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불행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입니다. 오랜 시간 그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며 살아갑니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살면서 차츰 마음 정리가 됩니다. 삶이라는 수레바퀴에 밀려서 잊혀가는 것입니다. 물론 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먼 창고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트라우마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튀어나와 슬픔과 분노를 재생산해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속 어딘가에 간직되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아니면 혼자서 이겨내야 합니다.
갑작스런 사고는 충격이 크지만 그만큼 빠른 대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질병이라면 조금 다릅니다. 물론 시간을 다투는 급작스런 병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을 유지하며 진행하는 질병의 경우 여러 가지 차질을 불러옵니다. 먼저 가족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실 가족 중에 환자가 발생하면 그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겪는 아픔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그래도 요양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지요. 지난 세기까지만도 모두 가족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요양시설에 입원한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기훈’은 특히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엄마 곁에 머물러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두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안에 가두어두기도 어렵지요. 24시간 따라다니며 지킬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 입구에서 쪼그리고 앉아 졸면서 버티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생활이란 것이 없어집니다. 동생 ‘지은’이가 돌아와서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고 우기는 것을 극구 말립니다. 1년만이라도 그냥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애원합니다. 듣고 있던 엄마도 요양원에 가겠다고 동조합니다. 어쩌지요?
‘알츠하이머’ 많이 들어본 이름입니다. 여러 가지 증상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억상실입니다. 최근 이 ‘기억’이란 문제로 글을 자꾸 쓰는 듯합니다. 과거를 모르는 나는 과연 나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는 여전히 내 아내인가? 등등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남은 가족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생각이 복잡해질 것입니다. 물론 일찍 발견이 된다면 서서히 대처해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완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뇌세포는 회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는 식사를 분명 끝냈는데 조금 후 식사하자고 말합니다. 일하는 식당에서 이상한 기미가 보였지만 설마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모시고 병원진료를 받습니다. 결과는 ‘알츠하이머’입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점점 진행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어느 순간 집을 나가더니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딸로 착각하고 데려가다가 아동유괴범으로 잡혀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기훈이는 엄마의 병명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지 않으려 합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오기는 합니다. 집안 곳곳에 설명서를 붙입니다. 화장실, 싱크대, 안방, 찬장 등등. 엄마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진작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자기 꿈을 실현하고자 나간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부모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기훈이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훈이는 친오빠가 아닙니다. 어려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기훈이를 아들로 받아준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아들처럼, 아니 오히려 더 애정을 쏟아부어 키웠습니다. 지은이는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것입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당하며 자랐습니다. 자라는 동안 내내 상처가 되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십대의 반항과 더불어 아이돌을 꿈꾸며 가출한 것입니다. 당시 화를 내던 아빠가 쫓아오다 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상처까지 안고 산 것입니다.
한창 잘 나가려는 때에 지은이는 백혈병 진단을 받습니다. 골수이식이 필요합니다. 보호자로 달려왔지만 기훈이는 부적합자입니다. 당연하지요. 친형제가 아니니 말입니다. 남은 사람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족은 다시 모입니다. 수술은 잘 끝나고 모두가 살아서 소풍을 나갑니다. 진작 이렇게 사랑해주었으면 오죽 좋았을까 마는 우리 삶 속에 늦은 경우는 없습니다. 생각이 나면 지금 하면 됩니다. 지나간 과거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며 살 것이 아니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때로는 반성도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영화 ‘세상 참 예쁜 오드리’(Audrey)를 보았습니다. 엄마의 별명입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