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옹기
안이숲
옆구리 모두 유통기한 하나씩 흉터처럼 찍혀 있는데
나는 나의 유통기한을 기억해 본 적 없다
할머니는 몇 대째 이어 내려오는 내 몸속 물이
씨간장이라고 명명해 주신 적이 있지만
씨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부터 서리 맞는 일을 배웠다
가끔 몸을 씻겨 주는 소나기를 피부에 새겨 넣기도 하고
바람이 전해주는 먼 곳의 이야기를 담아
씨의 근원을 만들었다
씨란 할머니의 그 윗대 할머니의 고함소리
한 번씩 뚜껑을 열 때마다 세상 모두를 달이고도 남을 만큼 짰다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일도 허기가 져서
무두질해 부드러워진 옹기 한 벌 걸쳐 입고 먼 섬으로 떠나고 싶기도 하고
옹기를 반으로 뚝딱 잘라
양산을 만들어 쓰고 도시로 쇼핑을 나서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마트에서 파는 나의 짝퉁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 들은 이후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시간이 쌓인 짱짱한 나의 둘레
진짜는 진짜답게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법
나는 나의 방식을 온몸으로 쟁여둔다
훌쩍 성숙한 씨 간장 한 그릇, 따스한 봄이 퍼갈 때를 기다려
나는 나를 완성한다
안이숲 (본명 안광숙).
경남 산청 출생. 경 2021년 계간 《시사사》 상반기 신인상 당선.
시집 『요즘 입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