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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우이도
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의 주도로서 우이도는 면적 10.704km2, 해안선 길이 21km에 달하며 88세대에 151명이 거주한다. 부속도서로는 무인도인 화도, 항도, 승도, 송도, 가도, 어락도 등이 있다. 신비의 섬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는 우이도는 동양 최대라고 알려진 80m 높이의 모래언덕을 자랑하고 있는 섬이다.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하는 우이도는 부속섬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와는 0.3km, 면소재지인 도초도와는 동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다.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도의 새끼섬이다. 과거에는 흑산진의 관할이었다. 일제가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명명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오랫동안 소흑산도라 불리어왔다.
신라 때부터 우이도는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있었다. 《택리지》에는 영암의 구림이나 월남마을을 출항한 배가 흑산도, 홍의도, 가거도를 거쳐 중국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들이 순풍을 만나면 6일 만에 당나라의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풍랑이라도 만나면 흑산도로 항해하던 배가 가까운 우이도로 피항했다고 한다.
이번 우이도 방문이 필자에게는 다섯 번째이다. 그만큼 우이도는 늘 오고 싶고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우며 무궁무진한 자연의 보물을 담고 있는 신비의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약전 선생과 한국의 하멜이라 일컫는 홍어장수 문순득 선생의 자취가 있고, 가히 최고의 환경을 갖춘 곳이라 일컬어지는 3개의 해수욕장과 80m 높이의 신비롭기 짝이 없는 모래언덕 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이도는 교통이 불편하여 외지인의 발길이 닿질 않은 섬이다. 어쩌면 열악한 교통이 도리어 자연의 훼손을 막은 채 잘 보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섬은 온통 산지로 이루어져 육로가 더 불편하므로 주민들은 마을과의 왕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우이도 주민들은 다른 마을을 오갈 때에 여객선을 이용한다. 마을마다 선착장 시설이 발달하여 그나마 이동의 불편을 덜어주고 있다.
우이도 진리 마을
오전에 여객선이 우이도 서쪽의 성촌선착장에 닿으면, 이어 돈목, 동리, 서리, 진리선착장 순서로 돌아 도초도를 거쳐서 목포로 향한다. 낮 12시에 목포항을 출발하여 도초도를 거쳐서 우이도에 오는 배는 다시 도초도에 들어가 1박을 하고 오전에 우이도로 출발한다. 이렇듯 일일 생활권에서 멀어진 우이도는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어 문명이나 개발의 손길이 덜 미쳐 있다. 섬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채 늘 한결같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우이도에는 빈집이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 나지막한 돌담이라 돌담 너머로 집안이 다 보일 정도다. 이곳 역시 대부분이 민박업을 하고 있다. 민박업을 하다 보니 식당도 있고 슈퍼도 있다. 대신 밭은 그리 많지 않다. 농지가 거의 없어 농업활동이 미미하며, 흑염소 사육과 어업이 주를 이룬다.
해변에 위태하게 높이 솟아 있는 바위 사이로 흑염소들이 노닐고 있다. 야생 흑염소다. 방목해서 키우다 도망쳐 야생이 된 이들 염소는 위험한 바위를 타고 다녀 붙잡을 수가 없으니, 흑염소의 천국일 수밖에 없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잎, 그밖의 여러 가지 약초를 뜯어먹고 자란 이 염소들은 약염소로 유명하다.
마을 주변의 가파른 산비탈에서는 방목해서 키우는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광경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방목한 염소는 우이도의 특산품 중 하나이다. 1년 내내 방목하는 우이도의 염소는 갖가지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비싼 약염소로 팔려나간다.
그러나 농사라고는 거의 없는 우이도에서 염소만으로는 살림을 꾸려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자연산 미역 채취와 어업이 아직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특산물로는 미역, 톳, 약염소, 후박나무, 꽃게, 새우 등이 있다.
우이도는 온통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육로를 이동할 만한 교통수단이 없는 곳이라 걸을 수밖에 없다. 워낙 험한 산길이라 마을과 마을 간의 왕래는 차라리 배를 이용하는 편이 섬사람들에게는 훨씬 수월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진리에서 산길을 타고 서쪽으로 향해 한참 가다 보니 해수욕장을 두 개나 끼고 있는 성촌에 도착하게 된다. 성촌마을 가는 길목에 나무로 된 데크 시설이 있다. 그 옆으로 드러난 모래언덕은 성촌해변과 돈목해변 사이에 있는데 마치 사막처럼 커다란 사구가 형성되어 있다. 돈목해변에서 바라보면 훨씬 높아서 사구의 높이를 실감할 수 있다.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모래가 모래언덕에 쌓이면 한쪽에서 침식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퇴적하는 자연의 신비를 이곳에서 절감할 수 있다. 신비로운 모래언덕을 와본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일렁였다. 동양 최대 높이라는 이 모래언덕은 비와 바람, 모래가 어우러진 풍성사구(風成砂丘)다. 돈목과 성촌마을 사이가 온통 사구인데 주민들은 산태라 부른다. 거대한 모래언덕도 세월 따라 비와 바람, 파도를 맞으며 점차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구의 수직고도는 약 50m, 경사면의 길이는 약 80m다. 경사도는 70도가 넘는다는 둥 과장되게 전해져왔으나 실제로는 32~33도 안팎이라고 한다. 현재 모래언덕은 침식이 심해 탐방객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사실, 우이도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이 모래언덕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진작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우이도라는 섬이름도, 모래언덕이라는 것도 생소하게 여길 만큼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다.
80m의 모래산은 비와 바람에 의해 매일같이 그 형태가 변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경사가 가파른 모래산을 오르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 후에야 모래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라보는 우이도의 절경은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2010년에 다시 찾았을 때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일부 관광객들이 썰매를 타듯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적잖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이런 희귀한 생태환경을 보존하고자 하는 시민의식이 희박했던 것은 큰 아쉬움이다.
우리나라는 해수욕장 따라 시멘트 해안도로를 만들고 주변을 개발하고 있으나, 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는 모래는 퇴적과 침식, 재퇴적이라는 순환의 균형을 잃고 모래가 점차 없어져가는 환경파괴 현상이 일어나고 만다. 이러한 시행착오가 이곳 모래언덕에는 미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염원을 간절히 담고 둘러보았다.
모래언덕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돈목마을 청년과 성촌마을 처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두 연인이 바람과 모래로 변해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래언덕이 있는 성촌마을 해변에는 금도치 전설이 서린 굴이 있다.
우이도 둘러보기
돈목마을 가는 길에 상산봉(359m)이 보인다. 우이도의 최고봉으로, 바위로 된 산이다. 다도해를 바라볼 수 있고,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산이다. 상산봉 자락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곳곳에 군락을 이룬다.고개를 넘으면 돈목마을이다. 모래사장으로 계곡물이 퍼져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의 둔덕에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세운 선박형상의 샤워장 겸 화장실이 있다. 바닷가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요긴한 시설물이다. 그 앞에 나무로 된 다리, 이어 긴 모래해변이 나타난다.
이곳이 돈목해수욕장이다. 1,500m 길이의 백사장에는 모래가 비단결처럼 펼쳐져 있다. 우이도 처녀들은 모래 서 말을 먹고 시집간다는 속설이 이해가 간다.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곳 말고는 죄다 모래땅일뿐더러 대부분의 해수욕장도 개흙이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모래해변이다.
오로지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언덕만 있는 무공해 해변이다. 완만한 경사의 넓은 백사장과 잔잔한 파도는 서해안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물이 빠진 백사장에서는 동네 아낙들이 허리를 숙인 채 모래를 뒤지고 있다. 우이도에서만 난다는 은빛 조개를 캐고 있는 것이다.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일품인 조개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섬에서만 맛볼 수 있다.
돈목해변에서 남쪽 마을을 지나면 또 하나의 작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연인과 함께라면 둘만의 오붓한 공간으로 충분할 듯싶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또 다른 모래밭이 펼쳐진다. 큰 대치미해변이다. 돈목해수욕장 크기의 모래사장인데 어디를 봐도 인공시설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이도 진리항의 물양장은 상당히 넓은 편이고 마을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 깊은 만이 형성되어 있고 방파제가 섬의 북동쪽 끝자리에 위치해 있다. 방파제 앞에는 가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우이도에는 내연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를 통해 바로 앞에 있는 두 개의 섬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섬 전체가 산악지대로 마을은 해안가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우이도에는 세 개 마을이 있다. 성촌리, 돈목리, 진리라는 마을이다. 섬에 다니면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이름이 진리, 진촌, 읍리, 읍동 등의 이름이다. 읍리는 섬의 행정관청이 있던 마을이고, 진리는 수군이 주둔하던 마을이라 보면 된다. 우이도의 진리도 옛날에는 수군의 진이 있던 마을이었다.
영조21년 조성된 진리마을 전통포구
진리는 우이도의 서쪽에 있는 모래언덕의 반대편, 즉 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우이도의 중심지답게 마을 규모도 크고 마을 앞에는 튼튼한 방파제가 포구를 둘러싸고 있다. 우이도 출장소 등 각종 행정 및 편의시설이 있는 중심지다. 그러나 모래언덕의 유명세로 무게중심이 돈목해수욕장이 있는 돈목마을로 옮겨가고 있다. 갈림길에서 조금 더 가면 왼쪽에 조그마한 포구가 있다.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된 옛 포구 진리선창이다. 1745년에 축조된 선착장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잘 보존돼 있다.
선창기념공원에는 시주자 명단을 새긴 비석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선창기념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를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 포구시설인 우이도 선창은 조선시대에 중수에 관련한 기록이 있는 석비가 남아 있다. 계속해서 사용된 유적이자 보기 드문 해운관련 문화유산이며, 섬사람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선창은 길이 63m, 높이 3m, 폭 1.6m 규모의 석축으로 현재도 선박의 안전한 피항처로 활용되고 있으며, 예전에는 선박의 건조와 수리 장소로 이용됐다. 선창의 중건시기를 알려주는 석비 비문에는 조선조 1745년(영조 21년)에 마을주민 25명이 참여해 선창을 중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포구 맞은편 산 아래에는 열녀비가 있다. 주변에 동산을 만들고 다양한 수목이 심어진 이곳에는 약 한 평 규모에 시멘트로 테두리를 두른 뒤, 지붕모양의 돌문을 만들고 비각 안으로 비석을 세웠다. 밀양 박씨 장녀비라 쓰인 열녀비이다. 우이도에는 열녀비가 여럿이다. 밀양 박씨, 상원 김씨 열녀비가 길가에 정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안길은 몇 번의 증축과정을 거쳤다. 선착장에서 마을입구까지 이어지는 제법 넓은 해안도로 주변은 일종의 해변공원이다. 지난 2009년에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다. 길가에는 다양한 돌탑까지 조성해두고 화단도 깔끔하게 만들었다.
마을은 산 아래에 포근하게 자리잡았다. 평지에 마을이 있고, 그 뒤는 경사진 밭 그리고 그 뒤에는 높은 산이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로 이곳이 진리 삼거리임을 알 수 있다. 마을표지석 옆 큰 바위 위에도 열녀각이 세워져 있는데, 여인상이 특이하다. 얼핏 보아 밀양 박씨 것에 비해 격이 낮아 보이는데, 여인이 보자기 같은 것을 둘러쓴 듯한 조형이다. 그리고 주변에 새겨진 비문 등을 보면 동일인물처럼 보인다. 상원김씨열녀지각으로 부인은 밀양 박씨라고 하며 순정열녀비라고 되어 있다. 둘러쓴 것이 미사보라면 아마도 천주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유추해보았다.
우이도 인물《표해록》의 저자 문순득
산에서 내려오는 하천과 연결되는 부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경로당을 지나 문순득 생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대부분 높지 않은 돌담들, 넝쿨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나지막한 돌담길을 돌아 나오면 문순득 생가에 닿는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표해록》의 저자이다. 《표해록》은 목포해양대 국문학과 최덕원 교수가 우이도에 거주하는 주민 문채옥 씨의 집에서 발견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책이다. 정약전의 《표해시말》에도 우이도 홍어상인 문순득 일행이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해 필리핀과 마카오를 거쳐 1805년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3년 2개월 동안의 경험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현재 발견된 국내 표류기 가운데 이 지역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이다. 1488년에 최부가 지은 《표해록》과 1770년에 장한철이 지은 《표해기》와 함께 우리나라 해양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저술이다.
정약전의 '표해시말'
유구 및 여송 표류기라는 부제를 단 이 《표해록》은 주인공 문순득을 포함한 우이도 주민 6명이 표류하여 유구, 곧 오키나와와 여송 그리고 필리핀까지 가서 겪은 일들을 글로 적은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얘기하자면, 이들이 돌아온 후에 당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에게 말로 전하여 글로 남기게 되었다.
생가는 복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안내판이 있는 돌담으로 된 슬레이트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한 쪽만 열려 있고 사방을 양철판으로 가려놓아, 누가 보아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 보전차원에서 접근이 필요하건만 아쉽다.
정약전과 《자산어보》
진리에서 돈목 가는 도중에 만나는 밭넘어 갈림길. 비포장도로인 이 길을 따라가면 밭넘어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마을과 동떨어져 한적하기 그지없는 띠밭너머 해변이다. 이름에 등장하는 띠라는 풀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김 등을 말릴 때 깔개로 사용해오던 깔개재료인데, 인근에 띠가 많아서 띠밭너머 해변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 가지 않아 정약전 서당터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진리에서 돈목으로 넘어가는 산길 초입 서당골이라 불리는 이곳에 정약전이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이도는 19세기 이 섬으로 유배를 온 정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의 배경지가 된다. 정약전은 이곳에 귀양살이를 와서 이곳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손암 정약전(1760~1816)은 천주교도 탄압이 있었던 신유사옥(1801) 당시 이곳으로 유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물고기, 해산물 등 총 227종의 어족연구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약전은 조선시대의 학자로서 인문학적 소양과 그 깊이가 뛰어난 분이었다. 32세에 문과에 급제, 병조 좌랑까지 올라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펴낸 이력도 있다.
그런데 선생은 서학에 뜻을 두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오직 천주교 전교에만 열중했다. 1801년 2월 9일, 정약전과 정약종 그리고 정약용 3형제는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보름 후, 천주교 전도회장이었던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정약전 · 정약용 형제는 옥에서 풀려나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전남 완도군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 땅으로 귀양을 갔던 것이다.
그 무렵 발생한 사건이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황사영이 청나라의 신부에게 도움을 청한, 1만 3천여 자에 달하는 밀서가 발각되어 손암을 포함한 다산 형제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해 11월 5일엔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정약전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오랜 시간을 거쳐 유배지 우이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홀로 우이도라는 외딴 섬으로 유배 온 정약전은 그 후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았을까.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을 것 같은 정약전, 그러나 이곳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잡고 해초며 조개, 소라와 전복들을 따던 섬사람들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으고, 생태를 조사해서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를 저술했다. 정약전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후 15년 동안 《논어난(論語難)》 《역간(易柬)》 《송정사의(松政私議)》 등 귀한 책을 저술했다.
회갑의 나이가 가까워졌을 무렵,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가족들과 고향 산천, 풀리지 않은 귀양살이를 뒤로한 채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로운 섬에서 쓸쓸하게 죽어 간 그의 주검은 온 섬사람들의 애도 속에 꽃상여 대신 배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고 한다.
간다간다 고향간다
훠이훠이 고향간다
모진목숨 웬말인가
북망산천 내가간다
누구든 우이도에 도착해서 정약전 선생께서 살다 가신 대초리를 밟다 보면 한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학처럼 고고한 정신이 절로 느껴질 것이다. 손암 형제의 비극적인 삶과 슬픈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들려주는 듯 파도소리가 애처롭기만 하다.
우이도 관광과 명소
섬을 둘러보기 위해 선착장을 출발한 배가 서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도리산 아래를 끼고 돌면서 우이도 남쪽 해안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섬 자체가 거대한 암반지대다. 서쪽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북쪽 해안에는 길게 모래밭이 형성되었다.
낚시터로 유명한 곳은 우이도의 남쪽 끝자락 암벽, 붉은 벽으로 알려진 곳이다. 우이도의 낚시는 걸리지 않을 때가 없을 정도로 사철 조황이 꾸준하다. 봄에는 4월 초부터 5월 말까지, 가을에는 10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감성돔과 돌돔, 농어가 호황을 이룬다. 주요 낚시 포인트로는 건네 끝, 나릿 바위, 대린지 끝, 하나지 끝, 농께(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등이 있다.
우이도는 신비의 섬으로, 알려지지 않은 자랑할 것들이 많다. 동양최대라는 모래사구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우이도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 도리산(252m)은 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인 만큼 사방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도리산은 소의 한 쪽의 귀처럼 본섬에서 돌출된 곳이다. 도리산 서쪽의 해안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쳐다보노라면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가파르고 높은 검은 암벽이 우뚝 솟아 있다. 오랜 해식작용에 온갖 기이한 형상으로 조탁이 이루어진 자연의 조각품이다. 그러나 우이도로 들어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있을 정도로 관광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우이도 돈목리에서 민박을 운영하는 박화진 씨는 9대째 이곳에서 사는 토박이다. 그는 조상이 해왔던 것처럼 파도와 싸우며 50여 년을 보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이도를 찾는 외지인이 늘면서 횟집을 겸한 민박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가 운영하는 이곳은 여느 민박과는 성격이 다르다. 원한다면 자연산 활어를 직접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떠먹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어촌체험을 해볼 수 있다. 섬 주변 고기들이 주로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내려놓고 하루 이틀 지나 들어 올리면 팔뚝만 한 민어부터 광어, 참돔, 줄돔 등이 가득해서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민박집에서는 직접 재배한 콩과 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두부며 밭에서 갓 따온 채소 등으로 풍성한 먹거리를 내놓는다.
이처럼 우이도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거기에다 먹거리가 풍요롭지만 마을과 마을 간에 소통할 수 있도록 도로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아 발전이 더디기만 하다. 진리와 돈목 사이의 2km 정도의 길은 경운기조차 다닐 수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아무리 국립공원이라도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길만큼은 조성돼야 할 것이다. 필자로서는 정착하여 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의 신비가 가득한 섬 우이도이다. 우이도의 갯벌은 모래가 섞여 잘 빠지지 않으며 꽃조개잡이의 천국이다. 그래서 누구나 호미나 건챙이를 이용해 갯벌을 긁으면 꽃조개를 잡을 수 있다. 성촌리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모래언덕의 반대편 갯벌에서 잘 잡힌다.
영조21년 조성된 진리마을 전통포구
길이 약 1,500m, 너비 300여m의 우이도해수욕장은 돈목부락에 있어 돈목해수욕장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우이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이다. 물이 맑고 백사장이 단단하고 곱기가 이루말할 수 없는 모래이다. 수심도 완만한 경사인데다 만 안쪽이라 파도도 잔잔하다.
우이도 최고의 명물은 우이도해수욕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사구 모래산이다.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의 허리가 벗겨져 드러난 모랫더미에 파도와 해풍에 불려온 모래가 덧쌓여 오뚝한 산이 된 것이다. 사구의 수직고도는 약 50m, 경사면의 길이는 약 80m다. 일반적으로 해발 50m는 만만한 높이로 생각되기 쉽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이 높이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정상에 올라서면 눈앞으로 돈목해수욕장과 주변 섬들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공룡 발자국처럼 모래산 위에 움푹움푹 파여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모래산은 바람 부는 방향대로 모랫결이 달라지고 비라도 한바탕 내리면 모래들이 뭉쳐 저절로 신비한 형상의 작품들을 빚어낸다. 모래언덕은 침식이 심해 현재 탐방객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정약전 유배터
손암 정약전(1760~181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천주교 탄압이 있었던 신유사옥(1801) 당시 이곳으로 유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물고기, 해산물 등 총 227종의 어족연구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최치원 유적지
통일신라 진성여왕(887-897) 때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중국으로 유학 가던 중 우이도 상산에 도착했을 때에 극심한 가뭄이었는데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바위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문순득의 《표해록》
조선시대의 두 표류기인 최부의 《표해록》(1488)과 장한철의 《표해기》(1770)와 더불어 우리나라 해양문학 작품으로 손꼽힌다. 유구 및 여송표류기라는 부제를 단 이 《표해록》은 이 책의 주인공인 문순득을 포함한 우이도 주민 6명이 표류하여 유구, 곧 오키나와와 여송 및 필리핀까지 가서 겪은 일들을 글로 적은 것이다. 이들이 돌아온 후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에게 말로 전하여 글로 남기게 된 것이다.
해안절벽
배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기암절경의 연속이다. 특히 도리산 서쪽의 해안절벽이 압권이다. 쳐다보노라면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가파르고 높게 검은 암벽이 섰고, 오랜 해식작용에 온갖 기이한 형상으로 조탁이 이루어졌다. 공룡의 등줄기 형상을 닮았는가 하면 구멍이 숭숭 뚫린 곳도 있다. 그런 절벽 여기저기에는 연초록 팽나무숲으로 장식되어 있다. 조류는 흡사 홍수 때의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며 작은 암초에 물거품을 일으킨다.
상산봉
우이도 최고봉은 상산봉(358.6m)이다. 성곽 같은 긴 암릉길에 이어 다도해 풍광의 정수가 바로 이것이다 할 만큼 기막힌 정상의 조망이 기다린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심 산
우이도선착장▼
돈목마을▼
정약전 서당터▼
돈목해변 사구▼
우이도 상수원▼
영조21년 조성된 진리마을 전통포구▼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