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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李小龍, Bruce Lee)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이다.
李小龍|Bruce Lee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활동한 중국계 미국인 배우이다.
그는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액션 영화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절권도(截拳道)는 영화 배우이자 무술가
이소룡(李小龍)이 창시한 무술이다.
영문명은 'Jeet Kune Do'로 많이 불린다.
이소룡이 자신이 배웠던 영춘권(詠春拳)과
홍가권(洪家拳), 채리불권(蔡李佛拳),
복싱에 펜싱의 스텝을 차용하여 만든
종합 무술이다.
그러나 이론을 정리하던 중
이소룡이 급사함으로써
절권도는 미완성의 무술로 남고 말았다.
절권도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세계적인 쿵푸스타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이다.
절권도의 바탕을 이루는 권법은
중국 남파 무술의 일종인 영춘권과
홍가권
그리고 북파 무술인 공력권과
한국의 태권도,
서양의 복싱 등이며
스텝은 펜싱의 스텝을 차용하였다.
어린 시절 홍콩에서
유명한 영춘권 사부인
엽문(葉問)으로부터
영춘권을 전수받은
이소룡은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무술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영춘권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이 배운 여러 무술과
미국에서 다른 무술가들과
교류하며 익힌
서양의 무술을 연구하여
마침내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시하였다.
그러나 절권도의 이론을 정리하던 중
이소룡이 의문의 사고로 급
사하는 바람에
절권도는 빛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의 무술로 남게 되었다.
짧은 순간 맹렬히 빛난 무술가이자
영화배우 이소룡
살아서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액션 스타였다가
죽어서는 전설이 된 그 이름
‘이소룡(Burce Lee)’.
그가 살아있었다면
오는 11월 27일 그의 71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짧지만 불같은 삶을 살다 간
그의 생애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영화 맹룡과강 이소룡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藩)으로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생후 3개월 때
부모와 홍콩으로 돌아가 자랐다.
그는 영춘권(詠春拳)의 고수인
엽문에게 권법을 사사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소룡으로 인해
후일 엽문이 재조명이 되기도 했다.
엽문과 함께 중고등 시절 이소룡은
소위 말하는 불량청소년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차차차 댄스콘테스트에서도
1등을 하는 등
춤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여자친구와 댄스장에서
춤을 추다
미군병사들과 싸움이 붙어
때려 눞이는 사고를 친다.
이에 경찰이 찾아와
감옥에 처 넣는다는 말을 하자
이소룡의 신변을 걱정한 부모는
이소룡을 1959년 4월
샌프란시스코의
자신의 누나에게 보내버린다.
미국으로 간 이소룡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무술을 가르쳤다.
그는 인근에 있는
가필드 고등학교에
쿵푸를 시범하러 갔는데
이 학교의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
(Linda C. Emery, 1945~)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이소룡의 제자가 되었고,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이
워싱턴 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결혼하게 된다.
이소룡은 샌프란시스코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여러 격투기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복싱, 유도, 펜싱, 태권도, 가라테 등을
소화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인
절권도를 정립시켰다.
그는 무술의 단련 외에도
항상 영화배우를 꿈꿨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많은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한 바 있었고
그로 인해 대학교도
연극학과를 선택했다.
tv시리즈 그린 호넷하지만
동양인인 그가 미국에서
영화에 데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1964년
영화배우가 되려는 마음을 접고
무술에 전념하기로 하여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기 위해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참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 도지어
(William McElroy Dozier)에게
그 무술 실력을 높게 평가 받아
TV 시리즈인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
1966~1967)’의
케이토(Kato)역을 따내어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69년 이소룡은
‘말로우(Marlowe)’를 통해
미국 영화에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간간이 다른 영화에서
무술 감독 등의 역할로
얼굴을 비추었지만
큰 이슈도 되지 못했고
동양인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조연으로만 출연할 수 있는
현실에 큰 실망을 하게 된다.
당산대형 포스터그는
결국 홍콩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의외로 그린 호넷이
홍콩에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어서
그의 이름도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홍콩의 영화제작사인
골든하베스트와
영화 2편을 계약하고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1971)을
촬영한다.
당산대형은
당시 맨손 격투 영화의 붐과 더불어
이소룡의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웠고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정무문(精武門, 1972)으로
연타석 흥행 홈런을 친다.
골든하베스트와의 계약이 끝난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를 창립하여
각본과 감독, 주연과 무술지도,
제작까지 스스로 한 작품
‘맹룡과강(1972)’으로
또 다시 흥행 신기록을 세워
그의 능력을 뽐냈다.
영화 용쟁호투
1973년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의 공동 제작 작품인
‘용쟁호투’의 주연을 맡게 되었고
이 영화를 통해 그
의 위상은 미국과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곧바로 ‘사망유희(1978)’의
촬영에 돌입하였는데,
‘용쟁호투’의 개봉을 얼마 안 남기고
1970년 7월 20일
애인으로 소문이 났던
대만 여배우 베티 팅 페이
(Betty Ting Pei)의
집에서 사망한다.
누구보다 강한 모습을 보였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약물 부작용이었지만
충격이 큰 탓에
많은 소문을 낳는 등
죽음까지도 슈퍼스타다웠다.
그리고 그는 절권도라는
군더더기 없는 권법의 창시자로
현재까지도 그의 강함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영화배우이자 최강의 무술가로
칭송받는 이소룡.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짧은 시간 찬란하게 빛난 이소룡,
오늘 그의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이소룡 근육
▲ 3분 30초부터 |
사또 박눌(朴訥) 이야기,
우부리 장살사건(묘답, 苗畓)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땅에
김한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녀(處女)고 유부녀고 가리지 않고
얼굴만 반반하면
수하(手下)의 잡놈들을 시켜 끌고 와
겁탈(劫奪)을 했다.
겁탈당한 여자들의
자살(自殺)이 이어졌다.
이 고을 사또라는 위인은
빗발치는 민원에
김한을 찾아 와 그 앞에 꿇어 앉아
한다는 말이
"어르신, 제발 유부녀 만은..."
보료에 삐딱하니 앉아
장죽(長竹)을 문 김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건방진놈,
네놈 할 일이나 하지
쓸데없이 참견이야,
썩 꺼지지 못할까."
나주 사또는
김한의 눈 밖에 나
옷을 벗고 물러났다.
도대체 김한은 누구인가?
연산군(燕山君) 애첩(愛妾)의
큰오빠였던 것이다.
박눌(朴訥)이라는
신관사또(新官使道)가 부임하러
나주(羅州)땅에 들어섰건만
누구하나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신관사또의
기(氣)를 꺾으려는
김한의 농간(弄奸)이었다.
동헌(東軒)에 들어오자
이방(吏房)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찾아 왔다.
"나으리,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이거라도 들고
먼저 인사를 가시지요."
박눌(朴訥)은 보따리를 걷어 차며
고래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당장 김한이란 작자(作者)를
잡아 오렸다."
천하의 김한에게
인사 가기는 커녕
잡아 오라 대갈일성(大喝一聲)하니
"들리지 않느냐!"
다시 호통을 쳐도
고개만 숙일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놈 집 마당에 형틀이 있다지."
사또 박눌(朴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방을 앞세워
김한의 집으로 가자,
관속과 포졸들이 뒤따랐다.
박눌이 김한의 안마당에 들어서자
마루에선 김한이 두눈을 부릅뜨고,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며
사또에게 고함을 쳤다.
사또가 단숨에 뛰어 올라가
김한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
형틀에 묶고
형방(刑房)에게
곤장(棍杖)을 치라 명했다.
얼떨결에 형틀에 묶인 김한이
"네 놈 사또옷을 당장 벗기리라."
악을 썼다.
형방이 곤장을 들고 벌벌 떨자,
사또가 빼았아
떡메치듯 곤장 스무대에
김한은 똥을 싸며 뻗었다.
찬물을 퍼부었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황천(黃泉)길로 가 버렸다.
김한이 신관사또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주(羅州)백성들은
밤새도록 꽹과리를 울리며
춤을 췄다.
일은 크게 벌어 졌다.
그 날밤 육방(六房)이
사또 앞에 엎드려
"사또 나으리,
변복(變服)을 하고
멀리 행적(行跡)을 감추십시오.
여기 노잣돈을 마련했습니다."
박눌(朴訥)의 대답은 단호(斷乎)했다.
"필요 없다"
이튿날 아침,
나주 사또 박눌(朴訥)은
당당하게 연산군에게 고하고
사약(死藥)을 받을 참으로
집사(執事)만 데리고서
말을 타고 상경 길에 올랐다.
애첩의 큰 처남이
사또의 태장(笞杖)에 절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산군은 펄적 뛰며
사헌부 관리를 나주로 보냈다.
그들은 엿새만에
나주에 도착해
"사또 박눌은 빨리 나와
사약을 받으라."고
고함을 첬지만 박눌은 없었다.
한편 서울에 도착한
박눌은 간발(間髮)의 차이(差異)로
남대문(南大門, 숭례문) 문이 닫힌지라
그날 밤은 성(城)밖 주막집에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평생 대리고 다닌
집사(執事)에게
"함께 화를 당할지 모르니
너는 이 돈을 가지고
네 고향으로 내려 가거라.
날이 밝으면
나 혼자 조정(朝廷)으로 들어가
사약(死藥)을 받으리라."
집사는 박눌(朴訥)에게
술 한잔을 올린 후
큰절을 하고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떨구었다.
이튿날 아침,
간밤에 마신 술로
주막(酒幕)에서 아직 자고 있는데
집사가 뛰어들었다.
"나으리,
세상이 바뀌어 졌습니다."
간밤에 중종반정
(中宗反正, 1506년 9월 2일)으로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강화도(江華島)로 쫓겨나고
중종(中宗)이 등극(登極)했던 것이다.
박눌(朴訥)이 서둘러
한성으로 돌아 오니
새 임금 중종은
부제학(副提學, 정3품)을
그에게 제수했다.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죽음은 그를 비켜 가버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일설에는 박눌(朴訥)은
그날 밤 술을 너무 마셔
중종(中宗)을 알현했을 때
아직도 취중이었던지라,
"소신이 나주로 떠날 때
뵈온 용안과
지금의 용안이 다르니
이 어쩐 일이옵니까?"
라고 실언하여,
그 바람에 새 임금 중종과
주변 신하들이 웃었다는 이야기...
(여기서 박눌(朴訥)이
나주사또로 나오지만
정식 관직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