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시 내항에 자리 잡은 진포해양테마공원 전경.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함포를 만들어 왜선을 500여 척이나 물리쳤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문을 연 해양공원이다. 항만을 끼고 있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해군함정 장갑차 자주포 전투기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하다 퇴역한 군사장비가 전시돼 있다.
전북 군산(群山)에는 고만고만한 산이 많을 것 같다.
이름에 '무리 군(群)'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도심 한편에 월명산이라는 길쭉한 동산이 보일 뿐 도시 전체가 시야가 탁 트인 평지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지명이 붙었을까.
지명의 유래를 자못 궁금하게 만드는 도시, 군산을 다녀왔다.
군산시는 금강 하구와 만경강 하구 사이에 위치한다.
두 강이 만들어 놓은 널따란 선상지인 옥구반도와 고군산군도를 포함한 서해의 여러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인구는 2014년 기준으로 27만여 명이다.
금강(錦江)이 어디 예사로운 강이던가.
감히 말하건대 금강이 없었다면 백제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삼천궁녀의 백마강은 알아도 그 백마강이 금강 중류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던 백강전투, 그 전장이 금강 중류였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백제의 영광과 멸망 모두 금강이 원인이었다.
군산내항 부두의 부잔교 모습. 물위에 떠 있는 다리라고 해서 일명 '뜬다리 부두'라고도 하는 부잔교는 바닷물의 수위가 오르락내리락해도 접안한 선박이 하역과 선적작업을 할 수 있다. 군산항의 부잔교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증명하는 산물이기도 하다.
만경강(萬頃江) 역시 예사로운 강이던가.
만경은 일만 이랑의 평야를 뜻한다.
만경강 없이는 애당초 김제·만경평야도 없었고,
백제 왕조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지도를 보면 옥구반도의 바깥쪽 바다 위에
세로로 팽팽한 활(弓) 모양이 보인다.
바로 세계 최장을 자랑하는 새만금방조제인데, 그 모양이 마치
군산의 미래를 겨냥한 활시위 같다.
군산 기행의 마중물은 이 정도로 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자.
◇ 채만식 소설 '탁류'의 무대로 들어서다
■ 군산의 초입, 망해사
이른 아침 6시45분, 부산교대 앞에서 전세버스로 출발했다.
3시간 남짓 졸다 깨다를 거듭했는데, 어느덧 창밖이 훤해지는 게 아닌가.
시야 가득 끝없는 지평선이다.
도로변의 전봇대에는 지평선축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아하! 이곳이 바로 '징개맹개', 바로 김제·만경평야로구나.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 군산을 무대로 쌀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윽고 망해사(望海寺)에 다다랐다.
이름 한번 고약하다.
이미 망해버린 절간 같지만 한자로 풀이하면 바다 건너 서방 정토를 바라보는 절이다.
이 절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풍광이 빼어나다.
그래서 군산 가는 길에 마수걸이하듯 들른 곳.
망해사에 갔더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나오셨다.
친히 낙서재(樂西齋)에 걸린 주련(柱聯)을 해설해 주신다.
'하늘 이불, 땅 요때기에 산을 베개 삼고서/ 달 촛불, 구름 병풍에 바다 술통을 마시고/ 크게 취해 흔연히 춤을 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로다(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劫嫌長袖掛崑崙-震默大師)'.
이 주련을 지은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는 함자도 예사롭지 않다.
진동과 침묵의 스님이라니. 시의 내용 또한 대단한 파격이다.
언뜻 생각하면 땡추요, 다시 생각하면 도승(道僧)이다.
'취해서 빈산에 누우니, 하늘이 이불이요 땅이 베개로구나(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하는
이태백의 '우인회숙(友人會宿)'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다.
누가 말했던가. 조선은 억불숭유정책으로 일관했다고.
정말 그랬다면 이런 시가 어찌 용납되었을까.
더 재미있는 게 있다.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비구니 스님이 해설을 하신다니….
망해사 앞에 출렁이던 바다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벽해상전(碧海桑田)!
지속적인 매립 때문인가.
아니면 도승 진묵대사가 시나브로 바다 술통을 들이켰기 때문인가.
◇ 수탈의 현장을 산 교육장으로 복원
■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치욕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대중이 그 역사를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은 뭘까.
당시에 남아있는 흔적, 당대의 건축물을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군산은 수탈의 현장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훌륭하게 복원해 놓았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 일본식 주택 히로쓰가옥, 이영춘 가옥, 구 군산세관,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일본 18은행 군산지점, 군산 내항의 부잔교(浮棧橋) 등이다.
지면 관계상 건설기술자인 필자의 관점에서 몇 가지 건물들만 소개하기로 한다.
◇ '만인보' 고은 시인이 출가한 절
■ 동국사, 일본 사찰
본래 이름은 금강사(錦江寺)로 1909년 창건되었다.
일본 불교의 최대종파 조동종의 사찰이었다.
이 절은 '만인보'로 유명한 고은 시인이 출가했던 절로도 유명하다.
대웅전의 지붕 구배는 함박눈도 미끄러져 내릴 듯이 급하다.
절의 앞마당도 협소하다.
본당 좌측으로 종각이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 부속 건물도 변변찮다.
그래도 이 절의 부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아담한 요사채를 중건하고 있다.
본당 내로 들어가면 벽 쪽으로 자료전시관이 있다.
놀라운 점은 일제 침략 당시 이 사찰 승려들의 협조에 대해 참회와 사과의 비석(2012)이 서 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해외 포교라는 미명하에 일제가 자행한 야욕에 영합해
수많은 아시아인의 인권을 유린하고…운운'으로 되어 있다.
◇ 식민정책으로 배불린 日부잣집의 정원
■ 히로쓰가옥
군산은 1899년 개항했다.
개항 이후 일제는 일찌감치 김제·만경평야의 차진 쌀에 눈독을 들였다.
그래서 미곡 증산과 미곡의 본토 수출을 위해 본격적인
식민(植民) 정책을 실시한다.
그 결과 군산에는 일본인 땅 부자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땅 부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증거가 일본인 히로쓰가옥이다.
히로쓰(廣津) 라는 사람은 포목상으로 갑부가 된 사람으로
1927년께 이 집을 지어 약 20년 남짓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대문부터 우리네 대문과는 다르다.
마치 집의 옆구리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대문을 들어가면 곧장 정원으로 길이 연결된다.
우리나라 전통주택으로 치면 마당이 있는 곳에 정원이 있는 셈이다.
마침 일요일이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일본식 정원의 한가로움은 고사하고, 마치 어깨동무하고 보리밟기를 하는 듯하다.
정원의 가운데는 당초 연못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담한 석등도 정원 가운데 서 있다.
일본 정원은 언제나 4가지 요소로 채워져 있다.
물 돌 나무 그리고 석등과 같은 경물(景物)이다(이 석등은 어느 한적한 산사에서 피랍되어 온 것 같다).
일본식 정원은 자연경관을 인공적으로 축소한 축경(縮景)식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전통 가옥에는 안채 앞에 마당이 있을 뿐 정원은 따로 없다.
우리는 마루나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자연경관을 즐긴다고 하여 차경(借景)이라 한다.
◇ 쌀 하역·선적 위한 시설 '뜬다리 부두'
■ 군산 내항 부잔교(浮棧橋)
부잔교는 부교(浮橋)와 잔교(棧橋)의 합성어이다.
일명 '뜬다리 부두(floating pier)'라고 한다.
이 다리는 조수 운동으로 조위(潮位)가 오르락내리락해도
접안한 선박에서 하역과 선적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군산은 밀물과 썰물과의 조위가 6~9m에 이른다.
따라서 고정식 잔교만 있다면 하역이나 선적을 제한된 시간에만 해야 한다.
이 부잔교는 1905년의 1차 축항공사로부터 1938년 4차 축항공사까지 단계적으로 4개까지 건설되었다.
2015년 현재는 3개의 부잔교가 남아 있고, 여전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선박들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곳을 이용하는 선박들은 날로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 일제 전진기지·진포대첩 승리 현장 공존
■ 진포해양공원에서
조선조 초기만 해도 군산진(群山鎭)은 선유도에 있었다.
선유도는 군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고만고만한 섬들로 이뤄져 있다(지금은 새만금방조제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산의 무리라는 뜻의 군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군산(선유도)은 고려 말 뱃길로 개경(개성)에 왔던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1091~1153)의 '고려도경'에도 등장한다.
선유도가 서해 상의 중간기착지이자 수군진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말 서해 상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다.
이들 왜구를 대파한 전쟁이 바로 신형 화포들을 이용했던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년)이다.
당시 고려 조정은 왜구 섬멸에 대단히 공세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조선 초, 태종 연간에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섬을 통째로 비우라는 공도(空島)정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은 지금의 군산으로 이전하고, 선유도와 부속 섬들은 고(古)군산군도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군산의 입지는 계속 수세적 입장으로 몰렸는데 그 절정이 일제강점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군산은 어떤 상황일까.
새만금방조제에서 보듯이 군산은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공세적으로 보인다.
마치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처럼 이미 역전을 하고 굳히기 작전에 들어간 느낌이랄까.
그런 뜻에서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 내항에 진포해양공원을 조성한 것은
역전의 기상이 느껴진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리의 역사를 현창하는 것은
그보다 수백 배나 더 효과가 있으니까 말이다.
하루 만에 후다닥 돌아본 군산은 너무 아쉬웠다.
박원호 우인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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