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물어뜯은 시집 / 조경선 우편으로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 있다 제목은 찢겨져나갔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 위에 너덜거린다 한 끼에 9,000원짜리 독상 침 흘리고 먹다 버린 첫 장 시인의 말이 마당에 흩어져 있다 귀퉁이 구겨진 시인의 얼굴은 웃는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맛을 아는지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배불리 먹었을까 씹어 넘기다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핥았을까 유명한 견이니 겉장만 보고 가려서 맛보았겠지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이 대문 앞에 적멸로 앉아 있었다*
* 장인수 시집 시집 『적멸에 앉다』 인용
- 시집 『개가 물어뜯은 시집』 (달아실, 2021)
* 조경선 시인 1961년 경기 고양 출생, 경희대 대학원 행정학과 졸업 2012년 계간 <포엠포엠> 등단 2016년 매일신문 시조 당선 시집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 2014년 천강문학상, 시흥 문학상, 2019년 김만중 문학상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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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잠깐 집을 비운 사이 마당에, 개가 물어뜯은 시집이 흩어져 있다. 개에게 시집은 먹을 수도 없고, 아무 쓸데가 없는 사물인데 말이다. 개가 물어뜯은 탓에 표지는 나달거리고, 내용은 읽어낼 수가 없다. 한 끼에 9,000원짜리 독상 치고는 너무나 씁쓸하다. 오늘날 시가 처한 현실이 개가 물어뜯은 시집처럼 쓸모없이 변방으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시집의 독상이 먹음직스러운 풍성한 한 끼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조경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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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수이자 각자장인인 조경선 시인의 신작 시집 『개가 물어뜯은 시집』(달아실, 2021)에서 한 편 띄웁니다.
시인에게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는 천연덕스럽게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시인 옆집 개 삼 년'쯤은 된 모양입니다. 시집 한 권쯤 너끈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어쩌면 시인은 시집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며 자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누가 시 따위를 읽는다고! 요즘 누가 시 따위를 쓰고 있냐고! 시집을 보내봐야 어차피 개나(개처럼) 물어뜯기밖에 더할까! 그렇게 자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개만도 못한 시인이 문제일까요? 개만도 못한 독자가 문제일까요? 아니면 시의 효용은 이미 개밥보다 못하게 된 게 문제일까요?
시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참 얄궂은 시입니다.
하긴 '시'만 그런 건 아닐 테지요.
2021. 5. 3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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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티브이와 영상시대다, 시와, 시인이 대접받고 있지 못하는 요즘 세태를 풍자한, 씁쓸함을 던져주는 시다. '한 끼에 9000원 짜리 독상'(즉, 시집 한권이 9000원 짜리 식사대의 은유다). 시집이 배달되었다. 마당 한켠에 던져진 시집을 개가 물어뜯고 있다. 시집 제목은 찢겨 나갔고 누가 보냈는지도 알 수도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위에 너덜거리고! 있다. 찢어진 시집 한 귀퉁이에 구겨진 시인의 얼굴이 보인다. 시집 속에서 시인은 아직도 웃고만 있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시집 맛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개는 꼬리만 흔들며 놀고 있다. 날은 맑고 청명한 대낮이다.
(개는)'배불리 먹었을까?' 찢겨진 시집, 찢겨진 책에서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만이 '대문 앞에 적멸처럼 앉아 있었다', '적멸처럼!(생과 멸이 없어진 열반 상태, 죽음처럼)' 앉아 있는 찢겨진 시집의 쓸쓸함! 이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게 담겨 있는 시행이다. '죽음처럼' 찢겨진 시집 한권에 담긴 상징, 시가 이렇게 푸대접 받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일차적인 책임은 이 땅의 시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상황도 또한 무시하지 못할 현실이다. 시인도, 독자도, 한편의 시에서 고달픈 삶을 위로 받고, 삶을 깨우치는 '시를 사랑하는 시대'가 다시 와야 한다. 이제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시가 질문한 다.
-김성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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