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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 송 가 수 ( C - 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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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카브렐 Francis Cabrel
1953년 11월 23일 알프스 남서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구두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15세가 되던 때에 가수가 되기로 결심, 마을의 무도회장 등에서 밥 딜런, 레오나드 코헨, 질 영의 노래를 불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1980년 3집 앨범을 발표할 때까지는 슬로우 계열의 음악을 주로 했으나 그 이후로는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 프랑스를 대표하는 로커로 성장했다. 카브렐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사회 문제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데 앞장섰다.
마야 카사비앙카 Maya Cassabianca
1941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프랑스인인 조선 기사, 어머니는 스페인인이었다. 그 후 3년간 이스라엘에서 산 뒤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의 항구를 전전하고 1958년 프랑스에 왔다. 60년 봄 프로방스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같은 해 레코드를 취입하여 이국적인 필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모리스 슈발리에 Maurice Chevalier
영화 배우로서도 낯익은 슈발리에는 1888년 파리의 노동자 동네 메닐몽탕에서 페인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직업의 견습공이 되고 12세 경부터 노래를 부르고 르뷔에 출연했다. 미스탱게트의 상대역을 지낸 데서 그녀와 맺어지고 유명해졌다. 도미하여 영화에도 출연하고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전성 시대를 쌓아올렸다. 전쟁 후 파타슈를 후원하여 세상에 내보냈고, 1956년 아랑브라 극장에서 가수로서의 은퇴 공연을 열었다.
앙드레 클라보 Andre Claveau
1915년 12월 17일 파리의 상업 지구 세블 가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실내 장식상이며 그도 장식가가 되었으나, 이윽고 취미로 부르던 노래가 노래 자랑 대회에서 우승하여 뮤직홀과 카바레 가수로 데뷔했다. 1936년에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하고 39년에는 이미 일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중단한 뒤 1945년에 재출발, 50년 '작은 합승마차'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매혹의 샹송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Mademoiselle Hortensia, Domino, Cerisier roses et pommiers blancs 등의 히트작을 냈다.
필립 클레 Philippe Clay
독특한 개성을 지닌 남성 가수 겸 배우로, 1927년 3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종전 후 콩세르바투아르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고전극 등을 했으나 앙드레 클라보의 권유로 가수로 전향했다. '트루아 보테'로 데뷔해 금세 인기를 얻고 1955년 'La Goualante du pauvre Jean' 등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쥘리앵 클레르 Julien Clerc
본명은 폴 알랭 르클레르라고 하며 1947년 파리 태생이다. 1968년 뮤지컬 코미디 '헤어'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 1970년 올랭피아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음악 세계는 바이브레이션이 풍부한 목소리와 초현실주의적인 가사, 창의적이며 다양한 멜로디로 특징지워진다. 1980년부터는 록 음악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전과는 반대로 음악이 가사에 우선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피아 콜롱보 Pia Colombo
1937년에 출생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굴뚝 청소부, 어머니는 집시였다. 어렸을 때 양친이 이탈리아 순례 여행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가 수도원에 버리고 말았다는 불행한 성장 배경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발레리나를 지망했으나 병을 얻어 가수로 전향했고 1956년에 데뷔하고 59년에는 올랭피아 극장에 진출했다. 연극에도 출연,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감동적인 샹송을 들려준다.
샹송의 법 Les Compagnons de la chanson
샹송에는 많지 않은 코러스 그룹의 하나로, 1941년 리옹에서 결성된 레지스탕스 단체. 프랑스의 동료들이 프랑스 남부의 피난민을 위문하기 위해 루이 리에발을 리더로 하여 음악의 벗이라는 소년 코러스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후까지 계속되어 1946년 파리의 '보비노'에 출연했으며, 이듬해 '음악의 벗'은 둘로 갈라지고, 새로 9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샹송의 벗'이 태어나 에디트 피아프에게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다. 1946년 '세 개의 종'이 대히트, 48년 '라 마리'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고, 그 후 최고의 실력과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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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다오 Etienne Daho
1957년 1월 14일 렌 태생. 록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영어로 학위를 받았다. 직접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들도 많으나 프랑수아즈 아르디, 실비 바르탕 등에게 곡을 주어 작사가 겸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달리다 Dalida
1935년 1월 17일 이탈리아 카라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요란다 질리오티다. 어린 시절에 일가는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주하고, 그녀도 거기에서 자랐다. 1954년 미스 이집트로 뽑혔고, 몹시 좋아하는 노래로 입신할 결심을 하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몇 개의 카바레에 출연한 뒤 56년 4월 올랭피아 극장의 오디션을 받고 합격했다. 심사원 뤼시앵 모리스에게 인정받고 후에 결혼했으며, '밤비노'를 취입하여 레코드에 데뷔하고, 이것이 크게 히트해서 인기 가수가 되었다.
자클린 다노 Jacqueline Dano
1953년 11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1952년 1월 파리에 나가 연극을 배우고 54년부터 무대에 섰다. 그 후 병을 얻고 코트 다쥐르로 옮겼으며, 또다시 파리에 올라가 고생을 거듭한 뒤 1959년 10월 샹송 가수로 전향했다. 이듬해 1월 보비노 극장에 나가 성공을 거두었다. 연극의 소양에 뒷받침된 가창은 실력이 충분하다.
다미아 Damia
1929년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라마리즈 다미앙이다. 어려서부터 고용살이를 했으며, 샤틀레 극장에서 단역을 맡기도 했다. 이윽고 로베르티의 가르침을 받고 괴테 몽파르나스 극장에서 데뷔하지만 실패하고, 얼마 후 사샤 기트리의 눈에 띄어 아랑브라 극장에 출연한 뒤부터 차츰 팔리기 시작했다. 프레르, 이본 조르주와 나란히 전쟁 전의 3대 현실파 가수의 한 사람이며 'Les Goelands', 'Sobres Dimanche', 'Tu ne sais pas aimer' 등의 히트곡이 유명하다.
다니엘 다리외 Danielle Darrieux
영화 배우 겸 가수로, 1917년 5월 1일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14세 때 음악 학교에 입학, 바이얼린을 배우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에 '무도회'라는 영화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영화계에 입문(1931년), 이후 미모의 대스타로서 많은 영화에 주연했다. 샹송 가수로서도 활약하고 1960년에 디스크 대상을 획득했다.
다니 도베르송 Dany Dauberson
1926년 리옹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영화 배급 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그녀에게 영어와 노래를 배우게 했다. 이것이 도움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에 진주한 미군 장병 위문 쇼의 감독이 되고, 얼마 후 그녀 자신도 부르기 시작했다. 이집트를 반 년간 순회 공연하고 성공을 거둔 뒤, 파리에서 데뷔를 했다. 오히려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낮은 목소리로서,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데뷔 드 수아레 Debut de soiree
1986년 여름 혜성 같이 나타난 남성 2인조 댄스 음악 그룹으로, 원래는 덴마크인이다. '광란의 밤' 이외에도 '삶과 밤' 등의 히트작을 내놓았으나 댄스 음악의 퇴조로 급격하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프랑스 랩의 시조'라고도 부를 수 있다.
프랑수아 드겔트 Francois Deguelt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타르브에서 태어나 바르베즈유에서 자랐다. 1951년 파리에 나가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52년 파리의 센 강 좌안의 카바레에서 샹송을 부르며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것을 프랑시스 클로드가 인정해서 53년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데뷔, 아내 프랑스 올리비아의 피아노를 반주로 노래했다. 1956년에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비교적 소박한 존재였으나 65년에 그의 작품 '하늘과 태양과 바다'가 대히트했다.
뤼시엔 들릴 Lucienne Delyle
1920년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모 밑에서 자랐다. 1939년 라디오 시티의 '신인 뮤직홀'이라는 아마추어 콩쿠르에서 '외인부대의 깃발'로 1위가 되어 가수로 데뷔했다. 이듬해 파라마운트 카바레에 출연, 레몽 르그랑 악단의 반주로 노래했는데,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트럼펫 주자 아메 발레리와 사랑에 빠져 1944년에 결혼했다. 47년 발레리 악단이 반주한 'Emb-rasse-mpo'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1957년에는 'Java'로 또다시 ADF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에 백혈병으로 쓰러져 1962년 4월 10일 몬테 카를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셀린 디옹 Celine Dion
'미녀와 야수'의 주제가를 불러 우리나라에 알려진 가수다. 캐나다 출산의 여성 가수로 오빠와 디온스 패밀리를 결성, 공연을 갖기도 했다. 파워가 넘치는 목소리가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미국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노래를 부른다.
자쿠 두에 Jacques Douai
1920년 12월 11일 두에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본명은 가스통 탕시옹이며, 예명은 물론 태어난 곳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47년 파리의 카바레에 데뷔했고, 프랑시스 클로드에게 발견되어 방송에도 출연했다. 1954년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 민요나 그것에 준한 시적인 작품을 기타로 치면서 소박하게 불러 깊은 감명을 준다.
마리 뒤바 Marie Dubas
전쟁 전, 환상파 여성 가수의 제1인자로, 파리의 15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연극을 공부하고 여우로서 활약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중단, 전쟁이 끝날 무렵 이집트에 가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귀국 후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 대성공을 거두고 스타가 되었다.
이브 뒤테유 Yves Duteil
1949년 파리 태생으로 대학에서는 음악 학부를 졸없했다. 1974년 스타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했고, 1977년 골든 디스크를 수상하면서 완전히 히트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간단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에 음악과 가사를 가장 잘 혼합시키는 가수이며 안티 스트레스가 음악의 모토다. 현재는 프랑스의 작은 시의 시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이른바 샹송계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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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이셰 Stephane Eicher
1960년 베른 태생, 어려서는 '개구쟁이들을 위한 특수 학교'에 다녔다. 형과 함께 그룹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 지금은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 걸프전 당시 발표한 5집 앨범 '엔젤머그'에 수록된 곡 '평화 속에서의 식사'가 크게 히트했다. 5개국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도 재능을 보이는 그는 현재 취리히에서 살고 있다.
엘자 Elsa
1973년 5월 20일 파리에서 작곡가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이미 영화에 데뷔해서 아역 배우로서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엘자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바로 1986년 영화 '내 인생의 여인'에 출연, '떠나지 마세요'를 부르면서다. 이후 87년 싱글 '내 마음 속의 무엇'을 발표하면서 확실한 인기를 굳혔고, '눈 오는 날', '우정 이야기' 등이 담긴 1집 '엘자'를 히트시키면서 하이틴 스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을 했다.
엠마뉘엘 Emmanuelle
1963년 7월 19일 파리 태생. 홀어머니에게서 자란 무남독녀로 원래 전공은 미술이었다. 원래 잘 알고 지내던 도로테의 권유로 첫 45회전판 '난 널 마카오에서 불로'를 발표하고 5개월이 지난 1986년 5월 올랭피아 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에서보다도 미국에서의 진출이 돋보인다.
엔조 엔조 Enzo Enzo
본명은 쾨린 테르노브제프이며, 러시아의 작가이자 시인인 푸쉬킨의 손녀이며,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고골리의 조카로 러시아의 혈통을 타고났다. 어려서 프랑스의 록 트리오 '릴 드롭'에서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블랑쉬 네주(백설 공주)'로 옮기면서 이름을 엔조 엔조로 바꾸었다. 그리고 파시피코라는 카페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폴린 에스테르 Pauline Ester
1963년 12월 18일 프랑스 남부 툴루즈 근처의 몽지스카르 태생. 본명은 사브리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피아프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원래 안달루시아 출생인 아버지는 플라맹코를 가르쳤다. 플라맹고 댄서로 시작한 연예인 생활은 곧 그녀가 가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를 끈 노래는 '열린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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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렌 파르메르 Milene Farmer
1961년 9월 12일 캐나다의 몬트리얼 출생. 10살 때 이미 노래 경연 대회에 출전, 1위에 입상한 바 있다. 첫 히트작은 '엄마가 틀렸어요'이며, 특히 뮤직 비디오를 통해 외국(헝가리와 아시아는 물론 일본에 이르기까지)에 많이 알려졌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잘 묘사해내는 가수로 호평을 받고 있다.
프랑수아 펠드만 Francois Feldman
1956년 5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제임스 브라운의 영향을 받고 그룹 활동을 시작, 디스코텍에서 키보드 주자로 일을 했다. 초기에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가 45회전판인 '단지 너'라는 음반을 내면서 계속적으로 45회전판 히트곡을 발표했다. 디스코 계열과 발라드 계열의 음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장 페라 Jean Ferrat
1930년 12월 26일 브크레송 태생의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1954년 데뷔하여 나이트클럽에서 자작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 작품을 쥘리에트 그레코 등이 다루어 먼저 샹송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1960년부터 뮤직홀의 무대에 서서 활약, 63년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레오 페레 Leo Ferre
유니크한 작품으로 알려진 작사, 작곡가 겸 가수로서 생 제르맹 데 프레의 귀재라고 불렸다. 그는 1916년 8월 24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해 이윽고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피아노를 배우고 레오니드 샤바니에프에게 작곡법을 습득했다. 전쟁 후 그가 작사한 샹송 '파리의 연인들'을 에디트 피아프가 다룬 데서 힘을 얻어 1946년 파리에 진출,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쳤으나 호평을 받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부인 마들렌과 만나 그녀의 사랑에 의해 재기했다. 한때 클래식 작품을 쓴 뒤 1952년 샹송계에 컴백. '남자', 'Paris Canaille' 등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1955년 자작인 'Le Piano du Pauvre'로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리안 폴리 Lians Foly
본명은 엘렌 폴렉스로 1962년 12월 6일 리옹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이미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어머니는 아마추어 재즈 가수, 언니는 피아니스트, 오빠는 드럼 주자를 하는 등 음악 가족을 이루었으나 불행히도 아버지가 마약 중독자였다. 1973년 첫 무대에 올랐으며, 꾸준한 노력으로 88년 빅투아르 들 라 뮈직에서 그 해의 여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동양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녀는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국적인 음식을 즐긴다.
클로드 프랑수아 Claude Francois
1939년 2월 1일 이집트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17세 때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몬테카를로의 클럽에서 타악기 주자가 되었다. 1962년 파리에 나가 가수로서 데뷔했고, 이듬해 63년 '천사의 해머'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자작곡과 포크송을 즐겨 부르고 있다.
자클린 프랑수아 Jacqueline Francois
1922년 1월 20일 파리 근교의 고급 주택지 뉘 쉬르 라 센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자클린 기유모트다. 아버지는 로자라는 화장품 회사의 사장이었다. 처음에는 영화계를 동경하여 필름의 편집자가 되었으나, 1945년 라디오의 노래 자랑에서 우승하고 가수로 데뷔했다. 밴드 리더인 폴 뒤랑에게 인정받아 48년 '이것이 봄' 및 '봄'의 두 곡을 첫 녹음했고, 이것이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영화 '파리의 스캔들'의 주제가 'Mademoiselle de Paris', 'Bolero'를 사운드 트랙에 취입해 대히트가 되었다. 그 후 'Les Lavadieres du Portugal'로 1956년 ADF 디스크 대상을 획득했다. 미국의 발라드 창법을 마스터한 바 있는 제1급의 가수이며, 가수 앙리 데켈의 부인이다.
프레데리카 Frederica
프랑스의 남부 마르세유 태생의 여성 가수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경인데, 53년 같은 마르세유 출신인 프랑크 푸르셀의 권유로 레코드를 취입하고 프로로 데뷔했다. 방송과 카바레 등에서 노래학 5년만에 중견 가수가 되었다.
프레르 자크 Les Freres Jacques
1944년에 노동 문화 협회의 사람들이 결성한 남성 4중탕단으로, 멤버 앙드레 및 조르주 베레크 형제와 폴 투렌, 프랑수에 수비랑 등 네 명의 코러스를 피아니스트 피에르 필립이 반주한다. '재산 목록'으로 1951년 디스크 대상을 수상, 56년에는 오페레타 '아름다운 아라벨'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 판토마임을 샹송과 결부시킨 멋진 무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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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의 네 사나이 Les Quartes Barbus
1938년 피레네 지방의 바캉스 캠프에서 서로 알게 된 네 사람이 결성한 보컬 그룹으로, 처음에는 '길벗'이라는 이릉을 썼다. 전쟁으로 활동을 중단했으나 1945년에 다시 만나 '수염의 네 사나이'라고 이름을 고쳐 활약을 시작했다. 1950년, 52년(ACC), 55년(ADF)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네 사람 모두 진짜 수염을 기르고 코믹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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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트 르나르 Colette Renard
1930년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집의 재봉사였다. 어려서 첼로를 배우고 12세 때에는 어떤 소극장에서 막간에 연주한 적도 있다. 13세 때부터 양품 잡화의 점원을 비록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한 뒤 악단 지휘자 레몽 르그랑의 비서가 되었다. 1908년생인 르그랑은 파리의 파퓰러 음악계의 대가인데, 그 덕분에 르나르는 악단의 직속 가수가 되었고, 18세 때 ABC 극장의 르뷔에 출연했고, 1956년 8월 도빌 콩쿠르에서 '나무와 사랑'을 부르고 조르주 브라생스상을 수상했다. 동년 뮤지컬 '온순한 이르마'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따. 57년 LP 판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받고 그 명성을 확립했으며, 레몽 르그랑의 부인이다.
르노 Renaud
1952년 5월 11일 파리 태생으로 쌍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수이자 소설가였으나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이곳 저곳 전전하다가 16세가 되던 해 집을 나와 서점의 점원으로 또는 길거리 가수로 생활했다. 75년 앨범 제작자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을 낸 후 2년 후인 77년에 '콘크리트를 내버려둬'로 크게 히트를 친다. 오랜 기간 공백기를 거쳐 1991년 '자갈 상인'을 발표했으며 클로드 베리 감독의 영화 '제르미날'에서 열연했다.
린 르노 Line Renaud
주로 르뷔에서 활약하는 여성 가수로, 본명은 자클린 앙테라고 하며, 1928년 7월 2일 아르망티에르와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모가 경영하는 카페에서 노래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연합군 장병에게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 가수가 되었다. 전쟁 후 파리에 나가 '폴리 베르빌'에 출연 중 작곡가 루이 가스테와 알게 되어 그 지도와 사랑을 받고 결혼했다. 1946년 이후 영화에도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고 49년 남편이 작곡한 '캐나다의 나의 오두막'으로 디스크 대상을 획득하여 명성을 확립했다.
티노 로시 Tino Rossi
달콤한 노래 소리로 크나큰 인기를 얻었던 남성 가수로, 1907년 4월 29일 코르시카 섬의 아야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콘스탄티노 로시이며,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했으나 집은 가난하여 남프랑스의 군대에 들어가 그대로 본토에 정착하고 마르세유의 카바레에서 노래했다. 이윽고 파리에 나가 1934년 ABC 극장에 데뷔하고 '카지노 드 파리'의 지배인 앙리 베르나르에게 인정받아 그 무대를 밟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6년 주연 영화 '마리넬라'의 주제가가 대히트하여, 모든 여성이 동경하는 대스타가 되었다. 전쟁 후 얼마 동안은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해 활동이 활발치 못했으나 46년 ABC 극장에 나가 컴백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기력이 왕성하게 활약한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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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사블롱 Jean Sablon
1906년 3월 25일 파리 교외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작곡가이고 집안에는 음악가가 많다. 17세 때 '부르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의 오디션을 받고 연예계에 들어가 1930년에는 '카지노 드 파리'의 르뷔에 출연했다. 그 후 미국에서도 활약하고 '떠나가는 그대'를 불러 36년도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마이크로폰을 이용한 가수로서도 알려졌으며, 그 부드러운 창법은 '프랑스의 빙 크로스비'라고 일컬어진다. 주로 외국에서 활약했다.
앙리 살바도르 Henri Salvador
1917년 7월 18일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섬 구아들루프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서 흑인의 피가 섞여 있다. 3세 때 일가는 파리로 이사를 갔다. 형과 함께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기도 했으며, 1935년 장고 라인하르트 악단의 기타 주자가 되고, 41년 제대 후 레이 벤추러 악단에 참가했다. 남미 순회 공연 중에 뽀빠이 흉내를 낸 것이 히트하여 가수가 되었다. 1949년 '원기를 내야지'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코믹한 연기와 노래로 즐겁게 해준다. 작곡으로는 '사랑스러운 인디언' 등의 히트곡이 있다.
테오 사라포 Theo Sarapo
1962년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던 남성 가수로, 그리스인이며 본명은 테오프란시스 랑부스키스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발사로 프레트 쉬르 센에서 개업했으며 그도 이발 기술을 배웠다. 샹송을 좋아해서 티노 로시 풍의 필링으로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려 '티노'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마침 휴양하러 왔던 피아프의 머리를 쪽지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지도와 애정을 받고 21세 연상의 그녀와 결혼했다. 가수로서 그녀와 함께 62년 올랭피아 극장의 무대에 섰다.
윌리암 셸레르 Willame Scheler
1950년생으로 프랑스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였으나 바르바라의 노래를 반주한 것을 계기로 샹송계에 뛰어들었다. 1975년 첫 앨범 '록 앤 달러'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가수로서보다는 작사, 작곡가로서의 이름이 더 높았다. 대중 음악 외에도 클래식 4중주곡도 여러 편 작곡했으며 클래식 악기를 대중 음악에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셰일라 Sheila
1946년 8월 16일 파리 근교 크레투이용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 아버지는 시장에서 과자 가게를 했다. 8세 때부터 춤을 시작하고 피아노와 노래를 배웠다. 이윽고 학우들과 '레 기타 브러더스'라는 그룹을 만들고 거기서 노래하고 있다가 오디션을 받고 1962년 레코드에 데뷔했으며, 그 타이틀 '셰일라'를 예명으로 했다. 이듬해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잇따라 히트를 기록하고 스타가 되었다.
카트린 소바주 Catherine Sauvage
1929년 5월 29일 낭시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카트린 소니에다. 10세 때부터 소녀 시대를 아누시에서 보냈는데, 노래와 연극에 정열을 불태웠고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에 나가 1947년 장 루이 바로의 연극 연구소에 들어갔다. 친구들의 파티에서 노래하던 중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의 매니저 모아제스에게 스카웃되어 이튿날부터 가수로서 데뷔했다. 1954년 레오 페레 작의 '사나이'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작자의 'Paris Canaille'를 대히트시켰다. 61년에도 레오 페레의 작품을 모은 LP로 ADF 디스크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지적인 샹송을 부르는 제1인자이다.
베르트 실바 Berthe Silva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활약하고 인기가 놓았던 여성 가수로, 1886년 브르타뉴의 생 브리유 태생으로 본명은 베르트 파케다. 어린 시절을 브레스트에서 보낸 뒤 가수가 되어 파리의 카바레에서 노래했다. 1928년 방송을 통해 순식간에 인기를 획득하고 레퍼터리는 1000곡이 넘는데 약 450곡을 레코드에 취입했다. 1940년에 마르세유에 정착하고 41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
알랭 수숑 Alain Souchon
원래 가수로 시작하여 영화계에 진출한 스타로 1945년 5월 27일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원하던 공부보다는 파리 센 강 서안에 번창하던 카바레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963년부터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1971년 첫 45회전판 '나는 방랑자'를 내놓았으며 73년에 혹평을 받은 '사랑 1830'을 내놓고 나서 로랑 불지와 만났다. 그 이후 공동으로 히트곡을 많이 냈다. 또 불지와 서로 곡을 주고 받으면서 나란히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영화에도 진출했는데 늦게 시작한 배우 활동치곤 여배우 복이 많다는 평을 들으며 카메라가 잘 받는 드문 가수 중 한 사람이다.
쇠르 수리르 Soeur Sourire
이름은 '미소짓는 시스터'라는 뜻으로, 그녀의 본명은 루크 가브리엘이라 하며, 벨기에의 피셰르몽에 있는 도미니크파의 수도원에 사는 수녀다. 30여 년 전에 이 수도원에 한 여류 바이얼리니스트가 들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시스터들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고 코러스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다 친근미가 있는 샹송의 형태로 전도가를 만들었던 바, 그 하나인 'Dominique'가 1962년도에 크게 히트했다.
베르나르 스테판 Bernard Stephane
1938년 2월 26일 태생의 남성 가수로, 소년 시대를 노르망디에서 보내고 13세 때부터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작곡에도 재능을 나타내고 달콤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필링으로 인기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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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트레네 Charles Trenet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샹송에 재즈의 요소를 도입하여 혁명적인 진보를 가져온 공로자다. 1913년 5월 18일 프랑스 남부의 나르본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최초의 샹송을 만들었으며 그 곡은 신문에 실렸다. 17세 때 파리에 나가 촬영소의 조수가 되었다. 이윽고 피아니스트 조니 에스와 알게 되어 '샤를과 조니'라는 이중창팀을 편성하고 데뷔했다. 1936년 군대에 들어가 영창 안에서 만든 샹송 '기쁨 있도다'를 이듬해 37년 '카지노 드 파리'의 르뷔에서 모리스 슈발리에가 부른 후 이름이 알려졌다. 1938년 ABC 극장에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Boum'으로 동년도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 50년도에도 'Voyage au Canada'로 수상한 바 있다. 'L'ame des poetes', 'La Mer', 'Coin de rue' 등 수많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조르주 윌메르 Goerges Ulmer
'샹송계의 채플린'이라고 일컬어지는 쇼맨십이 풍부한 남성 가수로 작사, 작곡도 한다. 1919년 2월 16일 덴마크의 코펜하겐 출신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스페인에서 영어 교사가 되었으나, 내란을 피해 프랑스의 니스로 건너가 카바레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파리에 나가 인기를 높였다. 1947년 '몹시 취해서'를 부르고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으로는 'Pigalle'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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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발레리 Claude Valery
여루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1909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콩세르바투아르에서 공부했다. '공화국의 구멍'이라는 카바레에서 시인 겸 가수 레몽 아소의 반주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결혼했다. 아소의 시를 가지고 발레리가 작곡한 1951년의 작품 '작은 개양귀비처럼'은 물루지가 불러 53년의 디스크 대상을 획득했다.
실비 바르탕 Sylvie Vartan
1944년 8월 15일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어린 시절 파리에 이주하여, 빅토르 위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오빠 에디 바르탕이 밴드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만두어 대역으로 노래부르고, 그대로 노래하는 일을 계속했다. 록 조의 노래를 중심으로 매력적인 연기, 가창으로 인기를 획득했다., 조니 알리데와 연애 결혼했다.
코라 보케르 Cora Vaucaire
시적인 정시에 넘친 노래를 들려주는 뛰어난 여성 가수이며, 마르세유 출신으로 처음에는 배우였으나 1939년 파리 방송극의 아마추어 노래 자랑에 우승하고 가수로 전향했다. 41년 ABC 극장의 신인 콩쿠르에서 '부드러운 샹송'을 부르고 1위가 되어 에디트 피아프와 프레르에게 인정받았다. 1955년 'Rose blanche를 포함하는 LP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라 토마토'라는 카바레의 경영자가 되고 거기서 노래불렀다. 시인 미셸 보케르의 부인이다.
에르베 빌라르 Herve Vilard
1946년 7월 24일 파리의 랑데부가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양친은 이탈리아계였는데 생후 3개월의 그를 버리고 행방불명되었다. 그래서 빈민 구제 사업의 대상이 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따금 자선가의 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는데, 그 한 집에서 달리다와 질베르 베코의 샹송을 듣고 가수를 꿈꾸었다. 1964년 레코드 회사의 오디션을 받고 무난히 합격하여 그 해 레코드에 데뷔했으며, 이듬해 65년 자작인 'Capri, c'est fini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기 스타가 되었다.
플로랑스 베랑 Florence Veran
여성 가수 겸 작곡가로, 파리의 콩세르바투아르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때문에 중퇴하고, 전쟁 후인 1947년부터 샹송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1951년 아즈나부르의 가사에 곡을 붙인 'Je hais les dimanches'를 쥘리에트 그레코가 도빌 콩쿠르에서 노래하고 에디트 피아프상을 수상했고, 그녀 자신도 자작을 부른 LP로 56년의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록 부아진 Roch Voisine
캐나다의 퀘백주에서 태어났으나, 뉴 브런스워크의 영어권 지방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하게 되었고,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영어로 된 노래와 불어로 된 노래를 함께 섞어 선곡을 한다. 사랑의 아픔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가수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발라드 뿐 아니라 록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의 장르를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음악성과 함께 뷰직 비디오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연기력마저도 지닌 가수다. 원래 그의 16살 때의 꿈은 캐나다의 프로 하키 선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그 꿈이 좌절되었을 때, 후에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된 폴 뱅상을 만나게 되었고, 폴 뱅상의 권유에 의해 연예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로랑 불지 Laurent Voulzy
1948년 크레올(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태생으로 트로피칼한 리듬이 특색이 있는 가수다. 1977년 여름, 록 음악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과 1960년대 풀의 멜로디를 록에 가미, 록 음악에 변화를 시도했다. 자신의 음악 뿐 아니라 알랭 수숑에게 준 곡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 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완벽주의자로 모든 곡의 녹음을 반드시 프랑스 내에서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8년 '그녀가 상상한다'와 '나의 노래'로 이제 히트 가수 대열에서 물러설 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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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랑글루아 Simone Langlois
1935년 파리 태생의 여성 가수로, 5세 무렵부터 피갈가의 카페에서 노래했다. 47년 장 오앙이 에디트 피아프를 닮은 그녀의 목소리에 흥미를 갖고 방송에 출연시키기도 하고 순회 공연하는 일행에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 후 잠시 존재가 희미해졌으나 53년에 복귀했고, 58년에 최초의 LP 음반으로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카트린 라라 Catherine Lara
1945년 푸아시 태생으로 13세에 바이얼린을, 21세에는 챔버 음악을 배우는 등 원래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디스코라마'에 출연하여 반주자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러 곡의 싱글을 발표했다. 특히 신세사이저를 이용하여 목소리와 합성하는 등 그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시도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포크와 록, 동양적인 또는 폴리네시안적인 음악을 시도하면서 네오 클래식한 분위기를 잃었다. 활력있고 폭발적인 제스처와 목소리가 트레이드 마크로 무대 매너가 강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글로리아 라소 Gloria Lasso
1928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의과 대학에서 외과 공부를 하는 한편 노래를 좋아하여 방송국에 출입하면서 프로그램 사회자가 되었다. 이어 그 프로그램의 가수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을 때 기타를 치면서 노래불러 대역을 하고, 가수로서 데뷔하는 기회를 잡았다. 1949년 레코딩하여 대성공했으며 각지를 순회 공연하고 54년에 파리에 도착, 이듬해 올랭피아 극장에 진출했다.
마르크 라부안 Marc Lavoine
1962년 8월 6일 롱쥐모 태생. 8살 때 니노 페레의 음악을 듣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83년 두 번째 싱글앨범인 '너와 함께하는 기긴 춤'이 큰 히트를 한 후, 90년에는 '일요일의 사라'에 수록되어 있는 '친애하는 그대에게'와 '퐁텐 거리'가 히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히트 가수의 대열에 들어섰다.
르네 르바 Renee Lebas
1917년 4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 처음에는 저널리스트 지망생이어서 신문사에 다녔다. 16세 때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불렀지만 본격적인 데뷔는 1938년이었다. 이듬해에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전쟁 후 컴백하여 인기를 되찾았다. 딕션(화법)의 능란함은 정평이 나 있다.
막심 르포레스티에 Maxime Leforestier
1949년 음악 가족의 한 일원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피아노, 바이얼린, 기타를 배웠으며, 68년 5월 사태를 겪은 이후 사회상을 노래에 많이 담아냈다. 조르주 무스타키, 조르주 브라생스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한 그는 그 닷시 '새로운 샹송 새데의 기수'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음악의 이듬을 프랑스에 도입한 주역이다.
프랑시스 르마르크 Francis Lemarque
1917년 11월 25일 파리의 상업 지대 뤼 드 라프에서 태어난 작사, 작곡가 겸 가수로, 12세 때 인쇄소의 견습공이 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했으며, 이윽고 형과 함께 듀엣을 편성하고 '르마르크 형제'라는 이름으로 샹송계에 대뷔했다. 시인 자크 프레베르와 알게 되어 그의 소개로 조제프 코스마가 형제의 반주를 한 적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쟁 후 프레베르의 소개로 이브 몽탕과 친해지고 몽탕은 르마르크 작의 '합승마차의 마부' 등을 불러 디스크 대상(1951년)을 받았다. 그것을 전후하여 르마르크 자신도 솔로 가수로 활약을 시작하여, 1949년 레코드에 첫 취입하였으며, 56년에 자작곡인 'Le Grenouille'를 부르고 ACC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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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마시아스 Enrico Macias
북아프리카 알제리 태생의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스페인 사람으로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사람이었다. 14세 때 처음으로 기타를 다루고 18세 경에는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장래는 교사가 될 계획이었으나, 이윽고 일가는 동란을 피해 마르세유로 이주했고, 그는 카바레에 출연하여 아르바이트를 했다. 1962년 파리에 나가 성공했으며, 그 64년의 작품(작곡만 했음) '연심'은 널리 유행했다. 64년과 65년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했고, 그 가창은 이국적인 창법으로 동양적인 맛을 갖고 있다.
리나 마르즈 Lina Marzy
코레즈 현의 볼 레 조르그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가수가 된 계기는 그녀가 다니던 사무소의 동료들과 내기를 한 일이었다. 얼마 후 라디오 오디션에 합격, 파리에서 레코딩했다. 최초의 히트는 1943년에 취입한 '작은 백포도주', 그 뒤 많은 카바레와 뮤직홀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 정감 넘친 아름다운 샹송을 들려준다.
루이스 마리아노 Luis Mariano
1920년 8월 12일 프랑스와 국경을 접한 스페인의 도시 이룬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미술 학교에 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스페인 내란 때문에 1938년 프랑스의 보르도로 이주했다. 2년 후, 음악 학교에 들어가 오페라를 공부한 뒤, 1942년 파리에 올라가 오페레타에 데뷔했다. 달콤한 노래 소리로 인기를 높였다.
마르잔 Marjane
1918년 8월 26일 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마리잔 장도뱅이다. 2년 쯤 법률 공부를 한 뒤 빈의 음악 학교에서 배우고 1937년 레코드에 처음으로 취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돌일어로 노래했기 때문에 전후 '대독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아 노래를 부를 수 없었지만 1948년에 컴백했다. 55년의 영화 '사랑 많은 여자'에도 출연한 바 있다.
잔 마스 Jeanne Mas
1957년 2월 28일 알리캉트 생으로 아버지는 프랑스인, 어머니는 스페인인이다.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이태리어, 무용과 성악을 공부한 그녀는 19세 되던 해 이태리에 와서 모델 수업을 받고 모델로 활약했다. 1984년 첫 싱글 '처음으로'를 발표한 이후 첫딸 빅토리아의 출산으로 인해 2년 여의 공백이 있었다. 현재 로마에 거주 중이며 딸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레유 마티외 Mireille Mathieu
1946년 7월 22일 아비뇽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13명의 형제 자매 중 맏딸이다. 가정은 가난하여 공장에 다니면서 자랐다. 15세 때 아비뇽의 샹송 콘테스트에서 1위가 되었다. 이윽고 바르클레 레코드의 사장 에디 바르클레에게 스카웃되어 1965년 12월 신인 콘테스트에 출연, 이듬해 66년 봄, 데뷔 레코드 '사랑의 신조'가 대히트하고 일약 스타가 되었다. 목소리와 창법이 에디트 피아프와 비슷하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스케일이 큰 실력의 소유자다. 1966년 9월에는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제2작인 '눈물로 보는 그대'도 히트하였다.
아르망 메스트랄 Armand Mestral
1917년 11월 25일 파리 태생의 남성 가수로, 아버지가 조각가였으므로 그도 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미성을 타고나 소년 시절에는 교회 합창단의 솔로를 맡았다. 그 후에도 노래 공부를 계속하여 오페레타에 데뷔했고 1942년에는 코미디 오페라의 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베이스이기 때문에 노인역 뿐이어서 샹송으로 전향했으며, 방송과 레코드 외에 오페레타에서도 활약했다.
미크 미셸 Mick Michel
1926년 2월 8일 리옹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 겸 작사가로, 본명은 포레트 잔 미셸이다. 리옹의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상업 미술을 하는 한편 샹송을 쓰고, 자기 자신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노래했다. 1947년 리옹의 콩쿠르에서 1위가 되고 49년 파리의 카바레 등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ABC 극장의 콩쿠르에서 자작인 '시를 파는 사람'으로 샹송 드 샤름상, 53년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고, 그 작사로 'Un Gamin de Paris' 등이 유명하다.
미레유 Mireille
여루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샹송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샤를 트레네 등에게 크나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으나 손가락이 짧아 단념하고, 연극으로 전향하여 14세 때 첫 무대를 밟았다. 오데옹 극장에서 장 노앙과 알게 되고, 두 사람의 콤비에 의한 샹송 '건초 안에 누워서'가 필스와 타베의 2중창으로 1932년 디스크 대상을 획등했다. 친구의 권유로 34년 ABC 극장에서 자작을 부르고 가수로서 데뷔했다.
미스탱게트 Mistinguette
전쟁 전의 르뷔계의 대스타로, 1871년(그밖에 여러 설이 있다) 파리 근교 양걍 레 방에서 태어나 소녀 시절에는 꽃을 팔았다. 1893년에 데뷔하고 1906년 막스 데리리와 함께 콤비로 '물랭 루즈'에서 아파쉬 댄스를 추고 크게 인기를 얻었다. 26년부터 30년에 걸쳐 이곳을 무대로 활약하고 르뷔의 여왕으로서 이 방면에 군림, 모리스 슈발리에와의 연애 등 화려한 화제를 뿌렸다. 1951년까지 무대에 섰으나 56년 1월 6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에디 미첼 Eddy Mitchel
1942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록 음악만을 고집하고 있다. 1961년에서 1964년까지 '검은 양말들'이라는 그룹을 친구들과 결성하기도 했고, 곧 미 팝송을 리바이벌하며 독립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름도 일부러 미국적 냄새가 나게끔 고친 것이다. 예예 풍의 노래가 히트를 칠 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음악 활동과 공연을 계속하고 있으며, 영화에도 진출했다.
이브 몽탕 Yves Montand
1921년 10월 13일 이탈리아의 몬스마노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본명은 이보 리비라고 한다. 23년 일가는 파시스트에게 쫓겨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이주했고, 아버지의 기업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도 어린 시절부터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8세 때 이브 몽탕이란 예명으로 데뷔하고 카우보이 차림으로 웨스턴조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944년 파리에 진출했으며, 그 해 '물랭 루주'에출연했을 때 에디트 피아프와 알게 되어 그녀의 충고로 레퍼터리를 바꾸고 성공을 거두었다. 50년의 '바르바라', 51년의 '합승마차의 마부', 52년에 '갈레리앙', 54년에는 에투알 극장의 리사이틀 LP 등 네 번에 걸쳐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다. 1946년의 '밤의 문' 이래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특히 52년의 '공포의 보수'에서의 명연기가 인상깊다.
제르멘 몽테로 Germaine Montero
1909년 10월 22일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 본명은 제르멘 베루시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6개월을 영국에서 보내고 스페인에 건너가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롤카의 문하에 입문, 그 단체에서 여배우로 데뷔했다. 스페인 내란 후 귀국하여 38년 이후 연극, 영화 등에 출연하고, 가수로서는 스페인 민요와 문화적 샹송을 불렀다. 1953년 스페인 민요의 LP로 디스크 대상을 수사앴다.
다리오 모레노 Dario Moreno
1911년 4월 21일 터키의 스미른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배우로, 아버지는 스페인인이고 어머니는 멕시코인이었다. 2세 때 멕시코에 건너가 여기서 자라났다. 마이아치라고 불리는 향토 악단의 가수가 되어 노래부르며 돌아다니던 중 미국의 밴드 리더 막스 알렌에게 인정받아 그의 악단의 전속 가수로서 각국을 순회했다. 1948년 파리에 나가 이듬해 레코드와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52년 도빌의 콩쿠르에서 티노 로시상을 수상했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귀중한 바이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물루지 Mouloudji
1922년 9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사가로, 작가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하며, 배우이기도 한 다채로운 재능의 소유자다. 풀네임은 마르셀 물루지로 아버지는 카리비아인, 어머니는 브르타뉴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신문팔이 등을 하면서 일하다가 10세 때 시인 자크 프레베르에게 발견되어 연예계에 들어가 12세 경부터 아역으로 무대를 밟았다. 1943년 이후 소설에 손을 대고 처녀작 '엔리코'로 플레야드 상을 수상했고, 화가로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전쟁 후 샹송을 쓰기 시작하고, 얼마 후 가수로서 무대에 섰다. 53년 LP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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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가라 Niagara
부부 가수로 여자는 뮈리엘 모레노 라포르트(1963년 1월 24일생), 남자는 다니엘 수느벤(1956년 6월 12일생)이다. 뮈리엘은 원래 예술사를 공부했으나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남편 다니엘을 만나 니아가라를 결성한 후 대중 가수로서 대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뿐만 아니라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미국 등지에서 많은 팬을 확보했다.
마조리 노엘 Majorie Noel
1945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프랑수아즈 니보이다. 노엘이라는 예명은 크리스마스를 의미하고, 또 마조리는 인기 가수 니그 오프레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다방을 경영하는 양친을 도우면서 노래를 공부하고, 1964년 레코드에 데뷔했다. 이듬해 65년의 유러비전 콩쿠르에서는 몬테카를로 대표로서 출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Dans le meme wagon' 등의 히트곡을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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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랑 파니 Florent Pagny
1961년 11월 4일 부르고뉴 지방 출생, 15세 되던 해에 파리로 이사왔다. 처음에는 연극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가 영화 감독의 눈에 띄어 1990년따지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가수로의 데뷔는 1988년 '사크레 수아레'의 제작자. 제라르 루벵의 도움으로 '아무거나'를 발표함으로 치렀다. 바네사 파라디와 동거 생활을 하다가 헤어진 후 활동이 뜸한 상태다.
바네사 파라디 Vanessa Paradis
1972년 12월 22일생으로 14세 되던 해에 '조와 택시'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프랑스 샹송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첫 앨범인 '엠 앤 제이'가 1988년 플래티넘을 기록하면서 영화 '하얀 면사포'에도 출연, 14세의 어린 나이에는 걸맞지 않을 정도의 진한 연기를 하면서 혹평을 받기도 했다. 플로랑 파니와는 1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거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더니 음악을 위해 과감하게 포기하기도 하는 등 프랑스 최대의 스캔들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장 클로드 파스칼 Jean-Claude Pascal
영화 배우 겸 가수로, 1927년 10월 24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디자이너를 지망했는데,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눈에 띄어 그 덕분에 연극 관계의 의상을 손댔다. 이듬해 미셸 오크랠의 권유로 1년간 연기를 배운 뒤 49년에 영화 배우로서 데뷔하여 인기를 획득했다. 노래는 취미였으나, 같은 날 태어난 질베르 베코에게 권유받아 53년 크리스마스 방송에서 불렀는데, 그것을 듣고 있던 레코드 회사의 간부가 계약을 맺고 가수 파스칼이 탄생했다. 1961년 유러비전의 콩쿠르에서 '두 사람은 연인'을 불러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파타슈 Patachou
1918년 경의 6월 19일 파리의 달동네 메닐몽탕의 올피라가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앙리에트 라공이다. 아버지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기능공으로 그녀는 외동딸이었다. 국민학교를 나와 악보 출판상 라울 부르통의 가게에 다녔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어느 비행기 공장의 인사과에 근무했고, 여기서 알게 된 청년과 결혼했다. 전쟁 후 몽마르트르에서 과자집을 개업했고 47년에는 그 옆에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러나 경영이 잘 안 되었으므로 손님을 끄는 수단으로 스스로 샹송을 불러 분위기를 바꿀 생각을 했다. 이로써 가수 파타슈(파트 아 슈, 즉 크림 파르페를 본뜬 예명)가 탄생했다. 모리스 슈발리에에게 인정을 받고 1950년 ABC 극장에 출연했으며, 54년에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서민적인 개성을 가졌고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
샹송계 최대의 여성 가수로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용이라고 하며, 1915년 12월 15일 파리의 노동자 동네 베르빌의 가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리의 예인이고 어머니는 변두리 가수인데, 자선 병원으로 가는 도중 그녀를 낳았다. 이윽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도망가버려 그녀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세상 물정을 알게 된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거리에 나가 구경꾼한테서 돈을 모으는 역을 하고, 15세부터는 혼자 노래불렀다. 마침 그것을 들은 '자니스'라는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프레가 그녀를 자기 가게에서 노래하게 했는데, 반 년 후 르프레가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혐의를 받은 피아프는 실의의 밑바닥에 가라앉는다. 얼마 후 레몽 아소, 마르그리트 모노 등의 결려로 재기했고, '나의 병사님' 등을 부르고 성공을 거두었다. 1940년 장 콕토가 그녀를 위해 쓴 '냉담한 미남'에 의해 배우로서도 눈을 떴다. 1944년에는 '물랭 루즈'에서 이브 몽탕을 알고 그를 사랑하여 열심히 선전했으며, 46년에는 샹송의 벗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 후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49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50년 9월 20일 피아프는 그 때까지 뤼시엔 부아예의 남편이었던 가수 자크 필스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고, 그 4년 후에 이혼했다. 1962년 21세 연하인 테오 사라포와 결혼, 그와 함께 올랭피아 극장에서 노래했다. 그리고 63년 10월 11일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원인으로 요양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간 뒤 세상을 떠났으며, 그 충격으로 장 콕토도 뒤를 따랐다. 노래와 사랑에 산 위대한 여성이었다. 디스크 대당은 'Le chevalier de Paris'(51년), 'Padam Padam'(52년도 ADF)이 있다. 작품(작사)으로는 'Hymne a l'amour', 'La vie en rose'가 유명하다.
자크 필스 Jacques Pills
1914년 태생의 남성 가수로, 의사의 아들로 의학을 배우러 파리에 나가 가수로 전향했다. 1932년 조르주 타베와 2중창팀 '필스와 타베'를 편성하고 뤼시엔 부아예가 경영하는 가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콤비에 의한 '건초 안에 누워서'가 히트하여 같은 해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1939년 뤼시엔 부아예와 결혼하였으나, 둘 다 오페레타에서 활약하다가 1949년에 이혼했는데, 이 두 사람의 아이가 자클린 부아예다. 50년에 질베르 베코를 피아노 반주자로 하여 미국을 순회 공연했으며, 52년 뉴욕에서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하고 56년에 이혼했다.
미셸 폴나레프 Michel Polnareff
러시아계의 작곡가 레오 폴의 아들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한 뒤, 기타를 갖고 프랑스 각지와 런던에 건너가 롤링 스톤즈와 애니멀즈의 영향을 받았다. 1966년 '농, 농, 인형'의 히트로 인기를 획득했다.
파우와우 Pow Wow
1992년 인기를 싹쓸이하듯 나타난 프랑스의 4인조 남성 아카펠라 팀이다. 만화 영화 '라이온 킹'에도 등장했던 음악 'The lion sleeps tonight'을 불어로 번안한 노래 '오늘 밤 사자가 죽었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룹이다.
세르주 갱즈부르 Serge Gainsbourg
1928년 4월 2일 파리에서 태어난 작사, 작곡가 겸 가수로, 본명은 뤼시앵 갱즈부르다. 양친 모두 러시아인으로 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재능을 발휘했지만, 그 자신은 화가 지망이어서, 그 때문에 피아노와 기타를 치고 생활비를 벌었다. 1954년 미셸 아르노에게 인정받아 그녀의 반주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동시에 샹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아르노나 프레르 자크에 의해 불려져 성공을 거둔 뒤, 1958년 아르노가 남편 프랑시스 클로드와 함께 경영하는 지하 술집 '미롤 랄수유'에서 자작을 부르고 가수로서 데뷔했다. 영화 '군침'에도 출연했다. 그 최초의 LP로 1959년도의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 65년 유러비전 콩쿠르에서 그의 작품 '꿈꾸는 샹송 인형'을 프랑스 갈이 불러 우승하여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프랑스 갈 France Gall
1947년 생으로 음악 가족의 한 일원으로 태어났다. 프랑스 갈의 아버지는 샤를 아즈나부르가 부른 '라 맘마' 등을 작곡한 유명한 작곡가이다. 초기에는 예예 풍의 노래를 많이 불렀으며, 1965년 '춤추는 샹송 인형'으로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그 후 10여 년간 공백 기간을 가지다가, 미셸 베르제를 만나면서 샹송계의 선두 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영미 팝의 영향을 많이 받아 팝 음악 풍의 노래를 히트시켰다.
이본 조르주 Yvonne Georges
벨기에 태생의 여성 가수로, 다미아, 프레르와 함께 전쟁 전의 3대 현실파 가수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브뤼셀에서 배우로 활약한 뒤, 제1차 세계 대전 중 파리에 나가 올랭피아 극장 지배인의 권유를 받고 거기서 노래불러 유명해졌다. 1926년 경까지 무대에 섰으나 심장병을 앓고 병원에 들어가 28년 세상을 떠났다.
이베트 지로 Yvette Guraud
한국인과도 친숙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이베트 우롱이라 하며 1916년 9월 14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테 말코니 레코드 회사의 타이피스트가 되어 일하는 동안 그 목소리의 매력을 인정받고 1945년 말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Mademoiselle Hortensia'를 방송에서 불러 히트시키고 이것이 그녀의 별명이 되었다. 1952년 '시인의 혼'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1955년, 57년에 극동에 와서 샹송 붐을 불러일으키고 그 후에도 거의 매년 해외 공연을 갖고 있다.
장 자크 골드만Jean-Jacques Goldman
1951년 10월 11일 생으로 외국인계 부모(아버지는 폴란드계, 어머니는 독일계)에게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는 부모의 권유로 클래식 음악을 배웠다. 14세가 되던 해부터 리듬 앤 블루스 음악에 심취한 그는 1967년 '팔랑스테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고 기타리스트로 활약을 하게 된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1973년 결성한 '타이 퐁'도 나름대로 인기를 얻으며 3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당시 그의 음악 성향은 하드록과 블루스였다. 1981년 '영미 팝을 소화해낸 프랑스 샹송'의 틀을 만들면서 샹송을 발표한 그는 이후 공연 실황 앨범을 포함하여 총 10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쥘리에트 그레코 Juliette Greco
1927년 2월 7일 몽플리에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도르도뉴와 보르도에서 어린 시절을 모내고 7세 때부터 파리에서 자랐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머니가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여 언니와 함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15세의 그레코는 혼자 살아가게 된다. 전쟁 후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지하 술집에 출입하는 동안 그 검은 스웨터와 지저분한 바지가 사람 눈을 끌어 '실존주의의 뮤즈'라고 소문이 나면서 그녀의 사진이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그 인기에 착안한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의 경영자가 손님을 끌기 위해 그녀를 가수로서 노래부르게 하는 데 성공하여 하룻밤에 새로운 스타가 되었다. 1951년 도빌의 콩쿠르에서 'Je hais les dimanches'를 불러 에디트 피아프상, 52년에 'Romance'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64년에 피에르 마콜랑의 작품을 부른 LP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프랑스어의 뉘앙스를 살린 시적인 샹송을 들려주는 뛰어난 가수다.
조르주 게타리Georges Guetary
오페레타계의 남성 가수. 1915년 2월 8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그리스계이며, 본명은 람브로스 월룬이라고 한다. 20세 때부터 파리의 상업 학교에서 배웠으며, 숙부가 피아니스트인 타소 야노포우로였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가와 알게 되고, 니농 바랑에게 성악을 배웠다. 조 비용 악단의 전속 가수를 거쳐 미스탱게트에게 인정받아 르뷔에 출연했으며, 1942년부터 레코드에도 활약했다.
이베트 길베르 Yvette Guilbert
벨 에포크의 위대한 여성 가수로, 186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노르망디에서 보내고 18세 때 모델이 되었으며, 23세 때 희극 여우로서 첫무대를 밟았다.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디방 자포네, 물랭 루즈 등의 대스타가 되었다. 샹송의 화법을 확립하여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으로, 194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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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알리데 Johnny Halliday
미국의 처비 체커와 나란히 트위스트를 전 세계에 유행시킨 남성 가수로, 1943년 6월 15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군 병사, 어머니는 프랑스 여성이다. 얼마 후 아버지는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성장하자 조니는 곧잘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아버지의 농원에 놀러가 기타의 초보를 배웠다. 아버지가 다른 형의 부부는 댄서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유럽 각지를 돌면서, 공연 막간에 카우보이송을 불렀다. 14세 때 미국에서 빌 헤일리의 연주를 듣고 귀국 후 록에 열중하여, 나이트 클럽이나 방송에 출연하면서 16세로 성공을 얻었다. 1960년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 트위스트 붐의 원동력이 되었다.
자크 이쥴랭 Jacques Higelin
1940년 센 에 마른에서 태어났다. 일정한 틀이 없이 그때 그때 새로운 음악을 잘 소화해내는 가수로 정평이 나 있다. 처음에는 영화, 연극을 했으나, 1968년 사라바의 일원이 되면서 샹송계에 뛰어들었다. 1975년 완벽한 록 앨범 'BBH75'를 발표한 이래로 나름대로의 하드록, 블루스, 부기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갔다. 앨범도 상당히 개성이 있지만 특히 라이브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리 고티 Lys Hauty
1908년 2월 14일 르베로와 페레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알리스 고티에이며 아버지는 운전수여서 생활이 어려워 봉제 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는 한편 오페라 극장의 합창단원에게 노래를 배웠다. 얼마 후 올랭피아 극장의 오디션을 받고 1924년에 데뷔했다. 각지를 순회 공연하는 밑바닥 생활을 계속하여 1933년 '서푼짜리 오페라'의 '바르바라의 노래', '해적의 신부'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오페레타와 영화에도 출연했다. 한국에서는 'A Paris dans chaque faubourg', 'Le chaland qui passe'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활동 기간은 짧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은퇴하여 모나코에 살고 있다.
루디 이리과옌 Rudy Hirigoyen
1919년 피레네 산기슭의 망디옹드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바스크인이고 어머니는 브르타뉴 출신이었다. 가계를 돕기 위해 어려서부터 일을 했으며, 이발사가 될 뻔했으나, 1938년 방송의 노래 자랑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테노르 콩쿠르에서 1위를 획득하여, 가수로서 데쉬했다. 전쟁으로 중단된 뒤 전후 샤틀레 극장의 코러스 보이가 되고 1947년 루이스 마리아노의 대역으로 무대에 섰다. 이후 주로 오페레타 분야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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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장메르 ZiZi Jeanmaire
1924년 4월 29일 파리에서 태어난 발레리나 겸 여성 가수로, 본명은 르네 장메르. 9세 때부터 발레를 배우고 국립 오페라 극장의 발레과에 들어갔다. 이윽고 롤랑 프티가 '발레 드 파리'를 결성했을 때 ㅡ 파트너로 초빙되어 성공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 후 몬테카를로 발레단으로 옮기고 미국 순회중에 프티와 재회하여 결혼했으며, 이후 이 콤비는 특이한 발레 커플로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1951년 '다이아몬드를 먹는 여자'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57년 2월 아랑브라 극장에서 공연하고 미스탱케트의 뒤를 잇는 노래와 춤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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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시아 카스 Patricia Kaas
블루스나 재즈, 로큰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장르와의 접목을 시도하는 파트리시아 카스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6년 12월 12월 5일 프랑스 북부 로렌에서 태어났으며 8살 때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1985년에 정식으로 가수로 데뷔한 그녀는 1987년부터 '나의 남자'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파트리시아 카스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물론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어느 가수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랑을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더 두드러지며 자신이 음악 활동을 하는 데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리나 케티 Rina Ketty
이탈리아 태생의 여성 가수로, 젊은 시절 파리에 나가 타이피스트로서 일했다. 노래를 좋아하여 친구의 모임에서 부르기도 하다가 레코드 회사에 채용되어 몇 곡의 히트를 냈다. 1936년에 '내 마음 뿐'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고, 레퍼터리 중에서 특히 '기다립시다'가 유명하다.
프랑시스 카브렐 Francis Cabrel
1953년 11월 23일 알프스 남서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구두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15세가 되던 때에 가수가 되기로 결심, 마을의 무도회장 등에서 밥 딜런, 레오나드 코헨, 질 영의 노래를 불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1980년 3집 앨범을 발표할 때까지는 슬로우 계열의 음악을 주로 했으나 그 이후로는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 프랑스를 대표하는 로커로 성장했다. 카브렐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사회 문제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데 앞장섰다.
마야 카사비앙카 Maya Cassabianca
1941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프랑스인인 조선 기사, 어머니는 스페인인이었다. 그 후 3년간 이스라엘에서 산 뒤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의 항구를 전전하고 1958년 프랑스에 왔다. 60년 봄 프로방스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같은 해 레코드를 취입하여 이국적인 필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모리스 슈발리에 Maurice Chevalier
영화 배우로서도 낯익은 슈발리에는 1888년 파리의 노동자 동네 메닐몽탕에서 페인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직업의 견습공이 되고 12세 경부터 노래를 부르고 르뷔에 출연했다. 미스탱게트의 상대역을 지낸 데서 그녀와 맺어지고 유명해졌다. 도미하여 영화에도 출연하고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전성 시대를 쌓아올렸다. 전쟁 후 파타슈를 후원하여 세상에 내보냈고, 1956년 아랑브라 극장에서 가수로서의 은퇴 공연을 열었다.
앙드레 클라보 Andre Claveau
1915년 12월 17일 파리의 상업 지구 세블 가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실내 장식상이며 그도 장식가가 되었으나, 이윽고 취미로 부르던 노래가 노래 자랑 대회에서 우승하여 뮤직홀과 카바레 가수로 데뷔했다. 1936년에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하고 39년에는 이미 일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중단한 뒤 1945년에 재출발, 50년 '작은 합승마차'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매혹의 샹송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Mademoiselle Hortensia, Domino, Cerisier roses et pommiers blancs 등의 히트작을 냈다.
필립 클레 Philippe Clay
독특한 개성을 지닌 남성 가수 겸 배우로, 1927년 3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종전 후 콩세르바투아르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고전극 등을 했으나 앙드레 클라보의 권유로 가수로 전향했다. '트루아 보테'로 데뷔해 금세 인기를 얻고 1955년 'La Goualante du pauvre Jean' 등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쥘리앵 클레르 Julien Clerc
본명은 폴 알랭 르클레르라고 하며 1947년 파리 태생이다. 1968년 뮤지컬 코미디 '헤어'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 1970년 올랭피아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음악 세계는 바이브레이션이 풍부한 목소리와 초현실주의적인 가사, 창의적이며 다양한 멜로디로 특징지워진다. 1980년부터는 록 음악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전과는 반대로 음악이 가사에 우선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피아 콜롱보 Pia Colombo
1937년에 출생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굴뚝 청소부, 어머니는 집시였다. 어렸을 때 양친이 이탈리아 순례 여행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가 수도원에 버리고 말았다는 불행한 성장 배경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발레리나를 지망했으나 병을 얻어 가수로 전향했고 1956년에 데뷔하고 59년에는 올랭피아 극장에 진출했다. 연극에도 출연,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감동적인 샹송을 들려준다.
프랑시스 카브렐 Francis Cabrel
1953년 11월 23일 알프스 남서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구두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15세가 되던 때에 가수가 되기로 결심, 마을의 무도회장 등에서 밥 딜런, 레오나드 코헨, 질 영의 노래를 불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1980년 3집 앨범을 발표할 때까지는 슬로우 계열의 음악을 주로 했으나 그 이후로는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 프랑스를 대표하는 로커로 성장했다. 카브렐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사회 문제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데 앞장섰다.
마야 카사비앙카 Maya Cassabianca
1941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프랑스인인 조선 기사, 어머니는 스페인인이었다. 그 후 3년간 이스라엘에서 산 뒤 아버지와 함께 지중해의 항구를 전전하고 1958년 프랑스에 왔다. 60년 봄 프로방스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같은 해 레코드를 취입하여 이국적인 필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모리스 슈발리에 Maurice Chevalier
영화 배우로서도 낯익은 슈발리에는 1888년 파리의 노동자 동네 메닐몽탕에서 페인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직업의 견습공이 되고 12세 경부터 노래를 부르고 르뷔에 출연했다. 미스탱게트의 상대역을 지낸 데서 그녀와 맺어지고 유명해졌다. 도미하여 영화에도 출연하고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전성 시대를 쌓아올렸다. 전쟁 후 파타슈를 후원하여 세상에 내보냈고, 1956년 아랑브라 극장에서 가수로서의 은퇴 공연을 열었다.
앙드레 클라보 Andre Claveau
1915년 12월 17일 파리의 상업 지구 세블 가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실내 장식상이며 그도 장식가가 되었으나, 이윽고 취미로 부르던 노래가 노래 자랑 대회에서 우승하여 뮤직홀과 카바레 가수로 데뷔했다. 1936년에 처음으로 레코드를 취입하고 39년에는 이미 일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중단한 뒤 1945년에 재출발, 50년 '작은 합승마차'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매혹의 샹송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Mademoiselle Hortensia, Domino, Cerisier roses et pommiers blancs 등의 히트작을 냈다.
필립 클레 Philippe Clay
독특한 개성을 지닌 남성 가수 겸 배우로, 1927년 3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종전 후 콩세르바투아르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고전극 등을 했으나 앙드레 클라보의 권유로 가수로 전향했다. '트루아 보테'로 데뷔해 금세 인기를 얻고 1955년 'La Goualante du pauvre Jean' 등으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쥘리앵 클레르 Julien Clerc
본명은 폴 알랭 르클레르라고 하며 1947년 파리 태생이다. 1968년 뮤지컬 코미디 '헤어'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 1970년 올랭피아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음악 세계는 바이브레이션이 풍부한 목소리와 초현실주의적인 가사, 창의적이며 다양한 멜로디로 특징지워진다. 1980년부터는 록 음악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전과는 반대로 음악이 가사에 우선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피아 콜롱보 Pia Colombo
1937년에 출생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굴뚝 청소부, 어머니는 집시였다. 어렸을 때 양친이 이탈리아 순례 여행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가 수도원에 버리고 말았다는 불행한 성장 배경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발레리나를 지망했으나 병을 얻어 가수로 전향했고 1956년에 데뷔하고 59년에는 올랭피아 극장에 진출했다. 연극에도 출연,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감동적인 샹송을 들려준다.
샹송의 법 Les Compagnons de la chanson
샹송에는 많지 않은 코러스 그룹의 하나로, 1941년 리옹에서 결성된 레지스탕스 단체. 프랑스의 동료들이 프랑스 남부의 피난민을 위문하기 위해 루이 리에발을 리더로 하여 음악의 벗이라는 소년 코러스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후까지 계속되어 1946년 파리의 '보비노'에 출연했으며, 이듬해 '음악의 벗'은 둘로 갈라지고, 새로 9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샹송의 벗'이 태어나 에디트 피아프에게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다. 1946년 '세 개의 종'이 대히트, 48년 '라 마리'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고, 그 후 최고의 실력과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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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다오 Etienne Daho
1957년 1월 14일 렌 태생. 록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영어로 학위를 받았다. 직접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들도 많으나 프랑수아즈 아르디, 실비 바르탕 등에게 곡을 주어 작사가 겸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달리다 Dalida
1935년 1월 17일 이탈리아 카라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요란다 질리오티다. 어린 시절에 일가는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주하고, 그녀도 거기에서 자랐다. 1954년 미스 이집트로 뽑혔고, 몹시 좋아하는 노래로 입신할 결심을 하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몇 개의 카바레에 출연한 뒤 56년 4월 올랭피아 극장의 오디션을 받고 합격했다. 심사원 뤼시앵 모리스에게 인정받고 후에 결혼했으며, '밤비노'를 취입하여 레코드에 데뷔하고, 이것이 크게 히트해서 인기 가수가 되었다.
자클린 다노 Jacqueline Dano
1953년 11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1952년 1월 파리에 나가 연극을 배우고 54년부터 무대에 섰다. 그 후 병을 얻고 코트 다쥐르로 옮겼으며, 또다시 파리에 올라가 고생을 거듭한 뒤 1959년 10월 샹송 가수로 전향했다. 이듬해 1월 보비노 극장에 나가 성공을 거두었다. 연극의 소양에 뒷받침된 가창은 실력이 충분하다.
다미아 Damia
1929년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라마리즈 다미앙이다. 어려서부터 고용살이를 했으며, 샤틀레 극장에서 단역을 맡기도 했다. 이윽고 로베르티의 가르침을 받고 괴테 몽파르나스 극장에서 데뷔하지만 실패하고, 얼마 후 사샤 기트리의 눈에 띄어 아랑브라 극장에 출연한 뒤부터 차츰 팔리기 시작했다. 프레르, 이본 조르주와 나란히 전쟁 전의 3대 현실파 가수의 한 사람이며 'Les Goelands', 'Sobres Dimanche', 'Tu ne sais pas aimer' 등의 히트곡이 유명하다.
다니엘 다리외 Danielle Darrieux
영화 배우 겸 가수로, 1917년 5월 1일 보르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14세 때 음악 학교에 입학, 바이얼린을 배우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에 '무도회'라는 영화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영화계에 입문(1931년), 이후 미모의 대스타로서 많은 영화에 주연했다. 샹송 가수로서도 활약하고 1960년에 디스크 대상을 획득했다.
다니 도베르송 Dany Dauberson
1926년 리옹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영화 배급 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그녀에게 영어와 노래를 배우게 했다. 이것이 도움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에 진주한 미군 장병 위문 쇼의 감독이 되고, 얼마 후 그녀 자신도 부르기 시작했다. 이집트를 반 년간 순회 공연하고 성공을 거둔 뒤, 파리에서 데뷔를 했다. 오히려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 낮은 목소리로서,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데뷔 드 수아레 Debut de soiree
1986년 여름 혜성 같이 나타난 남성 2인조 댄스 음악 그룹으로, 원래는 덴마크인이다. '광란의 밤' 이외에도 '삶과 밤' 등의 히트작을 내놓았으나 댄스 음악의 퇴조로 급격하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프랑스 랩의 시조'라고도 부를 수 있다.
프랑수아 드겔트 Francois Deguelt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타르브에서 태어나 바르베즈유에서 자랐다. 1951년 파리에 나가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52년 파리의 센 강 좌안의 카바레에서 샹송을 부르며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것을 프랑시스 클로드가 인정해서 53년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데뷔, 아내 프랑스 올리비아의 피아노를 반주로 노래했다. 1956년에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비교적 소박한 존재였으나 65년에 그의 작품 '하늘과 태양과 바다'가 대히트했다.
뤼시엔 들릴 Lucienne Delyle
1920년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모 밑에서 자랐다. 1939년 라디오 시티의 '신인 뮤직홀'이라는 아마추어 콩쿠르에서 '외인부대의 깃발'로 1위가 되어 가수로 데뷔했다. 이듬해 파라마운트 카바레에 출연, 레몽 르그랑 악단의 반주로 노래했는데,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트럼펫 주자 아메 발레리와 사랑에 빠져 1944년에 결혼했다. 47년 발레리 악단이 반주한 'Emb-rasse-mpo'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1957년에는 'Java'로 또다시 ADF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에 백혈병으로 쓰러져 1962년 4월 10일 몬테 카를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셀린 디옹 Celine Dion
'미녀와 야수'의 주제가를 불러 우리나라에 알려진 가수다. 캐나다 출산의 여성 가수로 오빠와 디온스 패밀리를 결성, 공연을 갖기도 했다. 파워가 넘치는 목소리가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미국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노래를 부른다.
자쿠 두에 Jacques Douai
1920년 12월 11일 두에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본명은 가스통 탕시옹이며, 예명은 물론 태어난 곳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47년 파리의 카바레에 데뷔했고, 프랑시스 클로드에게 발견되어 방송에도 출연했다. 1954년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 민요나 그것에 준한 시적인 작품을 기타로 치면서 소박하게 불러 깊은 감명을 준다.
마리 뒤바 Marie Dubas
전쟁 전, 환상파 여성 가수의 제1인자로, 파리의 15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연극을 공부하고 여우로서 활약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중단, 전쟁이 끝날 무렵 이집트에 가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귀국 후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 대성공을 거두고 스타가 되었다.
이브 뒤테유 Yves Duteil
1949년 파리 태생으로 대학에서는 음악 학부를 졸없했다. 1974년 스타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했고, 1977년 골든 디스크를 수상하면서 완전히 히트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간단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에 음악과 가사를 가장 잘 혼합시키는 가수이며 안티 스트레스가 음악의 모토다. 현재는 프랑스의 작은 시의 시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이른바 샹송계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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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이셰 Stephane Eicher
1960년 베른 태생, 어려서는 '개구쟁이들을 위한 특수 학교'에 다녔다. 형과 함께 그룹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 지금은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 걸프전 당시 발표한 5집 앨범 '엔젤머그'에 수록된 곡 '평화 속에서의 식사'가 크게 히트했다. 5개국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도 재능을 보이는 그는 현재 취리히에서 살고 있다.
엘자 Elsa
1973년 5월 20일 파리에서 작곡가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이미 영화에 데뷔해서 아역 배우로서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엘자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바로 1986년 영화 '내 인생의 여인'에 출연, '떠나지 마세요'를 부르면서다. 이후 87년 싱글 '내 마음 속의 무엇'을 발표하면서 확실한 인기를 굳혔고, '눈 오는 날', '우정 이야기' 등이 담긴 1집 '엘자'를 히트시키면서 하이틴 스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을 했다.
엠마뉘엘 Emmanuelle
1963년 7월 19일 파리 태생. 홀어머니에게서 자란 무남독녀로 원래 전공은 미술이었다. 원래 잘 알고 지내던 도로테의 권유로 첫 45회전판 '난 널 마카오에서 불로'를 발표하고 5개월이 지난 1986년 5월 올랭피아 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에서보다도 미국에서의 진출이 돋보인다.
엔조 엔조 Enzo Enzo
본명은 쾨린 테르노브제프이며, 러시아의 작가이자 시인인 푸쉬킨의 손녀이며,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고골리의 조카로 러시아의 혈통을 타고났다. 어려서 프랑스의 록 트리오 '릴 드롭'에서 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블랑쉬 네주(백설 공주)'로 옮기면서 이름을 엔조 엔조로 바꾸었다. 그리고 파시피코라는 카페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폴린 에스테르 Pauline Ester
1963년 12월 18일 프랑스 남부 툴루즈 근처의 몽지스카르 태생. 본명은 사브리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피아프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원래 안달루시아 출생인 아버지는 플라맹코를 가르쳤다. 플라맹고 댄서로 시작한 연예인 생활은 곧 그녀가 가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를 끈 노래는 '열린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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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렌 파르메르 Milene Farmer
1961년 9월 12일 캐나다의 몬트리얼 출생. 10살 때 이미 노래 경연 대회에 출전, 1위에 입상한 바 있다. 첫 히트작은 '엄마가 틀렸어요'이며, 특히 뮤직 비디오를 통해 외국(헝가리와 아시아는 물론 일본에 이르기까지)에 많이 알려졌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잘 묘사해내는 가수로 호평을 받고 있다.
프랑수아 펠드만 Francois Feldman
1956년 5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제임스 브라운의 영향을 받고 그룹 활동을 시작, 디스코텍에서 키보드 주자로 일을 했다. 초기에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가 45회전판인 '단지 너'라는 음반을 내면서 계속적으로 45회전판 히트곡을 발표했다. 디스코 계열과 발라드 계열의 음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장 페라 Jean Ferrat
1930년 12월 26일 브크레송 태생의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1954년 데뷔하여 나이트클럽에서 자작곡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 작품을 쥘리에트 그레코 등이 다루어 먼저 샹송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1960년부터 뮤직홀의 무대에 서서 활약, 63년에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레오 페레 Leo Ferre
유니크한 작품으로 알려진 작사, 작곡가 겸 가수로서 생 제르맹 데 프레의 귀재라고 불렸다. 그는 1916년 8월 24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해 이윽고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피아노를 배우고 레오니드 샤바니에프에게 작곡법을 습득했다. 전쟁 후 그가 작사한 샹송 '파리의 연인들'을 에디트 피아프가 다룬 데서 힘을 얻어 1946년 파리에 진출,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쳤으나 호평을 받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부인 마들렌과 만나 그녀의 사랑에 의해 재기했다. 한때 클래식 작품을 쓴 뒤 1952년 샹송계에 컴백. '남자', 'Paris Canaille' 등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1955년 자작인 'Le Piano du Pauvre'로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리안 폴리 Lians Foly
본명은 엘렌 폴렉스로 1962년 12월 6일 리옹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이미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어머니는 아마추어 재즈 가수, 언니는 피아니스트, 오빠는 드럼 주자를 하는 등 음악 가족을 이루었으나 불행히도 아버지가 마약 중독자였다. 1973년 첫 무대에 올랐으며, 꾸준한 노력으로 88년 빅투아르 들 라 뮈직에서 그 해의 여성 가수상을 수상했다. 동양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녀는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국적인 음식을 즐긴다.
클로드 프랑수아 Claude Francois
1939년 2월 1일 이집트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17세 때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몬테카를로의 클럽에서 타악기 주자가 되었다. 1962년 파리에 나가 가수로서 데뷔했고, 이듬해 63년 '천사의 해머'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 자작곡과 포크송을 즐겨 부르고 있다.
자클린 프랑수아 Jacqueline Francois
1922년 1월 20일 파리 근교의 고급 주택지 뉘 쉬르 라 센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본명은 자클린 기유모트다. 아버지는 로자라는 화장품 회사의 사장이었다. 처음에는 영화계를 동경하여 필름의 편집자가 되었으나, 1945년 라디오의 노래 자랑에서 우승하고 가수로 데뷔했다. 밴드 리더인 폴 뒤랑에게 인정받아 48년 '이것이 봄' 및 '봄'의 두 곡을 첫 녹음했고, 이것이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영화 '파리의 스캔들'의 주제가 'Mademoiselle de Paris', 'Bolero'를 사운드 트랙에 취입해 대히트가 되었다. 그 후 'Les Lavadieres du Portugal'로 1956년 ADF 디스크 대상을 획득했다. 미국의 발라드 창법을 마스터한 바 있는 제1급의 가수이며, 가수 앙리 데켈의 부인이다.
프레데리카 Frederica
프랑스의 남부 마르세유 태생의 여성 가수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경인데, 53년 같은 마르세유 출신인 프랑크 푸르셀의 권유로 레코드를 취입하고 프로로 데뷔했다. 방송과 카바레 등에서 노래학 5년만에 중견 가수가 되었다.
프레르 자크 Les Freres Jacques
1944년에 노동 문화 협회의 사람들이 결성한 남성 4중탕단으로, 멤버 앙드레 및 조르주 베레크 형제와 폴 투렌, 프랑수에 수비랑 등 네 명의 코러스를 피아니스트 피에르 필립이 반주한다. '재산 목록'으로 1951년 디스크 대상을 수상, 56년에는 오페레타 '아름다운 아라벨'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 판토마임을 샹송과 결부시킨 멋진 무대를 보여준다.
아다모 Adamo
1943년 11월 1일 이탈라이의 시칠리아섬 코미조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풀네임은 살바토레 아다모. 4세 때 일가와 함께 벨기에로 이주했으며, 12세 무렵에는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부르고 15세 때부터 가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부에게서 받은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만든 가사에 곡을 붙여 혼자 즐기고 있었는데, 학교 친구들이 권해 콘테스트를 받게 했다. 몇 번 실패한 뒤 한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고, 레코드 회사와 계약, 62년 Sans toi ma mie 가 대히트하면서 스타가 되었다. 그 후에도 잇따라 뛰어난 작품을 쓰고, 스스로 노래부르기도 했다. 65년 파리의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테 알테리 Mathe Altery
1930년 9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부모가 모두 클래식 가수였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는데, 파테 레코드의 피에르 예젤의 비서가 되면서 1951년 우연한 기회에 샹송을 부르게 되었다. 1953년 도빌 콩쿠르에서 <물결이 나에게 키스할 때>를 부르고 앙드레 클라보상을 수상했고, 57년 벨 에포크의 노래를 모은 LP로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샹송 외에 오페레타와 가곡 등을 부른다.
미겔 아마도르 Miguel Amador
1920년 멕시코의 아카풀코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아버지는 집시, 어머니는 멕시코 여성이었다. 5세 무렵부터 노래와 춤을 배우고, 1943년에 레코드를 취입, 영화에도 출현했다. 1951년 프랑스에 건너가 파리에서 데뷔하여, 주로 라틴 리듬의 것을 장기로 하고 있지만 레퍼토리의 폭은 넓다.
마르셀 아몽 Marcel Amont
1929년 4월 1일 보르도에서 태어난 환상파 가수다. 아버지는 국유 철도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고교 시대부터 예인을 꿈꾸고 학교를 중퇴하고 혼자 파리에 갔다. 결핵에 걸리는 등 고생을 거듭한 뒤, 1954년 도빌의 콩쿠르에 입상했고, 56년에는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했으며, 58년의 재차의 올랭피아 극장 공연 실황이 디스크 대상이 되어 인기를 확립했다. 1963년에는 극동에 와서 절묘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다.
아나이스 Anais
1993년 첫 앨범 '학생'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관심을 끌게 된 아나이스에게 미셸 폴나레프와 남편이자 작사가, 작곡가인 디디에 바르블리비앙이 끼친 영향은 그여말로 지대하다. 특히 디디에 바르블리비앙은 그녀의 데뷔 앨범부터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인 '방데 '93'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오늘이 있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리샤르 앙토니 Richard Anthony
1938년 1월 13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11세 때 영국에 건너가 2년간 칼리지에서 배우고, 다시 2년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냈다. 그동안 부모는 파리로 이사를 가서 18세가 된 아들을 법과대학에 넣었다. 대학에서는 바이얼린을, 이어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다. 아버지는 다시 미국에서 전기학을 배우게 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냉장과 세일즈맨이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레코드를 듣고 록에 열중, 폴 앵카의 레코드에 맞춰 자기 목소리를 취입한 테이프를 각 레코드 회사에 보내 인정받는 데 성공하고, 58년에 음반 취입을 시작했다. 60년 이후에는 자기의 악단을 결성하고 활약했다.
앙투안 Antoine
1946년 6월 4일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섬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양친과 함께 프랑스에 건너갔다.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다루어 이윽고 록과 포크송에 흥미를 갖고 스스로 작곡했다. 1966년 음반계에 ㄷ뷔하여 순식간에 인기를 높였다.
미셸 아르노 Michele Arnaud
프랑스의 남부 툴롱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는 인텔리로서, 노래는 오히려 취미였으나 이윽고 시인 프랑시스 클로드와 결혼하고 그가 경영하는 카바레에서 노래했다. 1952년 도빌의 콩쿠르에서 플로랑스 베랑 작각의 '그대는 바랐다'를 부르고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처음에는 문학적 샹송을 즐겨 불렀지만 요즘에는 원숙미를 더해 대중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레몽 아소 Raymond Asso
시인 겸 가수로, 1901년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출생, 15세 때 모로코에 가서 입대, 1923년에 귀국했다.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소설을 쓰고, 얼마 후 에디트 피아프와 알게 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를 격려하여 'Mon legionnaire' 등의 걸작 샹송을 만들었다(작곡은 마르그리트 모노). 1946년부터 스스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 반주자인 클로드 발레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콤비에 의해 'Comme un p'tit coquelicot'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이자벨 오브레 Isabelle Aubret
1939년 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1962년 '첫사랑'을 불러 유러비전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착실하게 인기를 높여 중견 가수로서의 지위를 쌓았다.
위그 오프레 Hugues Aufray
1932년 8월 18일 뤼 쉬르 센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로, 영화 배우 파스칼 오브레의 오빠가 된다. 처음에는 건축학을 배웠으나, 이윽고 기타를 다루고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활약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작은 술집을 열고 거기서 4년간 연주한 뒤 몬테카를로와 이탈리아를 돌고, 파리에 돌아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포크송이나 자작곡을 레퍼터리로 하고, 올랭피아 극장의 실황 녹음으로 1965년도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비키 오티에 Vicky Autier
니스에서 티어난 여성 가수로, 니스 음악 학교에 들어갔으며, 이어 파리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함께 피아니스트를 그만 두고 무용수로 전향했으나, 얼마 후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샹송을 부르게 되었다. 1955년 경부터 미국과 유럽 각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인기를 높였다.
샤를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
현대 최고의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1924년 5월 22일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애서 태어났다. 양친은 아르메니아인이고 그의 본명은 샤를 아즈나브리안이다. 집안 대대로 가수이며, 그도 어려서부터 아역으로 무대에 섰다. 1942년 피에르 로쉬와 만나 2중창으로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46년 경부터 작사를 시작하여 로쉬 곡인 'J'ai bu'와 조르주 윌메르의 노래로, 이듬해 47년도의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고 명성을 높였다. 1950년 로쉬와 헤어지고, 에디트 피아프에게 인정받아 솔로 가수로 출발, 이 무렵부터 작곡에도 손대고, 55년 올랭피아 극장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고, 57년에는 연예지의 인기 투표에서 1위가 되었다. 영화에도 출연하여 세련된 연기를 보여주는 재주꾼으로, 'Me-que, me-que', 'Je hais les dimanches'의 작사, 'La mamma'의 작곡 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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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 송 가 수 ( A - B )샹 송 가 수 ( A - B )
알랭 바슝 Alain Bachung
1948년 스트라스부르 생으로 가수로 데뷔한 지 15년 동안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보냈다. 코미디 뮤지컬 등을 하며 미국, 독일 등지를 돌아다니던 그는 1980년 유머러스한 가사의 '가비 오! 가비'의 히트로 명실상부하게 프랑사를 대표하는 로커로 성장했다.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
미국 출신의 여성 가수로, 1906년 6월 3일 미주리주 센트루이스 출생. 아버지는 스페인인, 어머니는 흑인이다. 가난의 밑바닥에서 자라 8세 때부터 춤을 시작했고, 1923년 브로드웨이의 흑인 뮤지컬에 무용수로 출연했다. 25년 파리에 도착, 샹젤리제 극장의 '흑인의 르뷔'에서 챨스턴을 추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카지노 드 파리의 르뷔에서 'J'ai deux amours' 등을 부르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전쟁 후 세계 각국의 고아를 맡아 길렀다. 56년 4월 10일 올랭피아 극장에서 극적인 은퇴 공연을 했으나, 59년 같은 극장의 르뷔 '사랑의 파리'에서 장기 흥행을 기록하고, 멋지게 컴백했다.
바르바라 Barbara
자작곡 외에 자크 브렐이나 조르주 브라생스의 작품을 레퍼터리로 하는 뛰어난 여성 가수로, 1930년 경 출생했다. 이스라엘인이었으므로 제2챠 세계 대전 중 나치의 추격을 피해 부모와 함께 각지를 전전했다. 그 동안 노래가 그녀의 삶의 보람이 되고 음악 학교에서도 배웠다. 전쟁 후 '셰 무아노'라는 레스토랑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1960년 브라생스의 작품을 부른 LP로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고, 65년 피아노를 치면서 자작을 부른 LP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레 바르클레 Les Barclay
1959년 12월에 결성된 바르클레 레코드의 전속 합창단. 남녀 각 12명으로 이루어진 혼성 코러스이며, 오케스트르의 지휘자로서 유명한 레몽 르그랑의 딸 크리스티엔 르그랑(미셸 르그랑의 누나)이 지퓌를 맡고 있다.
알랭 바리에르Alain Barriere
1935년 11월 18일 브르타뉴 지방 라 트리니테 쉬르 라 메르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본명은 알랭 베레크다. 로리앙, 앙제 및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뒤, 졸업 후 4년간 공예 기사로 일했다. 1959년 샹송계에 들어가 59년 최초의 작품을 발표, 프랑시스 르마르크에게 인정을 받고 코크 들 라 샹송 콩쿠르에서 르마르크는 그 그 '카티'라는 노래를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2년 유러비전 콩쿠르의 프랑스 대표가 되어 'Elle etait si jolie'를 불렀고, 2위 작품으로는 그밖에 '마리 지오콩드', 'Ma vie' 등의 히트 작품이 있다.
기 베아르 Guy Beart
1931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사, 작곡가로, 니스의 학교에 들어가 10세 때 바이얼린을 배우며 음악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16세 때 파리에 나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으나, 엔지니어로 전향했으며, 기사 자격을 얻어 건설부에 근무했다. 어느 날 실연의 슬픔을 노래로 엮어 술집에서 친구들에게 불러 들려주고 있었던 바, 손님인 자크 카네티가 이것을 듣고 그와 계약했다. 그 작품 '벌써 일 년 전의 일'은 지지 장메르에 의해 불려져 히트했고, 그 자신도 기타를 들고 가수로서의 데뷔를 장식했다. 1958년 ADF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에 영화 '강은 부르고 있다'의 주제가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배우 엠마뉘에 베아르Emmanuelle Beart의 아버지.
질베르 베코Gilbert Becaud
1927년 10월 24일 프랑스 남부의 툴롱에서 태어난 남성 가수 겸 작곡가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고 34년의 파리제 때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42년 니스의 음악 학교에 들어가 피아노과 수석이 되었다. 21세 때 파리에 나가 단편 영화의 영화 음악 작곡을 하는 한편 나이트 클럽의 피아니스트를 지내고, 1950년부터 가수 자크 필스의 반주자로서 2년간 남북 아메리카의 순회 공연을 가졌다. 이 동안 필스의 가사에 곡을 붙인 '나는 그대에게 홀딱 반해'라는 샹송이 1952년 에디트 피아프에 의해 초연되고 세상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듬해 가수로 데뷔하고 54년에 자작인 'Quand tu danses'가 ADF 디스크 대상을 획득, 명성을 확립했다. '무슈 10만 볼트'라고 불리는 다이나믹한 창법으로 샹송에 새 경지를 개척했다. 영화에도 출현했고,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등의 작곡도 있다.
미셸 베르제 Michel Berger
프랑스의 유명한 의학 교수의 아들로 1947년 태어났다. 1961년 '예 예' 풀의 노래를 잠시 부른 적이 있으나, 곧 작곡가로서 더 유명해졌다. 가수로서는 별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1992년 테니스를 치던 도중 급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아내인 프랑스 갈 뿐만 아니라 온 프랑스 내에 큰 슬픔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그와 동년배의 가수들에 대한 재평가 혹은 활동 재기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했다.
크리스티앙 보렐 Christian Borel
1926년 일송에서 태어나, 1951년부터 파리의 카바레 등에서 노래하고 54년 오페레타 '빌리티스의 노래'에 출연하고 세상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코라 보케르가 경영하는 카바레 등에서 노래했다. 달콤한 테너 목소리를 지닌 남성 가수다.
자클린 부아예Jacqueline Boyer
!942년 파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자크 필스. 어머니는 뤼시엔 부아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모리스 에스캉드의 연극 교실에서 배우는 한편 노래 레슨을 받았다. 57년 어머니의 헝가리 순회 공연에 동행하여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노래불렀다. 1960년 유러비전 콩쿠르에서 'Tom Pillibi'를 부르고 그랑프라를 획득했고, 같은 해의 코크 들 라 샹송 콩쿠르에서는 '처음의 날처럼'으로 2위를 수상했다. 59년부터 어머니가 몽마르트르에 만든 카바레 '셰 뤼시엔'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이 카바레에 나온 신진 가수 프랑수아 뤼비아나와 결혼, 62년에 엄마가 되었다.
뤼시엔 부아예 Lucienne Boyer
1930년 '사랑의 말을'로 디스크 대상을 받은 이래 그 달콤한 노래 소리로 일세를 풍미한 여성 가수다. 1903년 경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에밀리엔 앙리에트 부아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나서 여공과 모델로 일하고 아테네 극장의 타이피스트가 된 뒤, 그 지배인의 주선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딕션(발음 교정) 선생의 충고로 가수로 전향하여 데뷔한 것은 16세 때의 일이었다. 이후 긴 밑바닥 생활이 계속된다. 1830년 '사랑의 말을'로 겨우 성공을 잡고 레퍼터리는 종래의 어두운 현실적인 샹송에서 달콤한 사랑 노래로 일변했다. 1939년 그녀가 경영하던 카바레의 가수였던 자크 필스와 결혼, 41년에는 프랑크 푸르셀을 발견하고 자기의 반주자로 삼았다. 49년에 필스와 이혼했다.
조르부 브라생스 Georges Brassens
기타를 치면서 자작곡을 부르는 전쟁 후 최대의 샹소니에로, 1921년 10월 22일 남불 세트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다. 세트 및 몽플리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40년 파리에 나가 방랑 생활을 했다. 1952년 학생 시대의 동료로 당시는 주간지 '파리 마치'의 기자를 하던 테롱이라는 남자가 그를 '셰 파타슈'(파타슈의 가게)에 데려가 여기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1954년 '우산', '무덤 파는 인부'로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57년 영화 '리라의 문'에 출연했는데, 그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와 유며에 넘치고 때로는 상당히 에로틱하여 프랑스에서 종종 방송을 금지당하고 있다.
자크 브렐 Jacques Brel
자작 샹송을 부르는 남성 가수로, 192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한 회사의 사장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경부터 코러스를 만들어 병원 위문 등을 하다가 54년 파리에 나가 최초의 레코드를 취입하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57년에 자작 자창의 LP로 ACC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그 작품은 성실하고 때로는 상당히 난해했으나, 59년 'La Valse a mille temps'의 대히트 이래 친근미 있는 곡도 쓰게 되었다. 올랭피아 극장에 자주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파트릭 브뤼엘Patrick Bruel
1959년 5월 14일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CF 촬영을 하면서부터 조금씩 스타덤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1980년부터는 거의 격년으로 음악과 영화에서 골고루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영화 배우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계속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다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음반 제작자인 제라르 프라스귀르백과 1984년 '이 여잔 이제 지겨워'르 첫 싱글로 발표한다. 1986년 첫 앨범인 '얼굴을 맞대고'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는 이제 가수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듬해 그는 파리의 올랭피아에서 첫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와 연극에서 다진 무대 매너는 라이브 공연에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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