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5
3월20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사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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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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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SvnNRdIcaY ,(신동원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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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님의 양부(養父)셨던 요셉이었습니다. 비록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친부(親父) 못지않게 예수님을 양육하는데 있어 지극정성이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기묘한 동거였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남편보다도 마리아에게 자상하고 충실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 탄생 전후, 아주 제한적으로 요셉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과월절을 맞이하여 소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것을 끝으로, 요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요셉에 대한 복음 사가들의 제한적인 기록,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요셉은 과묵하고 진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의로운 사람, 주님의 뜻에 충실했던, 주님의 명령과 초대에 절대 순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어떤 유명 인사의 부모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어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서 이러쿵저러쿵 인터뷰를 하고, 이 방송사 저 방송사 다 출연하고 다녔다면, 예수님께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까요?
다행히 성모님과 더불어 성 요셉은 침묵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벌이기보다 조용히 기도하고 관조하며, 작게나마 주님의 구원 사업에 작은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침묵의 사도 요셉 성인 축일에 침묵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침묵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거듭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무죄한 이웃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 침묵함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성숙과 나약함, 위선과 이중성에 대한 신랄한 지적 앞에 침묵과 숙고, 성찰과 회개의 여정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미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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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fB_opYiR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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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천사를 만나는가?>
메리 앤 베번(Mary Ann Bevan)은 19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여성입니다. 1874년 영국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좋은 어머니가 되겠다는 꿈도 이루었습니다. 29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애정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32세쯤부터 메리에게 심한 편두통이 찾아왔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돈을 벌어야 해서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점점 변형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병명은 ‘말단비대증’입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잃고 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란 칭호를 받게 됩니다. 거리에 나가면 짓궂은 아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이웃들은 장난이었을지언정 온갖 추한 별명으로 그녀를 불렀습니다.
다행히 남편 토마스 베번은 아내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며 메리를 여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과로 때문인지 남편이 사망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메리는 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무언가 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억척스럽게 일을 하였고 심지어 도시에서 ‘가장 남성적인 여성’을 선발하는 대회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참가하여 우승하였고 거액의 상금을 탑니다. 물론 이때부터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라는 타이틀이 붙여졌습니다.
그녀의 명성이 이제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 기이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펼치는 드림랜드와 서커스 쇼에 출연하게 됩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던지는 날 선 농담을 받아들이며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참아냈습니다.
처음엔 혼자 건너왔지만, 2년 동안 지금 금액으로 12억 정도를 벌어 자녀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킵니다. 메리는 1933년 성탄절 다음 날 59세로 사망할 때까지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며 무대에 섰습니다.
그런데 2006년 영국에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에서 메리의 사진이 들어간 생일 축하 카드가 발매된 것입니다. 그 카드는 메리의 사진을 이용해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은 해당 카드를 발매한 회사를 비판하였고 그 결과 카드를 발매했던 홀마크 가드즈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해당 카드 판매를 중단하였습니다.
메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제 외모가 아닌 그녀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처럼 천사가 되었습니다. 메리는 분명 하늘에서도 천사를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이 천사였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천사를 만날 수 없습니다. 천사만이 이 세상에서도 천국에서도 천사를 만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악마도 만나야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사순 제4주일에 밀려 월요일로 이동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런 분 같습니다. 당신 자리를 내어주며 다른 이를 들어 높이는. 성 요셉은 처음엔 성모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의로운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본래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성모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임신시켜놓고 파렴치하게 버리는 세상의 파렴치한이 되어 마리아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지만 의로운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은 정의로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자비를 받았으니 당연히 자비를 베풀어야 함이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당신 아드님을 입혀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의로움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기로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죽옷으로 입고 마치 야곱이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긴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아버지 앞에서 우기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나의 공로가 없습니다. 그냥 믿음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껍질이 벗겨져 우리에게 입혀지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웃의 죄를 덮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나를 배신한 이들의 잘못을 나의 탓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천사는 그 이후에 나타납니다. 그러한 마음씨가 자신이 천사를 만날 존재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호천사는 우리가 죄를 짓는 동안에도 우리와 함께 있어 주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탓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같은 수준의 존재가 만나 친교를 이룹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사를 만나려면 천사의 의로움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제외한 그 가장 위대한 모범이 성 요셉이십니다. 그분은 천사를 만날 자격도 얻으시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를 보호할 권리도 얻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의로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의 잘못까지도 나의 잘못으로 덮어줄 성 요셉의 의로움을 지니고 있나요? 그러면 분명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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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 중의 한 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도 하였고, 예레미야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도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이끄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였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앙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가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신문사 직원들은 저를 ‘사장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동북부 ME 부부들은 저를 ‘동북부 엠이 대표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부르클린 공동체에서 교우들은 저를 ‘본당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직책은 다양하지만 저의 정체성은 ‘사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제가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주기 위해서는 병자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합니다.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처지를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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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1)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요셉은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으로 될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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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하는 사람>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강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에 대해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같아지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의 부모로 요셉과 마리아가 선택되었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27),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요셉이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요셉은 그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극복했고, 응답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1) 요셉은 마리아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는 요셉에게 그 일을 곧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 자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었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음을 믿었습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못해서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경우를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다면 믿어야 합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도,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겉으로는 법적인 부부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에게 그 어떤 불행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즉 요셉은 사랑하는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아기의 진짜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파혼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3) 요셉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못한 것은,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고민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꿈에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 자신의 증언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응답과 확신을 얻은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천사가 나타난 일이 많은데, 그 일들도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요셉은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 일이 모든 사람을 위한 ‘선’과 ‘사랑’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었기 때문에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순종하는 것은 끝까지 갑니다.
5) 요셉의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순종은 ‘인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또 태어나신 뒤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요셉은 하느님과 마리아와 예수님을 사랑했고, 믿었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사랑도 믿음도 없고, 기도하지도 않는다면,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말수가 적은(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된 것은, 그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그 사랑과 믿음과 기도와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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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요셉 성인은 독특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만 언급되는 요셉 성인은 침묵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성인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았을 때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혼인 전에 임신한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큰 죄였습니다. 성경은 요셉 성인의 성격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러기로 마음을 정하였을 때 요셉 성인은 꿈에서 천사의 말씀을 듣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 꿈은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를 받아들이기는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요셉 성인은 꿈에서 깨어나자 그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때에도 요셉 성인은 여전히 침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육적인 아버지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을 예수님의 양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요셉 성인은 구원의 봉사자이자 보호자라는 사실입니다. 성인은 침묵으로 천사의 명령을 따랐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묵묵히 말씀을 따르는 요셉 성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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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탄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1,19 참조) 요셉의 ‘의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하느님의 계명, 곧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 준수만으로 그의 의로움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신명 22,20-21 참조)에는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할 경우 받게 되는 형법적 절차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습니다. 이처럼 그의 ‘의로움’은 약혼녀 마리아를 향한 사랑, 법규나 규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데 있습니다.(마태 1,2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신앙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결정을 내린 요셉은 신앙인의 본보기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선택과 결정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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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복음의 요셉과 마리아, 제1독서의 다윗, 그리고 제2독서의 아브라함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오 복음 1장 20절) 약혼녀 마리아가 혼인 전에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그녀와 파혼하려던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말의 뜻을 요셉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나고 자란 중동 문화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오 복음 1장 24절) 성경은 천사의 말을 그대로 따른 요셉의 모습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전합니다. 그에게 왜 의문이나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런 인간적인 의혹들보다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 컸던 까닭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을 번영하게 할 후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사무엘 하권 7장 16절)
이렇게 나탄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다윗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계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두 번이나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통해 이 나라가 단지 사람의 족보로만 계승되는 인간적 왕국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바로 혈통과 민족을 넘어서 이어진 영원한 믿음의 후손이라는 증거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후손을 얻은 성조 아브라함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서 4장 16절)
아브라함은 믿었고 따랐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늙은 나이나 떠돌이 유목민 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말씀에 따라 … 믿었습니다."(로마서 4장 18절)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현재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바라는 투신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희망의 근거는 망상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순종, 겸손과 인내, 충실함을 기념하는 오늘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무수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생생히 되살리는 날입니다.
저마다의 녹록지 않은 인생 여정 안에서, 믿음 말고는 도저히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어렵지만 더욱 단단히 믿음의 끈을 조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나아가야 하지요.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요셉처럼 말입니다. 미지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역설 가득한 믿음의 모험에 담대히 뛰어든 여러분께 주님의 말씀을 축복으로 전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영성체송)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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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습니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 가자며 손을 잡아 주었고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하였던 환희의 순간에도, 아프고 힘들었던 고통의 순간에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갈등하고 고민하였던 결정의 순간에도 그 친구와 함께하였습니다.
서로 비슷한 점은 없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이해해 주고 자신의 의견보다 친구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전달해 주는 사이, ‘벗’이라며 같은 길을 걸어가 주는 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부부 같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동반자, 반려자라 부릅니다. ‘함께 의지하며 짝을 이루고 같이 걸어가는 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기 2장 24절)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꽃길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어려운 가시밭길도 함께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을 경축합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였기에 성인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라 합니다. 성인은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약혼자의 몸가짐을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고, 믿어 주고 참아 주며 끝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들을 참아내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픔과 역경을 함께 이겨 냅니다. 그래서 소년 예수님께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사랑과 호의를 삶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따르시는 고난의 길에 요셉 성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배필이신 마리아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 주고 짝이 되어 주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안아 주고 울어 주고 고민해 주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동반자의 손을 잡고 오늘도 한 걸음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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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 위에 굳건한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필리 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내 뜻을 내려놓고‘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화병이 났다’라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는데 무조건 참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0-21)라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 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이고 존중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받은 만큼 갚아 주려는 인간의 연약함을 일깨워주는 스승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로움을 간직한 믿음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라고 합니다. 오늘은 더 큰 사랑으로 그리고 더 큰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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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선 묵상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특히 수도자들이 이 묵상을 위해 절에 가서 선 묵상을 했습니다. 불교의 참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켜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아예 개종하는 수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소중한 가치를 간직하지 못했기에 개종한 것입니다.
종종 개신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는 분을 만납니다. 가톨릭 안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서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2,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왜 없겠습니까? 그보다 쉽게 영적 갈증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다른 종파의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분명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구원으로 이끈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을 쉽게 만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진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와 묵상 그리고 각종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것이 마치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뜻인 양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좀 더 우리의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것에 집중할수록 일상 안에서도 쉽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말처럼, 남의 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무는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법대로 사는 사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대로 살기가 더 쉽습니다. 원칙대로만 살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대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 성인이 대단한 것은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인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따를 수가 있었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의미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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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요셉에게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밀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 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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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성요셉 예찬-
어제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의 강론을 요약한 제목의 말마디에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는 듯 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의인 요셉을 기리는 대축일에 걸맞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여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선물들에 놀라십시오.”
선물중의 선물이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의인 성요셉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선물에 감동한 삶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역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선물같은 시편 성구였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는 기도 노래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아주 오래전 어느 수녀님이 넋두리처럼 던진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 없다, 스승 없다, 성인 없다 탄식할 일이 아니라 내 먼저 어른이, 스승이, 성인이 되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하게도 시공을 초월하여 참 어른이자 스승이요 성인이신 성요셉을 만납니다. 어제 점심식사시 한 수사님이 제 강론에 인용했던 만세 삼창의 기도를 언제 하느냐 묻기에 얼버무렸습니다만 지금 밝힙니다. 밤에 기상하자마자 방에서 소리내지 않고 하는데 평소 삼창에다 오늘은 성요셉을 넣어 만세 사창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수도원 만세!”
“성요셉 만세!”
이렇게 가슴을, 마음을, 활짝 열고 양손을 활짝 펼쳐 푸른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기도 역시 영육의 건강에 참 유익한 수행이겠습니다. 오늘은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임종자의 수호자이자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신 성요셉은 말그대로 위대한 배경의 의인이자 성인입니다.
오래전에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자작 “산처럼! 이란 자작 애송시 역시 산같은 배경의 하느님 아버지를, 또 예수님의 양부 요셉을 상징합니다. 성가정의 한결같은 배경의 수호자 의인 성요셉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넉넉한 품의 배경이 되어 살라고 유난히 산들이 많은 우리나라 같습니다. 산이 붙은 지명은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 고향만 해도 예산군禮山郡에 봉산면鳳山面에, 아홉 개 바위를 품은 산동네라 하여 구암리九巖里입니다. 이제 도시 아파트촌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런 추억과 꿈이 가득한 고향의 주소도 못지닐 것이니 얼마나 정서적으로 궁핍하겠는지요.
한결같은 산같은 배경의 의인 요셉의 성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미사후 부를 퇴장 성가 280장 “성요셉 찬양하세” 역시 의인 요셉의 성덕에 대한 찬양입니다. 요셉의 성덕은 끝이 없지만 셋으로 요약하여 나눕니다.
첫째, 성요셉은 의로운 사람, 의인이었습니다.
성경의 의로움은 또는 정의는 근본적으로 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충실함을 뜻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참으로 마리아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니 바로 이것이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다음 구절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관대하고 고결한 의인 요셉의 인품을 요약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말그대로 산의 배경, 산의 품같은 의인 요셉이었습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이요 인간의 될 수도 없습니다. 마리아의 처지를 배려하는 요셉의 자비로운 연민의 사랑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얼마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았는지 그대로 오늘 요셉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래서 의로운 사람, 의인 요셉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요셉은 침묵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없는 무겁고 어두운 침묵이 아니라 깨어 있는 밝고 맑은 경청의 침묵, 사랑의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은 그대로 하느님의 언어가 됩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이런 경청에서 겸손의 덕이, 순종이 덕이, 무죄한 삶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이런 침묵의 덕입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하다 오늘부터 마스크를 벗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마스크를 하며 그동안 침묵을 배웠음이 큰 소득일 것입니다. 새삼 침묵 역시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경청의 침묵중에 수호천사도 항상 함께 했음을 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밤새 침묵의 기도중에 고뇌하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결정적 조언을 주는 수호천사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마도 이 결정적 말씀을 성요셉은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배경의 품이, 사랑의 품이, 침묵의 품이 되어 예수님을, 마리아 성모님을 성심성의껏 돌봤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원대한 꿈, 사무엘의 예언입니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은 이미 그 아득한 옛날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하느님의 나라 교회의 출현을 암시하는 예언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셋째, 성요셉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순종, 믿음의 인내, 믿음의 정주, 믿음의 뿌리입니다. 믿음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동케 합니다. 믿음이 인간을 품위있게 합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은 믿음의 잣대이자 영성의 잣대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지체없이 순종하니 하느님은 얼마나 요셉의 믿음에 감동하고 기뻐하셨겠는지요!
자비하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은 절대로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발적 협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니 침묵의 경청중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순시기 참으로 자주 나오는 시편 성구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성 요셉의 믿음의 족보는 아브라함, 다윗에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인자 DNA가 의인 요셉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순교영성의 유전인자 DNA가 전수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그대로 성요셉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닮은 성요셉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라면 신약의 성요셉입니다. 역대 교황님들은 물론 신자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던 성요셉입니다.
지금 3월은 은총의 사순시기이자 성요셉 성월입니다. 한결같은 배경의 의인, 침묵과 믿음의 성요셉의 성덕을 닮을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1년도 요셉 성인에 대한 교리교육을 마치면서 바친 요셉 성인께 드리는 기도로 강론을 끝냅니다.
“침묵의 사람 성 요셉이시여,
당신께서는 복음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으니,
헛된 말을 금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올바르게 이끌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지지하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하소서.
비방이나 중상모략과 같이 상처주는 말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고,
항상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게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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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1,24)
<의로운 사람이 되자!>
오늘은 '성가정의 수호자'요,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어제가 본 대축일이었는데, 어제가 주일이어서 오늘로 이동해 지냅니다. 먼저 영명축일을 맞이한 많은 요셉 형제님들과 요셉피나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태1,16.18-21.24)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되었고 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 곧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답게 남모르게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1,20)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의로운 사람답게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주님의 뜻을 잘 따른 의로운 요셉 성인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됩시다!
신자들은 종종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많이 서운해 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 죽음과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자주 바라보며 묵상합니다.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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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7V_9__KvI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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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새봄을
맞이합니다.
새마음을
맞이합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보살핌이
무엇인지를
요셉 성인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종교인이기에 앞서
한 사람으로
돌아가
사람이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이
참된 보살핌임을
배웁니다.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웃형제들을
먼저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과
형제도
보호하여 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누구를
보호하고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삶은
하느님 곁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답고 편안한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주려는
성찰과
실천이 있는
노력하는
삶입니다.
요셉 성인의
용기와 믿음이라는
삶의 방식이
사랑의 진정한
배려임을
배웁니다.
삶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가장 크고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밀어냄과
끌어안음 사이로
십자가가
지나갑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기쁘게 마음을
비우는 멋진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순리를
따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값진
요셉 성인의
마음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서로에게
가장 좋은
마음을 선물하는
가장 좋은
봄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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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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