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4-9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말을 보면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은 자로서 그분의 말씀만을 따라간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400년 후에 이루어질 것이므로(15:13-16)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써 끝까지 “나그네” 정신을 갖습니다. 또 헷족속의 말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이방인들 앞에서도 빛과 소금이었기에 이방인들도 그를 존경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러할찌라도 그의 신앙은 요동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인 그가 사람들 앞에서도 “나그네”라는 사실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표현 그대로 본향을 향하는 자 곧 이정표를 보며 소망 중에 사는 자들의 표상인 것입니다.
1. 본문 4-5절은
“④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⑤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입니다.
1) 이 서론적인 문장은 다음의 요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의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애원적으로 그 묘지를 부탁함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으려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의 편에 있는 탐심에 대한 모든 의혹을 제거시키려고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 가운데 단지 불안정한 정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무덤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평생동안 그들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영토에서 거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 죽음을 위하여 마련하는 무덤을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의 발로였습니다.
만약 이 요청을 그들이 허락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겸손으로 그들의 호의를 받게 됩니다. 또 헷의 자녀들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고 선언하는 가운데서 그는 이 같은 찬사로 그들을 자극시켜 그들이 처음에 시작했던 그 관대함을 실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다른 의미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구매자(購買者)라고 그에게 붙여진 오명(汚名)을 피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것을 갖고자 하는 것은 현재 생활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야심이나 탐욕으로 그것을 소유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자기 아내의 시체가 장사되지 않은 채로 버려져 있게 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구매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가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당신들 가운데서 나그네로 계속 사는 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한 것처럼 의미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마치 ‘내가 내 소유로 삼으려고 당신들의 땅을 사들이려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다음에라도 당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살기 위하여 투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장사될 장소만 갖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2. 본문 6절은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입니다.
헷족속은 아브라함에게 장례지를 고맙게도 선뜻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좋아한 곳을 선택하여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줌으로서 아브라함의 덕성에 대하여 답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히브리인들은 무엇이든지 뛰어난 것이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백’이라는 표현으로 위대하고 특별히 탁월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찬양으로 아브라함의 덕성 때문에 그를 경외하고 있으며 그를 또한 특별히 돋보이게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덕성이 찬사를 받거나 경의를 받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그것들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어떤 경건의 씨가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이 대함으로 헷족속 안에서 그 경건의 씨 자체를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으로 희귀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모독적이며 야만적인 사람들은 마치 돼지가 진주를 발로 밟고 뭉개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선물을 야수적인 경멸로 짓밟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민족들이 그런 사악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서 더럽혀져 있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눈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존경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배은망덕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그보다 더 모독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태도의 존엄성이 헷족속의 호의를 받게 했습니다.그들은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서 월등하게 탁월함을 지닌 것을 전혀 시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위엄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그런 덕성을 대하여 그들보다 열등한 존엄성을 가진다면 우리로서 입을 벌려 변명할 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들의 광적인 성질은 악마적입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지독하게 그 호의를 대항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3. 본문 7절은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헷족속이 베풀어 준 호의를 사양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그렇게 작은 일에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의무감을 지우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방법으로 원주민들로부터 전혀 거저 주는 것을 받지 않겠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들의 땅을 상속받게 하기 위하여 축출당하게 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절대로 거저 땅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확고하게 고정된 그의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당장 그 땅을 통치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순수한 약속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모세도 ‘일어나 그 땅 거민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라고 말할 때에 이 거룩한 사람의 위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배하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을 여기서는 단지 존경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경배한다는 말은 누구든지 무릎을 꿇든지 몸을 굽혀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말입니다. 이런 형식의 자세는 사람이나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지만 단지 각각 목적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상호간에 무릎을 굽히거나 서로 바라보면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의 존경의 뜻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목적으로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외에 절대로 다른 것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다른 말로 하면 ὂουλὲια(둘레이아; 종살이 함)와 λατρέια(라트레이아; 예배함)를 흉내내는 것이라고 하는 자들은 유치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면에서 사람들에게 전용된 경배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아브라함이 간곡하게 그처럼 절대 복종적으로 처신했다는 데 놀라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행동이 일반 관습과 용도에서 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동양사람들이 의식을 치르는 데는 지나친 경향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헬라사람이나 라틴사람을 우리 자신들과 비교한다면 그런 면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인색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시아사람들과 기타의 미개인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이 너무도 이런 경의표시에 얽매어 있다는 잘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우리의 관습에 의하여 그 땅 사람들에게 한 경의를 저울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4. 본문 8-9절은
“⑧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⑨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1)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중(二重) 굴을 자기에게 팔게 해 달라고 맡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굴이 일부가 위에 있고 다른 일부가 밑에 있는 굴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굴의 입구는 하나로 되어 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중간 칸막이로 나누어진 동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당시의 시세대로 완전히 지불함으로 그들과 평등함을 개척했으며 또 유지했던 사실은 지적할 만한 일입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장사에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상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물건을 파는 사람은 팔려는 물건에 대하여 두 배의 값을 불러서 되도록 사는 사람에게서 많은 돈을 받으려고 하는가 하면, 그 대신 사는 사람은 갖은 수단으로 얼버무리면서 되도록 이면 값을 깎아내려 싸게 구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며 흥정에는 끝이 없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탐욕이 외양적인 가식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서로 계약을 체결하는 자들을 자극시켜 공정하고 정당한 주장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2) 마지막으로 다음의 사실이 주목해 둘 가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 묘지를 값을 다 치르고 구입했다는 사실을 번번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일에 대하여 더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마음을 일으켜 부활의 소망을 지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절반이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내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축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와 다시 만날 때까지 그 시체를 무덤 속에 감추어 두려는 것입니다. 이런 실질적 소망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격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