설날, 정월 초하루, 원일(元日)
코로나19’ 환난으로 올 설날은 큰댁에 모여 차시(茶祀) 지내기를 못하게 되어 아쉽구나! 다들 마음이 중요하니 차사의 뜻을 잘 새겨 숭조(崇祖)의 정신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자. 설이 찾아오면 옛 추억들이 주마등(走馬燈)같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끝에 나의 평소에 적어둔 ‘인계의 망향가’에서 설날의 추억을 담아보았다.
1954년 설날 고향에서 차례(茶禮)를 지내고, 어머니 모시고 찍은 우리 육 남매의 모습
큰댁에서 설 차례 지내는 헌관 주손(胄孫)의 모습
설날 큰댁에서 제관(祭官)들의 차사행사(茶祀行祀)때 재배하는 모습
설 차사 지낸 한복 차림의 제관들 모습
모재고택에 사진과 같은 가묘가 있었다.
설, 추석에 자손들이 모여 차사를 지내던 추모당의 모습
1.설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설에 관련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는 261년에 설맞이 행사를 하였으며, 신라에서는 651년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들의 새해 축하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설은 일제 강점기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쇠지 못하게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 실효가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까지 하여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여 공휴일이 되었다가 사회적으로 귀향인파가 늘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설날로 다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섣달 그믐날 풍속
섣달 그믐날은 까치설날이리고 하여, 어린아이들은 미리 설빔으로 갈아 입고, 어른들은 서로 찾아보고 인사하는데, 이것을 과세(過歲) 또는 ‘묵은세배’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초에 바쁘기 때문에 미리 세배를 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에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한편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 진다고 하여 밤을 세우는데, 이를 수세(守歲)한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고 일찍 잔다고 한다.
3.설날 아침의 풍속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새 옷을 갈아 입는 날은 1년에 3일뿐인데, 설날을 비롯하여 수릿날(端午)과 가위날(秋夕)이 그것이다. 이러한 명절날에 입는 옷을 특히 ‘비음’이라고 하는데, 이날 새 옷을 입는 것은 새로운 사회적 지위나 생활단계에 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통과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어른들은 설날 아침에 설비음[세장(歲粧)] 위에 예복을 차려입고, 사당이나 대청에서 4대 조상의 신주를 내어 모시고 차례로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돌아온다. 설차례에는 떡국을 올리고 차례를 지낸 다음에 음복으로 함께 모여 비로소 떡국을 먹는다. 차례와 성묘가 끝나면, 이웃의 어른들께나 친구끼리도 서로 집으로 찾아가서 세배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이때에 서로 나누는 말들을 덕담(德談)이라고 하는데 덕담의 표현은 시제를 항상 과거형으로 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덕담의 형식이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한 축원으로 변하였다. 어린이들에게는 세배돈을 주는 풍속이 전해오며, 세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하는 음식을 세찬(歲饌), 그리고 술을 세주(歲 酒)라고 한다.
4.설의 놀이와 연희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3일이 지나면, 어린 아이들이 보름날까지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려 버리면 그 해에 드는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를 하였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이것은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설음식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 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음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 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o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설날- 민족최대명절
5.우리고장의 설 풍속
1)그믐날 밤
(1)자면 눈썹이 흐게 된다
그믐날 밤에 일찍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밤을 세우는데, 이를 수세(守歲)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어릴 때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세우려고 애를 썼다. 졸다 잠이 들면 누나가 분을 눈썹에 발라두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놀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2)구세배를 가다.
한복 정장을 하고 집안 어른께 구세배를 들이러 간다.
2)설날
(1)세배를 들이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께서는 떡국을 끓어 상을 차리어 할머니 방으로 가서 조반(早飯)을 드리고 세배를 하셨다. 우리들도 할머니, 아버지께 세배를 드렸다.
(2)집집 마다 차사 지내기
삼 대소가 안에(주손 성우), 새집(주손 태기), 윗집(주손 병곤) 그르니 오금이 할배 후손인데 아내는 어려워 오금이 할배 차사를 우리 집에서 지냈다. 그래서 차사 순서가 우리 집, 윗집, 안에 순으로 지냈다.
우리집에서는 큰방에서 차사상을 차리어 사랑방으로 제수를 옮겨 진설하여 차사를 지냈다.
(3)추모당 차사
집 집마다 차사를 지내고 추모당에 자손들이 모여 윗대 차사를 지냈다. 모재공 주손댁에 가묘가 두 곳 있었다. 바깥의 가묘에는 모재공 이하 여러 선조님이 모셔져 있었으나 주손 중심의 4대봉사를 하기에 4대조 까지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이상은 조매(祧埋) 하였다.
설날 (인계의 망향가 중에서)
첫새벽 집 집마다 아침 조반(早飯) 떡국 내음
웃어른께 세배하고 차사(茶祀)준비 바빠 섰지
정성 들어 제수(祭需) 차려 선조님 차사 지내
가없는 조상 음덕(蔭德) 큰절하며 기렸다네
집 집마다 사사(私私) 차사(茶祀) 일찍 다 지내고
추모당(追慕堂)에 자손 모여 차사준비 한창일 때
가묘(家廟) 선조 위패(位牌) 모신 행렬 도착하여
온 재실 제관 모두 정성 들여 차사행사(茶祀行祀)
어른 아이 구별 없이 이웃 어른 세배(歲拜)가니
집 집마다 듣기 좋은 덕담(德談) 소리 풍성하고
호롱불 깜빡이는 설날 밤 찾아오면
도다 모다 편 갈라서 밤새도록 윷을 노네
설 명절 기다림은 설빔 바람(望)이었지
많은 식구 설빔 준비 어머니 고된 몫이였고
형들의 물러준 옷 줄인 양말 아우 차지
그래도 즐거웠던 설날 설빔 옛 추억들
첫댓글 할아버지 내외분 사셨던 자양에서 그믈날 미재할배댁 구 서배드리고 다리골할배댁 구 세배드리고 설날 아침 일찍 저근할배 세배드리고 우리집 세배드리고 차사지내고 집집마다 세배드리고 추모당 대소가 어른분께서 점심 시간때쯤 차사. 행사했지요,.
옛날에는 설날 춥기도 했지만 즐거운 추억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온 대소가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어제 새벽 고속도로 교통상황을 확인하니 전 노선이 원활하길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집이 당시 신정 과세를 하던 때인 83년1월2일 생일인 상록이 출산 때문에 대구를 못 간후
올해 처음으로 차례에 불참한 것 같아 오늘 하루 종일 조상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축년 새해 우리 대소가 두루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