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할 운명
사람이 도의 길을 가는 데는 달음질만 쳐서 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비조건과 목적을 성사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갖추어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쳐야 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진리를 잃어버렸고,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렸고, 생명의 본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네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도피하는 자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본향에 가는 것입니다. 본향에 등록할 수 있는 국민이 되려면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악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아야 하고, 타락한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달음질쳐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탄 주권을 하나님 주권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표 밑에서 인간은 진리의 본향, 양심의 본향, 생명의 본향. 사랑의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그곳을 향하여 달려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6천년은 진리를 찾는 노정이었습니다.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데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진리를 찾고 해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달음질쳐 봤댔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입각한 목적관을 가지고 나타나 모든 가치를 타진할 때, 진리가 해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지금 마음의 방향과 더불어 진리의 방향을 더듬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는 진리의 왕이요. 진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인류는 사조(思潮)나 주의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이요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진리와 만인류가 화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륜 도덕, 혹은 사회질서를 세워 나오면서 제시된 것은 양심기준에 응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지을 수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해결했다 할지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걸리게 됩니다. 이 생명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의 마음은 무한의 세계와 인연맺으려 하는데, 이 심적 작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목적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주만 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목적을 중심한 가치적 인연을 벗어나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기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내외적으로 침범해 오는 모든 악의 조건을 방비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반드시 그 목적지가 있을 것이며, 그 목적지에서는 어떤 인연적인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전체목적은 모를지라도 생활적인 가치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는 발전해 나왔으며 문화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문화에 따라 혹은 인지(人智)에 따라 모든 외적인 환경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는 혁명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그대로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마음에 어떤 목적관이 있어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면 무한대로 달려 나갑니다.
남과 북을 향하는 지남철이 방향만 잡히면 그 이상의 당기는 힘이 없는 한 방향을 돌이킬 수 없듯이 양심세계는 어떠한 외래적인 힘으로 움직여내지 못합니다. 그 움직여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절대적인 이념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뚜렷한 목적관이 해명되면 모든 세포나 감정까지도 휩쓸려 들어가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양심작용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합니다. 자기가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합니다. 물론 주체적인 입장에 있지만 몇천 만 배 이상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신을 수습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양심은 본질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하여 관(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생관이니 우주관이니 하는 것. 또 무슨 주의 주장이나 진리의 표상이 나옵니다. 상대성을 지닌 완전체기 때문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으면 완전한 플러스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영원 불변한 완전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완전한 주체를 본받아 그 주체 앞에 상대기준을 조성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턱대고 인간의 마음기준을 옮겨놓으려야 옮겨놓을 수 없습니다. 몸과 박자를 맞추어서 옮겨놓아야 하기 때문 입니다. 먼저 몸을 다스려서 그 몸을 어떤 환경에 몰아넣은 다음 그 심정의 방향을 자연적인 법도와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진리의 법도가 세워지길 하나님은 원합니다. 만약에 세계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원칙과 부합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면, 이 양심은 무한대로 뻗어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를 찾아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문명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이 솟구쳐서 찾고자 하는 무한대의 절대자 앞에 자연적인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도록 재촉하는 진리는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락의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모양으로 가르쳐주고 저 모양으로 뒤넘이쳐 나오면서 하나의 목적에 연결시키기 위한 서글픈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인생행로를 걸고 진리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도피 행로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였겠습니까? 오늘날까지의 인간 역사를 놓고 여러분은 서글프고 비참한 역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진행시켜 나오는 주체자에게는 더 서글프고 비참한 투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투쟁이 없다면 여러분이 편히 눈을 감고 자고 쉴 수 없는 비참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마음은 시작과 끝이요 영혼과 실존적인 본체와 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런 슬픔을 영원히 벗어나 해결 지을 때까지 그것과 똑같은 자극적인 슬픔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슬픔을 재촉한 것이 인간이요 그런 슬픔을 연결시키고 연장시켜 나온 것이 인간이니. 이러한 인간을 대해 심판하는 것은 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