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 31 무자비한 자 롬 1: 32 정하심을 알고도
롬 1: 31 무자비한 자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
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죄목들은 애정과 의리(義理)를 배반하는 종류에 속한다.
애정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배반하는 자야말로 극도로 악한 자이다.
우매한 자'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사랑이나 긍휼에 대하여 지각(知覺)이 없고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기억지도 않음을 말함이다.
* 사 1: 2-3 -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도탄 중에 빠진 자가 남의 동정을 구하다가 배척을 당할 때도 그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배은망덕의 태도를 볼 때에 느끼는 비통(悲痛)은 그 이상이다.
사람들은 또한 우매하다. 그들은 참된 지식도 깨달음도 없다. 그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불행을 자초(自招)한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였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있으며 무엇을 위해 있는지에 대하여는 어둡다. 이것이야 말로 무지하고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이런 인생이 과연 소와 말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배약하는 자' 성경은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고 한다.
* 시 15: 2-5 -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성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에 대한 약속과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신실한 인격, 믿을 만한 인격은 약속을 하는 데도 신중하지만,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무정하다 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무정함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렇게 제한을 두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환경이 조금만 악화되면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거나 아내를 학대하며, 힘센 자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전통본문에는 그 다음에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라는 말씀이 있다. 마음 상하는 일이나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 깊이 오래 간직하고 보복하려고 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인간관계는 허물어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준다. 인정이 활동하면 눈물의 골짜기도 변하여 회열의 낙원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자비일 수 있다. 크리스천의 자비는 조난자(遭難者)의 육신 정형 뿐 아니라, 정황까지 불쌍히 여김이다.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이기적(利己的)으로 변하였고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도 한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악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자비한 자로 전락되었다.
롬 1: 32 정하심을 알고도 -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1]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규정(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모두 양심(良心)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이 입증하는 바요 거기에 근거하여 그들이 정한 사회의 법들에 나타나 있는 바이다.
양심은 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해주는 도덕적 코드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사망이다. 죄인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영원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2]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죄를 범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침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죄를 옳게 여기는 자는 고칠 소망이 없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죄악됨은 이와 같이 명백하고 충만하다.
모든 불의, 음란,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불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고, 수근수근하고 비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 교만,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하다.
이에 덧붙여 이런 악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는 뻔뻔함과 완악함이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임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로부터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물로 씻거나 불로 태우면 되겠는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을 받을 수 있다.
여러분은 죄 씻음을 받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