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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마음의 쉼은 어떻게 누리는가?/ 마태복음 11:28-30
(설교자: 마경훈목사)
오늘은 제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2023년 7월 30일에 제가 “아직도 짐이 무겁습니까?”라는 제목으로 한 설교를 거의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들은 좋은 세월 다 간 것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생존경쟁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사는 것이 고생이다.” 인생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고난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난을 겪습니다. 웃으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울면서 태어납니다. 사는 것이 고생입니다.
도스토엡스키는 “이제 죄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입니다. 욥 5:7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습니다.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생에 고생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짐을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짐을 정리합니다.
①죄의 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시편 38:4입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컵에 물을 붓는데 물이 컵의 입구까지 가득 차면 물이 넘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악이 차고 넘칩니다. 사람에게는 이 많은 죄가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은 죄의 짐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하는 영적인 존재인데, 죄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8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줘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말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절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죄로 인하여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응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을 보니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귀가 둔해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누리려면 죄의 짐이 해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25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여기서 이러한 일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포괄적인 은총을 말합니다. 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복으로 받지 못할까요? 그 사람의 허물과 죄가 이러한 것을 물리친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사망입니다. 여기서 사망은 하나님과 단절을 말하고 영혼이 죽는 것을 말하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진짜 치명적인 결과는 지옥입니다. 성경에는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나옵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으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죽었다고 할 때는 이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천국과 지옥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데 절대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혼의 분리입니다.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계 20:14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죄를 처리하지 못한 인간의 종착역은 유황불이 끝없이 타는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②사람의 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모든 사람은 주변에 관계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 친구, 교우, 목회자, 직장 동료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면 좋겠지만 절대 그렇게 안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인간관계가 꼬이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관계가 꼬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무엘하 7:14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하나님은 우리 주의에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픔을 통해서 사람은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감당하기에 벅찬 사람들을 내 주변에 두시고 나의 좁은 마음을 넓히십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에 내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힘든 사람들을 두셔서 나에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런 훈련을 언제까지 시키실까요? 주님에게 합격 판정을 받을 때까지입니다.
③문제의 짐이 있습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한 문제가 해결 되면 다른 문제가 찾아오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언제까지 그럴까요? 죽을 때 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문제가 없을까요? 목사 안수를 받으면 문제가 없을까요? 기도를 많이 하면 문제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문제를 만납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리고 큰 산 같은 문제를 평지로 만드실 수 있는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난 모든 문제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④경제의 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에덴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여 낙원에서 추방 되었습니다.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수고해야만 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경제의 짐이 생겼습니다. 없는 사람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경제가 짐이 되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경제가 짐이 됩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재벌 회장님들은 돈이 많으니까 그 돈 가지고 편히 살면 될 것 같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큰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노력하고 더 고생합니다. 사람은 부모 품을 떠나면 그때부터는 경제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⑤질병의 짐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70이 넘으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옛날에 젊을 때는 죽는 것이 겁이 났었는데, 70이 넘고 보니 진짜로 거짓말 안 보태고 죽는 것은 하나도 겁이 안 난답니다. 진짜 겁나는 것은 아픈 것이래요. “안 아프고 죽어야지요.” 그분은 목사로써 많은 성도들을 돌보는데, 정말로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을 볼 수가 없더랍니다. 안 아프고 죽는 것이 마음에 늘 소원이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는데, 좀 빨리 죽으나 좀 늦게 죽으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죽습니다. 70까지 살았으면 잘 산 것이라 죽는 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아픈 것이 걱정이랍니다. 사람에게는 질병의 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⑥공허함의 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지만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내적인 공허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공허함의 정도로 자신의 충만함을 측정해 보세요. 정말 성령충만하면 내면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해서 만족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소멸한 사람들은 만족이 없고 마음이 공허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더 심하게 공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면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예배로, 기도로, 말씀으로 채워지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느끼며 살 수 있지만 그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 허전함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유명한 소설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거장입니다. 그런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지 4년 만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습니다. 그는 원래 자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삶의 허무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했습니다. 그는 지위도, 명예도, 돈도 있고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슴 속에 하나님을 모시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것입니다. 소설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도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그도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 한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인물이 잘났든 못났든, 마음의 허전함, 영적인 공허함이 인생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삶이 깃털처럼 가볍습니까? 무거운 짐이 없습니까? 본문에서는 우리 인생이 가볍고 쉬워지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수고하고’라는 말은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입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진 자’는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자의에 의한 짐이든 타의에 의한 짐이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쳐 있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쉬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데 또 다른 짐을 짊어집니다. 여러분도 이런 것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의 자물쇠를 여는데 제 열쇠가 아닌 다른 열쇠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쉼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약을 써야 하는데 다른 약을 쓰기 때문입니다. 배가 아픈데 혈압 약을 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신데 다른 방법으로 안식을 찾고 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진짜 안식을 원한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 편에서 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안식을 위하여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28절).
김장환목사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를 했습니다. 나라는 6.25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휴교했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김장환목사님은 미군부대서 하우스보이를 하다가 어떤 군인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큰맘 먹고 미국까지는 갔지만 영어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마음에는 ‘나는 하고 싶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용기는 가득했지만 구사할 수 있는 영어는 겨우 몇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에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 요청해봐! 네가 만일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예수님께서 너의 인생을 책임져주실 거야!” 그때 김장환목사님은 친구의 그 말이 너무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학교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고, 내친김에 전국 웅변대회에 출전해서 1등을 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상도 받았습니다. 김장환목사님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구나.’ 진짜입니다. 해보세요.
28절을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에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보통의 경우 예수님을 처음 만나면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인생의 멍에가 가벼워집니다. 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편의상 1차 안식이라고 하겠습니다. 3차 안식은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세상사에 지친 영혼이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면 세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쉼을 얻게 됩니다. 이때는 정말 행복합니다. 어떤 문제도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 하나로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에게 오므로 누리는 1차 안식입니다.
여러분! KFC를 잘 아실 것입니다. 식당 앞에 서 있는 수염 난 뚱뚱한 할아버지가 KFC의 창업자이신 할렌드 데이빗 샌더슨입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하는 일마다 시원치 않아 빚만 많이 지고 힘들게 살다가 60세의 나이에 파산했습니다. 그는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힘들었습니다. 남은 것은 빚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하려고 병원문을 나섰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였습니다. 그는 이 찬송에 이끌려서 조그마한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혼자 꿇어앉아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 옆에 끓어 앉아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는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한참 울며 회개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근심, 걱정,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자살하려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그가 다시 시작하게 된 일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돈을 날렸기 때문에 자본금이 안 드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통닭집을 시작했습니다. 통닭집이 너무나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 체인점이 되었습니다. 제가 KFC의 샌더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쉽고 가볍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무거운 짐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를 축복합니다.
1차 안식은 길게 가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원할 것 같지만 조금만 지나면 사라집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로운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2차 안식입니다. 2차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온 후에 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입니다.
2. 예수님의 멍에 메야 합니다(29절).
주님의 멍에를 메면 인생이 힘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 힘들 것 같지만 거기에 진짜 안식이 있습니다. 채규현 목사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분이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셨는데,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교회에서 일을 했답니다. 교인이 열 몇 명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사모님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반주를 시작했고, 그 이후 교회에서 끊임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신학교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니까 목회는 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만 하는데, 처음에는 성도님들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괜히 불안하더랍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난 저 강대상에 있어야 되는데, 왜 여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니 편안해서 너무 좋았답니다. 주일에 오전 예배드리고 나서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편안하게 소파에 있으면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야! 교수 생활하기 잘 했다.’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1년, 시간이 지나면서 못 살겠더랍니다. 일중독 때문에 못 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보람이 없어요. 교회 생활을 안 하니까 영 몸이 뒤틀려서 안 되겠어요. 그리고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음의 갈등이 생기는데, 신학생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하고,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자기 마음에서는 점점 은혜가 떨어지더랍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안 하니까요. 그래서 한 1년여 지난 다음에 담임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일을 주시던지, 아니면 다른데 가서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임목사님이 채목사님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교회 일을 하니까 비로소 교회가 내 교회도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채목사님이 미국에서는 날마다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무거운 짐입니다. 이분이 한국에서 교수를 하니 새벽예배 안 가도 되는 겁니다. 처음엔 편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밤에 잠자는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새벽 2시, 3시까지 있다 보면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서 학교 가는 겁니다. 그러니 생활이 엉망이 됩니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교회 일을 하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나 좋더랍니다.
채목사님은 자기 경험으로 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절대 축복이 아니랍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편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채목사님의 목회의 목표 중에 제일 큰 목표가 모든 성도들을 절대로 놀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냥 주일 예배만 똑딱 드리고 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진짜 은혜를 받고 진짜 쉼을 얻으니까요. 채목사님은 주님의 일에 동참하며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 진짜 쉼이고 진짜 안식임을 경험으로 터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좀 빡세게 해야 합니다.
29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첫 은혜를 받고 안식을 누리던 사람이 계속된 안식을 누리려면 주님의 새로운 요구에 응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요구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멍에는 무거운 짐을 함께 끌 수 있도록 동물들의 목에 가로 얹는 구부러진 막대기를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짐을 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30절에서는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합니다. 쉽고 가볍다는 말은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주님이 메신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그 짐은 어렵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그 짐을 주님과 함께 짊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뜻에 맞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하나도 무겁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이 함께 짐을 드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들기에는 충분하고 어린아이가 들 수 없는 짐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짐을 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짐은 어른의 힘으로 드는 것입니다. 어른이 힘을 써서 물건을 들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는 가볍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멍에는 쉽고 여러분의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 혹시 주님 없이 내 힘만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인생이 고달파집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시고 주님과 함께 일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3.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29절).
주님에게 무엇을 배울까요? 그것은 일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배우면 주님의 안식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배운 사람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면을 배워야 할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1)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우십시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십니다. 온유하신 주님은 우리가 온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마 5:5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주님은 온유한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이 말씀은 자연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무섭고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는 멸종 위기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약하고 온유한 양은 지구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람의 입 안에는 이가 있고 혀가 있습니다. 단단한 이는 가끔 부드러운 혀를 꽉 깨물어서 상처를 주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늙으면 단단한 이는 빠져서 없어지지만 부드러운 혀는 죽을 때까지 남아있습니다.
성경에서 온유함의 대명사는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타인을 잘 받아드립니다. 모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여 문둥병자가 된 미리암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그녀를 받아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선까지 받아드릴 수 있습니까? 나의 온유함의 정도는 내가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 만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원수 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자기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누구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모세의 성격은 사역 초창기에는 불같았습니다. 십계명 돌판을 받아서 산에서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보고는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져서 깨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며 마음이 넓어졌고 온유함이 더해졌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가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은 부딪혀도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아가 딱딱한 사람끼리 부딪히면 큰 소리가 납니다.
왜 사람들은 싸울까요? 우리가 누군가와 부딪혀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면 우리는 상대의 자아가 딱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소리 나지 않고 조용하게 처리가 될 것입니다. 온유함은 자아의 부드러움입니다. 그것이 주님 닮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사나운 말과 온유한 말의 차이가 뭡니까? 사나운 말은 사람이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올라타면 껑충껑충 뛰면서 그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온유한 말은 사람에게 잘 길들여진 말입니다. 그런 말은 사람이 등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으면 기수가 원하는 대로 달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고 하나님이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말라하면 하지 않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야생마 같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습니다. 범사를 자기가 맘대로 합니다.
하나님은 40세의 모세를 사용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야생마처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가 40년 간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모세는 하나님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십시오.
먼저 하나님께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 없이는 할 수 없다고 믿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8:28입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범사를 행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겸손하게 살려면 예수님처럼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하십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겸손입니다.
사람에게 겸손하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2:3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행동 이전에 마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올바른 마음을 가지셨고 올바른 행동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무거운 짐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무거운 짐 여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①죄의 짐입니다. ②사람의 짐입니다. ③문제의 짐입니다. ④경제의 짐입니다. ⑤질병의 짐입니다. ⑥공허함의 짐입니다.
마음의 쉼을 위하여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1.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멍에 메야 합니다. 3.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1) 예수님의 온유함을 배우십시오. 2)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