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hongbridgecom.wordpress.com/2019/12/24/%EC%99%9C-%EC%88%AB%EC%9E%90%EA%B0%80-%EC%95%88-%EB%A7%9E%EC%9D%84%EA%B9%8C-%EC%8B%A0%EC%95%BD%EC%9D%98-%EC%A1%B1%EB%B3%B4/
42대:14+14+14 숫자가 맞지않은이유
다윗을 두번 세고, 다윗의 이름이 드러나도록 14대로 일부러 맞추기까지 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구약에서 말씀하신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 의도로 마태복음은 쓰여졌고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자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마1: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마1:12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마1: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모든 세대가 열네 세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까지 열네 세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세대라.
마1:18 ¶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나매
마1:19 그때에 그녀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그녀를 공개적인 본보기로 삼기를 원치 아니하여 은밀히 그녀를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나
마1:20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 안에 수태된 그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1:21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니라.
마1:22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마1: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마1:24 이에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천사가 자기에게 지시한 대로 행하여 자기 아내를 취하고
마1:25 그녀가 그녀의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낳으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눅3:23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눅3:24 헬리는 맛닷의 아들이요, 맛닷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멜기의 아들이요, 멜기는 얀나의 아들이요, 얀나는 요셉의 아들이요,
눅3:25 요셉은 맛다디아의 아들이요, 맛다디아는 아모스의 아들이요, 아모스는 나훔의 아들이요, 나훔은 에슬리의 아들이요, 에슬리는 낙게의 아들이요,
눅3:26 낙게는 마앗의 아들이요, 마앗은 맛다디아의 아들이요, 맛다디아는 세메이의 아들이요, 세메이는 요셉의 아들이요, 요셉은 유다의 아들이요,
눅3:27 유다는 요안나의 아들이요, 요안나는 레사의 아들이요, 레사는 스룹바벨의 아들이요,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아들이요, 스알디엘은 네리의 아들이요,
눅3:28 네리는 멜기의 아들이요, 멜기는 앗디의 아들이요, 앗디는 고삼의 아들이요, 고삼은 엘모담의 아들이요, 엘모담은 엘의 아들이요,
눅3:29 엘은 요세의 아들이요, 요세는 엘리에셀의 아들이요, 엘리에셀은 요림의 아들이요, 요림은 맛닷의 아들이요, 맛닷은 레위의 아들이요,
눅3:30 레위는 시므온의 아들이요, 시므온은 유다의 아들이요, 유다는 요셉의 아들이요, 요셉은 요난의 아들이요, 요난은 엘리아김의 아들이요,
눅3:31 엘리아김은 멜레아의 아들이요, 멜레아는 메난의 아들이요, 메난은 맛다다의 아들이요, 맛다다는 나단의 아들이요,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요,
눅3:32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요, 이새는 오벳의 아들이요, 오벳은 보아스의 아들이요, 보아스는 살몬의 아들이요, 살몬은 나손의 아들이요,
눅3:33 나손은 아미나답의 아들이요, 아미나답은 람의 아들이요, 람은 헤스론의 아들이요, 헤스론은 베레스의 아들이요, 베레스는 유다의 아들이요,
눅3:34 유다는 야곱의 아들이요,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요, 데라는 나홀의 아들이요,
눅3:35 나홀은 스룩의 아들이요, 스룩은 르우의 아들이요, 르우는 벨렉의 아들이요, 벨렉은 에벨의 아들이요, 에벨은 살라의 아들이요,
눅3:36 살라는 게난의 아들이요, 게난은 아르박삿의 아들이요, 아르박삿은 셈의 아들이요, 셈은 노아의 아들이요, 노아는 라멕의 아들이요,
눅3:37 라멕은 므두셀라의 아들이요,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이요,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요, 야렛은 마할랄레엘의 아들이요, 마할랄레엘은 게난의 아들이요,
눅3:38 게난은 에노스의 아들이요,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요,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
☆나를 기준으로
부모위로
조부모위로
증조부모 위로
고조부모 위로
고고조부모 위로
고고고조부모 위로
고고고고조부모 위로
고고고고고조부모 위로
고고고고고고조부모 위로
고고고고고고조부모 위로
계속 쭈욱~~~~~~~~~~~ ~~~~~~~~~~~~~~~~
위로 끝까지 올라가면 최초의 아담이 나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지구상 모든인류는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왔으니
육신을 벗는순간 영혼은 하나님께 나아가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이라 함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http://thegreen.or.kr/sermon_m/55779
[20181225] 계보의 비밀 (마 1:1-17)
(마 1:1-17, 개정)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메리 크리스마스!
신약성경을 펴면 마태복음이 나오고, 마태복음의 첫 머리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작정하고 성경을 펼쳤다가도 덮는 얘가 많습니다. 족보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족보는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모릅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계보의 비밀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탄생시점입니다. 인류 역사는 주님 오시기 전과 주후로 나뉩니다. Before Christ(BC), Ano Domini(AD)로 나뉘는데, 올해가 주후 2018년입니다. 이것이 첫 성탄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2018년 전에 성탄하셨을까요? 그 이전이나 그 이후면 안 됩니까?
신약에는 예수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오는데,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42대손입니다. 본문은 42대 수를 크게 3토막으로 나누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예수님까지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왜 굳이 14씩 구획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완전수가 7입니다. 14는 완전수 7이 겹친 수입니다. 게다가 14가 3번 반복됩니다. 삼세판입니다. 무엇이든 삼세판을 해야 승복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성탄에까지 삼세판 원칙을 적용한 겁니다. 유사 이래 두 번 오기 힘든 길일에 주님의 성탄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연히 2018년 전에 탄생하신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장 완벽한 때에 탄생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마태는 굳이 14대를 세 번 반복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대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세어보면 총 77대가 나옵니다. 이것도 완전수 7이 횡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성탄이 하나님이 수립하신 구속사적 예정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2018년 전 오늘이야말로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날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계보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본문 2절 이하를 보면 모두 남자의 후손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마리아가 예수를 낳습니다. 주님만 여자의 후손입니다. 주님만 동정녀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 창세기 3장 15절,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한 것인데, 그것이 실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2절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그러면 주님은 왜 굳이 남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왔을까요?
주님은 원조의 유전질서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를 피할 도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성이 정해져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씨였기에 그 후손인 우리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죄씨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오직 한 분 주님만큼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기에 원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신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부계의 유전인자인 원죄와는 상관없이 주님은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지구로 우주여행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반드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소경이 어떻게 소경을 인도할 수 있습니까? 대속의 제물은 흠과 티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오셔야 하는 주님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의 후손으로 오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여성들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이례적입니다. 여성들이 족보에 오른 겁니다. 마리아까지 합하면 5명입니다. 마리아를 제외하면 이 여인들이 이방여인에다가 근친상간한 사람도 있습니다. 모범적이지 않은 이런 여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다말입니다. 3절 상반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와 다말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유다는 원래 아들이 셋이었습니다. 장남이 다말과 결혼해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자, 신명기 25장의 결혼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합니다. 첫째 엘이 죽자 둘째 오난을 형수에게 보내지만, 오난은 형의 대를 잇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오난은 벌 받아 죽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다말이 결정적인 제보를 받습니다. 유다가 친정 가까운 딤나에 온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과부복을 벗고 창녀가 입는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성문에 나가 유다를 기다립니다. 다말의 계략이 통했습니다. 다말이 유다와 관계를 맺고 쌍둥이를 얻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말을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인 유다 계보에 남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다말은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다말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라합입니다. 5절 상반절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그녀는 기생이었습니다. 술만 판 게 아니라 원어로 보면 몸도 파는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운 것은 히브리서를 보면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말과 마찬가지로 라합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룻도 이방인입니다. 이방 나라에 살던 나오미가 귀향을 결심했을 때 며느리 룻이 동행의 뜻을 밝힙니다. 룻기 1장 16절은 룻의 신앙고백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 백성의 반열에 서기 위해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미는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을 유혹하고, 남편 우리야까지도 죽게 한 여인입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 솔로몬이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다는 것과 다윗이 밧세바를 가장 총애했고, 나단이 밧세바의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녀가 남다른 믿음을 지닌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은 모두 모범적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희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치부를 지닌 사람도 하나님 구원사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계보는 믿음의 계보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에 누구나 오를 수 있습니다. 여성도 이방인도 창녀도 남편을 죽게 한 사람도 다 주님의 족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여성들의 이름은 오늘날 우리의 이름입니다.
성탄절을 통해 다시 한번 주님의 계보에서 우리의 이름을 확인하십시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계보에 자리매김하는 은혜를 확인합시다.
http://www.megaphone.or.kr/news/articleView.html?idxno=986
마1장 예수 그리스도 족보의 구속사적 경륜
the Redemptive Administration of Mt1 Jesus’ Genealogy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Mt 1:1 The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ASB : New Americn Standard Bible)
1. 서론 : 마1장 족보의 구속사적 의미 / Introduction : the Redemptive Historical Meaning of Mt1 Genealogy
[1] 구약이 (창조)로 시작되듯이 신약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됩니다. / Just as the Old Testament begins with (creation), the New Testament begins with Jesus' (genealogy).
이는 예수님의 (족보) 속에 천지 (창조)와 맞먹는 중요성이 담겨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창조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마1장 족보는 창3:15에 예언한 (여자)의 후손이 이 땅에 오시는 (통로)입니다.마1장 족보는 창3:15에 예언한 (여자)의 후손이 이 땅에 오시는 (통로)입니다. / Mt1 Genealogy is the (passageway) for the (woman)’s seed of Ge3:15 to come to this earth.
2. 마1장 족보와 눅3장 족보의 비교 / Comparison of the Genealogies in Mt1 and Lk3
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두)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1장 족보 - (42)대 (14 × 3) - (하향)식 족보 -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 (요셉) 가문의 족보
/ Mt1 Genealogy - (42) generations (14 × 3) - (descending) linear - from (Abraham) to (Jesus) - (Joseph)’s tribe
누가3장 족보 - (77)대 (7 × 11) - (상향)식 족보 -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까지 - (마리아) 가문의 족보
/ Lk3 Genealogy - (77) generations (7 × 11) - (ascending) linear - from (Jesus) to (God) - (Mary)’s tribe
3. 마1장 족보의 4가지 특징 / 4 characteristics of Mt1 Genealogy
세계 :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 족보 (헬)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 족보 (책)
[1]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기록하였습니다. / Jesus was recorded as a descendants of (Abraham) and (David).
(1)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합니다. / It testifies that Jesus is the (Messiah) who was promised through Abraham and David.
(2) 구약에서 (멜기세덱)을 만난 사람은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 뿐입니다. / Only Abraham and David met (Melchizedek) in the old testament.
이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변화)의 축복을 주실 것을 보여줍니다.
[2] (5) 명의 (여자)가 기록되었습니다. (5) 명의 (여자)가 기록되었습니다. / (5) (female) names were recorded.
통상적으로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것에 비해 마1장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➊(다말)Tamar ➋(라합)Rahab ➌(룻)Ruth ➍(우리야의 아내) wife of Uriah ➎(마리아)Mary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모두 (죄인)이었지만 구속사를 이룩하는 큰 (믿음)을 가진 여인들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으로부터 (42)대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 Jesus came in (42) generations from Abraham.
이것은 (광야)에서 42번 (진)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2)번 진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42)대 만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4] 많은 댓수가 (생략)되었습니다. / Many generations have been (omitted).
마1장 족보의 연대는 총 (2162)년인데 오직 (42)대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많은 댓수가 (생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기간의 사람들 중에 그 이름이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도 있고 (생략)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1장 족보에는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출처 https://crosslamb.tistory.com/m/2048
1솔로몬 2르호보암 3아비야 4아사 5여호사밧 6요람 7웃시야
8요담 9아하스 10히스기야 11므낫세 12아몬 13요시야 14여고냐
(마 1:12, 개역)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개역)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개역)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개역)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개역)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7, 개역)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1여고냐 2스알디엘 3스룹바벨 4아비훗 5엘리아김 6아소르 7사독
8아킴 9엘리웃 10엘르아살 11맛단 12야곱 13요셉 14예수
소위 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구원의 족보가 됩니다.
이 족보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지옥이요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족보와의 차이점은 마태복음은 바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기에 차이가 납니다.
즉 누가복음의 족보는 처음과 나중이라는 이 간극 사이에 속함으로써
(어떤 신학자들은 마태는 요셉계보 누가는 마리아 계보를 따른다고 하지만
둘다 접붙임 당하는 족보일 뿐 즉 누구를 따라 내려오는 육의 계보는 아니다는 것임)
이방인 조차도 예수님의 족보 속에 곧 처음과 나중 되시는 그 간극 속에서 태어나는
죽었더라 족보인 아벨의 족보를
살았더라 족보인 가인의 족보인 육의 족보와 대조를 이룹니다.
성령으로 인한(후손이 조상의 주가 되듯이) 족보는
(눅 3:22, 새번역)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또는 '너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자다'』
(눅 3:23, 새번역)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요,』
(눅 3:24, 새번역) 『그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맛닷, 레위, 멜기, 얀나, 요셉,』
(눅 3:25, 새번역) 『맛다디아, 아모스, 나훔, 에슬리, 낙개,』
(행 2:17, 공동)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요엘 3:1-5.』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공동)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갈 4:29, 공동)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난 자들의 족보이다는 거죠
거꾸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로꾸거 거꾸로 족보로
위에서 아래에서가 아닌 (육의 족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감으로써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아니요 족보)
처음과 나중으로써의 예수님을 언급하는 ~ 대신 족보입니다. 가인의 족보와 상대적으로,
다섯 여자 에게서 족보처럼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곧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족보에서는
의도적으로 14대 14대 14대를 의도적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맞추면서도 동시에 의도적으로 14대를 안 맞추고
14대 15대 14대로 맞추고 있습니다.
(마 1:17, 개역)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라고 다윗을 집어넣고 14대로 계산하면 안 맞더라 말이죠
15대가 된다 말이죠 위에서 나열한거 하나씩 밀리지요
1솔로몬 2르호보암 3아비야 4아사 5여호사밧 6요람 7웃시야
8요담 9아하스 10히스기야 11므낫세 12아몬 13요시야 14여고냐
1번을 다윗으로 하면 하나씩 밀리게 된다 말이죠 15대가 됩니다.
1다윗 2솔로몬 3르호보암 4아비야 5아사 6여호사밧 7요람 8웃시야
9요담 10아하스 11히스기야 12므낫세 13아몬 14요시야 15여고냐
그런데 바벨론 이거 전을 기준으로 하면서 다윗을 넣죠 다윗이 중복 됩니다.
또 바벨론 이거 후를 기준으로 해서 여고냐도 중복이 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14대 14대 13대 라고 하는데 (다윗의 중복은 넣지만 여고냐의 중복은 뺌)
(그러나 17절로 인해 거꾸로 다시 재해석 하면 바벨론 포로 기준이기에
또 아버지와 아들 이라는 관계개념이기에 여고냐를 문자 그대로 볼게 아니라
중복으로 집어넣음으로써 14대가 됨으로써 일곱이 되는 겁니다.
일곱 곧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으로써의 일곱 말이죠 잃어버림과 되찾는 의(義)의 개념입니다.)
바벨론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14 15 14인데
이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다윗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뺀다는 것은
바로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무화과 나무에게 과실을 내어라 라고 했고
내지 못함으로써 저주 받아 말라버린 것을
성경 스스로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듯이 말이죠
성경 스스로가 오류다 봐라 오류 맞제 라고 스스로 언급하면서
이 비밀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라는 식이다 말이죠
못 풀면 엉터리이다는 거죠
마치 다윗이 자기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듯이 이거 풀어보라고 하시는 것처럼
이 오류, 이 모순, 이 비밀 풀어보라는 식으로 말이죠
결국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에서는 엉터리가 되고
육의 소욕에서는 성령의 소욕이 엉터리가 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의 안목으로 보는 자는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족보인 거죠
아니 족보 땜에 넘어지는자 봤나요?
말도 안되잖아요
아 그런데 유대인에게 초반부터 처음을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 족보의 비밀 못 풀면 지옥이라고
(마 18: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것도 모든 인간의 대표성
그것도 자칭 하나님의 백성
자칭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자들이
그래 그래 아브라함 자손 맞는지 보자 라고 이 족보의 비밀을 풀어보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다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마치 다윗 시대 때에 다들 사울왕을 쫏았으면서도
다윗의 자손을 통해 구원 받는 다는 그런 교리 그런 성경 지식하나를 붙잡으면 구원된다는 식으로
다윗 자손을,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다윗 자손인 예수님에게서부터 탁 걸려넘어지는게 아니라
이미 다윗 때부터 탁 걸려넘어지더라 라는 겁니다.
그럼 안 넘어질려면 우짜면 되냐?
다윗이 누구에게 주여 라고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을 쫏는다고 하면서
다윗이 쫏은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저들의 다윗관 다윗에 대한 해석관이
이미 이 15대에서 걸려 넘어지더라 라는 거죠
결국 유대인들에게서의 계시관과 예수님의 다윗의 자손 됨의 계시관이 틀리게 되는 거죠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부활족보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주님의 의가 옳았다고 외치는 족보)
(막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죽은자의 족보가 아닌 산자의 족보)
(눅 20:1, 개역)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눅 20:2, 개역)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눅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눅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눅 20:7, 개역)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눅 20: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20:13, 개역)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눅 20:14, 개역)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눅 20:15, 개역)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눅 20:16, 개역)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눅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 20:22, 개역)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눅 20:23, 개역)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눅 20:24, 개역)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눅 20:25, 개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눅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눅 20:27, 개역)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눅 20:28, 개역)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눅 20:29, 개역)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0, 개역)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눅 20:31, 개역)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2, 개역)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눅 20:33, 개역)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4,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눅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개역)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눅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왜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는지
아니 조상이 다윗인데 할배인 다윗이 증손자와 같은 밑의 사람에게
어떻게 주여 라고 하느냐 에 대한 이유를 대 보라는 겁니다. 말해 보라는 거죠.
주여는 높은 사람에게 하지 아랫사람에게 하지 않는다 말이죠
유구무언입니다.
그런데 유구무언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소위 구원의 족보라고 해놓고서는
다윗을 빼 버리면 어떻게 구원이 되냐 말이죠
족보에 차질이 아니 구원에 차질이 생긴다 말이죠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십니다.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막 11:30,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눅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것도 못 푸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풀리겠냐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은 더더욱 꼬이는 겁니다.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매이는 겁니다.
율법인 말씀을 지킬수록 거룩을 실천할수록 더더욱 살인자임이 밝혀지더라 말이죠.
자 그러니 아무리 육의 족보로 계산기를 뚜드려도 답을 못하고 있으니
이 영의 족보의 의미를 아예 모른다는 셈이 되는 겁니다.
누가? 유대인이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말이죠
목사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말이죠
그래놓고 구원을 외친다면 거짓선지자의 대충 대충 평강이다 라는 말과 뭐와 다르냐 말이죠
그렇게 되면 엉터리 구원으로 장사를 한 것이 들통나는
강도의 소굴이였다는 거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냐 말이죠
아니 그럼 과연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거 맞느냐 라고
대답해 보라고
이들의 다윗의 자손이라는 구원교리, 메시아 사상이 다 깨어지는 겁니다.
마치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나사로 오빠의 죽음을 일부러 늦추어서 죽여놓고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이들의 기존의 헌술 헌부대인 부활교리를 다 깨어버리듯이
울리는 꽹과리의 와장창 시끄러운 소음과 같은 부활교리가 실상이신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심을 못 믿음으로써 깨어짐을 지적 당하는 그 사랑을 펼치시는 것과 같다 말이죠
부활이란
앞에서 도저히 믿을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시공간이라는 역사 곧 행함에서는 안되는 겁니다.
거꾸로 뒤에서 온다 말이죠. 의란 미래완료에서 오는 겁니다. 이것을 믿음 곧 행함의 반대이다 말이죠
그래서 자손일수 없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오니까 앞의 것이 다 깨어짐으로써
구원이 되는
이 성령의 부으심의 원리
다른 말로 의 義, 의로움, 거룩의 의미를
이 족보를 통해서도 알려주시는 겁니다.
왜?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나의 구원자요 라고 했냐 말이죠
육의 족보에 속한 자가 아무리 교회 다녀도
이 의미를 모른다면 영의 족보를 무시한 셈이다 말이죠
마치 맏형수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처럼 말이죠
동시에 영의 족보인 예수님의 족보는
저들이 들고 주장하는 이 다윗을 빼버리고 무시해 버림으로써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교리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그 교리 그 교리에 플러스 실천 곧 믿는다는 그 실천이
와장창 깨어지는 겁니다.
그 깨뜨리는 실체는 사랑 밖에 없다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를 깨뜨릴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듯이
성령의 일은 곧 하늘에서 온다는 것은
로꾸거 거꾸로이다는 겁니다.
이 영의 의미의 가치성을 더더욱 증폭시켜 또렷하고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다윗을 들고 주장해도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고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만을 외칠 뿐이다는 거죠
다윗의 자손이라는 교리만을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언제든지 이런 인간의 믿음은 이 다윗의 자손이 나를 구원 안 시켜주면 언제든지 죽여버리겠다는
이렇게 믿어줬는데도 불구하고 날 안 구원해줘? 두고보자 라는 식이
그대로 유대인에게서
예수님과의 충돌을 통해서 나타나더라 라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볼때에 가장 존경스러운 멘토들과 같은 그 인간 중에
가장 말씀실천과 거룩실천에 대가였던 자들이
한순간에 예수님의 족보와 부딧힘으로써 악마로 돌변함을 보게 되는 겁니다.
우리과 과연 롤모델로 삼았던 유대인 맞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버리고 그럼 누구를 집어 넣습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야 장군입니다. 그것도 밧세바 라는 5명 여자 인
에게서 라고 밧세바 라고 하지 않고
우리야 장군의 아내 에게서 라고 한다 말이죠
명백하고 또렷하게 다윗을 빼버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특이점인데
자 그럼 다윗은 다윗 자신의 노선에서 오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본 겁니까?
아니면 우리야의 죽음 노선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본 겁니까?
예수님이 어느 노선으로 오실까요?
성령의 일 성령으로 인해서 난 사건 오늘처럼 족보는
반드시 다윗이 무시했던 자를 통해서 오는 겁니다.
하늘이라고 해서 땅의 반대인 우리가 쳐다볼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
눈에 안보이는 하늘의 일 성령의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눈에는 오로지 선악을 쫏도록 되어 있는 눈에
그런 눈에 절대로 보이지 않는 성령의 노선을 무시함으로써
그 성령의 노선에서 오시는 예수님의 족보로써
다섯 여자 그것도 반드시 무시했다 말이죠
안보인다고 진짜로 없다는게 아니라
눈에 보여도 귀히 여기지 않고 완전 개무시해서
아예 안 보이는 투명인간 취급 무로 취급한
비존재였다는 거죠
비존재로써의 족보가 있다 라고 우기는 족보를 다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유대인은 비존재인가? 아니면 떳떳하게 나 분명 존재 합니다 라고 존재로써 우기는가?
예배 때에 어머니께 강조했습니다만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그냥 단독적으로 뚝 떨어져 따로국밥처럼 있는게 아니라
반드시 상대적인 거짓교회 속에서 성령의 일곱교회를 언급하시니까
늘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처럼 말이죠
요나의 표적이 그냥 단독적으로 뚝 언급되는게 아니라
반드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그런 요청의 쇄도 속에서 요나의 표적이 언급이 되니까
반드시 맞물리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의 족보는
특히 다윗을 의도적으로 집어넣고 다시 의도적으로 빼버리는 족보는
반드시 기존의 유대인들의 다윗의 자손 개념을 그 헌술 헌부대 개념을
반드시 깨뜨리는 식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사랑이 아닌 거죠
여전히 유대인들이 잔뜩 끌어모은 힘된다 싶어 구원된다 싶어
잔뜩 끌어모은 성경지식과 교리실천인 울리는 꽹과리를 깨뜨릴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우리가 잔뜩 끌어모으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꽝하고 부딧히고 충돌해서 꽈당 발가벗겨져야 한다 말이죠
자 그렇게 처음 14대는 족보를 이렇게 형성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보여줍니다.
다섯명의 여인 중에 세명이 들어갑니다.
즉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너희들의 처음자리는 이랬다 라는 거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은 것처럼 죄사함 받은 것처럼
주님의 긍휼로써 즉 불쌍히 여겨주심으로써 출발, 출 ~~~ 발 ~~~~ (박명수)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처음사랑을 개무시하고
아 글쎄 울리는 꽹과리를 잔뜩 모으지 않습니까 그려
즉 사울왕처럼 이스라엘 왕 답게 행동하겠다는 심뽀로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을 우기더라 말이죠
그거? 처음 14대 족보 속에 세 명의 여인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외치면서 형성된
족보와 맞을까요? 안 맞을까요? 안 맞죠
그래서 투입시키는 것이 바로 선지자 곧 성령의 일처럼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이란 내가 왕이 아니요 그 증거가 이겁니다 라고
마치 시아버지 유다처럼 세가지 물증을 도리어 잡히는 것이고
도리어
다말이 나 보다 옳았습니다 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
진짜 이스라엘 왕의 기능이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존재가 될려고 하더라 말이죠 이스라엘 왕이라는 존재
존재는 마치 남을 7번 반드시 용서하겠다는 심뽀이다 말이죠
다른 나라 왕은 그게 옳은지 몰라도
(이건 율법 많이 많이 지켜서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식이고)
이스라엘의 기능은 그 반대입니다.
(반드시 인애와 자비라는 주의 의를 곧 긍휼을 입혀짐 당하는
처음사랑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이스라엘 기능이다 말이죠
의를 실천하는게 아니라 의가 율법 외에 한 분 저분이다 라고 외치며 찬양하는 자 의 기능
더더욱 왕은 이스라엘 왕은 더더욱 그러하다 말이죠 곧 탕자로써
마치 예수님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는 이 용서를 외치는 자가 이스라엘 왕
곧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다 말이죠, 맏아들이 아니라
그래서 반드시 탕자족보는 맏아들 족보와 맞물려서 증거되는 한 세트 입니다. 여기에 맏아들 족보에
유대인 곧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과 충돌되는 식으로 펼쳐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족보로 출발하는 이유 입니다.)
다른 나라와 정반대 이다 말이죠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 다윗의 존재를 빼버리고
그런 존재를 믿는 다윗의 자손 이라는 교리를 따르는 유대인과 대충돌로써
아예 대놓고 전쟁을 벌리시러 왔다고 하시고
다윗 존재를 빼버린 그 빈자리에 다윗의 비존재성 곧 기능이지요
다윗이 외친 주여 라는 그 주
예수님 으로부터 다시 이 다윗을 해석하니까
15대가 되는 겁니다.
(왜 14대 라는 14라는 숫자가 언급되느냐?
어떤 해석을 보면 7의 배가 된다고 하지만
정작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개념입니다. 기업+장자(하늘에 속한 맏물)
이 관계를 하나로 쳐서 하나됨으로 치면(물론 유대인은 이 하나됨을 연결 연합으로 보고 있지만
정작 성령으로가 아닌 육으로 하나됨이라고 혈통을 따지는 반면에 조건처럼
여기서 하나됨이란 뚝뚝 끊어진 단절로서의 하나됨 곧 성령의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3명이 하나로 묶여지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가 개입하는 겁니다. 거룩개입
너거들이 더럽다고 하는 것이 너거들 깨끗하다는 것 보다 천배 만배 더 옳았다는 그 거룩
단절로서의 거룩 말이죠.
그러니 일곱이라는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이 되는 거죠 계시록의 일곱 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15가 되면 3을 하나로 묶게 된다 말이죠
껄끄러운 걸림돌이 들어오는
마치 뜨인돌이 하나 들어온 셈입니다.
이 굴러들어온 돌에 의해서 다윗족보가 재편성 됩니다. 우리야 족보로
머릿돌이 달라요 달라
다윗과 우리야(우리야의 아내)와 솔로몬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 이라는 하나됨을 우리는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둘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셋 두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 족보가 옳았습니다 라는 찬양을 과연 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복음이라고 외칠수 있냐 말이죠
인간은 못하지만 왜? 선악에 탁 걸려 넘어지거든요
복음은 성령은 하십니다. 백배 천배 만배나 더 깨끗하고 거룩하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멀다 라고 더럽다 라고 저주하고 무시하는 속성을 반드시 맞물리도록 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바벨론이 기준이 되어서
잡혀가기 전까지
잃어버림을 당하는 의가 덮쳐지는 겁니다.
왜? 의의 족보이니까 말이죠
인간이 외치는 특히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외치는 그 인간의 의, 인간의 거룩은,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개념이 아닌
반대로 울리는 꽹과리 쌓는 거룩이지요 가짜 거룩
그렇게 다윗이 잃어버림을 당하는 겁니다. 영구 없다 다윗없다처럼
그렇게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갑니다.
큰성 바벨론 입속에 요나가 큰물로기 뱃속에 집어삼키움 당하듯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14대가 바로 바벨론 귀환 후 14대가 됩니다.
이것이 의의 족보가 되는 거죠
의가 덮쳐진 거룩한 족보
그러니 사울왕이 대세라꼬 사울왕(울리는 꽹과리)을 쫏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쫏아낼때에
정작 자신들의 운명이 다윗이지 사울왕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누워서 침뱉기 하듯이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다가
심지어 거짓선지자의 말을 듣고 쫄딱 망했다가
그렇게 다 죽여놓고 다시 살림으로써
여전히 이스라엘의 기능을 예수님은 또렷히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여전히 포기 하지 않으심에 있어서
또 역시나 이 족보를 통해서
유대인과 충돌을 하시는 겁니다.
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포기 이미 벌써 포기해서 완전히 산당수준의 우상숭배로 빠졌지만
오늘날도 교회들이 우상숭배 밖에 못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주님 손해 보시는 것 전혀 없으신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완수하시고
이방인에게 왜 넘어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구체적 보편적 진리인 거죠
너거들 이래도 할 말 없제 라고 말이죠
왜? 본인들이 완악한 수건을 안 벗겠다고 하니까 말이죠
그 사라질 영광에 사로잡혀서 그림자 영광에 빠져서
실상을 거부하니 말이죠
찰리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서 정작 진짜 찰리채플린은 떨어지고
가짜가 당선 되듯이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 가짜 예수 가짜 교회가 사람들의 입맛에 딱 들어맞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주님은 겁도 없이 이 족보를 들이대면서
출~~~~~~ 발 ~~~~~ 하시는 겁니다.
다 깨어부수시면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거꾸로 우리는 가나안 땅으로 여겨서
이스라엘 기능
곧 가나안 정복 하시듯이
이 우리의 거인 속성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
울리는 꽹과리를 잔뜩 모으는 (부활교리 구원교리 다윗의 자손교리 잔뜩 모으고 실천하는)
이런 우리의 원수된 속성을
반드시 개같은 이방인 며느리 다말처럼 반드시 세가지 물증을 잡겠다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우시면서 침략하시는 겁니다.
여리고성 함락과 같죠 언약궤를 어깨에 매고 회개하듯이 우는 자가 복 되다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요나의 표적 으로만 무너뜨리는 겁니다. 이게 구원이죠.
거기에 상대적인 우리는
이런 유대인들처럼 고상하고 오우~~ 판타스틱 엘레강스 라고
온갖 점잖고 거룩하고 뷰티플 아름답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척 하는
시아버지 유다처럼 약속의 가문
선택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입술로는 존경하나 찬양하나
마음으로는 멀고도 먼
처음사랑과 너무 너무 멀어서
온갖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치는 종교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자의 자리에서 법을 쥐 듯이 하고 있지만 (다윗이 율법의 4배나 갚으라 하듯이)
그 놈이 너다 이 세가지 더러운 물건, 도장 도장끈, 지팡이의 주인이 너다 라고 알려주는 자가 바로
성령 바로 하늘에서 온 선지자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맞물리도록 되어 있는 족보이기에
특히 모든(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이 원하고 기다리고 고대했던
메시아 족보인 육의 족보(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이 원하는 족보)와 맞물려서 나타나는 족보인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떳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마태복음 1장 족보 뒤의 부분들이 모조리 엉터리 족보인 육의 족보 가인의 족보 살았더라 족보에서 나오는 속성들이
예수님과의 충돌하는 내용들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의 족보 속에 집어넣고자
다윗을 뺏다가 다시 집어넣는
이 십자가의 간극이라는 의가 덮쳐지지 않는 이상
아무리 다윗이라도 자신의 의로
성화론자들 주장처럼 그런 인간의 의로는 천국에 가기는커녕
도리어 쳐들어오는 예수님의 족보로 인해
그 가 나보다 옳았다 라는 뭐가 옳은가? 그의 의로움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나타내시는 것이 족보의 비밀입니다.
그릇을 깨뜨리심으로써 보석을 나타내시는 것이
바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푸는
천국의 열쇠 라는 교회의 기능인
찬양입니다.
이 주님의 인애와 자비인 주의 의로우심을 찬양하는 족보인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은 1장 6절과 12절부터 17절을 다룬 셈이고 특히 17절 말이죠
다음 시간은 거꾸로 1장 7절에서 11절까지의 이스라엘 왕의 기능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나 아니요 예수님만 옳았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crosslam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