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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785]陶隱(도은)선생7언절구沙門島懷古3首
沙門島懷古(사문도 회고)
사문도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沙門島(사문도) : 중국 山東半島(산동반도) 앞의 섬.
1386년(우왕 12)에 저자가 사신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가서
산동반도에서 귀국할 때 사문도의 옛 일을 회고해 보며 지은 작품.
- 李崇仁(1349년~1392),本貫:星州(성주).字:子安(자안).號:陶隱(도은).
高麗末(고려말)學者(학자).三隱(삼은)의 한사람.
憑高欲望蓬萊島。빙고욕망봉래도
渺渺煙波接蒼昊。묘묘연파접창호
安期空有棗如瓜。안기공유조여과
斜日茂陵生秋草。서일무릉생추초
渺渺묘묘=그지없이 넓고 아득하다. 渺=아득할 묘.
棗如瓜조여과=오이같은 크기의 대추
[주-D001] 안기생(安期生)은 …… 가졌거니 :
안기생(安期生)은 신선인데 크기가 오이만한 대추를 먹었다 한다.
[주-D002] 무릉(茂陵)에는 …… 우거졌네 :
무릉(茂陵)은 한 무제(漢武帝)의 능이며,
그가 신선을 구하다가 되지 못하고 죽어서 땅에 묻혔다는 말이다
높은 데 기대어 봉래도를 바라보려니
아득한 연기와 물결이 푸른 하늘에 닿았구나
안기생(安期生)은 헛되이 오이만한 대추를 가졌거니
지는 해 무릉에는 가을풀만 우거졌네
八仙當日訪壺瀛。팔선당일방호영
雲間旌旄擁飈輦。운간정모옹표련
令人悵然欲從遊。령인창연욕종유
且問弱水今淸淺。차문약수금청잔
壺灜호영=三壺의 전설이 깃든 바다.
三壺(삼호)=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
旌旄정모=儀杖인 旌節과 旄節을 아울러 이르는 말. 밝은 빛으로 만든 깃발.
천자
깃발과 장식. 旌=기 정. 旄=깃대 장식 모.
擁=안을 옹(다른 표현: 낄 옹). 飈=폭풍 표. 동자(同字)飆. 飆輦표련=바람수레.
令人령인=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다. 悵然창연=한탄하고 슬퍼함.
從遊종유=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더불어 사귀고 노닒.
[주-D003] 약수(弱水) : 물이 약하여 부력(浮力)이 없어서 작은 물건도 들어가면
가라앉고 뜨지 못하므로 사람이 건너가지 못하는데,
건너기만 하면 신선이 사는 곳에 갈 수 있다 한다.
여기서는 그 물이 말라서 얕아지면 건너가려고
얼마나 얕아졌는가를 묻는다는 뜻이다.
그 당시 여덟 신선 호영을 찾을 때에
구름 사이의 깃발은 바람수레 둘러쌌네
창연히 그들을 따라 놀려 하노니
묻노라, 약수(弱水)가 이제 맑고 얕아졌는가
千古之罘一點山。천고지부일점산
鴉鬟倒影滄波間。아환도영창파간
祖龍遺迹復誰記。조룡유적부수기
石刻剝落苔紋斑。석각박락태문반
罘=그물 부. 之罘(지부) : 산동성의 산 이름 또는 지명. 芝罘(지부).
1930년대에 ‘芝罘種(지부종)’ 배추가 우리나라에 보급된 적이 있음.
鴉鬟아환=검은 머리카락,새까만 봉우리.鴉=갈가마기아.鬟=쪽진 머리환.
剝落박락=돌이나 쇠붙이 따위에 새긴 그림이나 글씨가 오래되어 긁히고 깎여서 떨어짐
苔紋태문=이끼 모양으로 생긴 무늬.
斑=얼룩 반(다른 표현: 아롱질 반).
沙門島 : 중국 山東半島 앞의 섬. 之罘 : 산동성의 산 이름 또는 지명.
芝罘(지부). 1930년대에 ‘芝罘種(지부종)’ 배추가 우리나라에 보급된 적이 있음.
鴉鬟 : 검은 머리카락. ‘검은 산’의 뜻으로 쓴 말임.
祖龍 : 秦始皇 별칭. 祖는 始이요 龍은 人君의 형상이니 처음으로 황제라 한 데서 하는 말임.
刻石이 沙門島에 있었다 石刻 : 비석이나 바위에 새김. 산
동성 嶧山 바위에 진시황의 공덕비를 세웠는데 李斯(이사)가 篆書로 써서 새겼다고 함.
[주-D004] 조룡(祖龍) : 시황(始皇)을 조룡(祖龍)이라 하며 각석(刻石)이 사문도(沙門島)에 있었다
천고의 지부(산동성(山東省)의 지명) 한 점 산은
새까만 봉우리 끝이 푸른 물결 사이에 거꾸로 비추었다
조룡(祖龍)이 끼친 자취를 누가 다시 기억하리
돌에 새긴 글은 닳아 벗겨지고 이끼만 아롱졌구나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동문선원문이미지와 원문의
千古之䍒一點山의 䍒는 罘의 誤字로 보인다
동문선 제2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부(罘)의 유래
낭야대(琅邪臺-랑야타이)는 산동성 청도(靑島) 교남시(膠南市) 낭야진((琅邪鎭)에 있습니다.
한국에서 청도시까지는 항공편도 많고 배편도 있습니다.
청도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해양도시입니다.
칭타오피지오(청도맥주)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우리나라 3.1운동이 나던 그해 이곳 청도에서는 5.4운동이라 하여
항일의 기치를 드높였던 곳입니다.
산동성의 청도, 위해, 연대는 한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있어
한국의 기업체가 많이 나가 있는 곳이기도 해서
‘인천시 위해구’라는 우스개 소리도 생겼습니다.
낭야대는 청도에서 일조(日照)쪽으로 약 26km 떨어진 바닷가 야산(해발 218m)인데
제가 갔을 적마다 세 번 다 짙은 안개가 서려 있었던 환상적인 역사 유적지입니다.
청도에서 낭야진(琅邪鎭)으로 직접 가는 교통편은 없습니다.
청도에서 약 1시간 30분 걸려 교남시(膠南市)로 가서 다시 낭야진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10여인이 타는 아주 작고 낡은 버스밖에 없습니다.
가는 길에 온천을 좋아하시는 분이면 즉묵시(卽墨市) 온천진에 들러
닥터피쉬(Kangal fish)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낭야진은 지금은 바닷가 아주 한적하고도 작은 마을로 전락했지만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곳에 3만 가호를 이주시키고 12년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준
2200년의 역사가 있는 항구도입니다.
이곳은 '해 뜨면 천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해지면 만개의 횃불이 휘황했다'는
시의 구절도 있을 만큼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 중국의 명주(名酒)의 반열에 끼이는 '낭야타이주'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진시황 이전의 '월왕 구천'도 이곳에 임시 수도를 정해
제(齊)), 진(秦), 초(楚) 같은 강국을 견제하기도 한 곳.
제갈량이나 왕희지의 고향을 찾으면 '낭야'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13세에 등극한 진시황은 26년 후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1세 황제가 되었습니다.
삼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합쳐 황제(皇帝)인 것입니다.
삼황오제도 능가하는 최고의 통치자란 뜻입니다.
그는 많은 공과 과를 함께 지닌 인물로 평가되는데 글자나 도량형기의 통일은
오늘날까지 중국의 분립을 막은 공으로 인정되기도 합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여세를 몰아 태산에 제사를 올리고
이곳 낭야대 행궁에서 3개월을 묵었습니다.
이곳은 갓 정복한 제나라 초나라 등지를 선무하는데
적격이었던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서복이 신선 사상에 매료된 진시황 앞에 나타나
불로장생이라는 꿈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바다(발해) 한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여기에 사는 신선들은
불로초를 먹고 불로장생한다.
큰 배와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을 주면 불로초를 찾아 대령하겠다.
불로초는 신성한 풀이라서 탐욕어린 인간의 눈에는 띄지 않고
이성을 모르는 순결한 소년 소녀만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동남동녀 3천명을 원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진시황은 온갖 재화를 제공하여 서복의 성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9년이 지나 진시황의 3차 동순(東巡) 때까지도
서복은 선약(仙藥)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진시황의 추궁에 서복은 봉래산의 약초는 쉽게 구할 수 있는데 항상
큰 물고기가 방해하여 섬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변명합니다.
명궁(名弓)을 찾아 고기를 퇴치해 주면 불노초를 찾아 바치겠다고 재차 요구합니다.
봉래산은 스스로 자욱한 안개를 내뿜어 속세인의 접근을 막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진시황이 상어를 쏘는 장면(산동성 연대)과 불로초의 사연을 아뢰는 서복(낭야대)>
진시황은 불같이 노합니다. 황제는 땅 위의 임금일 뿐 아니라 바다 하늘에서도 임금인데
어찌 황제의 일을 방해하는 물짐승이 있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 활(連弩)을 가지고 낭야대 앞을 수색했지만 그 괴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진시황은 해안선을 따라 북상, 청도를 지나 위해(威海) 성산포에 이르도록 찾지 못하다가
연대 지부도(芝罘島) 앞바다에 다다르자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고기 이름은 교(鮫) 노(鰭), 사(鯊) 등 상어 비슷한 물고기로 알려졌는데
<사기> <진시황본기>에도 황제가 몸소 그 상어를 석궁으로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대시 지부도(芝罘島) 입구 광장에 대형 석상이 있는데,
진시황은 큰 활을 들고 바다를 쏘아보고, 이사(李斯), 서복 등 많은 신하들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사어대(射漁臺)>라 부릅니다.
진시황은 이곳 연대(烟臺)에 와서
제나라 8신 중의 하나인 양(陽)의 기운을 제사하는 양주묘(陽主廟)에 제사지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가 말을 키웠다는 양마도와 행궁 등 진시황 유적이 산동성 연대시에는 꽤 남아 있습니다.
연대 앞바다에는 지부도라는 섬 아닌 섬이 하나 있습니다.
영지 버섯 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芝)자를 쓰고
진시황이 세번이나 이곳에 들렀는데 네번째는 못왔다고 해서 부(罘)를 씁니다.
네 번째 못 온 이유는 이곳에서 그 물고기를 죽였기 때문에
환궁하다 평원진에서 병을 얻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문도
기자 동천의 종착지는 사문도(沙門島)의 평양성이다
진시황과 한 무제가 봉래까지 달려와 건너기를 원하였던 사문도(현 장도)에는 삼신산이 있다.
이 물은 울돌목같은 급류라서 무동력선으로는 도해가 불가능하였다.낙랑군의 험독이 이곳이다.
《우공추지》/권04 (8)
청주의 동북계를 다 고찰할 수는 없으나 《소》에 이르기를 바다를 건너서 요동땅이 있다고 하는데 완벽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통전》에 이르기를 청주의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에 걸쳐있고,태산동쪽으로 밀주를 거쳐 동북쪽으로
해곡을 경유한다.내주에서 요동과 바다사이에 낙랑과 삼한의 땅이 서쪽으로 요수까지 미친다.이것은 먼
옛날부터다.
현도군은 침략자 한무제때 낙랑군과 같이 열렸으나 남어있지 못했다.이곳은 모두 우이의 땅이다.청주지역에 있던
땅들은 삼한에 포함 되지 않는다.모든 우이는 희화가 살던곳으로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이다.그들
은 외부와의 동화에 불응하였다.
青之東北界無可考。《疏》雲:越海而有遼東之地。恐未盡。《通典》雲:青州之界,東跨海,從岱山
東曆密州,東北經海曲、萊州,越海分遼東、樂浪、三韓之地,西抵遼水。此說近是。然三韓地太遠,
而玄菟不可遺。竊疑漢武所開二郡,皆古嵎夷之地,在青州之域者,而三韓不與焉。蓋嵎夷,羲和之
所宅,朝鮮,箕子之所封,不應在化外。
묘도(廟島)의 천후궁(天后宮)및 사문새(沙門塞)의 고성지(古城址) (사문도는 샤먼문화의 발상지)
중국당국은 위에 올린 천후궁과 사문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그 건물의 앞에 이와 같은
건물을 새우고 현응궁(顯應宮이란 이름을 부쳤다.
그들은 마고(麻姑)를 마조(馬祖)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봉황 문장만은 천후의 상징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청와대의 봉황문장(鳳凰紋章)은 그 시원이 사문도의 천후궁에 있었다.
한국의 상고사 중간기에는 기자족의 활동기록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고조선의 기록이 기자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기자가 동래하였다는 서기전 1122년에 이 미 조선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단군조선의 건국을 서기전 2333년으로 기록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정하는 셈이다.따라서 기자 일행이 동천한 종착지는 사문도의 평양성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중공의 총리이던 주은래는 1963/6/28일 북한과학원 방중단을 환영하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 자손 (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 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러나 한국사학계에서는 기자가 한반도로 건너갔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 한반도에서는 들어왔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있는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만약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려면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한반 도 존재설도 당연히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강단사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의 한반도 존재설을 주장하면서도 기자동 래설만은 부정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율배반이다.그렇다면 기자가 동천한 조선은 어디에 있었는가.남당 박창화는 고조선 의 중심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북부여 芻牟鏡(추모경) 慕漱帝紀(모수제기) 顓頊(전욱)이 남하하니, 그 道(도)는 神農(신농)과 黃帝(황제)요, 그 地(지)는 北辰(북진)과 南溟(남명) 이었다. 偃皇(언황)이 북쪽으로 옮겨 가니, 그 法(법)은 堯(요), 舜(순), 禹(우), 湯(탕)이요 , 그 地(지)는 蟠木(반목)과 流沙(유사)였다. 희발(姬發)은 東侵(동침)하였고, 西戎(서융)은 주(周)를 칭하였다. 沛公 (패공)과 項羽(항우)는 강을 건넜고, 南蠻(남만)은 漢(한)나라가 되었다. 靑州(청주), 徐州(서주), 幽州 (유주), 冀州(기주)의 中土(중토) 백성들은 혹은 東(동)쪽으로 가고, 혹은 北(북)쪽으로 가니 , 唐虞(당우 )시대의 夷(이)요, 夏殷(하은)시대의 胡(호)였다. (1) 文(문)은 紋(문)에서 생겨났다. 艮(간, 북동쪽)은 道(도)의 宗(종)이며, 傳(전)하여 渤海(발해)에 있었다. 震(진, 동쪽)은 法(법)의 本(본)이니, 連山(연산)과 歸藏(귀장)이다. 農(농), 工(공), 医(의), 藥(약), 禮(예), 樂(악), 射(사), 御(어), 書(서), 數(수)의 術(술)이 갖춰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姜(강, 姜太公)을 초빙한 姬旦(희단)의 다스림은 우리에게 얻어서 저들에게 쓴 것이다. 오래도록 비옥하고 따뜻한 땅을 占(점)하는 것을 오랫동안 安樂(안락)의 계책을 삼았으나, 안주하는 자는 게을러서 망하고, 애쓰는 자는 부지런하여 흥하노라. (2) ***文(문)은 紋(문)에서 생겨났다. 艮(간, 북동쪽)은 道(도)의 宗(종)이며, 傳(전)하여 渤海(발해)에 있었다는 말은 모든 문물의 중심이 발해내역에 있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따라서 기자가 조선으로 간곳은 발해내역에 있던 조선이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고 조선(古朝鮮)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했다. “동해(東海)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 고 물에서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동해’는 지금의 서해를, ‘북해’는 발해 (渤海)를 의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의 평양 근처가 아니고 발해만 연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
▶다음은 기자가 은나라를 떠나서 고죽국(孤竹國)에 머물다가 조선까지 도착한 이동경로다.
"한 왕부가 지은 《잠부론 지씨성》중에 한후(韓侯)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옛날 주 선왕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하였다(3).
그리고 옛날 《시경》에 이르기를 옛날 한성(韓城)은 연나라에 의해서 완성되었는데 그 후
한의 서쪽에 역시 한씨 성(姓)이 있었다 하고,그들은 위만의 침략을 받아 바다가운데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기자는 드디어 부족을 거느리고 본디 고죽국 옛터로 가서 살았다. 얼마 뒤에 산융(山戎族)이 남하하자,
주(周)나라의 왕실의 통치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기씨부족은 또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마지막에는 산동반도에 이르렀지만,
많은 백성들은 기자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조선반도 북부의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기씨조선을 세웠다.](4)
***그러나 마지막부분 조선반도 북부의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기씨조선을 세웠다는 대목은 잘못된것이다.
이유는 이곳에서 한반도로 가는데 해상항로를 이용하려면 다시 발해의 북안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등주수도(登州水道)의 험한 물때문에 사문도로 직접 건너기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창락이나 청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급류를 피하여
우회하면 사문도로 건너기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당시 5천여명에 이르는 난민을 험한
항로를 이용하여 한반도까지 항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5)
뿐만 아니라 《한서》<지리지>의 보주나《제승》에 의하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였던
해군의 공격경로가 제남을 출발하여 발해의 연안을 따라 북쪽 난하의 열구에 도착하였다가
갈석산을 돌아 다시 등주 건너편에 있는 사문도에 도착한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사문도였다.
북동촌 유적 출토품 제기
■기자가 2차적으로 도착한 산동의 창락땅은 본래 기자족 기원지의 일부였다.
기자가 산융의 남하에 따라 구 고죽국에서 산동으로 이동한곳은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 폭군 주왕을 피해서 북해 바닷가로 몸을 숨겼다는 창락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맹자를 통해서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곳은 조선(장도)으로 건너는 관문이다
.기자가 요서에서 8년을 전전하다가 따르는 대규모의 백성들을 대리고 장도로 건너가기 위해서 머물렀던 곳이다.(6)
기자족 일행의 최종 종착지는 한반도 평양이 아닌 묘도열도의 사문도(현 장도)다.
이곳에 삼신산이 있고 불사국 군자국으로 부르던 고조선이 있었다.
공자가 땟목으로라도 건너고 싶다고 하였던 군자국이 바로 이곳이다.
따라서 초기 한사군은 묘도열도 내역에 있었다.
지도:청대 중반 제작예상 일본 쓰쿠바대학 소장
중국의 고대및 춘추전국.통일중국시대를 걸친 역사지명지도.
산해관과 영원 사이를 흐르는 패수를 주목하시라
이 지도에는 아예 난하는 보이지도 않는다. 제공:향고도
기자족 이동도 고죽국→산동반도 창락→묘도(사문도)
백이숙제는 창락의 고산(孤山)에서 은거하였다.
이곳은 기자가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장도로 건너가기 위해서 머무르던 곳이다.
《창락현 속지》에는 백이숙제가 머물렀던 얘기가 기자 얘기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창락에서는 고대신문자(古代新文字)가 발견된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이름은 고산이지만 옛날에는 수양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문자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기자 얘기는 《창락현 속지》뿐만이 아니다. 《서경(상서)》에서도 볼수가 있다.
기자가 주 무왕의 권유를 뿌리치고 산동의 청주에서 배를 탔다는 기록까지
조작된 얘기라고 부정하기는 어렵게 되었다.(7)
후대에 준왕은 사문도로 떠난것이 아니라
사문도에서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바다(대왕가도)로 떠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