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일상을 보내며,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기본적 공간들이 있다.
기업, 학교, 가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간과 관계들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비민주적으로 짜여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집·학교·회사라는 공간에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러한 공간에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거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해왔다.
공간이라는 프레임으로 다양한 현실의 문제를 포착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장소’와 ‘자리’(지위)의 분리와 단절이라는 측면이다.
김현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영어 ‘place’(플레이스)의 두 가지 의미가 ‘장소’와 ‘자리’라는 점을 환기한다.
즉, 영어 ‘place’라는 단어에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장소’와 그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사회적 관계의 표현으로서의 ‘자리’(지위)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소’와 ‘자리’(지위)의 분리와 단절은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첫째, ‘장소’에 대한 ‘자리’(지위)를 박탈해서 장소상실 상태를 만들어내는 추방의 형태가 있다.
가령, 용산사건의 철거민, 기업에서의 정리해고·직장폐쇄 등이 그것이다.
둘째, ‘자리’(지위) 없는 ‘장소’로 포섭하여 위계화하고 활용하는 형태이다.
가령 파견·도급과 같은 비정규 고용형태, 간병 등 돌봄노동의 문제, 대학 강사의 고용 형태, 이주노동자 유입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형태 여부를 막론하고, ‘장소’와 ‘자리’(지위)의 분리·단절이라는 현상에 공통되는 것은 공간의 민주성(주권)과 책임성(인권)의 문제다.
어떤 공간(장소)에 대한 결정 권한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공간을 구성하는 관계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가령 사회적으로 반향이 뜨거웠던 두 편의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은 공간(복지시설, 법정)의 비민주성, 폐쇄성으로 인하여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지위)가 부정된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최근 현대자동차의 한전 터 매입과 관련한 내용을 보면, 기업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10조5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투자되는 사안이 기업 총수 1인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사회는 요식의 절차였을 뿐이다.
주주의 이익에 대한 고려는 물론 노동자의 생존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그러나 가령 독일에서는 노동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로는 중첩적이다. 근로자가 5명 이상인 기업에서는 설치가 강제되어 폭넓은 권한이 부여되는 ‘종업원평의회’가 있고, 이에 더해 이사회의 구성과 역할에 있어서도 노동자 대표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공동결정을 통해서 독일 노조는 기업과의 협상을 통해 비정규직 남용과 하도급 착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상 노동자는 대의되지 않는 주체였다.
이사회는 주주총회의 대의기구일 뿐,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다수 노동자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정리해고가 이루어져도, 이는 단체교섭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장소와 자리(지위)를 나누고 분배하는 과정, 즉 일상의 공간과 관계를 구성하는 자체가 근본적으로 법과 질서, 정치의 문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학교는 누구의 것인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그 공간과 관계 속에서 나에게 그 공간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합당한 자리(지위)가 부여되어 있는가?
우리 일상의 터전이 되는 공간에서 민주성과 책임성이 인정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우리 사회의 위기의 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