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 여행1 - 배로 미야모도 무사시의 결투장 간류지마를 지나 모지코에 가다!
8월 12일 시모노세키 下関 에서 청일전쟁 기념관 과 1185년에 미나모토씨와 교토에서 물러난
타이라씨가 최후의 일전을 겨룬 겐페이해전(源平海戰) 에서 8살 어린 나이로 외할머니
품에 안겨 바다로 투신한 안토쿠왕(천황) 을 위해 세운 아카마진구 (赤間神宮)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해변 으로 내려와 간몬해협 関門海峡 에 걸린 간몬대교 関門大橋 (관문교) 를
보고 걸어서 해변공원에 들러 "몬항로개수사업비" 를 보고는 자매도시 광장 을 지나
가라토 어시장 (唐戶市場) 에 들러서는 떨이로 파는 스시와 오도리, 새우 튀김 을 삽니다.
밖으로 나오니 많은 일본인들이 해안가에 앉아 생선회를 먹는지라 우리도 앉아 점심을 떼우고는
일어나서 해안을 따라 5분쯤 걸으니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상륙 기념비가 보이는데....
조선은 500년간 쇄국정책으로 일관했으니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고 상인도 마찬가지라?
프란시스코는 인도 고아에서 말레이지아 말래카로 건너와 일본인촌에 거주하던 무사 출신의 상인 안지로
를 만나 세례를 주고는 그의 안내로 1549년 8월 15일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해 안지로의 친척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고는, 교토로 가기 위해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상인들은
베트남의 호이안, 태국의 아유타야등 여러나라에 저팬타운을 세우고 무역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몇발자국을 걸으니 건너편에는 바로 관문 (関門) 연락선 항구인 가라토 (唐戶)
선착장인데.... 여기 선착장이 2곳으로 나뉘어 있으니, 20분마다 1대씩 간격으로
불과 7~ 8분여 만에 간몬해협 을 건너 북규슈 모지코 (門司港) 까지 가는 배들 입니다.
그외도 1시간에 1대씩 간류지마 ( 嚴流島 엄류도 ) 행선지가 적혀 있는 것을 보니..... 그럼
일본에서 劍聖(검성) 이라고 불리는 그 미야모도 무사시 가 진검 승부 를 펼친 섬인가요?
미야모도 무사시 宮本武藏 는 일본 제일의 검객으로 오카야마현 미야모토촌에서
무사 의 자식 으로 태어나 신멘 다케조란 이름을 얻습니다. 13살
되던해 성년식 을 올리고는 아리마 기베에와 진검 대련에서 상대를 베어 죽인
것을 시작으로 29세 까지 60회의 진검 승부 에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고 하네요?
17세 때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오카야마의 영주 우키다 히데이에를 따라 서군
에 참전한후 선승 다쿠앙 밑에서 3년을 수행한 후에는 대련의 길에 나섭니다.
교토 요시오카 도장 을 찾아가서는 요시오카 세이쥬로등 수련생 70명 이 집단으로 달려
드는 것을 산으로 피하면서 차례로 물리치며 두자루 칼을 쓰는 이토류 를 고안하게 됩니다.
보장원에서 창술 을 익히고 사슬낫을 쓰는 시시도 바이겐 을 패배시킨후 시모노세키의
간류지마 섬 에서 간류의 대가 사사키 고지로 를 죽여 천하에 명성 을 얻습니다.
1612년 4월의 봄날에 시모노세키 남쪽 500m 쯤 떨어진 간류지마 ( 嚴流島 ) 섬
에서 사사키 고지로(佐タ木小次郞) 는 손에는 대도(大刀) 를 들고 대련을 기다렸습니다!
사사키 고지로 는 북규슈 고쿠라(小倉)성 의 번주인 호소가와 가(家)의 검법 사범 으로
도다 세이겐 에게서 검술을 배워 장검 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들이 사용하기 꺼려하는 장검을 주특기로 삼았는데, 날 길이만 3척(약 90 ~ 100cm)
에 달해...... 일명 빨래 너는 장대 를 뜻하는 모노호시자오(物干棹) 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사사키 고지로 는 전국을 떠돌며 무술 수행 을 하는 중에 다리 밑에서 날아가는
제비의 날개 를 베며 비검(飛劍) 을 연마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결투를 먼저 신청한 상대가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은
것이라..... 그는 초조해지면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차츰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에야 바다 위로 한 척의 배 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오더니만
한 명의 검객이 뭍으로 뛰어내리는 데, 검객의 손에는 진검 이 아니라....
목검 이 들려 있고 허리에는 소도 를 꽂았으니...... 사사키 도 분연히
일어서 장검 을 뽑으면서 평소 버릇대로 칼집을 휙 던집니다.
이때 상대 검객인 미야모도 무사시 가 온 바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으며
일갈하는데, “사사키 고지로, 그대는 졌노라! 승자라면 어찌 칼집을
버리겠는가.” 상대의 야유 에 얼굴이 붉어진 사사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출수 하지만 모노호시자오 는 상대의 머리띠만을 간신히 벱니다.
이와 동시에 상대의 목검 은 정확히 사사키의 머리에 떨어지니 휘청거리는 사사키는
안간힘을 다해 칼을 휘두르니...... 이번엔 상대의 무릎 옷자락 을 베었습니다.
상대 검객은 다시 한번 목검 을 날리고, 이는 사사키의 늑골 을 강타하니.... 바로 절명한
사사키 를 뒤로 하고 미야모도 무사시 는 배에 올라 타서는 바다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이 무인도의 결투 는 18세기 중엽에 씌인 이천기 (二天記) 에 수록된 내용인 데....
모노호시자오 는 비젠(備前) 의 명공 오사후네 나가미쓰 가 만든 명검 이라!
어지간한 검객은 사사키가 내리치는 장검의 간격 안으로 들어갈 수 조차 없었
으니 무사시는 모노호시자오 보다 1척 더 긴 목검 으로 장검을 극복 했던 것이지요?
무사시 가 약속된 시간 보다 두 시간 늦게 나타나 상대가 초조해지도록 한 것은 비겁
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목숨을 건 승부 에서는 이것도 하나의 병법(兵法) 이니....
배에서 내려 뭍으로 걸어갈 때 목검 을 바닷물에 담그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목검을 단단하고 무겁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그의 전술 을 사사키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으니, 무사시의 야유 에 평상심
을 잃은 나머지 상대방 무기의 간격을 정확히 계산 하지 못하고.....
성급한 일격 을 던졌으나...... 사사키 가 생각했던 것 보다 무사시 의
목검은 길었고, 그것이 승부를 결정 지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미야모도 무사시 는 검법을 수련 하면서 스스로 익힌 "독행도" 에서 세상의 도리 를
배반하지 않으며 육체적인 낙을 삼가하고 일생동안 욕심부리지 않는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선악에 대해 남을 원망하지 않으며 매사에 후회하지 않고 이별에
슬퍼하지 않으며 자타가 서로 원한을 살만한 구실을 만들지 않는다.
연모할 생각 은 갖지 않으며 매사를 좋거나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고 오래된 도구 를
지니지 않으며 도(道) 에 관한 것이라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노후를 위해 재물을 축적하지 않으며 신불(神佛) 은 존경 하나 그렇다고 신불에게
의지하지는 않으며 마음은 항상 "병법" 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적었던 것이지요!
구마모토번 에서“간닌분 고리키마이 (손님대우)”를 받으며 일본의 손자병법 이라고
불리우는 “오륜서” 를 저술한 전략성 이 무사시의 무패행진의 무기 였던 셈일러나?
우리 부부가 400엔씩을 내고 모지(門司 문사) 로 가는 배에 오르자 나는 듯 간몬해협
을 질주하는데...... 멀리 왼쪽으로는 혼슈와 규슈 를 잇는 간몬대교 가
보이고 그러고는 북규슈 모지 의 그 고풍스러운 건물들 이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배는 시모노세키항을 출발한지 불과 7~8분 여만에.... 모지코 門司港(문사항) 에 도착
하는지라 배에서 내려서 우선 선착장 에 걸린 시내지도 를 보면서 모지코 門司港
(문사항) 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곳들을 손을 짚어가며...... 하나 하나 점검을 해 봅니다.
그러고는 선착장 을 떠나 해변 을 따라 걷는데 옛날 무역항 으로 고풍스러운
건물 에다가 현대적인 건물이 서로 조화 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곳 북규슈 고쿠라 동쪽의 모지항 은 모지코 레트로 門司港 レトロ 라고
해서 칸몬해협 에 면하여 일찍이 1889년에 개항 하였다고 합니다.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에 지어진 서양 건축물 이 모여 있는 복고지구로
과거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던 항구 이며..... 2차 세계대전시 원폭
투하 때는 기상 상태로 비켜 갔으니 운이 억세게 좋았던 도시 이기도 합니다!
8월 6일 사이판 인근 티니안 에서 0시 30분에 이륙한 원자폭탄 을 실은 에놀라 게이호 는
먼저 출발하여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모지코) 로 향한 3대의 비행기 로 부터....
그러니까 7시간을 비행해 일본 해당 도시 상공에 이른 3대의 비행기들의 보고를 받습니다.
당일 아침의 기상 상태 를 보고해온 결과 날씨가 가장 좋은 히로시마 에 원폭을 투하
했던 것이니.... 이때 이후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사람 20만명 가까이 죽었는데...
그중에 3만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원폭 투하는 남의 일이 아닌 것 이지요?
사흘후 고쿠라로 출격한 B29 폭격기 는 기상상태 와 연료 문제로 나가사키 에 원폭이 투하되니
여기 고쿠라(모지코) 는 끝내 무사했던 것이라! 고쿠라(모지코) 다음 후보지는 교토와 니가타
요코하마 이며 도쿄 는 일왕(천황) 이 죽으면 일본인들이 결사항전할 것이 염려되어 제외합니다.
군수 산업의 요충지 이자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 으로 제1순위 였던 교토 가 제외된 것은 대전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예상 되던차에, 교토가 피격되면 일본 국민들이 소련편에 붙을까
염려된다는, 신혼여행으로 교토를 여행했던 미군 참모부 장성의 의견이 채택 되었기 때문이라나요?
3만명 피해자 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국인도 참전했었나? 왜 한국인들이 그것도 수만명
이나 일본땅에서 원자폭탄에 맞아죽었나? 하고 의아한 사람 도 있겠으나.... 스스로
"천황폐하의 황군(?)" 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나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한 자 가 많았습니다?
초대 참모총장 부터 21대 까지 이응준,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장도영 등 18명 (중임3명)
전원에다가, 국방부장관 유재흥등과 대장 박정희 등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21대 까지 참모총장 전원 이 일본군 출신 이고 광복군 출신은 전무한 것이지요?
그외 본인의 의사 와는 반대로 학도병 이나 군무원, 정신대 및 노동자 로 끌려갔던 사람들도
부지기수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 희생자 외에도 태국과 말레이, 인네 등지에서
군사재판 에 회부되어 전범으로 사형등 처벌 받은 한국인도 백수십명 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 함대는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 화와이를 기습 하면서 태평양전쟁 이 시작
되는데 한국인들은 미국편이 아닌 일본편에서 싸웠으니... 중경의 한국 광복군은 일본군과는
재정이 열악해 단 한차례의 전투도 벌이지 못했고, 장준하등이 미군 OSS의 훈련 을 받았으나
조선에는 침투해 보지도 못하고 전쟁이 끝났으니.... 미군편에 서서 전투한 실적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한국인은 "천황폐하의 황군(?)" 이 되기위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자원
입대한자도 많았고.... 학도병과 징병으로 강제로 끌려갔다지만 무려 1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자의건 타의건 일본군이 되어 미군 및 영국군, 중국군과과 전투를 했습니다.
10만명의 한국 출신 일본군 외에도 한국인은 군량으로 쌀과 면화를 공출했고 탄광이나 공장에서
전쟁물자 를 만들어 군수품을 지원하고.... 또 노동자들은 태평양에서 삽과 괭이로 활주로를
만드니 한국인이 만든 활주로 에서 이륙한 일본 해군 비행기는 미국 군함을 침몰 시켰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2차대전시 한국인들은 참가하지 않았거나 미군편에서 참전했다고 알고
계시지만 실은 일본군편에 참전했으니, 이런 분위기에 문인들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는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를 노래한 노천명 의 황군을 찬송하는 詩(시) “軍神頌(군신송)” 입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 남방 거친 파도 위에 /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
싸움하는 나라 거리다운 / 네거리 지나며 / 12월 하늘을 우러러본다 / 어뢰를 안고
몸으로 /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 성좌처럼 솟는다.
“국화 옆에서” 를 쓴 시인 서정주 의 가미카제 병사 송가 (松井俉長 頌歌) 입니다.
아아 레이터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 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 소리……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