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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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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이태리 여행 ⑧ : 세계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콜로세움과 판테온 등 로마의 유적들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200 16.12.12 05: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소렌토, 폼페이, 나폴리, 베니스, 볼로냐)

 

여행 다섯째 날 오후 : 로마(Roma)의 문화재들

 

특징 : 로마(이탈리아어: Roma)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 주의 주도로,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로 서울시의 2배정도이고, 2014년 현재 인구는 290여만 명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그 전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들 또한 대부분이 이 지역에 있다.

 

로마 시내 투어를 위해 바티칸시국을 빠져 나온다. 길은 생각보다 넓었다. 베르니니가 염두에 두었다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예상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성 베드로 광장이 조금 더 광활하게 보이기 위해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카스텔 산탄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큰길(大路), 즉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을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버려 베르니니의 의도는 빛이 바래버렸다. 문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얼토당토않은 시점에서 떠오르는 말이었으니 염두에 둘 필요는 없겠지만 옳은 말이지 싶다. 로마는 이제 제국의 중심지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정신적인 수도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티칸시국인근 식당 근처의 광장에도 오벨리스크(obelisk)가 보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전 세계에 28개가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12개는 로마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저것도 그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배불리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사의 벤 (VAN)에 오른다. 로마 시내는 대형버스의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걸어서 시내관광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벤은 우리를 로톤다광장(Piazza della Rotonda)’ 근처에다 내려놓는다. 로톤다(Rotonda)는 라틴어 ‘fotundus(원형의)’에서 파생된 말로 원형 또는 타원형의 건축물을 뜻한다. 둥그런 평면구조를 가진 로톤다는 윗부분이 돔으로 되어있는 독립적 건물을 말하는데, 판테온(Pantheon)이 그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그렇다면 판테온 앞의 광장 이름으로 안성맞춤이지 않나 싶다. 판테온과 첫 만남은 신선한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으로 지어졌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것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구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무와 벽돌로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어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신전의 벽면(壁面)을 따라 걷다보면 판테온(Pantheon)의 앞으로 나오게 된다. 전면을 이루고 있는 16개의 거대한 기둥이 보는 이들을 압도해버리는 신전이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라는 뜻으로 다신교인 고대 로마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신전이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에 아그리파(아우구스투스 대제, 즉 케사르를 계승한 인물인 옥타비아누스 대제의 사위)가 만든 것이다. 80년 낙뢰로 소실되자 120년경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가 재건하기 시작했고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 때 완성되었다. 이때 남쪽을 향해 있던 건물의 문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로톤다 광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선다. 건물의 안은 성당이다. 609년 비잔틴의 포카스 황제가 교황 보니파치오 4세에게 이 건물을 공식적으로 기증하자, 이를 받은 교황이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성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당의 안에는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묘가 있다. 성모 마리아 상 아래는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무덤도 있다.




판테온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돔(dome)이다. 지름 43.3m19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폭이 넓은 지붕이었다. 저 돔은 단 하나의 문을 제외한 어떤 출입구나 창문도 없는 원통형의 벽 위에 지지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콘크리트로 된 한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는데, 콘크리트에는 화산암과 부석이 많이 함유되도록 하여 무게를 줄였다고 한다. 또한 돔 내부의 표면은 깊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직·수평으로 살을 만드는 효과를 내어, 전체 하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단다. 판테온의 높이는 판테온의 지름과 같다. 돔의 최고점에는 지름 9m의 구멍, 즉 오쿨루스(Oculus)가 있어 건물 내부로 빛을 끌어들인다. 이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 달빛이 판테온 벽면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조차도 천사의 디자인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성당의 지붕을 만들 때 이곳 판테온의 지붕을 참조했다고 한다.



다음은 로마의 중심지이자 로마 교통의 요지인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이다. 광장 정면에는 엄청나게 큰 흰색 대리석건물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Monumento di Vittorio Emmanuele II)’이 자리 잡고 있다. 1885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911년에 완성한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1870)의 위업을 달성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하기만 이 건물은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색깔과 규모 때문에 케이크 덩어리’, ‘타자기라는 비난을 받았었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위화감이 들 정도로 말도 안 되게 큰 건물이었다. 아마도 이탈리아 역사에 있어 가장 기념하고 싶은 리더였기 때문에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건물의 전면 중앙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있으며 그 밑에는 세계 제1차 대전때 산화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참고로 백색이 강조된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마지막 기념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국의 제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기념관은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다. 광장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는 삼성의 광고판이다. 15년 전쯤인가 런던에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대사관 직원께서 가장 열을 내서 설명해주던 게 바로 삼성의 광고판이었다. 런던에서 가장 좋은 위치라면서 그 광고판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국력을 느낀다고 했었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 나는 지금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대전차 경기장인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이다. 로마 귀족들을 열광시키던 전차 경주가 열렸던 대전차 경기장은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지금은 비록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지만 25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은 영화 벤허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트랙의 위 언덕에 선다. 말고삐를 잡아채며 힘차게 마차를 이끌던 찰톤 헤스턴(Charlton Heston)’의 영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환청일까? 말발굽 소리와 전차 바퀴 소리, 그리고 관중의 함성까지 들리는 듯하다. 한편 이곳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집단으로 처형을 당했던 아픔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장 너머에 폐허(廢墟)처럼 보이는 곳이 고대 로마 황제들의 주거지였던 팔라티노 언덕(Colle Palatino)’이다. 2천 년 가까운 오랜 세월에 부대끼며 많이 훼손되었지만, 화려했던 옛 영광을 간직한 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넓은 공간은 현재 로마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화창한 날씨이다.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하염없이 여유를 즐기고 싶어진다. 벤허의 옛 이야기라도 떠올리면서 말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으로 향한다. 전차경기장에서 가깝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한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6세기에 지어진 성당으로, ‘발렌타인데이(Saint Valentine’s Day)‘의 유래가 된 성 발렌타인(Saint Valentine)’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7층 높이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아름다운 성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나보다. 너나 할 것 없이 기괴하게 생긴 조각상 앞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이란다.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소피아 로렌이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손을 집어넣던 그 조각상이다.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 Mouth of Truth)은 성당의 입구 한쪽 벽면에 있는 얼굴 앞면을 둥글게 새긴 대리석 가면(플루비우스의 얼굴)이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입에다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강의 신() ‘플루비우스(Pluvius)’가 손을 잘라버린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일부 영주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 몰래 잘라버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진실의 입은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포로 로마노보다도 훨씬 더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처럼 입에다 손을 넣어보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줄의 맨 끝에 가서 선다. 좀 꺼림칙하겠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이 조각상의 용도에 관한 얘기이다. 이 조각상은 고대 로마시절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된단다. 수염이 있는 남자의 얼굴(눈과 코, )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 구멍으로 물이 빠졌을 거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수채 구멍에다 손을 집어넣고 있는 셈인가?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앞에 코린트양식의 돌기둥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신전(神殿)이 하나 보인다. 로마에 현존하는 대리석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헤라클레스 신전(Tempio di Ercole Vincitore)’이다. 이 신전은 포룸 로마눔 안에 있는 베스타 신전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보통 베스타 신전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베스타 여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헤라클레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179년에서 142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나서 그리스와 시리아의 일부를 손아귀에 넣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되었을 때이다.



근처에 기념비 비슷한 것도 하나 보인다. 하지만 영어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i Campidoglio)’으로 향한다. ‘베네치아 광장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왼쪽으로 끼고 연결된다. 광장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계단이다. 이곳은 과거 정치의 중심지였다. 캄피돌리오라는 뜻 역시 수도라는 의미의 캐피탈(Capital)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사절들이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경사가 필요했단다.




언덕에 오른다.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기마상이 가장 먼저 반긴다. ‘로마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이며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 명상록(瞑想錄, T?n eis heauton diblia)’을 남긴 사람이다. 이 기마상은 약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라테란 광장에 있었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면서 1538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참조한다. 참고로 옛날에는 이 동상을 기독교를 인정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Portrait of Constantine)’의 상()인 것으로 알았단다. 때문에 이곳에서 예배도 드리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마상은 기독교를 박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상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가 궁금해진다.



광장은 세 개의 건물로 둘러 싸여 있다. 가운데 건물은 고대 로마의 문서 보관소이었는데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시청사를 중심에 놓고 정확한 대칭을 이루도록 양 옆에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누오보 궁전을 배치했다. 위에서 보면 세 개의 건물이 계단과 합쳐져 마치 한 송이의 꽃처럼 나타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 광장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로 누오보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은 현재 카피톨리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471년에 창설된 유럽 최고의 박물관으로 아름다운 천정벽화로 유명하다. 누오보 궁전박물관(Palazzo Nuovo)과 콘세르바토리 박물관(Conservatori)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기 로마, 그리스시대의 조각상과 청동상부터 18~19세기의 회화작품들까지 다양한 전시품이 소장되어 있다.



카피톨리노광장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포로 로마노(Foro Romano)’가 한눈에 들어오면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포로로마노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뛰어난 조망처이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 중심지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독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자칫 지겨울 수도 있는 곳이다. 거의 원형을 잃어버린 건축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번 여행에서는 포로 로마노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일정을 짜 놓았다.




포로 로마노는 시민정치의 산물로 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라 한다. ‘포로(foro)’는 공공광장이라는 뜻으로, 영어 포럼(Forum)’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즉 로마인들의 공공광장으로 해석되며, 이 광장에서 정치, 종교 등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던 장소였다. 당시 이곳은 하수시설이 완벽했고 신전과 공공기구가 마련되었고 대중목욕탕까지 갖춘 정치, 상업, 종교 활동의 주 무대였다.



원주 여덟 개가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사투르누스 신전(Tempio di Saturno)’의 흔적인데 나라의 보물을 보관한 곳이었다. B.C 497년경에 세워졌다고 했으니 나이가 25백세 쯤 되겠다. 사투르누스 신전의 왼편에서 시선을 끄는 건물은 203년에 지어진 세베루스 황제(Emperor Septimius Severus)’의 개선문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카라칼라 목욕탕을 짓게 한 카라칼라 황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세베루스 개선문 근처에 마메르틴 감옥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감금되었던 감옥소라고 한다. 그 외에도 이곳은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며 보존상태까지 양호한 티투스의 개선문(Arcodi Tito)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 그리고 잔해만 남아 있는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Basilica)’, '에밀리아의 바실리카', '로물루스의 신전', '파우스티나 신전', ‘베스타 신전’, ‘율리아의 공회당’, ‘원로원 건물등 수많은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언덕은 로마의 일곱 개 언덕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팔라티노 언덕이다. ‘테베레 강(Fiume Tevere)’에 버려져서 늑대에게 키워졌던 로물루스가 정착한 바로 그 언덕이란다. B.C 753년 로물루스가 이곳 팔라티노 언덕에다 세웠던 나라가 바로 로마인 것이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고대 로마 황제가 살았던 저택 자리가 있다.



스페인광장으로 향한다. 걸어서 이동하다보니 제법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려니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옛길을 따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겨를은 결코 없다. 계속해서 나타는 새로운 풍경들이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말이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라 퐁텐의 우화에 맨 처음 나온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에 빗대어 모든 여행은 로마로 통한다.’라고도 했다. 시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난 후자에 동의하고 싶다. 이곳 로마가 세상의 모든 여행지로 통하는 통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메모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그 메모에는 여행지의 풍물과 역사, 그리고 문화 등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된다. 당시의 기록들은 여행 후에 다시 재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 되는 곳이 바로 로마이다. 세상 곳곳에서 만났던 문화의 뿌리를 캐며 올라가다보면 어디선가는 꼭 로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모든 여행자의 종착지가 된다. 그러니 어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는가.




가는 길에는 아래와 같은 성당도 보인다.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 쓰느라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도로가 넓어진다. 목적지인 스페인광장에 거의 다 왔는가 보다. ‘성모마리아 동상으로 추측되는 동상이 눈에 띄는 등 주변 분위기가 스페인광장으로 연결되는 콘도티 거리(Via Condotti)’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소문난 거리이다.




잠시 후 눈에 익은 광장과 계단이 반긴다.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들의 휴식처로 언제나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명소다. ‘스페인 광장이란 이름은 17세기 이곳에 있었던 스페인 대사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광장과 낮고 좁은 계단뿐이지만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바로 그곳이다. 그 후 로마 최고의 명소가 됐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계단 위 삼위일체 성당(Trinita dei Monti)’의 종탑과 오벨리스크가 아름답다. 그런데 그 풍경이 그동안 생각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앉아 사랑을 속삭이거나 생각에 잠겨 있어야 하건만 137개의 계단이 텅텅 비어있는 것이다. 보수공사를 하느라 계단의 출입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젤라또(Gelato, 이태리식 아이스크림)를 사먹는 것까지 생략되어 버렸다. 뭐니 뭐니 해도 젤라또는 계단에 앉아서 먹어야 제멋이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멋을 부릴 장소가 사라져 버렸으니 젤라또를 사야할 의미까지 없어져버린 것이다. 아니 살 수는 있었다. 다만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서서 기다리느니 다른 장소에서 사는 게 더 현명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왕에 로마의 휴일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 보자. 이 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세계 영화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이다. 또한 오드리 헵번(Audrey Hephurn)’을 알고 싶으면 이 영화를 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를 단번에 은막의 여왕과 세기의 요정으로 만들었고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불후의 명작이다. 지성과 도덕적 강직함을 겸비한 품위 있는 미남 스타,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이 상대역을 맡았고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 1946)’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고 벤허(Ben Hur, 1959)’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 등의 명작을 만든 세계적 거장 월리엄 와일러(Walliam Wyler)’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럼 이제는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친선 순방차 로마를 방문한 가상의 왕국 공주인 (오드리 헵번)’은 엄격한 왕실의 규율과 복잡한 의전, 빈틈없이 타이트한 일정이 싫다. 그래서 변장을 한 채로 몰래 담을 넘은 그녀는 무작정 로마의 밤거리를 거닌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었던 안정제 때문에 스페인 광장에 놓인 벤치 위에 쓰러져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그러다가 우연히 앤 공주의 유럽여행 취재 임무를 띠고 특종 기사를 노리던 로마 특파원 미국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의 도움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도와준 여자가 앤공주임을 안 그는 사진기자 어빙 래도비치(에디 앨버트)’를 불러 비밀 촬영 작전을 짠다. 그러다가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끝내는 헤어진다는 스토리이다. 특종 기사용 사진이 폐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공주가 퇴장하고 난 기자회견장에서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대며 아쉬운 사랑을 안으로 새기는 라스트 신(last scene)’이 하이라이트이다.



스페인 계단 바로 앞에는 '바르카차의 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있다. ‘낡은 배의 분수라는 의미인데 테베레 강에서 와인을 운반하던 바르카차를 본떠 만들었단다.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의 아버지인 피에르토 베르니니(Pierto Bernini)’가 로마의 큰 홍수 후 하나 남은 조각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이 분수의 물은 트레비 분수와 함께 로마에서 가장 깨끗하고 맛있는 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품질은 보증되지 않는가 보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로 향한다. 좁은 골목길 양편으로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상점이 즐비하다. 스페인 광장에서 10분쯤 좁은 골목을 이리 저리 걷다 보니 트레비 분수가 불쑥 나타난다. 트레비(Trevi)는 삼거리라는 뜻이다. 삼거리에 위치한 분수 앞으로 좁은 골목길이 여러 개 나 있는 것이 보인다.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는 로마에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분수이다. 높이 25.9m에 너비가 19.8m에 이른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명한 처녀의 샘(Aqua Virgina)’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 물을 준 한 처녀의 전설을 분수로 만든 것이다. 분수의 정면 오른쪽 위에 이런 일화를 담은 조각품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는 풍부한 수원과 총 14개의 거대한 수로망(水路網)이 있어 로마 전역에 물을 공급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하면서 이 수로망을 파괴해버렸다.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물 부족은 15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새로이 로마를 재정비하려던 교황들이 여러 수도교와 분수를 만들면서 해소되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평범했던 이 분수는 1732년 교황 클레멘스13니콜라 살비(Nicola Salvi)’에게 명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트레비 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부조물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Poseidon)’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Triton)’이다. 종종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이곳까지 물에 잠길 때가 많아지자 바다의 신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건물 제일 위를 보면 라틴어로 ‘CLEMENS VII’라고 클레멘스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AQVAM VIRGINEM’이라고 적어 처녀의 샘 분수라는 것을 명명하고 있다. 양쪽에 있는 4개의 여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는 바로크 양식(baroque樣式)’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걸작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트레비 분수가 유명하게 된 원인은 따로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인해 스페인 계단이 유명해졌듯이, ‘트레비분수는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주인공인 마스트로이안니와 여주인공이 분수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갔나요?’ 북새통을 이루는 인파속으로 겨우겨우 비집고 들어간 집사람이 동전을 던지고 나서 내게 물어온다. 내 대답은 물론 예스. 서있기도 어려운 비좁은 공간에서 오른팔을 왼쪽어깨 뒤로 뻗어 동전을 던진다고 생각해보라. 그 고생을 하는 그녀에게 어찌 안 들어갔다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고 두 번째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세 번째 던지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첫 번째 동전이 분수에 잘 들어갔으니 집사람은 언젠가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고 말이다. 집사람은 더 이상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참고로 트레비 분수는 아리따운 처녀가 전쟁에서 돌아오는 지치고 목마른 병사에게 물을 떠 주었다는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동전에 얽힌 사랑 얘기들이 만들어졌나 보다.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물속에 있는 동전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시가 정기적으로 수거하여 로마 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매일 3,000유로 정도가 분수대 바닥에 쌓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콜로세움(Colosseum in Rome)이다. 로마의 상징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꼽히는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여행자들이 거르지 않고 꼭 찾아가는 명소다. 이 원형의 극장에서는 고대 검투사들의 칼싸움, 맹수와 인간과의 사투, 물을 채워 넣고 하는 모의 해전 등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들이 벌어졌었다. 아무튼 '콜로세움'은 겉에서만 둘러봐도 그 웅장한 크기와 분위기에 압도된다.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Colosseum in Rome)은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뜰에 있었던 인공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진 콜로세움은 AD 72(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건설을 시작하여 80(티투스 황제)에 완성된 대형 원형투기장 겸 극장이다. 맹수들과 생사를 겨루는 검투사의 경기와 서커스나 사파리 공연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콜로세움 바로 앞에 서면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규모에 놀란다. 콜로세움은 직경이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 둘레 약 527m인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바깥벽의 높이는 48m에 이른다. 그리고 경기장 내부의 길이는 87m에 폭은 55m, 80개 정도가 되는 출구에 55천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할 수 있었단다. 4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신분에 따라 자리를 따로 지정 받았으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콜로세움 바로 앞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서있다. 로마시대 개선문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밀라노 칙령(313)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패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지은 것이란다.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이 개선문을 흉내 내서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이나 인도 델리의 인디아게이트 등 세계의 많은 기념문들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들의 원조가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되는 셈이다.



개선문을 빠져나가면서 오늘의 일정, 즉 로마 시가지 투어가 끝난다. 로마에는 유럽 문화유적의 40%가 모여 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 그런 로마를 걸었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 온 수많은 건축물들을 도심 곳곳에서 만났다. 누군가 그랬다. 이곳 로마는 ‘1000년쯤 된 건물이라고 하면 눈길 한번 던지고, 100년쯤 된 건물은 신축이라며 쳐주지도 않는 도시라고. 그가 말한 로마를 걸을 때 로마인이 된 것처럼 로마를 사랑해보자는 또 다른 한마디를 염두에 두고 걸어본 하루였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꼈던 황홀한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하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르네상스로의 시간여행이 어디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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