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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주천(酒泉). 작고 조용했던 마을이 요즘 ‘다하누촌’으로 유명해지면서 한우를 파는 식당들이 생겨나고 주말이면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망산(望山)을 배경으로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주천은 그 옛날 망산 밑에 있는 바위샘에서 술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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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에는 200년
세월 수많은 풍파를 거치면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택이 있다. ‘영월 주천 고택(酒泉 古宅), 조견당(照見堂)’으로 더 잘 알려진
김종길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으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1리에 있다. 조선 1827년(순조 27)에 건립된 이 집은 건축 당시
120칸이나 되는 상당한 규모의 집이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훼손되어 안채만이 당시의 건축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를 결합한 사랑채 복원을 시작으로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주천강의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 강가까지 앞마당이
연결돼 있었으며,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택으로 건너올 만큼이었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주천강은 김종길 가옥이 이 자리에 있게 한 가장
큰 이유로, 강 주변의 넓은 농토를 기반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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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주천으로 가기 전, 지금은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고 있지만 늘 마음만은 고향을 지키고 있다는 김주태(1961년생, 현 MBC 인천
총국장) 선생을 만나 뵙기로 했으나 기자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전화상으로 궁금한 점을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김주태 선생은
주천에 터를 잡은 김낙배의 10대손. 선생의 중시조인 김낙배는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양반이었으나 숙종 때 당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강원도
주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뒤 황해도 의주와 부산 동래를 통해 서양과 무역을 시작하여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40칸 규모로 집을 지으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9년에 걸쳐 대규모의 120칸 저택으로 짓게 된다. 이는 부잣집에서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자 유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리되었다 한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연대본부로 사용됐는데, 대문 옆 밤나무에 인공기를 내다
건 모습을 본 미군 폭격기가 이곳을 공습함으로써 안채를 제외한 대부분 건물이 훼손되거나 소실되고 만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집안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구심점 삼아 서로서로 도와가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갔고, 이처럼 집주인과 마을 사람들 간 서로 위하던 마음이 세대를 넘어
은근하게 퍼지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고택은 집주인의 역사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역사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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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앞에 선다. 안사랑채와 연결된 바깥사랑채가 옛 영화를 말해주듯 ‘ㄱ’ 자 모양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안사랑채는 5칸, 바깥사랑채는 넓은
대청마루를 포함해 8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새롭게 복원을 마친 이 사랑채에 김주태 선생은 ‘효성재(曉星齋)’라는 당호를 붙였다.
효성재는 ‘샛별 같은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이 당호에 걸맞게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선생은 낡고 먼지 덮인 옛 시대의 고분 같은 고택이 새날을 준비하는 마당으로
쓰인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며, ‘교육과 정신’ 이 두 가지를 축으로 효성재에서 새 시대와 새 사람을 향해 나아갈 거라는 소신을
밝혔다.
낮은 기단석 위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안채로 들어서니 아녀자를 위한 배려인지 다른 고택들에 비해 넓은 앞마당이 시원스럽다. 안채는 ‘ㄱ’ 자형의 건물로 16칸이나
된다. 안채에 걸려 있는 ‘조견당(照見堂)’이라는 당호는 ‘세상의 진리가 어두워 보이지 않으니 밝게 비추어봐야 한다’라는 뜻으로,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청마루에 올라 가만히 대들보를 올려다본다. 대들보를 보면 집의 규모와 집을 지을 당시 그 집안의
재정적인 상태나 사회적인 신분, 권세 등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굽은 나무를 자연 그대로 살려 만든 거대한 크기의 대들보는 수령 800년이
넘은 소나무를 사용해 만들었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안채
조견당을 나와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 유난히 푸른 가을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지붕 선이 눈에 들어온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지붕 선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안채는 팔작지붕이다. 지붕 선과 선이 만나는 곳인 합각머리 부분에 독특한 문양을 새겼는데, 동쪽에는 해,
서쪽에는 달, 북쪽에는 별 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거리는 안채 동쪽으로 돌아가면 보이는 화방벽이다. 오방색, 즉
청·적·황·백·흑의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괴석 쌓기로 벽을 장식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벽이다. 이렇게 조견당 곳곳의 건축물에는 동양 사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음양오행의 원리가 구현되어 있다. 우리 조상은 이처럼 주거 공간에조차 자신들의 철학과 사상, 진리를 담고자 했으며, 집이
곧 자신이었다.
김주태 선생은 늘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야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고택이라고 생각한다. 고택은 ‘옛집’이다. 오래된 집이다. 오래된 집에는 묵은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고,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상과 사람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그 옛날 옛집에서 듣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는 우리 이야기의
원형이자 교육의 시작이었고, 이제는 문화 콘텐츠로 불리는 문화산업의 발화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택의 존재 이유는 고택 그 자체이기도
하려니와, 고택에 담겨 내려오는 정신과 철학, 이야기가 제일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또한, 선생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꿈꾸는 동안은 고통을 잊을 수
있습니다. 조견당 주인도 조견당이 있어 꿈꿀 수 있고, 언제나 꿈과 함께 살 수 있어 삶의 신산함을 잊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부모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왔으며,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오늘이 있습니다. 조견당의 부모님은, 조상은 한결같이 자식들이 꿈꾸고, 꿈을 펼치고, 꿈을 이루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세상의 온갖 것들을 알고, 맛보고, 느끼고, 함께한 시간 속에서 비로소 다시 꿈을 꿉니다. 조견당이 꿈이고 희망입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인 조견당이 있어 우리의 꿈과 희망은 무럭무럭 자랄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꿈의 자리에서 더 큰 꿈이 자라고 있기에 조견당은
흥분과 희열이 넘치는, 환희가 충만한 공간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할 수 있습니다. 조견당에 희망이 넘칩니다.”
-이진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