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806. 묵상글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희망의 증인. 등 )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희망의 증인 <2023.08.06. 05:12>
주님의 변모 축일에 저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 공동체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왜 다른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의 목적 없이 떠난 것입니다.
토마 사도 축일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토마 사도도 어쩌면 절망하고 제자단을 떠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열 사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고,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세 사도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다른 제자들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고 설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세 사도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봤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와 두 제자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증인들로서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감사송은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걸림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라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가는 것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서지 않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다음 마음을 접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만 한다면
그리고 걸림돌이었던 십자가를 오히려 디딤돌 삼기로 마음먹는다면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에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 영광의 시작이라는 믿음과 희망,
그것을 우리가 지녀야 하는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이 믿음과 희망의 근거라고 감사송은 노래하고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이라고 합니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제는 젊은 형제들과 우리 안에 희망이 있겠냐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둠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어둠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어둠 속에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인간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희망을 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가 희망의 증인이 되어 전체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 한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라고
타볼산으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인성을 통해 신성이 드러난 사건을 경축합니다. 전통적으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다볼 산에서 있었던 일이며 사도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에 피조물에 대한 주님의 왕권과 특히 그분의 인간 본성을 통해 비춰지는 신성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되고서 당신의 일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은 수난과 죽음을 전제하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주님께서는 훗날 당신 수난의 증인이 되어야만 할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변모 사건의 증인들로 선택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택하신 것은 위대한 정신이나 훌륭한 성품 때문이 아니라 상처입기 쉬운 성향 때문이며 그것이 오히려 거룩한 덕으로 변모시키는 은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선의 기회로 여기고 그것을 성덕으로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는 희망의 초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부활의 영광 이전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을 볼 때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우리가 구체적인 삶 안에서 어떻게 변모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유향처럼 언제나 그의 심중 깊숙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불길로 자신이 그분으로 완전히 변모되길 열망했습니다.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각별한 신심으로 그는 매년 예수님께서 혼자 사막에서 지냈던 시기인 주의 공현 축일부터 시작해서 40일간 단식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어떤 한적한 곳에 가서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가능한 한 적게 음식과 물을 마시며 자기 방안에 박혀 지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너무도 열렬히 사랑했고 주님을 끊임없이 자기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강렬한 신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분의 무한한 자비를 묵상했고, 신심의 열은 너무도 높이 타올라 사랑과 연민으로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때로는 대면하고 싶지 않는 힘겨운 여러 사건들과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 어디론가 피하고 싶기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바라보며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가 성 프란치스코 처럼 주님의 수난과 그분의 한 없는 자애로우심을 묵상하며 거룩한 변모를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거룩한 변모를 하신 주님의 부활 이전에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변모인 오상체험처럼 우리가 거룩한 완덕으로 변모하기에 앞서 자신의 나약함과 좌절 체험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입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본 장차 벌어질 사람의 아들의 영광된 모습과 통치를 미리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베드로가 직접 본 예수님의 변모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의 변모를 통해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0
‘해처럼 빛나는 얼굴’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난 모세의 모습(탈출 34,30)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의인의 모습’(마태 13,43)을 연상시킵니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심을 해처럼 빛나는 얼굴로 드러내셨다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빛처럼 하얘진 옷’은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마태 28,3)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님이 한 순간이나마 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셨음을 시사해줍니다.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심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바치고자 하는데,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마태 17,5). ‘빛나는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는 이들을 현존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예수님의 변모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벌어진 일도 함께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께 변모가 일어났듯이, 제자들에게는 변모될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와 함께 우리의 변모에 대한 가르침도 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지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빛나는 구름은 제자들을 변화에로 부르십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고”(루카 1,35), 변화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빛나는 말씀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은 것입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구름으로 덮고,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시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아버지의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이요,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 건물(초막)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1-22)
그렇게 우리는 말씀의 영으로 변모해 갑니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2코린 3,18)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진정 거룩해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을 믿고 순명하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모습이 밝게 빛나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과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로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럴 때 믿는 이들의 소명이 더 명확해집니다.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정성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건강관리에 유의하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으시고 영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면, 이미 지난 역사인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인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을 희망하며 주어진 선물인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저 죽은 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 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 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등지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엿새 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진”(마태17,2)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십자가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끝자락에 영광의 때가 온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닮은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 단장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지은 견고한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며 들은 바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누구나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에 이르려면 그의 말을 들어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가 일러주고 그가 앞서간 길은 가장 쉬운 길이며 단 하나뿐인 길입니다”(홍승모).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병에 걸립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외적인 신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길 바랍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다녀오면서 피부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강한 햇볕에 노출된 어깨와 등이 빨갛게 익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의 허물이 벗겨졌습니다. 피부가 햇빛에 약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학생 때 바닷가를 다녀와서 허물이 벗겨진 이후에 처음으로 허물이 벗겨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물이 벗겨지면서 미관상 안 좋기도 했고, 무리하게 허물을 벗겨내면서 민감한 피부가 아프기도 했습니다. 허물을 벗겨내면서 허물의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입니다. 저처럼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허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곤충에게는 ‘허물’이 있습니다. 곤충에게 허물을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탈피의 과정입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허물은 남고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같은 몸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부활의 상징과 같습니다. 파충류 중에는 ‘탈피’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물을 벗으면서 더 성장하고, 더 깨끗하고 건강한 피부가 됩니다.
허물의 두 번째 의미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허물과 관련된 속담이 있습니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 칼날이 날카로워도 제 자루 못 깎는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남의 말이라면 쌍지팡이 짚고 나선다. 누구나 허물 없는 사람은 없다. 독사는 허물을 벗어도 독사다. 똥 싼 놈은 도망가고 방귀 뀐 놈만 잡혔다. 자랑 쟁이에게 허물이 더 많다. 자기 얼굴은 자기가 못 본다. 겨울바람이 봄바람보고 춥다고 한다. 재를 털어야 숯불이 빛난다. 가랑잎이 솔잎 더러 바스락 거린다고 한다.” 허물에 대한 속담 대부분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이야기 하듯이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남들도 그러는데 머!’라고 하면서 저의 잘못을 합리화 한 적도 많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허물은 ‘원죄’와 같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었듯이, 원죄의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것이 ‘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늘에 계셨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시고 편하게 계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몸소 사람이 되시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허물은 지나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텐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겸손‘이라는 ’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염색을 하는 것도,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성형을 하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변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갈망, 만남, 이탈, 경청, 추종-
오늘은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날씨는 불볕더위라 몹시 덥지만 열정은 샘솟는 듯 어제 두편의 아주 짧은 시를 짓고 만족했습니다.
-“작열하는
불볕 더위
열정은 더욱 타올라
마음은 더욱 깨끗하다
하늘은 더욱 푸르고
꽃은 더욱 붉다”-
-“날마다
휴가처럼 산다
새삼
웬 휴가?
죽으면
영원한 휴가인데”-
오늘로서 8월1일부터 시작됐던 포르투칼 리스본에서의 제37차 “세계 젊음의 날(World Youth Day)” 축제도 끝납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있습니다. 젊음의 날 축제의 주인공이 흡사 88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인 듯합니다. 20-30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쁘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황님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삶의 기쁨을 잃지마라!”
“결코 슬퍼하지 않았던 성인들처럼, 언제나 행복하라!”
“형제자매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놀라라! 육화없이는 그리스도교는 이념이 된다(Without the incarnation, Christianity becomes ideolagy).”
“두려움에 마비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움을 꿈으로 바꿔라.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신비에 놀라라!”
젊은이들에게 준 교황님 말씀이 참 멋지고 은혜롭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마다 체험하는, 만나는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마다 만나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이자 주님을 닮아 그 자신 역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됩니다.
또 반갑고 고마운 소식은 7.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 메시지에서 교황님은 “한국인들이여! 평화의 예언자가 돼달라” 당부했습니다. 유흥식 추기경은 메시지 대독후 “교황님께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경로로 수차례 전하셨다. 북한이 초청하면 거절하지 않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북한에 꼭 가고 싶으니 나를 꼭 초대해 달라.”고 말씀하셨다며, “남북이 70년동안 서로 갈라져 왕래도 없이 지내는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교황님의 뜻”이라며 교황의 방북 의지를 다시금 전했습니다.
교황님 재위시 북한 방문이 이루어져 남북의 화해와 평화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꿈꾸며 고대합니다. 이모저모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 반갑고 기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날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은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사랑하는 세제자들에게 당신의 변모를 체험케 하십니다. 그대로 당신 부활의 영광을 체험시키니 말그대로 광야 여정중의 오아시스 체험이자 신비체험입니다. 여러분도 주님 변모의 신비를 체험하고 싶습니까?
주님의 변모체험을 갈망하십시오. 참으로 간절히 끊임없이 한결같이 깨어 주님 만남을 갈망할 때 주님은 만남의 신비체험을 선물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갈망의 사람, 다니엘이 그 모범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을 밤의 환시중에 체험하는 다니엘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하늘 나라 꿈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사실 당신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주님 변모체험을 일상화해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변모와 더불어 주님을 닮아가는 자신의 변모축일입니다.
세제자들은 주님의 참 면모를 보고 싶은 갈망이 깊었기에 마침내 선물처럼 주님의 변모를 체험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높은 산이 상징하는 바, 바로 내 삶의 꽃자리이며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찾는 갈망에 눈만 열리면 영광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상시에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누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금물입니다. 이탈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을 만난 신비체험에 감격한 베드로의 집착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부정적 경향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선의로 포장된 이기적 독점의 유혹입니다. 베드로의 집착에 즉시 제동을 걸고 제자리를 찾게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충고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나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씀은 세제자들 마음 깊이 각인되어 평생 깨어 분발케 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보다시피 이때의 감격을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집중하여 경청할 것을 권하는 베드로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언행이 정말 섬세하고 치밀합니다. 하늘에서의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려 몹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 손을 대시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한마디 추가한다면 “내가 너와 함께 있다”일 것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두려움을 떨처버리고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함구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여정에 항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갈망-만남-이탈-경청-추종의 영적 삶의 리듬따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 특히 사도 베드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초막 셋을 만들어 그곳에 머무르기를 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변모는 그 자체로 신비로운 체험이고 그 빛은 따듯함과 평화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빛이 아니라 천상의 빛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그 천상의 빛 안에 머무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과 기도 안에서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그분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비로움에 머무르고 싶겠지만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주님에 대한 체험은 그 자체로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잡거나 우리 마음대로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선물로서 잠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바로 우리 삶이 터전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신비로운 주님의 응답은 가슴속에 간직한 채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하루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신비로움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와 늘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일상의 주님과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수박 주스
오전 미사를 봉헌하고
더위에 헐떡이며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직원들이 내 손에 들려준
수박 주스.
수박 주스….
수박 주스….
한참을 책상 위에 두고 바라만 봤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그냥 바라만 봤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그것이 크든 작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박 주스 안에
마음이 가득 들어있으니까요.
고기나 한턱내야겠습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57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재능을 알아준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겨우 25%였지요. 회사가 나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는 직원의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까요? 재능을 알고 여기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업무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전에 직원 채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중에 이를 이야기하니, 한 사람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쉬고 대신 평일에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제가 맞춰야죠. 뽑아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채용되었을까요?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춰야 채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내게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할까요? 주님께서 내 재능을 몰라준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계속 머물러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제자들이 원할 뿐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진 주님 모습에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든 전교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이해하면서 오해하고, 오해하면서 이해합니다(정유민).
---------------------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키엣 대주교님.
변모 < 23.08.06 13:37>
성화 속의 예수님은 영광스런 빛, 후광이 비치고 있지만 거룩한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바로 그 모습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형제 자매의 얼굴에서 무형의 하느님, 창조주이신 거룩한 성령의 모습을 보고 있지만 항상 잊고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9)
예수님 모습에 익숙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얗게 변모하시자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그 순간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던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 2. 1.16-18).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아주 갑자기, 한 순간 반짝이는 빛이었으나 곧 다올 고통과 부활을 예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치욕의 십자가에 못 받히는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끝에 예수님의 육체는 영원한 영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고 절제와 인내 속에서 진실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습도 밝게 변모될 것 입니다.
높고 고요한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한번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짊어진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직접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형제 자매의 믿음과 사랑, 희망에 가득 찬 모습에서 주님의 변모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나의 영혼과 얼굴을 변모시키는 것이 바로 참회입니다.
주 예수님,
기도 속에서 저희가 서서히 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주님을 마주할 때마다 제 눈빛이 변하고, 묵주 기도를 올릴 때마다 제 말이 부드럽게 변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제 귀가 변하고, 주님을 만날수록 제 모습이 더욱 더 빛나게 하여주소서.
가족과 이웃들이 저희 미소 속에서 주님의 밝은 미소를 느끼고 저의 말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길을 묵묵히 따라갈 수 있도록 인내와 용기를 주시고 그 길 끝까지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2. 다른 사람들은 나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떠올릴까요?
3. 나의 가족과 나의 교회, 나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말씀의 나눔
1. 거룩한 주님의 변모는 세상과 인류를 바꾸는 시작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의 가족과 교회를 좀 더 밝게 빛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내면의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
23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막>
산 아래서
벗들을 품어야할
보잘것없는 거친 초막에
지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빛나는 초막을 맛보이시려
주님께서 올라가시네
산 위에
아쉬울 것 없는
우리만의 초막을 짓자는
들뜬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아래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든 이 깃들 초막을 지으시려
주님께서 내려오시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