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萬海, 卍海) (韓龍雲) 일대기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정옥이었고 아명은 유천입니다.
한용운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선비 가문이었고
1884년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역사책 통감을 비롯
소학 등을 모두 떼어
마을에서는 신동이 났다고
한용운을 칭찬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대학을 읽던 한용운은
그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을 정도로
이미 나름대로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14세 되던 1892년
집안에서 정해준 전정숙과 결혼했고
16세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5년 을미사변을 거치며
한용운이 살던 충청도 홍주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고,
싸움 도중 아버지 한응준과
형 한윤령을 잃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던
한용운은 19세에 한성으로 떠났고
그러던 도중 앞날을 위해서는
실력을 기르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있는
속리사(현 법주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백담사에 있는
탁몽성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을 하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연곡 스님이 가져다 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보다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습니다.
하선하려는 찰나
사람들이 한용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던
일진회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한용운은 이 사건을 겪은 후
같은 동포끼리도 믿지 못하고
목숨마저 노린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1908년,
30세가 되던 한용운은
세계 문물을 더 알고자
일본 도쿄로 갔고
일본 스님의 도움으로
조동종 대학에 들어가서
불교와 서양 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측량 기기를 사들고
국내로 들어와서
한성에 명진 측량 강습소를 개설하고
우리 민족이 신식 측량 기술에 대해 알고
절이나 개인 소유의 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1911년
경상남도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에 간 한용운은
팔만대장경을 주제별로 요약한
불교대전을 완성했고
이내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913년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 국한문 편찬을 하고,
전국을 다니며 젊은 승려들을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한용운은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려 노력했고
천도교, 기독교 인사들과도 만나며
3.1 운동 독립 선언서 작성에도
참여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념 연설을 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에 붙들려
마포 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조선 사람이 조선 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데
일본 사람이 무슨 재판을 할 수 있냐며
늘 당당했습니다.
징역 3년 동안
간수들에게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용운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좌선을 했고
1921년 마침내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1923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앞장섰고,
1924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직했습니다.
1925년에는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십현담 주해를,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완성했습니다.
한용운이 살아온 삶을
온전히 담은 시집이
바로 님의 침묵입니다.
1933년 53세 때
한용운은 유숙원과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성북동에 생애 첫 집인
심우장(소를 찾는다,
불교에서는 소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뜻함)을
지었습니다.
1935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 뒤에도 신문 연재 소설
후회, 박명 등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신경통, 각기병, 영양실조 등으로
몸이 약해진 한용운은
청소를 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으나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6월 29일
중풍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만해 기념관 출처: 광주여행
홍성 만해 한용운의 생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으로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1904년
내설악의 오세암으로 출가하여,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법명은 용운(龍雲)이다.
만해 한용운 생가지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와
공약 삼장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26년
'님의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민족시비공원 석비와 생가지
만해 한용운은 1911년
이회광 일파의 친일매불 책동을
격파하였으며
1913~1914년
조선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을 간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33인),
1922~23년
민립대학 기성회 중앙집행위원
1923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
1930년 만당 당수
1931년
'불교' 속간,
이후 창씨개명과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한용운 생가지 입구
1926년
'님의 침묵' 을 발표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인과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조선 독립선언서 전문
공악삼장(公約三章)
어록비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후
옥중에서 집필한 옥중 독립선언서인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첫머리에서
만해 한용운 동상
대구사범동문회 소정 정경자 총무가
카톡으로 보내준 동영상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