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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04월27일(일요일) 제주도 여행일정
06:00~06:38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공항철도로 환승하여 김포공항역으로 간 후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출발 18번 탑승구까지 도보로 이동 [38분 소요]
06:38~07:10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18번 게이트를 통과해서 제주공항행 제주항공 여객기 탑승 대기
07:10~07:35 제주공항행 제주항공 여객기에 탑승하여 출발 대기
[예약번호 : (편 좌석) (무료위탁수화물 20kg, 기내 수하물 1개 10kg) ]
[임직원 직계존속이라서 24,000원(운임 20,000원+공항이용료 4,000원)만 결제]
07:35~08:50 제주항공 여객기를 타고 김포 공항을 출발하여 제주 공항으로 이동 [1시간15분 소요]
08:50~09:10 제주 공항 Gate 5 맞은편에 있는 렌터카 셔틀버스 탑승구역 3구역 2번 승차장(담당 렌트카회사 : 제주유레카)으로 이동 09:10~09:20 렌터카 셔틀버스 탑승구역 3구역 2번 승차장에서 제주 유레카 셔틀버스 승차 대기
09:20~09:33 제주 유레카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셔틀버스 탑승구역 3구역 2번 승차장에서 제주 유레카(제주시 어영길 20)로 이동 [셔틀버스 이동시간 13분 소요, 배차 간격은 20분]
09:33~10:00 제주 유레카에서 사전에 렌트 예약한 차량을 인수 [면허증 지참]
[렌터카 예약 조건
2025년04월27일(일요일) 9시30분 인수~04월30일(수요일) 18시30분 반납 조건 모닝 어반 (2021~2022년형, 휘발유, 5인승 경형, 사고 1건 무제한 보장, 소모품 및 출동서비스 포함) 81시간 렌트요금(예약 접수번호 : ) : 원(완전 자차+무제한 보장)=월일 현대카드로 결제]
10:00~10:13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 유레카(제주시 어영길 20)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현길 61 번지에 있는 오현단으로 이동 [13분, 5.0km]
10:13~10:30 오현단(五賢壇)과 제주성지(濟州城址)를 탐방
[오현단(五賢壇)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주시 이도1동에 제주성지의 흔적이 있는데 그 북쪽에 바로 인접하여 오현단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이다. 오현(五賢)은 1520년(중종 15)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에 목사(牧使)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614년(광해군 6)에 유배된 동계 정온과 1689년(숙종 15)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이다.
단은 원래 1578년(선조 11) 임진(林晋)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가락천 동쪽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다. 1665년(현종 6) 이중신(李重信)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묘를 지금의 자리(제주시 이도동)로 옮겨 사(祠)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였다. 1682년(숙종 8) 신경윤(愼景尹)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5년에 이익태(李益泰)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50년(철종 1) 장인식 목사는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1665년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 제주지방 유림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이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한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1856년(철종 7)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磨崖銘)인 ‘증주벽립(曾朱壁立)’과 김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오현단
소재지 :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제주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 터이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선생,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선생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선생 등 다섯 분이다.
단은 원래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는데 현종 6년(1665) 이중신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지었다. 그리고 숙종8년(1682) 신경윤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선생, 송인수선생, 김상헌선생, 정온선생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 21년(1695)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선생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전국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도 헐렸으나 고종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철종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선생의「증주벽립」마애명과 충암 김정선생과 우암 송시열선생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제주 옛 성터가 있다.]
[조선 후기 내내 제주향교와 더불어 제주의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던 귤림서원에 배향된 오현은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이다. 김정, 정온, 송시열은 제주 유배인이었으며, 송인수는 제주목사, 김상헌은 선무어사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김정은 1520년(중종 15) 기묘사화로 제주목에, 정온은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정현에,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제주목에 각각 유배되었다.
김정은 유배된 지 1년 만에 제주에서 사사되었으며, 정온은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쫓겨날 때까지 10년간 대정현에서 지냈으며, 송시열은 유배된 지 100여 일 만에 다시 서울로 붙들려 가다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인수는 1534년(중종 29) 당시 권신이던 김안로(金安老)를 비판하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김상헌은 1601년(선조 34)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 소덕유(蘇德裕) 모반사건 진상조사 및 민심 안무를 위해 제주를 방문하여 4개월간 제주 전역을 돌아보고 올라갔다.]
[제주 오현은 청음 김상헌,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충암 김정, 동계 정온이다.
충암 김정
충암 김정은 조선 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이다.
역사서에 의하면 충암 김정(1486~1520)은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과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조광조와 함께 잘나갔다.
하지만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이 사사되며 사림들이 대거 숙청된 기묘사화(1519) 때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당시 김정의 적거지는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였는데, 그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 우생 문세걸 등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제주에 있으면서 「한라산기우제문」·「수정사중수권문」을 지어 제주도민의 교화에 도움을 주었고(?), 적거지 주변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직접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충암이 지은 『제주풍토록』은 그의 조카에게 제주의 풍물을 적어 보낸 기록이다.『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 의하면 제주에 대해 ‘겨울에도 덥다. 바람이 세어 병들기 쉽다. 비오는 날이 많아 물기가 많다. 가옥들은 초가가 많고 새끼로 얽어 매었다. 집이 깊고 침침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제주의 풍속에 대해서는 ‘이들이 귀신을 숭상하고 무당이 많다. 뱀을 신으로 받들고 있어, 작자가 뱀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또한, 말소리가 본토와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제주의 산물로는 노루·사슴·꿩·참새·전복·오징어가 많으며, 사기그릇과 유기는 없다고 하였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 소금이 부족하여 진도나 해남 등지에서 무역해다가 쓰고 있는 점이라 하였다.
김정의 눈에 비친 당시 제주의 사회상은 문명의 암흑지대로 보였나 보다. 하지만 위리안치된 김정은 유배지 주변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생의 의욕을 포기하지 않고 과실수를 심기도 하고 남 몰래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제주민의 삶의 열정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지방의 풍토와 문화 등을 기록한 풍토기는 대개 각종의 관찬읍지에 많이 나타나는데 관의 편찬의 의도는 지극히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도「제주풍토록」은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제주풍토지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제주민을 타자적 관점에서만 기록한 점은 안타깝다.
규암 송인수
규암 송인수는 제주민의 입장에서 오현으로 배향된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인물 중 1인이다. 1534년(중종 29년) 제주목사로 제수되어 부임해 온 이후 끝내 직책을 버리고 제주를 떠났기 때문이다.
규암 송인수(宋麟壽)의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1534년 3월부터 6월까지 고작 3개월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렸다고 사임하다니, 그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이토록 제주를 싫어한다면 난리 때 죽음으로써 지켜 죽을 수 있겠는가.” (중종실록)
암튼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보다 더 힘든 관직이 제주목사였다는 역설적 해설이다.
당시 정치적 해석을 하자면 정치적 실세였던 김안로에게 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여겨 꿋꿋한 성리학자의 이미지가 각인되었단다.
불의에 항거할 줄 알았던 이로 여겨져 오현에 배향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제주민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수 십일만에 제주목사 재임 중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고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평가에는 신뢰를 가질 수 없다.
청음 김상헌
청음 김상헌은 1601년(선조 34년) 제주에서 있었던 길운절 ㆍ소덕유 등의 역모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들렸던 인물이다.
김상헌은 1636년(인조 14)에는 예조판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안동에서 은거하였다.
남한산성 영화에서 김윤석이 김상헌 역할을 연기했다.
이후 1639년(인조 17)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나 귀국하기도 했다.
김상헌이 제주에 온 것은 이런 호란이 있기 훨씬 이전이다.
암튼 청음 김상헌이 1601년 8월부터 제주도에 6개월 간 체류하며 쓴 여행 일기인 <남사록>에 의하면 '이 섬의 말이 중국말과 아주 흡사하여 소나 말을 몰 때의 소리는 더욱 분간하지 못하겠다.....
사투리로 숲은 곶이라 하며 메뿌리를 오름이라 하며 손톱을 굽이라 하며, 입을 굴레라 하며, 굴레는 녹대라고 하며 또 가달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
또 다른 이는 1682년(숙종 15년) 유배된 송인수의 증손자인 우암 송시열이다.
오현단에는 송시열이 유배왔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적려유허비)이 있는데 원래 유배지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또 송시열의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는 마애명도 남아 있다.
이 글씨는 성균관에 있는 것을 탁본해 온 것을 가지고 새긴 것이다.(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의 유배지는 산짓골 윤계득(尹繼得)의 집을 적소로 정하여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적거지는 지금의 일도1동 1317번지, 제주시 칠성통에 있다.
추사가 직접 보았다던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길 가는 사람들도 단비 앞에 말 내리니
(行人下馬短碑前)/
김환심의 집에서 옛 자취를 전해오네
(金煥心家舊○傳)/
귤림에 잔 올려 심사를 밝혔으니
(一酌橘林明志事)/
생강 심던 그 해에는 지금도 눈물짓네.
(至今彈淚種薑年)
추사가 남긴 시를 보니 우암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계 정온
마지막으로 1614년(광해군 6년) 영창대군을 시해한 자를 찾아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 유배 온 동계 정온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죄 지은 자가 살기에 적합하구나”라고 탄식하고, 스스로 별호를 고고자(鼓鼓子)라고 지었다라고 전한다.
정온과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이 인목대비의 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외할머니로 김제남(金悌男)의 부인인 노씨부인이었다. 당시 제주도에 여자가 유배된 것은 노씨가 처음이었는데, 부인은 이곳에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술을 만들어 팔았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이 술을 일컬어서 모주(母酒)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 이후 정온과 노씨부인은 석방되고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쳐 제주로 유배오게 된다.
이후 1871년(고종 8년)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은 훼철되고 제주 유지들이 그 자리에 5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 제단이 오늘날 오현단이 되었고 이후에 다시 세워진 귤림서원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교학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하는 곳이 오현단이다.
오현은 1520년에 유배된 김정,
1534년에 목사로 부임했던 송인수,
1601년 안무사로 왔던 김상헌,
1614년 유배왔던 정온,
1689년 유배왔던 송시열 등 다섯 사람이다.
제주5현 중 김상헌, 송인수를 제외하면 모두 유배인들이다.
이중 우암 송시열은 제주에서 산 기간이 불과 111일뿐이었다. 또 어떻게 누구를 교화했는 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오현단은 정치적인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오현단은 제주의 유배문화와 유배자를 통한 기록에서 제주의 옛모습을 들추어 볼 수는 있다.
암튼 제주도에는 왕족부터 고위관리, 학자 등 상류사회를 이루는 인사들이 유배됨으로 인해 그 추종자 및 가족들이 왕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상류사회의 문화 등이 제주에 영향을 주었겠지~
제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배인들은 문화전달의 중요한 메신저로도 볼 수 있지만, 제3자의 타자적 시선이라는 점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해석할지 숙제를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출처] 제주 오현 누구인가?|작성자 빙삭빙삭 제주삼춘]
[제주성지(濟州城址)
제주성지(濟州城址)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제주성의 잔존 터이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현길 61
(지번)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개요
제주성은 옛 탐라국 수도 부근의 성곽으로, 도시화로 사라지기 전에는 둘레 2,280m에 달하는 평지에서 구릉으로 이어지는 평산성으로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부정형을 띠고 있었다.
제주성의 원래 규모와 초축(初築)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년) 증축했을 때 규모가 둘레 4,700자, 높이 11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태종(太宗) 8년(1408년) 제주에 홍수 피해가 발생해 성벽이 붕괴되어 3년 뒤인 동왕 11년(1411년)에 수축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주성의 규모를 둘레 910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394자에 높이 11자라고 기록했으며, 중종(中宗) 5년(1510년)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고 2년 뒤인 동왕 7년(1512년)에 제주목사 김석철이 제주성을 둘레 5,486척으로 확장해 쌓고, 성 남쪽 문루인 정원루(定遠樓)를 수리했다. 또한 제주성 안에는 물이 없었고 성밖으로 가까운 곳에 가락천(현지명 가락쿳물)과 산지천이 있어, 그곳에 겹성을 쌓아 따로 물을 조달했는데, 동왕 24년(1529년) 목사 곽흘이 동쪽으로 성을 증축해 산지천을 제주성 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명종(明宗) 10년(1555년) 을묘왜변 때는 왜선이 제주성을 포위공격하기도 했으며, 동왕 21년(1566년) 고능까지 동쪽으로 증축해 성의 둘레가 7,340척으로 늘어났고 남쪽으로 수구(水口) 두 곳을 두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목사 성윤문이 성벽을 5자 더 높이고 포루 등을 구축했다. 정조(正祖) 4년(1780년) 목사 김영수가 산 아래 하천 주변에 익성과 보를 쌓았다.
제주성은 제주 지역에 많이 있는 화산암을 이용해 축성되었고, 왜적의 약탈과 하천의 범람 때문에 자주 증축되었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지은 《탐라지》(耽羅志)(1653년)에 따르면 제주성에는 북쪽(남해 방향)을 제외한 동, 서, 남 세 곳의 성문과 두 개의 수문이 있었고, 격대(擊臺) 27곳에 타첩(여장)이 404곳이 있었으며 산지천과 가락천 두 강을 식수원으로 삼았다. 성문의 이름은 연양문(동문), 진서루(서문), 정원루(남문)라고 했고, 수구는 쌍안교, 원교라고 했다. 이밖에도 소민문(蘇民門)과 수복문(受福門, 중인문(重仁門) 등의 작은 간문이 더 있었다.
그러나 국권피탈 후인 1914년과 1915년에 제주성의 세 문루와 간문은 헐렸고,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이루어진 제주항 개발 공사 당시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서 지금은 일부만이 남아있다.
구조
현존하는 제주성지는 오현단 부근에 일부, 170m의 잔존유구가 남아있다. 높이 5m에 폭은 2m로, 재질은 현무암이다.
성돌의 크기는 50x20cm, 55x37cm, 70x50cm 이렇게 세 가지가 있고, 뒷부분 길이는 60, 65, 70cm 정도이다. 당초에는 내부에 잡석으로 석축을 2, 3단 쌓아 토사를 덮어 경사지게 처리했었으나, 이후 표면 토사가 유실되어 돌이 모두 노출되었다. 외벽의 협축으로 잔돌끼움을 한 허튼층쌓기[1]로 쌓아, 위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기울기는 1.0~1.4.1:1로 거의 기울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치성은 두 곳이 남아 있는데 오현단 뒤의 것은 높이 6m이고 나머지 하나는 10m이다. 간격은 65~70m. 성벽을 축조한 뒤에 덧대어 쌓은 것으로 시굴조사에서 T자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제주성지
소재지 :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제주시 오현길 61 번지)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쌓은 것은 아니고,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 때 왜구 방어용으로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일부인 남수각부분이 150여미터 정도 복원되어 있다. 제주도의 중심지역을 지켰던 이곳이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건입동 포구 앞바다를 매립할 때 성곽의 돌을 매립골재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헛놓인 돌 하나 없이 듬직한 성곽 주위에는 귤과 유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가을철 귤이 익을 무렵 성주위는 가을색으로 절정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허물어져 가는 옛 성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지만, 튼튼한 성을 쌓으며 왜침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던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10:30~10:55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오현단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16로 3041-24 번지에 있는 제주 산천단 곰솔 군으로 이동 [25분, 7.9km]
[이동 중에 들른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원 주유]
[제주 산천단 곰솔 군(濟州 山川壇 곰솔 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구)제160호(1964년 1월 31일 지정)
수량 8주
소유 문화재청 외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16로 3041-24 (아라동)
좌표 북위 33° 26′ 51″ 동경 126° 33′ 15″
정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제주 산천단 곰솔 군(濟州 山川壇 곰솔 群)은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 한라산신제단에 있는 곰솔 군이다. 1964년 1월 31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고,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海松)으로도 부르며, 또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도 한다.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防風林)이나 방조림(防潮林)으로 많이 심는다.
제주시 곰솔은 나이가 500∼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평균높이는 29.7m, 평균둘레는 4.35m이다. 이곳에는 곰솔 8그루가 있으며, 주변에는 팽나무, 예덕나무, 멀구슬나무 등이 있다.
예로부터 제주에서는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가는 길이 험하고 날씨가 나쁠 때에는 이 곰솔이 있는 산천단(山川壇)에서 제사를 올렸다 한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 있는 천신이 인간세상에 내려올 때는 큰 나무에서 잠시 쉬어 내려 온다고 믿어 왔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곰솔도 신이 땅으로 내려오는 통로에 있는 나무라고 믿어 신성시 여겨 잘 보호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제주시 곰솔은 매우 오래되고 큰 소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고, 우리 조상들이 자연물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0:55~11:13 총 8그루의 곰솔이 천연기념물 제 160호로 지정된 제주 산천단 곰솔 군과 한라산신제단(漢拏山神祭壇)인 산천단을 탐방
[산천단(山川壇)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일동 375-4
제주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산천단은 한라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옛날에는 새로 부임한 목사가 한라산 백록담에 올라가 천제를 지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것을 보고 아라동으로 제단을 옮기고 천제를 지내게 했다고 알려지는 이약동 목사의 사적비 또한 함께 볼 수 있다. 산천단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목으로 알려진 곰솔을 볼 수 있는데 총 8그루의 곰솔은 천연기념물 제 1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키가 무려 19m ~ 23m 정도이다. 곰솔은 나무껍질이 검은빛을 띠고 있다고 하여 흑송(黑,松), 바닷가를 따라 자란다 하여 해송(海松)이라고도 불린다. 커다란 곰솔들이 그늘을 만들어, 더운 여름날에도 시원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한라산신제단(漢拏山神祭壇)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 1동 375-4
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5월 9일, 2021년 11월 19일
1470년 제주 목사 이약동이 한라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제주시 아라 1동 산천단에 만든 제단.
개설
한라산신제단은 다른 이름인 산천단(山川壇)으로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라산신에 대한 제사는 조선 시대 이전인 탐라국 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 올렸다고 하는데, 겨울철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 죽는 일이 있었고 날이 사나우면 올라갈 수 없는 날이 많았다. 백성들의 이러한 고충을 없애기 위해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제주 목사 이약동이 소산봉(小山峯) 아래인 지금의 장소로 제단을 옮겨 설치하여 한라산신제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형태
1,431㎡ 경내에 현무암으로 된 제단 2식과 고선비 등 3기의 비가 보존되어 있다.
의례
한라산신제 봉행 과정에 대해서는 헌종 때의 제주 목사 이원조가 편찬한『탐라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1841) 7월 초 4일에 한라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주(州)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돌담으로 두른 묘(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0~40 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어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의거하면 한라산신제는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향(奉香), 봉로(奉爐),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작(奠爵), 전사관(典司官)으로 구성된 전통 유교식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라산신제는 1908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 주민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 아라동으로 이관하여 봉행하다가 2011년 기념물 지정 이후에는 아라동 주민 센터와 한라산신제 봉행 위원회의 주관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현황
제단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석비인 경우 1기는 한라산신 고선비로 이곳이 이약동 목사에 의해 제단이 설치되었던 옛 터임을 알리는 비로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나머지 현무암 재질의 2기는 고선비가 세워진 경위를 해설하여 세워놓은 비로, 그 내용을 초서로 음각하였다.
고선비가 세워진 경위를 해설한 비는 본래 1기의 비로 총격에 의해 두 동각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조각난 두 비의 자간, 글자 크기, 서체가 동일하며 비문 대강의 내용이 판독 가능하다. 또한 조각난 두 비 뒷면에 총탄 자국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녹슨 탄두가 박혀있는 것도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하다. 고선비와 조각난 두 비는 1978년 홍순만 제주도 문화재 과장이 인근 소림천(小林泉) 주변에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세운 것이다. 2011년 5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현 제주시 아라1동에 소재하는 한라산신제단은 청백리 이약동의 행적을 알려주는 유적일 뿐만 아니라 탐라국 시대 이래 한라산을 신성시 하여 한라산신께 제사를 지냈던 옛 제주인들의 신앙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유적이다.]
[영원한 안식처 한라산, 세계 중심에 자리한 하늘산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8.01.
(184) ㈔질토래비 창립 5주년과 총서 창간호 출판에 따른 한라산 특집
5년 전 처음 역사문화 길 개장
도민들 격려와 성원에 힘 얻어
한라산 정상 올라 보은제 지내
어사 김상헌·이증 산신제 올려
산천단 일대 제주도기념물 지정
▲질토래비, 한라산 정상에서 보은제를 올리다.
㈔질토래비에서는 창립 5주년 기념식과 함께 ‘질토래비 총서 창간호’ 출판기념회를 지난 7월 9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가졌다. 수많은 도민이 모여들어 질토래비가 걸어오고 갈 길을 격려하고 성원해 주었다.
5년 전 제주돌문화공원에서 ‘돌하르방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면서 질토래비 창립을 알리고, ‘동성·돌하르방 길’을 도민과 함께 걸으며 첫 역사문화 깃든 길을 또한 개장하였다. 그동안 질토래비에서는 제주 도처의 역사문화 깃든 길들을 개장하면서 관련된 소책자들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본 지면에 ‘질토래비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180회 이상을 연재해오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할 때에는 질토래비 알림 톡방(SNS)을 통해 다양한 제주 역사문화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단체 알림 톡방을 통한 제주 역사문화 정보 공유는 이후 질토래비의 지속적인 사업이 됐다.
창단 이후 도민들과 함께 질토래비가 펼친 다양하고 유의미한 여정과 특히 질토래비 총서 창간호 발간은 도민들의 격려와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
이에 질토래비에서는 지난 7월 21일 한라산 정상에 올라,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산신제로 보은제를 올리기도 했다. 한라산신제를 위한 제물과 축문도 준비하였는데, 다음은 축문 내용의 일부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한라산이여, 영험한 한라산신이여, 세계의 중심에 자리하신 하늘산이시여. 정성을 모아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오니 부디 친림하시어 흠향하옵소서.
늘 제주의 중심인 그곳에 계시면서 제주를 제주답게 세계를 세계답게 이어가도록 유무언의 계시를 주시고 있음에 감사드리옵나이다. 그 고마움에 보답하려 또한 님의 소리를 우주에서 듣고자 ㈔질토래비에서는 길일을 맞아 이곳 한라산 정상에 올랐나이다.
총서 창간호 출판에 즈음하여 밝혔듯이 앞으로도 매년 질토래비 총서가 발간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온 누리 백성들이 님의 품 안에서 님의 유·무언의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깨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이제 님의 따스한 음성을 가슴에 새기며 감사함만을 남기고 하산하겠나이다.…’질토래비 등정 길은 새벽 5시에 한라산을 천여 회 오르며 새로운 식물 333종을 밝혀내기도 했던 부종휴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관음사 등반코스로 출발, 1982년 수많은 군인들이 산화한 계곡에 세운 원점비에 참배를 한 후 삼각봉 현수교를 거쳐 정상을 올랐다. 그리곤 수백의 내외국인이 어울리는 정상의 쉼터 높은 곳에서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보은제를 지낸 후 사라오름을 거쳐 성판악으로 내렸다.
10여 년 만에 재회한 개미목과 삼각봉, 몸 하나 지나갈 수 있는 개미목 협소한 통로 있으매 감사드리고 삼각봉의 위용에 마음이 청결해졌다. 삼각봉 아래에는 등정 역사가 깃든 대피소의 돌담집이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2007년 나리 대풍으로 사라진 용진각 대피소는 그나마 안내판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용진각 계곡에 시설된 출렁다리 현수교를 지나 가파른 왕관능 계단을 올라 정상에 다가갈수록 많아 보이는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온난화 기후의 참상을 실감케 했다. (사)질토래비 등정에는 한라산 정상을 3백 회 이상 오른 고수향 전문위원이 동행하였다.
▲탐라국 이래 거행된 한라산신제
아주 오래전부터 전국의 명산대천에는 신들이 깃들어 있다 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라산 역시 탐라국시대부터 산신제를 지내왔다. 한라산신제는 본래 한라산 정상에서 지냈다. 등정과 제례 과정에서 사람이 동사하거나 불편한 점이 많아지자 1470년(성종 원년) 이약동 목사는 ‘제주읍성 남문 밖 15리에 산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일례로 1601년 어사 김상헌과 1680년 어사 이증은 제주판관과 정의현감, 대정현감, 향교의 교수 등 수많은 수행원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소덕유·길운절 모반사건으로 어수선한 제주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선조임금이 보낸 안무어사 김상헌이 백록담 북쪽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선조임금은 ‘한라산은 해외의 명산인데 사전(祀典)에 실려 있지 않아 평상시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마침 어사가 내려가니 따로 향축을 마련하여 제를 올리고, 제문은 지제(地祭)교(제사 담당하는 벼슬 이름으로 당시 지제교는 이수록임)가 지어 바쳐라.’하고 명령했었다. 제문에는 못된 무리들이 반역을 꾀했으나 한라산 신령님의 도움으로 음모가 일찍 드러나 평안을 되찾으니, 이에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못된 무리들의 반역이란 소덕유와 길운절이 제주에 들어와 역적모의를 하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관련자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건을 이른다.(본 연재 180회 참조) 남사록(南槎錄)에 따르면 김상헌은 제주목 남문을 출발하여 병문천과 한천과 무수천을 지나 존자암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지자 일행들이 존자암 뒤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봉양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상헌은 이를 거절하고 정상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
1680년 4월에도 한라산 백록담 북쪽 제단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제사의 주체는 숙종 임금을 대신한 어사 이증(李增:1628-1686)이다. 이증은 제주목의 전임목사 윤창형과 정의현감 상인첨 등의 탐욕과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 안핵어사 겸 순무어사의 자격으로 제주를 찾았다. 이증 일행은 백록담 분화구에서 장막을 치고 하룻밤을 묵었는데, 차가운 바람과 추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다. 지제교(권흠)가 지은 제문에는 그동안 제대로 제사를 봉행하지 못했음을 사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날의 일을 이증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 김성구 정의현감은 남천록(南遷錄)에 각각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또 한 사람의 이증은 영조 시대에 제주에 유배와 서거한 영조와 8촌지간인 왕손이다.
한라산신은 탐라국시대부터 백성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고, 오늘날에도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숭배 대상으로 한라신제를 새롭게 하여 올리고 있다. 2009년부터는 제주시 아라동과 한라산신제봉행위원회 주최로 산천단에서 한라산신제가 열리고 있다. 2011년에는 산천단 일대가 한라산신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제67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11:13~11:51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 산천단 곰솔 군(濟州 山川壇 곰솔 群)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번지에 있는 금산공원으로 이동 [38분, 25.0km]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 난대림 숲 ‘금산공원’을 아시나요?
칼럼니스트 김재원
베이비뉴스 기사 승인 2023.05.23. 11:45
[육지사람 제주살이 이야기] 77. 초록빛 성성한 신비의 숲 납읍리 난대림지대 금산공원
오늘은 여행객들에게 다소 생소한 제주 난대림 숲 금산공원으로 떠나보려 하는데요. 가본 사람 보다 아직 이 초록빛 성성한 신비의 숲의 존재를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을 텐데요. 천연기념물 제375호로 지정된 난대림지대 금산공원은 애월읍 납읍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주에는 난대림 지역으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곳이 두 곳 더 있습니다. 바로 천연기념물 378호 천제연 난대림과 379호 천지연 난대림입니다. 이곳도 메모해두시고 꼭 방문해보세요.)
금산공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려면 공원이 위치한 납읍 마을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1300년 충렬왕 시절 제주지역 동서도현을 설치할 때 지금의 애월읍 지역에는 귀일·고내·애월·곽지현이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마을이 확장되면서 곽지현 지역 남쪽에 ‘곽지남동’이 설촌 되었는데 이 지역을 줄여서 ‘곽남’이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도 계속 주민들이 입주하여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에서 과거급제자가 10여 명 출연하면서 ‘과거에 합격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과납’ 마을로 바꿔 불리게 되었고요. 이후 숙종 원년(1675년)에 제주목사 소두산이 이 지역을 순찰하면서 마을의 형세가 마치 읍과 같다고 하여 지금의 ‘납읍’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납읍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곽지·애월·고내·어음·봉성·상가·하가까지 7개 마을이 모여있기 때문인데요.
마을에는 노꼬메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애월곶자왈 지대를 형성하고 다시 끝자락에서 용암이 부풀러 올라 여러 바위 형태로 지대를 덮어버린 곳이 있었는데 지금의 금산공원 일대입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납읍에서 위쪽을 쳐다보면 금악봉이 마을 남쪽에 노출된 암석 너머로 화체로 보여져 노출된 암석지대에 나무를 심어 가리지 않으면 불(화)의 재해를 면키 어렵겠다는 풍수사의 결론에 따라 조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방목과 벌목 심지어 나뭇잎과 가지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금하였고 숲 안에 포제단을 설치하여 금할‘금’자를 사용하여 ‘금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자연림이 원형 그대로 잘 간직되어 있어 지금은 비단‘금’자를 사용하고 있고요. 난대림에는 난아열대 기후대에 자생하는 후박나무, 종가시나무, 생달나무, 곰솔, 식나무와 보리밥나무, 송악, 마삭줄, 콩짜개덩굴 등과 같은 덩굴식물, 밤잎고사리 같은 희귀식물 등이 숲을 이뤄 자생하고 있는데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8월 19일 천연기념물 제375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보호되고 있습니다. 현재 숲은 일부만을 탐방할 수 있어서 그 규모를 작게 볼 수 있지만, 숲의 지대는 무려 1만 평에 달하는데 커다란 축구장을 다섯 개쯤 더한 크기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더욱 멋진 경치를 선사해줍니다. 숲 밖으로는 눈이 쌓여 있지만, 숲에는 눈이 전혀 없는 도무지 겨울이라 믿어지지 않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데요. 또한 비가 오는 날에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비에 젖은 숲의 향기가 오래 묵은 스트레스까지 말끔히 사라지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숲길을 걸을 때는 마지막 종착지까지 정복하듯이 걷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발을 붙드는 수많은 것들을 오롯이 느끼면서 걸었으면 합니다. 숲과 숲 사이로 드는 햇살, 신령스러운 숲의 느낌과 신선하고 따스한 공기와 오만가지 소리로 짖어 귀는 새소리들을 듣고 마시고 느끼면서 말이지요.
숲 안에는 남성들이 제사를 주도하는 포제를 드리는 포제단이 위치해 있습니다. 1986년 4월 10일 제주도 무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된 납읍 마을 포제는 제주도에 전래되고 있는 마을제 가운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큽니다. 포제단 앞 마당에는 포제를 지내는 제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토신(마을수호신), 포신(인물,재해신), 서신(홍역 마마신) 순으로 제를 올립니다. 매년 정월 초정일(양력 2월 13일)과 칠월 초정일 각각 일 년에 두 번 치르다가 지금은 봄 제사 한 번만 치르고 있습니다. 제일이 다가오면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며칠 전부터 제관들이 모여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요 때는 공원 출입이 금지된다는 것 꼭 기억해주세요. 제관은 12명이 하는데 제를 지내기 3일 전에 제청에 들어 준비합니다. 먼저 이장이 술을 올리고 나면 노인회장이 다음 술을 올리고 제물로는 통돼지, 메(밥), 갱(국), 채소, 과일 등이 올려집니다.
금산공원 초입 왼쪽에는 인상정이라고 새긴 비석이 남아 있는 곳이 있고 바로 오른쪽에는 송석대라 칭하는 공간이 나옵니다. 인상정을 새긴 사람은 현일락이라는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인데 인상정은 바로 현일락의 호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송석대 역시 강학하던 장소였다고 하는데 인상정보다 송석대의 제생(유생)이 더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주위에 있는 하가·장전·어도·고성리에서도 이곳까지 찾아와 수학하였다고 하니 선비의 마을답습니다.
난대림 숲 금산공원은 올레 15-A코스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천년을 살아온 난대림 숲 금산공원은 원시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깁니다. 바깥세상은 빠르게 변해가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분명 달라 보입니다. 숲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경쟁 관계가 아닌 모두 함께 태어나 긴 시간 함께 살아온 듯 보이고요. 제주에 왔다면 혹은 올 계획을 갖고 있다면 이번에는 꼭 한번 금산공원에 방문해 보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칼럼니스트 김재원은 작가이자 자유기고가다. 대학시절 세계 100여 국을 배낭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에 사는 '이주민'이 되었다. 지금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제주인의 시선으로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에세이 집필과 제주여행에 대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11:51~12:20 금산공원(납읍 난대림지대)을 탐방 후 준비해간 음식으로 식사
[금산공원(납읍 난대림지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문화재 지정 [제주 납읍리 난대림] 천연기념물 제375호(1993.08.19 지정)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마을에 인접하여 일만여 평에 이르는 넓은 면적에 속칭 "금산공원"이라 불리는 곳에 울창한 상록수림이 있다. 이곳이 자연림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표본지역으로 원식생 연구에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학술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아 문화재보호법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납읍난대림지대이다. 이곳은 제주시의 서부 지구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상록교목 및 60여종의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원시적 경관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수목가지의 절취, 식물 채취 행위 및 야생동물의 포획 등 자연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일체 금지되고 있다. 납읍리는 예로부터 반촌(班村)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난대림지대는 예로부터 이 마을의 문인들이 시를 짓거나 담소를 나누는 휴양지로서 이용되었기 때문에 경작지와 인가가 주위에 있으마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이곳의 식생은 주로 후박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등이 상층목을 이루고, 하층에는 자금우, 마삭줄 등이 전면을 덮고 있으며, 송악이 상층목의수관(樹冠)을 감아 올라가고 있다.나무의 종류는 비교적 단순하나, 전형적인 난대림상을 이루고 있다.]
12:20~12:38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금산공원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2237 번지에 있는 명월성지(明月城址)로 이동 [18분, 10.1km]
[명월성지(明月城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터. 1976년 9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관리단체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크기 : 둘레 1.3㎞, 높이 3m
1976년 9월 9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張琳)이 명월포(明月浦)에 쌓았던 성터이다. 선조 때 제주목사 이경록(李慶錄)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다시 쌓았다. 성의 총길이는 1,300m, 높이는 3m이다.
성에는 동문·서문·남문이 있으며 성에는 샘이 있었다. 객사·군기고 등이 있었으며, 해안에는 수전소(水戰所)도 있어서 판옥선(板屋船)과 노 젓는 군사 103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당시 책임자(종4품의 만호) 112명의 명단비 및 개인 공덕비가 있는 소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경록은 1592년 나주목사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1593년 제주목사가 되어 많은 치적을 세웠다.]
[명월진성은 둘레가 3천 20척, 높이가 8척이었으며, 동쪽과 남쪽 및 서쪽에 각각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었고, 건물로는 객사·별창·군기고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명월포는 1270(고려 원종 11)에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이 고려에서 파견된 관군을 진압하고 탐라를 점령할 때 상륙한 곳이며, 김방경이 삼별초를 정벌할 때에도 그 일진이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더욱이 1374년(공민왕 23)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몽고에서 파견된 몽고인 목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이 상륙한 곳도 명월포였다.]
12:38~12:50 한림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월성지(明月城址)를 탐방
[명월진성
제주도 동쪽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명월진성은 바닷가에 접해 있지 않고 약간 내륙 쪽에 쌓은 석성이다. 타원형인 성의 규모는 둘레 1,360m, 높이가 4.2m며 동·서·남쪽에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남문과 문 위의 누각, 일부 성벽이 복원된 상태다. 남문 앞쪽으로 옹성이 둘러져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성문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명월진성은 처음 1510년(중종 5) 제주 목사 장림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월포에 나무로 쌓은 목성(木城)이었다. 이후 1592년(선조 25) 제주 목사 이경록이 석성으로 개축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내에 역대 만호(萬戶)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성안에는 객사와 사령방·무기고·창고 등 각종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민들의 밭으로 대부분 사용되고 있어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다.
정조 때 제주를 다녀간 어사 박천형은 서계(書啓)에서 “제주와 대정(大靜) 사이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9진 중 으뜸이다. 성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샘물과 창고도 있어서 충분히 자급할 수 있으므로 서남쪽 거진(巨鎭)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여 제주의 9진 중 명월진만이 구색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였다.]
[명월진성(明月鎭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2235·2256
시대 조선/조선
출처 디지털제주문화대전-명월진성
목차
1. 정의
2. 개설
3. 건립경위
4. 위치
5. 형태
6. 현황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
개설
명월진성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여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은 조선 시대 성곽이다. 명월진성이 있는 명월포는 고려 후기인 1374년(공민왕 23) 제주에 살던 목호(牧胡: 원나라가 운영하던 국영 목장 관리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고 돌아간 곳이다.
조선 시대 명월진에는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으며,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와 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하였다.
건립경위
명월진성은 조선 중기인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이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木城)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제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이 돌로 바꿔 쌓았는데, 제주목의 서북쪽을 방어하는 진지였기 때문에 1764년(영조 40)에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주 출신을 임명토록 하였다.
위치
명월진성은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월림리가 있고, 서쪽은 금릉리, 북쪽은 한림리가 있다.
형태
명월진성의 원래 둘레는 3,020척이고 높이가 8척으로 성 안에는 풍부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다. 동문과 서문·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성벽은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장축인 타원형으로, 성벽의 요소에 치성을 두어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소(供所: 2칸), 공수(公需: 2칸), 무기고(武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중화청(仲和廳: 2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창고 4동(각각 2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황
현재는 남문과 문 위의 누각, 일부 성벽이 복원된 상태다. 남문 앞쪽으로 옹성이 둘러져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 시대 성문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12:50~12:53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명월성지(明月城址)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2223 번지에 있는 명월대로 이동 [3분, 1.3km]
[명월대(明月臺)
문화재 지정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호
문화재 지정일 198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臺).
내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호. 조선 말기에 이 지방의 유림(儒林)들이나 시인·묵객(墨客)들이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명월대가 있는 천변(川邊)은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100여 그루의 수백년생 팽나무 60여 본과 푸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자연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간간이 흐르는 물소리가 정결하기 그지 없다.
대는 마을을 끼고 있는 천변 중앙의 자연암벽 위에 8각형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으며, 최근에 와서 콘크리트 처리를 하였다.
그 옆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격은 너비 12㎝, 높이 75㎝이며, 앞면에는 ‘明月臺(명월대)’라 음각되어 있다. 또 명월대 주변에 1910년경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는데, 이는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석교(石橋)의 하나다.
12:53~13:20 조선 말기 지방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인 명월대(明月臺)와 제주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 제19호인 명월팽나무군락과 제주현무암으로 만든 유일한 홍예교인 명월리 무지개 돌다리와 제주출신 가수 고(故) 백난아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명월리 백난아기념관을 탐방
[명월대(明月臺)는 조선 말기 지방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1981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대는 마을을 끼고 있는 천변 중앙의 자연암벽 위에 8각형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으며, 최근에 와서 콘크리트 처리를 하였다. 그 옆에는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격은 너비 12cm, 높이 75cm이며, 앞면에는 [명월대]라고 음각되어 있다. 또 명월대 주변에 1910년경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는데, 이는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석교이다. 명월대가 있는 천변은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100여 그루의 수백 년생 팽나무 60여 본과 푸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자연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간간이 흐르는 물소리가 정결하다.]
[명월팽나무군락(明月팽나무群落)
제주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하천변에 있는 팽나무군락. 수령 약 500년생 이상으로 추정되는 자생적인 숲이다. 제주도 기념물 제19호.
서식지·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2223
천연기념물(보호수) 지정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 제19호
천연기념물(보호수) 지정일 : 1974년 04월 03일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하천변에 있는 팽나무 군락.
내용
1974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명월리 중동 마을 중심부를 흐르는 계천 양편에 따라 수령 약 500년생 이상으로 추정되는 팽나무와 푸조나무의 노거목 100여 그루가 잘 보존되고 있고 이 숲은 자생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명월리의 팽나무 중 큰 나무는 수고 13m, 가슴높이줄기둘레 5m쯤 되는 것이 10여 그루 있으며 산유자나무·보리장나무 등이 틈틈이 섞여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높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호랑가시나무가 자라고 있다.
팽나무로 제주도내의 오래된 마을에는 정자나무로 남아 있는 것이 있으나 이곳 명월리의 팽나무는 노거수집단이면서도 단순군락으로 볼 수 있어서 지난날의 식생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월마을은 옛날부터 선비마을로 알려져 있어 인근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고 풍류를 즐겼었고 지금도 이 숲에서 시를 읊으며 놀았다는 월대(月臺)가 있으며, 마을동쪽에 높이 2.3m, 폭 3.6m의 만월형의 돌다리가 있는데 그 축조양식이 특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돌로 만든 무지개 다리 – 명월리 무지개 돌다리
제주일보 기사 입력 2005.02.04. 오전 4:03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엔 무지개 돌다리(虹霓橋)가 있다.
명월천을 따라 우거진 팽나무군락과 함께 있는 이 다리는 제주현무암으로 만든 유일한 홍예교로, 이름만큼 운치가 있다. 다리 이름은 그 모양이 무지개(홍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예교는 양 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둥글고 높이 솟게 만든 다리를 말하는데, 이 다리 정식이름은 '명월교’다.
이 돌다리는 제주향교 도훈장을 지낸뒤 이 마을 향교훈장을 지낸 월헌 오인호 선생(1849~1928)과 그의 아들인 진규씨의 학덕을 기려 제자들이 세웠다고 한다. 이 마을 오용승씨(66)의 말이다. 두 사람은 명월리 중동 자택에서 무료로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월헌 선생의 학덕은 한림지역뿐 아니라 애월.한경지역 청년들에게도 미쳤다고 한다. 1917년 12월 몇몇 문하생은 월헌 선생의 덕을 기려 명월대 서쪽에 '오인호선생지비(吳仁.瑚先生之碑)'를 세웠고,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이름을 음각한 제삿상을 만들기도 했다고 전한다.
다리 입구에 '소화(昭和) 6년 3월'이라 새겨진 돌비석 4기가 있어, 건립연도가 1931년 임을 알수 있다. 다리 길이는 5.2m, 다리 폭은 6.1m 로 매우 작다.
이 다리는 명월천의 울창한 팽나무 군락(제주도기념물 제19호)과도 잘 어울린다.
다리는 팽나무 군락의 지형을 고려해 일부러 낮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수백년전 팽나무를 심었다고 이야기 한다. 예부터 '건천(乾川)에 나무가 없으면, 한기(旱氣)가 살수(殺水)로 되어 재해가 일어나고 건해(乾害)가 터지면 빈촌이 된다'고 하여, 재해를 막기 위해 하천에 팽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풍수지리로 보면, '비보풍수(裨補風水)에 해당된다. '비보풍수'란 자연여건에 인위.인문적인 사상을 보내 보완하고 주거환경을 조정.개선함으로써 이상적 조건을 지표공간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제주에선 '허한 부분‘을 암석을 이용해 '거욱대(일명 방사탑)‘를 만들어 나쁜 기운을 막았는데, 명월마을에선 '팽나무‘로 그 기운을 막은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 팽나무는 여름철 더위를 피하는 장소일뿐 아니라 방풍림 기능과 하천범람으로 인한 침수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대응전략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을 주민들은 팽나무 보호를 위해 '종수감(種樹監)'이라는 직책을 두었고, 마을향약에도 보호규정을 두었는데 '팽나무의 한 줄기, 한 잎 일리라도 손상시킨자는 목면(木棉)반필을 징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 다리는 건설된 뒤 여러차례 고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리가 낮아 태풍이나 홍수로 물이 넘치기 일쑤였고, 차량통행이 늘면서 팽나무 보호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70여년간 이 다리가 원형 보존된 것은 팽나무 보호를 위한 주민들의 노력 덕분인 것임을 알수 있다.
다리 건립자는 이 마을 유명한 석공인 오일문이 건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마을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명월천 변 명월대 아래 다른 돌다리를 건축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명월교'가 일제강점기 인재양성에 힘쓴 마을훈장과 관련된 시설물이라면, 제주시 영평동 소재 제주산업정보대학 정문앞 삼의교는 5.16쿠테다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유산이다.
이 다리는 제주도가 1963년 5.16도로를 개설할 때 건설된 14개의 다리중 하나로, 원형을 유지한 채 있는 유일한 교량이다. 1979년 1월 인근에 새 다리가 교체되면서 기능을 다했지만, 교량시설로 1960년대의 교량건축의 어휘와 내용을 담고 있는 의미있는 시설물인 것이다. 다리는 길이 12m, 폭 6.2m이며,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시공은 당시 5.16도로 건설에 참여한 삼부토건이 맡았다. 현장에서 콘크리트 작업을 해서 고생이 적지 않았는데, 일일이 물과 자재를 싣고와서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현재 제주에 남아있는 홍예교는 명월리의 명월교가 유일한 것이다. 그 건립년도가 1931년이고 전통적인 형태여서 근대구조물로 취급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서구에서의 아치구조 또는 전통적인 홍예구조를 정확하게 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있다.]
[시대 풍미한 국민가수, 한국 대중문화의 기틀을 닦다
김현종 기자
승인 2019.11.24. 18:13
12) '찔레꽃' 가수 백난아
콩쿠르 휩쓸며 10대 때 가수의 길 입성
해방 후 '찔레꽃' 인기로 국민가수 반열
독보적인 레코딩 가수로 해외 공연까지
"시대 굴레 깬 리더십 강한 선각자 평가"
제주여성 강인한 기질 예술로 승화 울림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제주출신 가수 고(故)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의 첫 소절이다.
백난아는 10대 때 콩쿠르 우승으로 데뷔해 20대 때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백난아는 여기 머물지 않고 남성도 어려운 악극단을 조직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변방 출신으로 최고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그녀의 삶에 제주여성의 강인한 기질이 관통한다.
옛 명월국민학교 입구에 그녀의 기념비가 서있고 학교 건물에는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노래 재능…국민가수 반열에 오르다
백난아의 본명은 오금숙(吳金淑)이다. 1927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서 오남보씨의 3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딸 중에는 넷째다. 당시 명월리는 오씨의 집성촌이었다.
오금숙이 3살 때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고 그녀가 9살 때 함경북도 청주에 정착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오금숙은 동덕보통학교 6학년이던 1940년 빅타레코드사가 주최한 청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고 북성여중에 입학한 후 콜럼비아레코드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오금숙은 15세 때 태평레코드사의 레코드예술상 회령대회에서 1위를 한 후 본선에서 공동 1등에 오르며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걸었다.
당시 ‘나그네의 설움’을 부른 가수 백년설이 오금숙을 양딸로 삼았다. 백난아란 예명은 그 때 백년설이 자신의 성을 따서 붙였다. ‘난초처럼 청아하다’는 뜻이다.
특히 백난아가 1941년 취입한 ‘찔레꽃’은 단연 불후의 명곡이다. 당초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만 1945년 해방 후 국민들의 가슴 속 향수를 자극했다. 시쳇말로 ‘차트 역주행’이었다.
국민가수 백난아의 등극이었다. 광복 직후 인기가 급상승한 여가수는 많았지만 레코딩가수로 성공한 이는 백난아가 독보적이었다.
백난아는 일본에서도 톱 가수 대접을 받으며 순회공연을 했고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 부족으로 레코드산업이 전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만주 공연을 다녔다.
히트곡도 차고 넘쳤다. ‘아리랑 낭랑’, ‘갈매기 쌍쌍’, ‘낭랑 18세’, ‘직녀성’, ‘망향초 사랑’, ‘무명초 항구’, ‘아주까리 선창’, ‘간도선’, ‘인생극장’, ‘금박댕기’…. 훗날 ‘낭랑 18세’는 제주출신 가수 한서경이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며 백난아를 대중 곁으로 소환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백난아는 1960년대까지 왕성하게 신곡 취입활동을 한 뒤 주로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 본격적인 TV시대가 열린 후 백난아는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1985년 첫 전파를 탄 KBS 프로그램 ‘가요무대’에 원로가수로 자주 출연했다.
지금까지 ‘찔레꽃’은 가요무대 사상 가장 많이 불린 국민가요로 유명하다.
백난아는 1989년부터 제주그랜드호텔(현 메종글래드 제주호텔) 전속가수로 활동하던 중 폐암이 발병해 투병하다 1992년 1월 타계했다.
생을 마감하기 3년 전인 1989년 백난아는 자신의 히트곡 53곡을 묶은 ‘백난아의 히트 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을 펴냈다. 작사가 반야월‧유호, 작곡가 박시춘‧손목인 등 이른바 한국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들이 작성한 ‘축하의 말씀’이 책에 수록돼 있다.
손목인은 이렇게 썼다.‘백난아! 그대 뜨거운 가슴으로 대중들을 사랑하였으니 대중들 또한 고운 그대를 영원히 잊지 않고 사랑하리라…. 언제나 푸른 넋으로 살았고 언제나 하얀 순정으로 견딘 그대 백난아….’
▲제주여성 강인한 기질 예술로 발현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가 펴낸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Ⅵ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에 백난아는 언론문화체육 분야 인물 중 첫 번째로 소개됐다.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기틀을 다잡은 선각자로 평가받았다.
생전 백난아는 여장부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백난아는 해방 후 직접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충무로 소재 일본인 집을 매입해 양재학원을 설립하고 서울극장 경영에도 관여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선 남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내 문화계 일각에선 백난아의 행보로 한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의 물꼬가 트였다고 평가한다. 전쟁포화 속에서 10살이던 이미자는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를 꿈꾼 것으로 알려졌다.
백난아는 결코 고향을 잊지 않았다. 백난아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백난아는 1957년과 1961년, 1986년 3차례 현인과 함께 제주를 찾아 한림문화관(옛 한림극장)에서 공연했다.
명월리지(志)에 1957년 백난아의 공연이 기록돼 있다. 백난아는 현인과 함께 한림문화관을 찾아 무대에 올랐다. 고향인 명월리 주민들도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백난아가 명월 출신이란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마을지에 수록돼 있다
백난아기념사업회 오경욱 초대회장(77)과 양성찬 회장(56)은 “백난아는 행적으로 봐도 리더십이 뛰어난 여장부”라며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시대적인 굴레를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돼야 한다. 제주여성의 강인한 정신을 세상에 떨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난아의 히트 애창곡집’에 실린 고인의 인사말은 국민가수다운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 찬바람 불던 식민 치하의 무대에서, 만세소리 드높던 해방의 무대에서, 포연이 자욱한 6‧25의 무대에서 뜨겁게, 뜨겁게 성원해 주시던 팬들의 박수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 백난아 고향이 청진? 오류정보 떠돌아…출생연도는 1927년
백난아는 한때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으로 잘못 알려졌다. 인터넷 특성 상 지금도 일부 오류정보가 떠돌고 있다.
오경욱 백난아기념사업회 초대회장은 2007년 기념사업회 결성과 2009년 백난아가요제 첫 개최에 앞서 백난아의 신상명세를 모두 살펴 제주 출신임을 확인했다.
오 전 회장은 당시 명월에 거주하던 백난아의 6촌 오성종씨와 서울에 살던 백씨의 오빠 오택규씨를 만난 후 “제적등본 등도 다각도로 확인한 결과 명월 출신이 분명했다”고 강조했다.
오류 정보와 관련해 오 전 회장은 “백난아가 태평레코드사 전속으로 활동할 때 그녀를 양녀 삼은 백년설이 고향을 청진으로 쓰게 하면서 잘못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백난아의 출생연도도 인터넷 등에 1923년과 1925년, 1927년 세 가지가 돌고 있다.
오 전 회장은 “제적등본에 1925년 1월 16일로 나와 있고 연예인카드와 주민등록번호, 이력서 등에는 1927년 5월 16일로 기록돼 있다”며 “가족들을 만나 실제 출생연도를 확인하고 본인이 연예인카드 등에 직접 썼던 1927년생이 유력해 기념사업회도 이를 공식화했다”고 말했다.]
[가수 백난아(본명 오금숙)은 1927년 5월 16일 제주 한림읍 명월리 1750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오동동극단', '망향초사랑'으로 데뷔한 그녀는 1992년 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찔레꽃', '낭랑십팔세' 등 민중의 애환과 恨을 달래 주는 노래를 불렀다.]
[변화는 있어도 변함없는 그 교정
기자명 강도림 기자
단비뉴스 기사 입력 2019.12.30. 05:22, 수정 2025.02.02 17:36
[맛있는 집 재밌는 곳] 카멜레존 ⑨ 제주 명월국민학교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한 시기 ‘국민가수’이던 백난아의 ‘찔레꽃’ 첫 소절이다. 백난아가 그리워하던 ‘남쪽나라 내 고향’은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다. 한림(翰林)은 글자 그대로 ‘글의 숲’을 뜻한다. 명월(明月)리는 조선 말기에 유림이나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문화적 기운이 깃든 곳에서 ‘국민가수’ 백난아가 태어났다.
‘찔레꽃 붉게 피는’ 국민가수 백난아 고향
백난아는 중학생 때 콜럼비아 레코드사 콩쿠르, 태평레코드사 레코드예술상 회령대회 등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1941년 그가 부른 ‘찔레꽃’은 1945년 해방 후 많은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 노래는 발표 당시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점차 인기를 얻으며 ‘차트 역주행’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기를 끌고 레코드 판매가 상위권에 오른 것이다. 국민가수 백난아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직접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백난아의 이런 행보는 여성들의 사회참여에도 물꼬를 트는 기여를 했다.
백난아가 한참 활동하던 1950년 당시 열 살이던 이미자는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를 꿈꿨다고 한다. 백난아는 KBS 프로그램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찔레꽃’은 KBS 가요무대 사상 가장 많이 불린 국민가요다.
‘찔레꽃’은 작곡가 김교성과 작사가 김영일이 1941년 만주지역 순회공연 중 비밀리에 독립군을 만나고 와서 작사∙작곡해 백난아의 목소리에 실은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는 당시 가사보다 노래 시작 전 오프닝 멘트가 당시 상황을 더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 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슬픈 별 아래 서야 했다.
절망의 황혼…우리는 허수아비…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가던 젊은이들의 충혈된 눈동자…
처녀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갈까 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 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인스타그램 게시물만 5만 개 넘는 학교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백난아가 ‘찔레꽃’ 2절의 첫 소절을 부르며 그리워했을 동창생들은 어디에 있을까? 백난아가 태어난 명월리에는 명월국민학교가 있다. 백난아는 1923년 이곳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만주로 떠났다. 아홉 살 때 함경북도 청진에 정착해 동덕보통학교를 다녔다. 명월국민학교는 백난아가 떠나고 한참 뒤인 1955년 7월 23일 문을 열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터와 건물을 마련해 한림국민학교 명월분교장으로 출발했다. 그는 고향 명월리를 생각하며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을 그리며 천리객창에서 북두성을 바라보았을 터이다. 실제 백난아는 찔레꽃 작곡가∙작사가와 함께1941년 명월국민학교 정문 앞 사거리 근처에 있는 명월대를 찾아와 일제 치하 암울한 시기의 울분을 달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 명월분교장은 13년 동안 101명의 어린이를 졸업시키고 1968년 명월국민학교로 승격했다. 이후 25년간 67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3년 3월 1일 폐교되면서 한림국민학교로 통합됐다. 백난아는 명월국민학교가 폐교되기 1년전인 199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명월리 주민들은 폐교사 한 켠에 백난아기념관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폐교됐던 명월국민학교가 작년 9월 25년만에 다시 ‘개교’했다. 명월분교장을 만들 때처럼 이번에도 명월리 청년회원과 부녀회원 등 주민들이 나서서 갤러리 카페 형태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연 것이다.
1996년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뀐 지가 언제 적인데 웬 ‘국민학교’인가 싶지만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게시물만 5만 개가 넘는다. 하늘색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시골 초등학교처럼 넓은 운동장과 단층 학교 건물이 길게 서있다. 학교이긴 한데 학생과 선생님은 없고 관광객과 제주도민들로 북적인다. 어느덧 제주의 명소로 자리잡은 카페 ‘명월국민학교’다. 명월리는 제주 서쪽 중산간인 해발 100~300m의 고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면 멀리 한림읍이 보이고 그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바닷가에 있는 협재해수욕장까지는 걸어도 30분이면 닿는다.
버려진 폐교가 ‘뉴트로 제주’로
명월리 마을 주민들은 폐교를 다시 마을을 위한 공간으로 활성화해 보자며 지난 2017년 제주교육청으로부터 무상으로 폐교를 빌렸다. 주민들이 돈을 모아 갤러리 카페로 리모델링 해서 작년 9월 문을 연 것이다. 리모델링이라지만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그대로 두고 내부 인테리어만 카페 겸 갤러리에 맞게 새로 한 정도다. 운동장의 농구대는 골대의 망사가 없어지고 구석구석 녹슬어 있고 식수대는 물이 나오지 않은 지 오래돼 보인다. 학교 건물 안 복도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들도 학교 책걸상처럼 목재로 만든 것들이다.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2월 옛 감성을 유지한 이 곳을 ‘뉴트로 제주’ 중 한 곳으로 선정했다. 뉴트로는 ‘새로운 복고(New+Retro)’를 뜻하는 신조어로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취향을 뜻한다.
몇 학년 몇 반? 커피반, 소품반…
운동장을 지나 학교 건물 가운데로 가면 현관이 나온다. ‘명월국민학교’라는 문패가 큼직하게 걸려 있고, 그 위에 학교종이 덩그러니 달려 있다. 학교종은 60대 전후 세대나 기억하는 추억의 소품이다. 차임벨 같은 것이 없던 시절에는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땡땡땡 땡땡’하고 치면 ‘선생님 모여’라는 종소리고 ‘땡땡땡’ 치면 수업시작, ‘땡땡’ 두 번 치면 수업 종료 신호였다. 불이 나거나 비상시에는 연속으로 종을 쳐서 비상상황임을 알리는 등 학교마다 사정에 맞게 종소리를 정해 신호로 삼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일곱 개 정도 교실이 이어져 있다. 교실은 몇 학년 교실이 아니라 ‘커피반’ ‘소품반’ 등으로 이름이 붙어있다. ‘커피반’은 커피를 사서 마실 수 있는 카페 공간이다. ‘커피반’에서는 카운터와 의자 테이블이 놓여있어 커피나 디저트를 즐길 수 있고 추억의 문방구에서 과자도 사 먹을 수 있다. 100원, 200원을 주고 사 먹던 ‘아폴로’와 ‘쫀드기’가 이 곳에서는 2개 1000원에 판다. 복도에도 의자가 놓여있는데 창밖을 내다보면 멀리 한림읍 시가지와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커피반’ 옆 ‘소품반’에서는 엽서, 나무 볼펜, 액세서리 등 다양한 관광상품과 특산물을 판매한다. 여기 있는 기념품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프리마켓이 열리는 월요일에 ‘등교’하면 다양한 소품과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들이 만든 각종 중고물품과 수제품도 살 수 있다.
이어진 ‘갤러리반’에는 명월국민학교를 그린 일러스트 작품, 제주도가 담긴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작품을 살 수도 있는데, 수익금은 청년작가들을 위해 쓰인다. ‘갤러리’반 복도 쪽 창문에는 커다란 걸개그림이 있다. ‘명월국민학교’라는 글자 아래 학교 그림이 있는 포토존이다. 그 아래 국민학교에서 사용하던 작은 책걸상이 놓여 있어 거기 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교실과 복도에서 음미하는 커피와 바다
명월국민학교가 많이 알려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 앉을 자리가 있을까 하는 것은 기우다. 커피계산대 앞에 많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고 복도에도 바 스타일의 테이블과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다. 실내가 갑갑하다고 생각되면 푸른 협재해수욕장 앞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로 나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야외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즐긴다.
협재 쪽을 바라보면 바다 위로 작은 섬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비양도(飛揚島)다. 이 섬은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에 딸린 섬이자 오름이다. 1002년에 화산이 분출해 형성된 제주에서 가장 어린 섬이다. ‘날아온 섬’이라는 뜻의 비양도 이름에는 유래가 들어있다. 옛날 협재 근처에 사는 한 여인이 커다란 산봉우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산이 날아온다, 거기 멈춰라”고 소리치자 산이 한림 앞바다에 떨어져 비양도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비양도 역시 제주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 간다.
노 노펫존 · 노 노키즈존.
요즘 많은 카페들이 어린이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을 내세우지만 명월국민학교는 ‘키즈존’이다. 이 학교에는 매일 많은 어린이들이 ‘등교’해 뛰어 논다. 카페가 넓은 운동장과 여러 칸 교실로 이루어져 아이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눈치 줄 이유가 없다. 아이들은 맘껏 뛰놀며 어쩌면 아빠, 엄마도 느끼지 못했을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큼지막한 렌터카를 타고 오더라도 운동장 한 켠에 마련된 넓은 주차장이 있어 걱정이 없다. 반려견과 운동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반려견의 건물 내부 출입은 안 된다. 목줄을 매는 기본 에티켓은 지켜야 노펫존이 유지될 듯하다.
가끔 제주도에서 장사 잘되는 카페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내가 카페 차릴 걸’하고 배 아파하곤 한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명월국민학교는 개인이 아닌 명월리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여서 수익금 일부는 마을발전기금으로 쓰인다. 명월국민학교가 카페로 문 열기 전까지는 명월리는 관광명소도, 특산품도 없다 보니 젊은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마을 주민도 789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명월국민학교를 찾는 사람들로 동네가 북적이고 마을에 활력이 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지어진 성터인 명월성지, 수령 500년 이상 된 팽나무군락 등 마을의 다른 명소에도 사람들이 몰려든다.
명월국민학교 복도 창문 한 곳에는 눈길이 가는 글귀가 붙어있다. ‘변화는 있어도 변함이 없기를.’ 시간이 흐르며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것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을 것이다. 명월국민학교에서 차 한잔 하면서 변함 없었으면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카멜레존(Chameleon+Zone)은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현대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춰 공간의 용도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밖에 나가서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할 때도 서비스나 물건 구매뿐 아니라 만들기 체험이나 티타임 등을 즐기려 한다. 카멜레존은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의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전환한다. [맛있는 집 재밌는 곳]에 카멜레존을 신설한다. (편집자)]
13:20~13:32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명월대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번지에 있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으로 이동 [12분, 8.5km]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문화 지구 내에 위치한 연면적 1587m² 규모(지상 1층)의 도립미술관. 김창열 화백의 업적을 기리고 세계 현대 미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작품을 수집, 연구, 전시하기 위해 2016년 9월 24일 설립됐다. 김창열은 6.25전쟁 때 1년 6개월 가량 제주도에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한 이후 이곳을 제 2의 고향으로 여겼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로 초기에는 추상화를 그리다가 1972년부터 물방울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물방울 화가’라 불리고 있다. 1961년 파리비엔날레, 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했고, 69년 파리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한 이후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1972년에는 전위미술 전시회인 살롱 드 메에 <밤의 행사>를 출품하며 유럽에서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기억>, <물방울의 형태>, <물방울의 자욱>, <해체> 등이 있다.
소재지 : 제주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영업시간 : 09:00 - 18:00
정기휴무 : 매주 월요일
전화번호 : 064-710-4150
관람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500원
6세 이하 및 65세 이상 : 무료
어른 단체 1,400원
청소년 및 군인 단체 700원
어린이 단체 300원 ]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저지예술마을. 일명 새오름이라 하는 저지악이 마을 중심에 있어 풍광이 독특하고, 전국의 유명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을 생산하는 문화예술인촌이 형성돼 있어 문화적 향취가 남다르다. 또 동양 최대의 분재 정원으로 알려진 생각하는 공원과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천연 난대림 지역인 곶자왈, 야생화가 지천인 방림원 등 이색 공간이 많아 제주의 문화와 함께 볼거리까지 풍성하게 돌아볼 수 있다.]
13:32~14:30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관람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은 화가 김창열(金昌烈, 1929~)이 제주도에 자신의 대표작 220점을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2016년 9월에 세운 도립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소재한 제주는 김창열이 한국전쟁 당시에 머물렀던 곳이다. 주요 소장품은 1960년대 초 앵포르멜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 화가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작품들과 1980~2010년대 회귀 연작 등 그의 대표작들이다. 미술관의 공간 구성은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 특별전시실, 교육실, 수장고로 이루어져 있다. 김창열의 예술 세계를 동시대적 문맥으로 재해석하고, 김창열 정신과 관련된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하고, 김창열과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아카이빙을 하는 것을 미술관의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김창열의 회귀 철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제주시 수정일 : 2021. 4. 7.
‘물방울 화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 화백(金昌烈, 1929년 12월 24일 ~ 2021년 1월 5일)이 2021년 1월 별세했다.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의 주옥같은 작품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미술관은 2016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 잡았다. 김창열은 미술관 건립을 위해 주요 작품 220점을 기증했다. 홍재승 건축가가 설계한 미술관은 독특하다. 하늘에서 보면 중정을 기준으로 거대한 큐브형 건물 8개가 둘러싼다. 이는 김창열이 추구한 회귀의 철학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람자의 동선 역시 ‘회(回) 자형’을 따른다. 사각형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로비에 있는 중정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서 미술관 밖으로 나간다. 관람자는 이 동선에 따라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과 설치 작품을 만나고, 작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현무암 돌담이 이어진다. 호젓한 진입로를 따르다 보면 현무암처럼 검은 사각형 건물이 불쑥 나타난다. 미술관의 이국적인 건물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로비로 들어가니 한쪽 벽면 전체가 창문이고, 그곳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창문 옆 벽면에 김창열의 설치 작품 ‘물의 나라 이야기’가 있다. 작은 무쇠 상자 20개 안에 유리로 만든 물방울이 있고, 바닥에는 모래가 깔렸다. 작품 옆에 붙은 해설을 꼭 읽어봐야 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해설과 그 옆에서 상영되는 동영상을 살펴보면, 김창열의 삶과 작품 세계를 가늠할 수 있다.
김창열은 1929년 북녘의 맹산에서 태어났다. 맹산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로, 어린 시절 작가는 강변 모래밭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았다. 해방 후 월남해 서울대학교 미대에서 그림을 공부했고, 한국전쟁 때 1년 6개월쯤 제주에 살았다. 전쟁의 상처는 스무 살 김창열에게 ‘맹수가 물어뜯는 고통’ 같았지만,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마음을 치유했다. 김창열이 제주를 ‘제2의 고향’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전쟁 후 서울로 돌아와 박서보, 정창섭 등과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1972년 파리의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출품한 ‘밤의 행사’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 물방울을 그렸다.
로비의 다른 쪽 벽면에는 중정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중정은 전시실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나가야 한다. 전시실로 가는 컴컴한 복도 모퉁이를 돌자, 창문 앞에 설치 작품 ‘물방울’이 보인다. 물방울은 밖에서 들어오는 빛과 풍경을 담아 영롱하게 빛난다. 다시 복도 모퉁이를 돌면 2전시실과 3전시실이 나온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물방울 작품이 있다. 김창열은 캔버스, 마포, 목판, 신문, 활자 등 갖가지 소재에 물방울을 그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천자문을 배경으로 한 물방울 시리즈는 김창열 작업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배운 천자문을 물방울 작업과 연결했다. 천자문 시리즈의 대표작은 2전시실과 3전시실 사이에 있는 ‘회귀’다. 여러 한자 바탕에 빛나는 물방울 하나가 스며들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김창열은 왜 그렇게 물방울에 집착했을까.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하고 투명하게 무(無)로 돌려보내기 위한 행위”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물방울을 영원한 존재로 변화시켰고, 물방울에서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삶의 기쁨을 발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시실을 다 둘러봤으면 중정을 구경할 차례다. 홍재승 건축가의 안목이 빛나는 이곳은 로비에서 유리문을 열고 나가 만나는 ‘빛의 중정’으로, 큐브형 건물 사이에 자리한 야외 공간이다. 중정에는 연못처럼 물이 찰랑찰랑하고, 그 가운데 물방울 3개가 놓여 있다. 김창열의 설치 작품 ‘삼인’이다. 작은 분수에서 물방울이 작품에 떨어지면 무지개가 나타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관람 동선은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중정을 한 바퀴 돌아 옥상으로 올라선다. 오르면서 바라보는 중정의 모습이 다채롭다.
옥상에 서면 비로소 미술관의 전체 모습이 그려진다. 다시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미술관 입구다. 관람 동선에 계단이 없다. 시종일관 평지이거나 경사가 완만해, 보행 약자도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나오면 제주현대미술관을 둘러볼 차례다. 미술관 정문 앞, 관람객에게 손을 뻗은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고 싶다. 상설전시관에서 2021년 3월 5일부터 〈김흥수展〉, 야외조각공원에서 2025년 8월까지 이승수 작가의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전시가 이어진다. 특히 곶자왈인 야외조각공원에서 열리는 전시가 볼 만하다. 원시적인 숲에서 만신창이가 된 인간의 형상은 마치 우리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제주현대미술관은 곶자왈 특유의 풍요로운 숲을 품어, 작품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성이시돌목장은 젊은이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통한다. 그들은 푸른 초원과 테쉬폰(Cteshphon), 우유갑 모양 조형물 등에서 인생 사진을 남긴다.
목장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테쉬폰은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맥그린치(Patrick J. McGlinchey) 신부가 제주 중산간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건축물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1961년 국내 처음으로 성이시돌목장에 테쉬폰을 여러 채 지었다. 테쉬폰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구조로 시공하기 쉽고, 제주의 강한 바람에 잘 견뎠다. 1960∼1970년대 주택과 창고, 돈사 같은 용도로 제주 곳곳에 보급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들러본 곳은 알려지지 않은 왕이메오름이다. 아덴힐CC리조트 주차장 입구에서 200m쯤 더 가면 오름 입구가 나온다. 이 오름은 호명목장의 사유지인데, 도민과 관광객을 위해 개방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녀가야 하는 곳이다. 오름에 들어서면 울창한 삼나무 숲이 반긴다. 서늘한 숲을 지나면 길은 오름 꼭대기로 이어진다. 능선에는 활엽수가 가득하다. 능선을 한 바퀴 돌고, 분화구로 내려갈 수 있다. 잔디가 깔린 분화구 바닥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오름의 축복을 한가득 안고 제주 여행을 마무리한다.
여행코스
〈당일 여행 코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제주현대미술관→성이시돌목장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제주현대미술관→성이시돌목장 둘째 날 / 방림원→왕이메오름
여행정보
○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 제주현대미술관
○ 문의 전화 - 제주시청 관광진흥과 064)728-2757 -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064)710-4150 - 제주현대미술관 064)710-7801
○ 대중교통 정보 [버스] 제주국제공항 정류장에서 151번 급행버스 이용, 동광환승정류장에서 820번 관광지순환버스 환승,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정류장 하차. * 문의 : 극동여객 064)753-0310 관광지순환버스 064)746-7310
○ 자가운전 정보 제주국제공항→노형로→평화로→용금로→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 숙박 정보
- [한국관광 품질인증업소] 늘송파크텔 : 원노형5길, 064-749-3303
- [한국관광 품질인증업소] 제주알(R)호텔 : 서광로14길, 064-757-7734
- [한국관광 품질인증업소] 제주메이플호텔 : 원노형3길, 064-745-6775 ·
한국관광 품질인증 이란? ☞ 숙박, 쇼핑 등 관광시설과 서비스에 대한 품질을 국가에서 인증하는 제도로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되며, 다양한 사후관리를 통해 품질을 유지합니다. ※ 더 많은 품질인증업소가 궁금하시다면? KQ 접속!
- 꽃신민박 : 한경면 용금로, 010-3829-5836
- 이끌림민박 : 한경면 저지1길, 0507-1305-3349
- 제주힐링리조트 : 한림읍 금악서길, 064)796-3533
- 절물자연휴양림 : 제주시 명림로, 064)728-1510
○ 식당 정보
- 웃뜨르항아리 : 보말칼국수·전복비빔밥, 한경면 중산간서로, 010-4917-1124
- 뚱보아저씨 : 갈치구이정식·육개장, 한경면 중산간서로, 064)772-1112
- 한라당몰국수 : 고기국수·멸치국수, 한경면 중산간서로, 064)773-0679
- 뉴저지김밥 : 김밥, 한경면 중산간서로, 064)772-3255
○ 주변 볼거리 금악오름, 낙천아홉굿마을, 수월봉, 환상숲곶자왈공원
※ 위 정보는 2021년 4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물방울의 방'… 김창열 기획전 3월5일 개막
뉴시스 기사 등록 2025.02.26. 14:13:41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3월5일부터 7월20일까지 제1전시실에서 소장품 기획전 '물방울의 방 1972~1983'을 개최한다고 26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 화백이 기증한 220점의 작품 가운데 물방울 회화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1972년에서 1983년까지 주요 작품 13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이 물방울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선택한 이후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 1972년에서 1983년까지 물방울 작업을 조명한다.
김창열은 1973년 파리 놀 인터내셔널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에서 물방울 연작을 선보이며 성공리에 프랑스 미술계에 데뷔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물방울은 단순하게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는 가운데 다양한 물리적인 형상을 선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 스프레이 기법에서 벗어나 붓을 이용한 회화적 실험을 시도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수많은 고민과 치열함, 조형언어에 대한 도전적인 실험의 결과를 거쳐 김창열은 한국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한편 제2, 3전시실에서는 또 다른 소장품 기획전 '메카닉한 물방울'이 4월9일까지 열린다. 개념 우위에서 회화 우위로 변천해가는 물방울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김창열(金昌烈)
김창열(金昌烈, 1929년 12월 24일 ~ 2021년 1월 5일)은 대한민국의 미술가이다.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물방울 화가'로 알려져 있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에서 김대권과 안영금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며 붓글씨를 통해 회화를 접했고, 광성보고 시절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데셍을 배웠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인 광성고보 4학년 때 해방이 되자 학교에 있던 일본인 선생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학교에서는 매일 자습만 시켰다. 당시 여기저기 붙어있던 "격문(檄文)"이란 방(榜)을 자주 본 터라 김창열은 노트를 펴놓고 '격문'이란 단어를 이런저런 글씨로 연습하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 선생 대신 자습을 지켜보러 온 보안서원이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끌고 가서 일주일간 구류시켰다. 학교로 돌아오자 또래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고, 상급생으로부터 이런저런 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은 김창열은 김구 선생을 따르는 모임에 한번 나갔다가 연락책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직 아무 지시도 내려온 적이 없는데, 그 일로 갑자기 수배를 받게 된다. 삼촌이 먼저 알고 뛰어와서 조카를 피신시키며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찾아 월남하라고 제안한다.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가족을 두고 월남한 김창열은 서울에서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찾아냈고, 2년 뒤 남은 가족도 월남을 감행해 기적처럼 우연히 길에서 지나가던 김창열을 만나는 바람에 모두 상봉하게 된다. 김창열은 제1회 대학입학 검정고시에 응시해 졸업 자격을 획득한다.
김창열은 월남 후 서울의 다양한 회화연구소를 다녔다. 처음에는 조각가 이국전 연구소에 다니다가 연구소가 폐쇄되자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 때 발발한 6·25 전쟁으로 1950년 학업이 중단되었고,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가족들과 헤어진 채 김창열은 길거리에서 의용군 모병 반에 끌려갔다. 다행히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김창열은 눈치껏 도중에 도주를 했고 서울수복 때까지 모두가 피난 가서 비어 있던 자기 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누군가 김창열이 의용군에 있었음을 고자질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현병대에 끌려갔으나, 김창열 집에 뭐라도 집어갈 게 없나 살피러 들어온 아주머니에게 그의 일기가 발견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일기장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구제를 해주어 큰 탈 없이 석방되고 다시 피난 중이던 가족을 만난다. 김창열은 이후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월남 후 경찰관이 된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의 귀띔으로 경찰전문학교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해 평생의 친구가 된 수필가 박재식, 정치가 정석모 등을 만나게 된다. 휴전 후 서울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으나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등록이 거부된다. 계속해서 경찰생활을 하면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1957년 5월 김창열은 평소 친분이 있던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김청관, 라병재, 조동훈, 이철, 김종휘,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과 함께 뒤에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 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했다. 뒤에 박서보를 찾아가 협회에 가입시켰고, 그의 제안을 받아 동인전의 이름을 "현대전"이라고 약칭하고 제2회부터 함께 해나갔다. 당시 안국동 동덕여대 건물 2층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박서보가 운영하던 작업실 겸 화실이 현대미협 동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세간의 주목을 유독 많이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전은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었던 앵포르멜 운동의 한국판이 되었고, 그런 일색이 싫다고 나가는 동료들이 계속 생겨 현대미협 회원들은 매번 교체되었다. 김창열은 서울 경찰전문학교 도서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집과 미술서적을 통해 당시 세계적 흐름을 읽어냈고, 창작에 전념했다. 하지만 박서보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후배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고 성루예고 교사로 근무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자 괴로움 끝에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61년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있던 박서보가 주선하여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이 초청되었고, 김창열이 출품작가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다음 1963년에는 제3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를 선정하는 커미셔너가 되었고,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1961년 파리 비엔날레 이후 해외 전시나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할 기회들이 계속 주어지자 사람들 간에 경쟁이 극심해졌고 마침내는 국제적 출품 작가를 선정하는 문제를 두고 108인의 연대 서명과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 김창열은 미국에 가 있던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거기서 다시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에서 한달 동안 연수를 받게 된다. 이후 미국에 남아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도 하고 갖은 잡일을 하며 4년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린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를 통해 세계미술계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우던 중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박서보의 추천으로 1971년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 때 만나게 된다.
김창열은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라는 곳에서 마굿간을 아뜰리에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지금의 아내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며 그곳에서 주야장천 그림만 그렸다. 마침내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하기에 이르렀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들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1972)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전 세계에서 활발한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 초대전에서는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하였다.
2016년 9월 김창열이 한 때 경찰 생활을 했던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다. 현재 김창열은 한국으로 돌아와 성북동 자택에서 살다가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시신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에서 수목장되었다.
작품세계
그의 작품세계는 '물방울'이라는 소재로 일관된 측면이 있으나, 시대별로 변화한 점들을 고려하여 10년 단위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60년대
1965년~1971년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 '서정적 추상'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아 반복되는 형태들의 배열로 구성되어 기계적이며 추상적이다. 대표작으로는 《Rite》 시리즈가 있다.
1970년대
작가가 파리로 이주한 이후의 시기로, 물방울의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2년 살롱 드 메에 입선한 이후로 여러 그림들에서 단일한 모티프인 물방울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하나의 혹은 다수의 물방울이 캔버스의 다양한 위치에서 나타난다. 대표작으로는 《Event of Night》(1972), 《Water Drops》(1974) 등이 있다.
1980년대
작가는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는 거친 표면이라는 물체의 즉물성(卽物性)을 살리는 반면,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바탕과 이질감을 형성하여 실제 물방울이 가진 물질성을 상실하게 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단순한 마대에서 나아가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음으로써 동양의 철학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마대에 물방울들이 몰려 있는 《Water Drops》(1987), 천자문 위에 물방울들이 그려진 《Recurrence》(1989) 등이 있다.
1990년대
이 시기에 작가는 《Recurrence》(회귀)라는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물방울들은 단지 맺혀있는 것에서 변화되어 일그러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며, 지워지기도 한다. 또한 물방울의 바탕에는 끊임없이 천자문이 작게 혹은 크게 등장하는데, 이는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형성된 작가의 향수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아래에서 쓰던 천자문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작가는 이전 시기까지 계속되었던 채도가 낮은 배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과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시도한다. 《Bell》(2003)에서는 하늘색 바탕에 천자문을 그려넣고, 《Yellow Earth》(2003)에서는 이전과 달리 채도높고 적극적인 노란색 바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Meditation》(2004)의 경우에는 물방울 모양의 큰 유리병에 물을 담아 천장에 쇠줄로 매달아 늘어뜨린 설치미술도 시도한다.
작품해석
그가 소재로 그리는 물방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동서양의 문화를 함께 접하였던 작가가 서양 미술의 재료를 통해 동양적인 사고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하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나, 그 철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작가의 언급
"파리 가난한 아틀리에에서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체를 떼어내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 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과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서양과 다른 나의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한 방울의 물방울이었던 것입니다. 물방울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평론가의 해석
"투명한 물방울은 일종의 눈속임(trompe l'oeil)으로서, 가상의 빛과 그림자의 유희로 만들어진 환상이다. 바탕을 칠하지 않은 천을 그대로 캔버스로 사용하기 때문에 천 위에 실제로 물방울이 맺힌 듯한 눈속임 효과가 더욱 배가된다."(이일)
"김창열 선배는 물방울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에 물방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를 가지고 시각적으로 미술사에 남는 일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방울은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물방울은 착시현상이지 현실 자체의 물방울은 아니다. 그런데 마대를 거꾸로 해서 그리거나 바탕을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그려 물방울이 금방 스며들거나 배어 나오는 듯한 느낌의 착시 현상은 그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냥 하얀 캔버스에 그린 것과는 뜻이 다르다. 마대라는 물질적인 현상과 물방울의 착시현상을 중첩시킨 것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물질과 환상을 겹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인 것을 제시했다. 그래서 하나의 오브제도 아니고, 옛날식의 그림도 아닌 묘한, 어중간한 지점을 포착해낸 대단히 새로운 매체현상을 그는 창안해 낸 것이다. 물방울 하나는 기쁨도 주고 설움도 주고 어떤 추억이나 기억도 되살려 준다. 그리고 우리는 영롱한 물방울 속에서 또 다른 환상도 본다."(이우환)
전시경력
개인전
2006 PYO BEIJING(베이징)
2005 김창렬 중국국가박물관 초대전(베이징)
2004 갤러리 현대(서울), 쥐드폼 국립미술관(파리)
2002 박영덕화랑(서울)
2000 갤러리 현대(서울), 박영덕화랑(서울)
1999 앤드류샤이어갤러리(로스앤젤레스),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파리)
1998 MMG 갤러리(동경), 동경화랑(동경), 사카모토 젠조 미술관(구마모또)
1997 박영덕화랑(서울), 갤러리현대(서울), 드라기냥 미술관(드라기냥), 물의나라 미술관 개관 기념전(시마네현)
1996 타이페이 아트페어(타이페이),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파리)
1994 선재미술관(경주), 공간화랑(부산)
1993 SAGA(파리),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파리), 갤러리 현대(서울)
1991 시그마 갤러리(뉴욕), 스템플리 갤러리(뉴욕), 인공갤러리(대구), 공간화랑(부산)
1990 갤러리 현대(서울)
1989 카사하라 화랑(오사카), 스즈카와 화랑(히로시마), 시카고 아트페어(시카고), LA아트페어(로스앤젤레스),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로스앤젤레스)
1988 갤러리 현대(서울), 동경화랑(동경), 세이부 현대 아트 갤러리(동경)
1987 나비글리오 갤러리(밀라노), 갤러리무(토론토), 갤러리 현대(서울)
1985 FIAC(파리), 스템플리 갤러리(뉴욕)
1984 바젤 아트페어(스위스)
1983 동경화랑(동경), 스템플리 갤러리(뉴욕), 카사하라 화랑(오사카), 베란느망 재단(벨기에), 갤러리 현대(서울), 다카기 화랑(나고야)
1981 갤러리 무스(토론토), FIAC(파리)
1978 스템플리 갤러리(뉴욕), 나비글리오 갤러리(밀라노), 다카기 화랑(나고야), 안쿠럼 갤러리(로스앤젤레스)
1977 앤드워프 갤러리(앤드워프)
1976 갤러리 가레르프(브뤼셀), 동경화랑(동경), 가네코 아트 갤러리(동경), 갤러리 현대(서울), 명동화랑(서울)
1975 INKO 아트페어(로마), 쿤스트하우스(함부르크), 아베이 생-미셀 드 프리골레(생 미셀), 갤러리 노벰버(베를린)
1974 갤러리 스프릭(보쿰), 갤러리 야자(뮌헨), 갤러리 엔겔베르츠(제네바), IKI 아트페어(뒤셀도르프)
1973 크놀 엥테르나쇼날(파리), 갤러리 도뜨(아비뇽)
1963 신문회관(서울)
단체전
연도 전시명 주최 장소
2006 한중현대미술전 굿모닝신한증권&표갤러리 서울
2005 수묵의 시 기메아시아미술관 파리
2004 한국의 평면회화, 어제와 오늘 시립미술관 서울
2002 한국작가 4인전 비쥬츠세카이 갤러리 도쿄
2001 한국모노크롬 회화 코리아 아트 갤러리 부산
한국 현대미술의 현황 비쥬츠세카이 갤러리 도쿄
해변 미술제 앙리코나바라 갤러리 파리
Sharjah 국제아트 비엔날레 Sharjah UAE
KCAF 예술의전당 서울
2000 침묵의 작가들-한국현대작가8인전 니스 동양미술관 니스
시카고 아트페어 시카고 박영덕 화랑 외 다수 시카고
1999 한국미술50년:1950-1999 갤러리현대 서울
침묵의 작가들=한국현대작가8인전 프랑스 몽베리에 시립미술관 몽베리에
1997 메이드 인 프랑스 퐁피두 센터 파리
1996 SIAF 갤러리 현대 서울
문자와 그림 한림미술관 대전
시카고 아트페어 갤러리 현대 시카고
1995 FIAC 갤러리 현대,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 서울, 파리
1994 해변미술제 앙리코 나바라 갤러리 프랑스 남부
NICAF 갤러리 현대 동경
1992 자연과 더불어 테이트 갤러리 리버풀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한글기념 서림화랑 서울
시카고 아트페어 갤러리 현대 시카고
1991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1990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1989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1988 올림픽 국제 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올림픽 판화 국제전 로이드 신 화랑 서울
1987 에꼴 드 서울 관훈미술관 서울
1986 서울-파리 프레스센터,파리국립조형예술센터 서울, 파리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85 휴먼도큐먼트 84/85 동경화랑 동경
1984 한국현대미술전 70년대 후반-하나의 양상 동경, 오사카, 삿포로, 우스노미야, 후쿠오카
오늘의 미술-소장작품에서-파트1
'83콜렉션을 중심으로' 동경도미술관 동경
1982 한국현대미술의 위상 교토시립근대미술관 교토
한국재외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현대종이의 조형, 한국과 일본 국립현대미술관, 교토시립근대미술관, 사아타마시립미술관 서울, 교토, 사아타마
1981 화상의 눈 롱아일랜드미술관 미국
한국현대드로잉 브루클린 미술관 미국
1980 아시아 현대미술
아시아 미술전 제2부 후쿠오카 미술관 후쿠오카
교수단 선택 올버니 대학교 미술관 뉴욕
살롱 "거장과 신인" 파리
1979 에꼴 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착각의 현실 덴버미술관 서울
한국현대미술 4인의 방법 현대화랑 서울
살롱 "거장과 신인" 파리
종이작업 진화랑 서울
1978 살롱 "거장과 신인" 파리
종이작업 견지화랑 서울
1977 제15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브라질
FIAC '77 파리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동경 센트럴 미술관 동경
한국 현대화 국립역사미술관 타이페이,대만
한국 서양화대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국현대미술 6인전
김환기, 권영우, 윤형근, 김창렬, 박서보, 이우환 보자르 화랑, 무라마스 화랑 나고야, 동경
1976 리얼리즘의 한 측면 위니펙 미술관 캐나다
살롱 드 메 Salon de Mai 파리
1975 살롱 드 메 Salon de Mai 파리
1974 살롱 드 메 Salon de Mai 파리
1973 살롱 드 메 Salon de Mai 파리
살롱 드 레아리떼 누벨 파리
제1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브라질
1972 살롱 드 메 Salon de Mai 파리
살롱 드 레아리떼 누벨 파리
살롱 드 메-50인의 회화 유고슬라비아
카뉴 국제회화전 카뉴, 프랑스
제8회 동경국제 판화전 동경
4인전 생 폴 시립미술관 프랑스
1971 한국현대회화 파리
1969 아방가르드 페스티발 뉴욕
1965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브라질
1961 제2회 파리 비엔날레 파리
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과천, 한국)
국립미술관(도쿄, 일본)
도쿄도 미술관(도쿄, 일본)
물의 나라 미술관(시마네현, 일본)
베란느망 재단 미술관(kruishoutem,벨기에)
보스톤 현대미술관(보스톤)
보이만 현대미술관(로테르담)
보쿰 미술관(보쿰, 독일)
사이타마현 근대미술관(사이타마, 일본)
선경미술관(서울, 한국)
선재미술관(경주, 한국)
알브라이트-녹스 갤러리(버팔로, 미국)
오하라 미술관(오하라, 일본)
위니팩 갤러리(위니팩, 캐나다)
이와키 시립미술관(이와키, 일본
퀼른 아시아 미술관(퀼른, 독일)
타카마츠 시립미술관(타카마츠, 일본)
텍사스 공과대학 미술관(러벅, 미국)
퐁피두 센터(파리, 프랑스)
허션 현대미술관(워싱턴, 미국)
호암미술관(용인, 대한민국)
후쿠오카 미술관(후쿠오카, 일본)
히로시마 현대미술관(히로시마, 일본)
부산시립미술관(부산, 한국)
대전시립미술관(대전, 한국)
대림미술관(서울, 한국)
디트로이트 미술관 (Detroit Institute of Arts, www.dia.org, 디트로이트, 미국)]
14:30~14:38 걸어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번지에 있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저지14길 35 번지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으로 이동 [8분, 550m]
[제주현대미술관
저지문화예술인 마을 안에 자리한 제주현대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제주자연친화성을 우선으로한 공모전의 최우수작품을 실시 설계한 건물이다. 국제조각심포지엄 야외공원과 함께 1천여명이 동시 관람 가능한 야외공연장과 특별전시실,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아트숍, 세미나실 등 문화 예술 복합 기능을 갖춘 미술관이다. 제주에 반해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목 김흥수 화백이 자신의 대표 작품을 무상으로 기증한 유일한 미술관이다. 주변에는 대한민국 원로 화백들이 다수 거주하며 저지문화예술마을이라는 거대 문화벨트를 조성하고 있어, 예술의 관심이 있다면, 다수의 갤리러와 전시관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제주현대미술관과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공간적 분리감이 거의 없어 관람 후 편하게 둘러볼 수 있으나, 거주 공간인 만큼 관광 매너를 준수해야 한다.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저지14길 35 번지
관람요금 및 운영 시간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은 1,000원, 어린이는 500원 (특정일에는 무료 관람도 가능)
무료관람 : 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등 관람료 면제대상
운영시간 : 09:00 - 18:00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며,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미술관 내 카페와 기념품 가게도 있어 여유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14:38~15:28 제주현대미술관 관람
[2007년 9월 1일에 개관한 제주현대미술관은 본관과 분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은 지하1층·지상2층의 연면적 1,773㎡으로 김흥수화백 기증작품전시 특별전시실과 상설전시실, 그리고 2개의 기획전시실 및 수장고·자료실·아트샵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분관은 지상2층의 연면적 333㎡ 건물로 박광진화백 기증작품이 특별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제주현대미술관이 위치한 약 99,383㎡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는 30여동의 예술인 창작 건축물이 건축되어 있고 1,000여명이 동시관람이 가능한 야외공연장 시설과 어린이 야외조각공원 등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다.
또한, 미술관 주변에는 김창열 미술관, 방림원 야생초박물관과 평화박물관, 생각하는 정원, 오설록 등이 근접해 있어 앞으로 문화예술의 관광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테마공간 환경을 지니고 있다.]
[제주 현대미술관 '박광진: 자연의 울림' 개막
배정화 기자
조이뉴스24 기사 입력 2025.03.11. 10:40
[조이뉴스24 배정화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현대미술관은 오는 11일부터 제주현대미술관 분관에서 박광진(1935~) 화백의 상설전인 '박광진: 자연의 울림'을 개막한다.
전시에서는 박광진 화백이 기증한 149점 중 그가 그린 사실적인 풍경화와 함께 '자연의 소리' 연작이 소개된다.
박광진 화백은 지난 1964년 제주에 첫 방문 이후 꾸준히 제주의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아왔다. 특히 1990년대 중반 발표된 '자연의 소리' 연작에서는 기존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 담긴 감성을 추상적 요소와 결합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냈다.
오랜 시간 자연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온 박광진 화백은 자연에서 받은 인상과 세로로 그은 가느다란 선의 추상적 요소가 만나 공명(共鳴)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관람객에게 또 다른 울림을 전달한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운영시간은 화요일~일요일(매주 월요일 휴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오후 5시 30분 입장 마감)까지다.
이종후 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익숙한 계절의 반복 속에서도 자연이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2025년8월31일(일요일)까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제주현대미술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5 아트저지Ⅰ 현유정 속삭임(Whisper)
일시 2025.03.18 ~ 2025.09.14
관람시간 09:00 ~ 18:00
장소 1평미술관
주최 제주현대미술관
주관 제주현대미술관
문의 064-710-7801
전시내용 소개
제주현대미술관은 야외 유휴공간을 1평 미술관이라는 감성 공간으로 탈바꿈해 관객 체험형 전시 아트저지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2021년부터 다각도의 전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으며 아트저지 아홉번째 프로젝트 작가로 현유정 작가를 선정하였다.
현유정 작가의 작업은 내면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방식이 돋보인다. 특히 애니메이션 기법을 통해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연출을 사용하고 음악과의 결합으로 감각적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더 깊은 공감과 몰입을 선사한다.
메인 작품 <속삭임>은 인디록 밴드 신인류의 <Whisper> 음악과 결합된 형태로 내면의 감정이 확장되며 그 흐름 속에서 현실과 꿈이 어떻게 엮여지는 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번 전시는 감정의 깊이를 탐구하는 작품으로 꿈속에서 유령 친구와의 여정을 통해 자아를 돌아보고 감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다. 특히 그리움과 상실 정서적 회복 등을 다루는 주제는 다양한 감정선들을 잘 드러내고 있어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꽃물과 춤이 관계의 해방과 기쁨을 나타내고 애정 어린 포옹이 이 모든 과정을 마무리 지으면서 결국 사랑과 관계가 치유와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힘임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중요 역할을 하는 꽃물넥타르 Nectar은 단순히 식물의 생리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감정적 심리적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인공과 유령친구가 꽃물을 마시며 춤을 추는 장면은 치유와 연대를 나타내는 중요한 순간이다. 꽃물은 감정의 흐름을 상징하며 이를 나누는 순간은 주인공이 그리움을 극복하고 영혼의 안정을 찾는 시간이다. 작가는 꽃물을 단순히 외부 세계의 단맛을 넘어 내면의 정서적 자양분과 심리적 회복을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로 강조하고 있다. 이번 [2025 아트저지Ⅰ현유정-속삭임Whisper] 전시의 인간 감정에 관한 다양한 표현과 해석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여러 감정들을 돌아보게 하고 그 안에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을 선사할 것이다.]
15:28~15:36 걸어서 제주현대미술관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번지에 있는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으로 원점회귀 [8분, 550m]
15:36~16:00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산 255-4 번지에 있는 큰노꼬메오름 주차장으로 이동 [24분, 18.0km]
산 : 제주도 큰노꼬메오름
산행코스: [큰노꼬메오름 주차장~(2.32km)~큰노꼬메오름 정상~(2.32km)~큰노꼬메오름 주차장] (총 이동거리 4.64km)
일시 : 2025년04월27일(일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2시간 소요)
16:00~17:00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산 255-4 번지에 있는 큰노꼬메오름 주차장에서 산행출발하여 큰노꼬메오름(833.8m) 정상으로 이동
[제주도 노꼬메오름
부산일보 기사 입력 : 2016-07-06 19:09:19 수정 : 2016-07-12 11:13:18
제주 사람들이 피서 가는 곳, 고된 일상 내려놓는다
노꼬메오름 정상에 서면 한라산과 주변의 크고 작은 오름 등 제주도 중산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이맘때 피는 산딸나무와 산수국도 산행의 재미를 더해 준다.
제주 여행을 많이 다녀봤단 사람도, 노꼬메오름(833.8m)이라면 고개를 갸웃한다. 제주에 산 지 2년이 넘은 지인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했다. 해발 800 고지가 넘고, 한라산과 제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며, 여름에는 냉장고를 방불케 하는 서늘한 고원지대. 구름이 한라산을 숨겼다가도 '한 번만~' 하고 읍소를 하면 순식간에 보여주는 설문할망의 현신 같은 장소, 노꼬메오름을 제주산악회의 추천을 받아 '산&길' 취재팀이 다녀왔다.
■참 높고 높구나 '놉고메'
한라산은 제주도에서 가장 큰 오름이다. 제주도의 산은 모두 오름이라고 보면 되는데 360개가 넘는 오름이 제주 곳곳에 있다. 노꼬메오름은 그중 한라산을 제외하고 제주 산악인이나 제주 시민이 즐겨 찾는 오름 가운데 손에 꼽는다고 제주산악회 전양호 부회장이 추천했다. 관광지로 개발해 입장료를 받는 오름도 아니고, 원시림이 울창해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과 달리 노꼬메오름은 편안한 접근성은 물론 등산로도 잘 정비돼 있었다.
여름에도 냉장고같이 서늘한 곳
소길농장서 8.2㎞ 쾌적한 산길
계곡에 흐르는 물은 천연 '삼다수'
삼나무·편백 빼곡한 원시림 장관
안개인 듯 구름인 듯 몽환적 정상
설문할망 허락 땐 한라산 볼 수도
노꼬메오름은 소길농장 쪽에 있는 큰노꼬메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농장 입구~자연보호 안내판~쉼터~갈림길~큰노꼬메 정상~다시 갈림길~삼거리~야생오소리 서식지~작은노꼬메~765봉~사거리 갈림길~궷물오름~테우리 막사~백중제~사거리 갈림길~상잣길~오랑캐죽을홈~큰노꼬메주차장까지 이어지는 8.2㎞의 쾌적한 산길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4시간 3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제주경마공원 윗길인 1117번 도로를 가보면 노꼬메주차장으로 가는 농로가 숨어 있다. 차량 내비게이션으로는 노꼬메주차장을 검색하면 안내를 잘해 준다. 제주도 현지인들이 고사리를 뜯으러 오는 곳이다. 노꼬메는 높은 뫼라는 뜻인데 한자로는 고고산(高古山)이라고 했고, 노꼬메를 음차하여 녹고산(鹿高山)이라고도 불렀다지만, 지금은 순우리말 정겨운 이름인 노꼬메로 부르고 있다. 바로 옆에 작은노꼬메가 있어, 큰노꼬메로 구분하기도 한다.
소길목장 상잣길 얕은 돌담 제주공항에서는 후텁지근한 여름 기운이 묻어났는데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제주산악회 전 부회장 말로는 "제주 사람이 피서를 가는 곳이 노꼬메"라고 했다. 그만큼 고지대에다가 숲이 짙어 시원한 것이다. 노꼬메오름은 특이하게 말발굽 모양의 분화구인데 그 흘러내린 용암이 애월 곶자왈(제주의 원시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은 빠져나가지만, 마소는 나가지 못하게 해 놓은 미로형 출입구를 지나 곧장 큰노꼬메가 보이는 길로 간다. 한라산에서 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세 노꼬메를 가려버린다.
■설문할망의 고운 꽃밭
제주마의 말똥도 정겹다. 노꼬메오름으로 가는 길 위에는 거대한 말똥 무더기가 곳곳에 있다. 사실 말들의 세상으로 사람이 들어선 것이다. 이곳은 소길리 공동 목장지다. 노꼬메에 바싹 접근하자 무덤 몇 기가 나온다. 제주 특유의 무덤으로 돌담을 쌓아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산수국이 길섶에 만발했다. 산수국은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꽃잎이 촘촘하게 박혀 그윽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군데군데 나무 평상 쉼터가 있지만 높은 습기로 인해 앉아서 쉴 수는 없었다. 제주 산죽밭을 지나 원시림으로 들어선다. 제법 된비알을 오르는데 여성 한 분이 인기척에 놀랐는지 가지 않고 경계를 한다. 평일인데도 노꼬메오름은 등산하는 사람이 많아 한적하지는 않다.
주변이 확 트이는 능선에 올라섰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몽환적인 풍경이다. 작은노꼬메 갈림길을 지나니 정상까지는 일사천리다. 구름 속을 걸어 넓은 전망대에 도착했다. 한라산과 중산간, 주변 오름들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인데 너무 아쉬웠다. 저 멀리 구름 속에서 한 사람이 온다. 올라오면서 만난 그 여성이었다. 하필 부산이 고향인 진효연 씨였다. 부천에 살고 있다는 중년의 이 여성은 힐링 여행 차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에 왔다가 친구 소개로 혼자 노꼬메를 올랐다.
융단처럼 깔린 제주조릿대 그때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더니 갑자기 사위가 환해졌다. 한라산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노꼬메로 이어지는 산록엔 산딸나무가 군데군데 피었다. 제주도를 만든 전설의 그 설문할망이 숨겨둔 화원이던가. 모두 넋을 잃고 운명처럼 다가온 풍경을 감상한다. 큰노꼬메와 작은노꼬메 사이 골짜기로 궷물오름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 이 길을 버리고 작은노꼬메로 오른다. 고비와 관중, 삼나무와 편백이 빼곡한 원시림이 펼쳐진다.
■테우리와 말이 어울리던 곳
작은노꼬메 중턱에 야생오소리 서식지가 있다. 원시림이 울창하니 야생동물이 살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작은노꼬메는 가까웠다. 역시 말발굽처럼 생긴 오름 정상을 휘돌아 하산한다. 임도와 등산로, 산책로가 혼재돼 있으나 이정표만 잘 보고 간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산딸기가 지천이어서 걸음을 자주 멈춘다.
내친김에 궷물오름도 오르기로 했다. 597m로 육지 웬만한 산 높이의 궷물오름이지만 고도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평지 지형이 거의 500~600m이니 그랬다. 궷물오름 정상의 초원에서는 한라산 조망이 좋다. 방금 내려온 작은노꼬메와 큰 노꼬메도 우뚝 솟은 배경이 되었다. 농장지대답게 테우리(목동의 제주 사투리)가 마소를 돌보다 악천후를 피해 머물던 막사가 복원돼 있다. 돌로 만든 집이라 웬만한 눈보라나 비바람에도 문제없겠다.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연못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백중제다. 이곳 연못에서는 백중날이면 제를 올린다고 했다. 연못의 물은 바로 먹을 수는 없었고, 대신 그 옆 계곡에 흐르는 물은 천연 '삼다수'여서 빈 물통을 가득 채웠다. 길가에 지천인 산딸기도 틈나는 대로 따 먹었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산록에 희게 수놓은 듯한 산딸나무 다시 사거리 갈림길에 섰다. 여기서부터 상잣길을 따라 걷는다. 잣성은 조선 시대 중산간 목장 경계용 돌담이다. 상잣길은 마소가 한라산으로 잘못 들어가 얼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한 돌담이고, 하잣길은 마소가 농지로 들어가 농작물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돌담이다. 최근 복원된 상잣길 돌담을 따라 노꼬메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오른쪽은 드넓은 초지이고, 왼쪽은 원시림이다. 그 경계를 따라 노꼬메오름 입구로 돌아 나온다. 중간에 이죽을홈이라는 특이한 지명이 있어 안내문을 보니 왜구가 노략질한 후 숨어 있다가 몰살당한 곳이라고 한다. 산행을 마치고 나니 기어코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취재 협조=제주특별자치도관광협회]
17:00~17:05 큰노꼬메오름(833.8m) 정상에서 파노라마 조망 풍경을 사진촬영
[노꼬메 오름 정상에 서면, 제주도 서부 지역 전체를 일망무제로 조망할 수 있다.
제주도 북부지역을 조망하려면 어승생악이 최고이고, 제주도 동부지역 최고의 조망대는 다랑쉬 오름이고, 제주도 남부지역을 감상하려면
굴메 오름(군산오름이라고도 부름)과 고근산이 제 격이다.]
[노꼬메 오름 정상에서 북쪽으로는 제주시 애월읍의 하귀포구가, 북동쪽으로는 족은노꼬메오름(774.7m)과 그 뒤로 제주시가, 동쪽으로는 어승생악(1,172m)이, 동남쪽으로는 한라산 정상(1,947m)과 한라산 1100고지가, 남쪽으로는 서귀포시 안덕면의 군산오름(334.5m)이, 남서쪽으로는 서귀포시 안덕면의 산방산(395m)과 제주시 애월읍의 바리메 오름(763.4m)이, 서쪽으로는 제주시 한림읍의 비양도가, 서북쪽으로는 제주시 애월읍의 렛츠런파크제주와 그 뒤로 멀리 곽지해수욕장과 과오름(156.7m)이 조망된다.]
[큰노꼬메오름은 제주 북서쪽 중산간에 위치해 있으며 바로 옆에 노꼬메족은오름이 나란히 서 있다. 높고 뾰족한 오름이 노꼬메큰오름이고 그 옆의 낮은 오름이 노꼬메족은오름이다. 큰노꼬메오름은 해발 833.8m의 높이와 가파른 사면을 이루고 두 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큰 화산체다. 북쪽의 봉우리가 주봉으로 정상이고 화구 방향인 북서쪽에 소구릉들이 산재되어 있으며 원형 화구였던 것이 침식되어 북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었다. ‘노꼬’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한자표기가 鹿古岳(녹고악), 鹿高岳(녹고악)등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옛날 사슴이 내려와 이 오름에 살았었다는 것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오름 탐방로 초반에는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가팔라지지만, 중간에 두 개의 쉼터가 있어 숨을 고를 수 있다. 큰노꼬메오름의 정상 전망에 서면 족은노꼬메오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오름들이 펼쳐지고 한라산과 한림 앞바다가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노꼬메오름
노꼬메오름(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표고 834m)은 주변의 족은노꼬메오름(표고 774m), 궷(궤)물오름(표고 597m)과 같이 오름군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외견상 말굽형 분석구로서, 노꼬메오름와 노꼬메족은오름은 북서쪽으로 트인 반면, 궷(궤)물오름은 동쪽으로 열린 방향을 가진다.
노꼬메오름은 애월 곶자왈 지대를 구성하는 조면현무암 조성을 지닌 아아 용암의 분출 근원지이다. 용암 시료에 대한 Ar-Ar 연대 측정 결과, 26.4±13.2Ka를 나타내어 약 2만 6천 년 전의 화산활동으로 아아 용암이 분출한 것으로 해석된다.
분화구의 굼부리 높이가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노꼬메오름은 분화구 서쪽 내부(표고 625~670m), 약 1m 두께에서 시작하여 최대 약 10m 가량의 용암 절벽이 노출되어 있다. 약 1m 두께인 4~5매의 아아 용암이 상하 50cm~1m의 클링커층과 함께 노출되어 있어, 최대 5회 가량 화구로부터 용암이 분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태를 달리하는 분석구
화산 분화구로부터 폭발에 의해 터져 나온 스코리아가 집적되어 만들어진 원추형의 화산체를 분석구라 한다. 분석구는 마그마에 들어있는 가스가 폭발하여 만들어지는데, 마그마에 휘발성분이 적어지면 용암이 분출하게 된다. 이 용암은 분화구 내에 모여 용암호(lava lake)를 만들게 되는데, 용암은 스코리아보다 무겁기 때문에 분화구에 모여 있던 용암은 분석구 바닥이나 사면의 약한 틈을 따라 스코리아층을 붕괴시키면서 분화구 바깥으로 흘러 내려가게 된다. 스코리아는 용암에 비하여 매우 낮은 비중을 갖기 때문에 분석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붕괴된 분석구의 일부분을 싣고 마치 땟목과 같이 멀리까지 흘러가게 된다.
이 현상은 우유 컵에 후레이크를 넣고 컵을 기울여 우유를 쏟으면 우유 위에 후레이크가 떠서 흘러가는 양상과 유사하다. 이 결과 원추형의 분석구는 원래 제 모양을 잃게 되어 말발굽 혹은 초승달형 등의 모양을 갖게 된다. 제주도에 분포하는 분석구는 외형적 특징에 따라 말굽형, 원추형(예, 다랑쉬오름), 원형(예, 아끈다랑쉬오름) 그리고 화구가 두 개 이상인 복합형 오름(예, 용눈이오름, 도너리오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말굽형 오름은 약 50%에 달한다.]
17:05~18:00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산 255-4 번지에 있는 큰노꼬메오름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산행 완료
18:00~18:24 렌트한 승용차로 큰노꼬메오름 주차장에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산 1-2 번지에 있는 한라산 1100고지로 이동 [24분, 18.3km]
산 : 제주도 서귀포시 [삼형제 큰오름&1100고지 습지]
[삼형제 오름
1100도로 탐라각휴게소에서 서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개의 오름이다.
1100고지에 삼형제큰오름이 있고, 서쪽으로 삼형제샛오름과 삼형제말젯오름이 있어 흔히 삼형제오름이라고 부른다.
1100고지 위의 영실에는 윗세오름이 있다. 윗세오름도 3개가 나란히 있어 삼형제오름인데, 1100 고지에 삼형제오름이 있기 때문에 위에 있는 3개 오름이라 해서 윗세오름이다.
동쪽의 영실에서 바라보는 삼형제오름은 3개가 겹쳐 보이는데, 석양에 보면 아름다운 실루엣이 압권이다. 그리고 북동쪽의 어승생오름 정상에서는 왼쪽에서부터 삼형제큰오름, 샛오름, 말젯오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삼형제오름은 행정구역상 서귀포시와 북제주군 애월읍 경계에 걸쳐져 있으며, 일명 세오름이라고도 한다. 삼형제오름은 줄지어 서 있는 자세로 세 오름의 정상부는 다소 평평하며, 서쪽으로 흘러내린 형태의 말굽형 화구를 갖는 일정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큰오름 정상에는 KT통신탑이 서 있다. 큰오름에서 샛오름으로 가려면 급하강했다가 계곡을 건너서 다시 된비알을 올라야 한다.
샛은 중간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즉, 샛오름은 큰오름과 말젯오름 사이에 있는 오름이란 의미다. 샛오름 정상에는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하나는 정상표지석이고 다른 하나는 한라산국립공원 경계석이다.
말젯은 셋째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삼형제 오름 중 높이가 가장 낮아서 셋째 오름이란 뜻이다. 말젯오름의 정상에는 표지석이 없다.
생태자원으로서 보존가치가 큰 고산습지가 1100고지 휴게소 일대에 약 3만평 정도 분포되어 있으며 삼형제 오름 근처에도 약 1만평의 습지가 분포되어 있다. 주요식생은 주목, 꽝꽝나무, 물푸레나무 등 한라산국립공원내의 자연림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큰삼형제오름
표고 : 1,142.5m, 비고 : 118m, 둘레 : 2,262m, 면적 : 367,384㎡, 저경 : 843m
샛오름
표고 : 1,112.8m, 비고 : 123m, 둘레 : 2,419m, 면적 : 412,642㎡, 저경 : 703m
말젯오름
표고 : 1,075m, 비고 : 125m, 둘레 : 2,118m, 면적 : 340,627㎡, 저경 : 686m ]
산행코스 : [ 1100고지 휴게소 주차장~고상돈 기념비와 백록상~삼형제 큰오름~1100고지습지~1100고지 휴게소 주차장 ]
일시 : 2025년04월27일(일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1시간1분 소요)
18:24~18:3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1100로 1555 번지에 있는 1100고지휴게소 주차장에 있는 고상돈 기념비와 백록상을 사진촬영
18:30~18:45 삼형제 큰오름(해발 1,142.5m) 정상으로 이동 [15분, 507m]
[삼형제 큰오름 정상에는 통신탑이 있어서 정상을 우회하여 옆으로 통과해야 한다.]
18:45~18:50 사진촬영
18:50~19:05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산 1-1 번지에 있는 1100고지습지로 이동 [14분, 774m]
[1100 고지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중문동을 잇는 1100 도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도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라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쉽게 감상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1100 도로에 인접한 1100 습지탐방로를 한 바퀴 돌며 습지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으며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더불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한라산의 날씨를 체험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19:05~19:20 1100고지습지를 탐방 [2025년 04월 27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몰시각 : 19시13분]
[1100고지 습지는 한라산 고원지대에 형성된 대표적인 산지습지로서 16개 이상의 습지가 불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이 습지들을 따라 2009년에 습지보호지역이 설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1100고지 습지의 동물과 식생환경에 대한 안내문이 탐방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습지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에서만 서식하는 멸종위기 1급의 야생동물인 매와 야생생물 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습지의 낮은 곳에 고여있는 물은 야생동물의 식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습지 안에는 나무로 이루어진 자연 생태탐방로가 있어 걸으면서 습지를 관람할 수 있다.]
19:20~19:25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1100로 1555 번지에 있는 1100고지휴게소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산행 완료
19:25~19:55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1100로 1555 번지에 있는 1100고지휴게소 주차장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주서로 1240 1층에 있는 중문고등어쌈밥 제주점(전화 : 064-738-2457)으로 이동 [30분, 21.5km]
19:55~20:45 중문고등어쌈밥 제주점에서 저녁식사 [식사 시간 중에 핸드폰 충전]
[중문고등어쌈밥 제주점
영업시간 : 매일 09:30 ~ 21:00
메뉴
<30인분한정>순살꽃고등어묵은지조림 13,000원 <2인분부터 주문 가능>묵은지와 가시 없는 순살 고등어로 드시기 편해요!(공기밥 별도)
살찐통고등어구이 한마리 12,000원 (오동통하게 살찐 고등어만 사용하여 부드럽고 식감이 아주 좋습니다.)
묵은지고등어쌈밥+전복돌솥밥 17,000원]
20:45~20:56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중문고등어쌈밥 제주점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일주서로 1836 번지에 있는 루나폴로 이동 [11분, 6.2km]
[루나폴
소재지 :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일주서로 1836
루나폴은 12만 평의 세계 최대 규모의 나이트 디지털 테마파크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달에 소원을 빌었고, 소원이 가득 쌓여 무거워진 달이 제주에 떨어졌다’라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밤길을 걸으며 즐기는 몰입형 체험 콘텐츠를 제공한다. 루나폴은 미디어아트와 홀로그램 등 실감미디어 기술력으로 꾸며진 총 9개의 체험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나폴 세계관을 재현한 ‘루나 빌리지’, 달의 민족 ‘루나리안’, 달의 민족들이 사용한 언어 ‘루나리안어’ 등 세계관이 매우 풍부하게 구현되어 있어 몰입도를 더욱 높인다. 루나폴만의 세계관과 제주의 청정자연, 최정상 실감미디어 기술력이 만난 루나폴 판타지는 곶자왈이 포함된 천연 보호구역으로 비포장 숲길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일부 동선에 주의를 요하기에 안전하고 편안한 신발과 복장을 추천한다.
상세정보
영업시간 : 매일 19:00 ~ 24:00 (입장 마감 23시)
전화 : 064-794-9680
입장요금 : 성인 22,000원, 청소년 20,000원, 어린이 17,000원
※ 제주도민, 경로(65세 이상) 20% 할인 - 신분증 소지 필수
※ 36개월 미만 유아는 증빙서류 제시 후 무료입장
위싱볼 : 5천원 (노랑, 빨강, 파랑 3가지 색의 위싱볼이 있음)
입구에서 구매할 수 있는 '위싱볼'을 이용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미디어 아트가 나타나 마치 달나라 주민이 된 듯한 체험도 가능하다. 위싱볼은 필수 아이템이다.
소요시간 : 1시간~1시간30분
쉬는날 : 연중무휴
주차시설 : 가능 (약 150대)
유모차대여여부 : 불가
신용카드가능여부 : 가능
애완동물가능여부 : 불가
체험가능연령 : 전연령 가능
체험안내 : 프로젝션 맵핑 및 미디어 / 나이트워크 / 인터랙티브 전시 등
문의및안내 : 064-794-9680
관련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lunafall_jeju
블로그 https://blog.naver.com/luna-kr
이용가능시설
포카튼 도어 : 시공간 너머의 새로운 차원을 마주하게 되는 곳
루나 테일 : 루나폴의 이야기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프리쇼 공간
헬로우 루나폴 : 무지개색 연못과 수천개의 위싱볼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루나폴의 세계로 향해보세요
루나 아우라 : 달의 기운이 가득한 깊은 안개 속의 루나 아우라
루나 빌리지 : 거대한 달이 떨어진 제주도,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압도감이 느껴지는 초대형 달과 달 주변에서 마을을 형성하고 살고 있는 루나리안들을 만나 보자.
루나 샤인 : 강력한 달의 인력으로 인해 지구와는 다른 패턴으로 일렁이는 금빛 파도, 금화를 쏟아내는 황금 나무와 폭포, 부자가 되길 바라는 소원들이 루나 샤인을 금빛으로 물들었어요!
루나 하트 : 사랑에 대한 소원들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바싹 말라버린 핑크빛 달의 사막
루나 피스 : 라이프 사이클을 담은 신비로운 숲으로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건강하길 기원하는 소원들로 가득 차 있어요.
루나 레인 : 지구인이 '별똥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이루어진 소원들이었다는 사실! 이루어진 소원들이 하늘에서 내려요!
더 루나 : 지름 20m의 최대 규모 달 조형물인 루나폴에 소원을 빌어보세요.]
20:56~21:00 루나폴 매표소에서 입장권과 위싱볼을 구입 [경로 입장요금 : 17,600원, 위싱볼 구입요금 : 5천원]
21:10~22:20 12만 평의 세계 최대 규모 나이트 디지털 테마파크인 루나폴을 탐방
[르포] 닷밀 '루나폴' 12만평 펼쳐진 '꿈의 공간'…제주 명소, 거듭나
스토리텔링 몰입형 '실감미디어' 기반 테마파크
인터랙티브 테마 공간 구성, 관광객 '눈길'
제주 관광 산업,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양민호 기자
빅데이터뉴스 기사 등록 : 2024-12-17 16:31:04
[빅데이터뉴스 양민호 기자] 달빛이 스며드는 제주의 밤. 서귀포시 안덕면 깊은 숲속에 5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보름달 모형이 내려 앉았다. 닷밀 '루나폴' 테마파크는 사람들의 소원이 너무 무거워진 달이 "제주에 떨어졌다"는 상상력으로 탄생했다. 지난 2022년 8월 개장한 '루나폴'은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형 디지털 테마파크다. 이곳은 12만평 부지에 펼쳐진 압도적 규모와 섬세한 스토리텔링으로 제주의 밤을 새롭게 수놓고 있다. 최근 글로벌 테마파크 기업 멀린엔터테인먼트와 협력해 더욱 주목받고 있는 닷밀(464580) 루나폴을 직접 방문했다.
루나폴 탐험은 넓은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입구까지 이어지는 짧지만, 설레는 산책로는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약 5분 정도 숲길을 따라 걸으면 은은하게 퍼지는 풀 내음과 상쾌한 밤공기가 앞으로 펼쳐질 모습에 기대감을 더했다.
매표소 옆 상품점에서는 달 테마 향수와 일러스트 제품, 그리고 체험에 필요한 '위싱볼' 등을 만날 수 있다. 다채로운 상품들을 구경하는 재미와 더불어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물품 보관함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의무실, 수유실까지 마련돼 있다. 본격적인 입장 전에 루나폴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거나, 입구에 비치된 루나맵(LUNA MAP)을 통해 마련된 코너를 미리 살펴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마주한 '거대한 달(루나폴)'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
입구에 들어서면 '루나리안'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루나리안은 달에 사는 종족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의 캐릭터다. 루나리안을 따라간 첫 번째 프리쇼 공간에는 작은 달 조형물 중심의 환상적인 미디어 쇼를 볼 수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7분 동안 펼쳐지는 웅장하고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 미디어아트) 쇼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다음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울퉁불퉁한 동굴 벽면에 투사된 루나폴의 수호신 '룬'이 오랜 세월 동안 바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쏟아지던 폭포수가 멎고 그 뒤로 비밀스러운 동굴 입구가 나타난다.
폭포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또 다른 세계다.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정성 들여 만든 루나폴은 단순한 야경 명소가 아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경험하는 특별한 공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작은 연못을 지나 안개 자욱한 구불구불한 통로를 걸으면 루나폴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압도적인 크기의 달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와, 진짜 달나라다!" 등의 환호성이 나온다.
실제 마주하는 달의 크기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다. 바로 이곳부터 본격적인 루나폴의 여정이 시작된다. 루나폴은 △부자가 되고 싶은 소원들이 모인 '루나 샤인(Luna Shine)' △사랑을 염원하는 '루나 하트(Luna Heart)' △건강을 기원하는 '루나 피스(Luna Peace)' △별처럼 쏟아지는 소원들의 공간 '루나 레인(Luna Rain)' 등으로 구성됐다.
아울러 각 공간에는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장치들이 숨어있다. 입구에서 구매할 수 있는 '위싱볼'을 이용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미디어 아트가 나타나 마치 달나라 주민이 된 듯한 체험도 가능하다. 위싱볼은 필수 아이템이다.
숲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작고 귀여운 돌멩이 모형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이는 바로 달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온 살아있는 돌, '루나락'이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작은 돌멩이 형태이지만, 바위에 정교하게 구현된 미디어 아트를 통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귀여운 산타 모자를 쓴 루나락을 만날 수 있는가 하면, 반짝이는 별빛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지기도 한다. 이처럼 계절과 다양한 테마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루나락의 모습은 방문객들에게 매번 새로운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숲길을 걷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따뜻한 음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어? 엄마가 밥을 챙겨주면 좋을 텐데 형편도 안 돼서 미안하네", "사랑하는 우리 딸아, 늘 행복하렴", "아들아, 네 꿈을 항상 응원할게"와 같은 진심 어린 메시지들은 건강을 기원하는 소원들이 모여 있는 '루나 피스'다.
이 애틋한 목소리들은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깊은 사랑과 걱정을 고스란히 전하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화려한 미디어 아트 속에 숨겨진 이러한 따뜻한 순간들은 루나폴을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일상의 진심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되게 한다.
여정의 마지막을 알리는 거대한 달이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간절히 비는 소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루나폴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그니처 포토 스팟이다. 정면에서 비추는 조명이 달 표면에 방문객들의 실루엣을 그려내는데,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정한 포즈부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점프샷,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까지 방문객들은 저마다의 소중한 추억을 이 특별한 달빛 아래 영원히 간직할 사진 속에 담아간다.
이제 루나폴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출구 쪽에 마련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루나폴에서 보낸 밤의 추억이 차분히 정리되는 시간이다.
루나폴은 단순한 야간 관광지를 넘어 제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스토리텔링과 첨단 기술의 결합이 만들어낸 이 신비로운 공간은 실감미디어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창이 되고 있다.]
22:20~22:52 렌트한 승용차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일주서로 1836 번지에 있는 루나폴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김정문화로41번길 10-6 번지에 있는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으로 이동 [32분, 20.2km]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전화번호 : 064-802-7000)
아고다 예약(예약번호 : ) 4월27일 스탠다드 더블 룸 1박 숙박요금 : ₩(세금 및 봉사료 포함) [월일 현대카드로 결제]
조식 이용 가능(사전 결제시 1인당 ₩ 13,000)
조식시간 : 7시~09시30분
주차장은 지하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주차 타워도 설치되어 있어 주차가 매우 편리]
22:52~23:40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 호 객실로 입실하여 짐 정리 후 샤워
23:40~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 호 객실에서 취침
제주도 관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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