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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오회장님의 카톡에서]
🌻말은 마음의 그림 ☆ -
말 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이 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잔잔하면
말도 잔잔하고
마음이 거칠면 말도 거칩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말도 부드럽고
마음이 차가우면 말도 차갑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때
그사람 옆에 내 마음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말을 하기 위하여
좋은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말을하고
좋은 말이 좋은 그림을 그립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싶은
마음이 있나요?
유창한 표현보다 내 마음의 진실이
중요하겠죠!
구름한점없이 푸른 하늘에
밝은 햇살속 신선한 공기와
주변의 울창한 숲이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는 5월
이네요.
도처에서 형형색색 아름
다운 모습으로 줄줄이 피어나는
각종 꽃향기에 매료
되어 4월이 가는줄도
몰랐건만,
아름다웠던 계절!
지난 한달동안 일상속에서
나름대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지냈으리라 믿습니다.
장미의 계절인 5월 !!!
꽃향기 짙어가는 5월을 맞이하여 호연지기를 받아 모든 질병에서 벗어나시고 건강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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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갖지 말고 마음을 넓혀라」
미국 UCLA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곧바로 현지 병원으로
나가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수업 중에 한 사례를 들며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때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 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 했습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 모두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악성 베토벤은ᆢ 바로 그런 환경에서 1770년에 태어났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한거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으나
그런 악조건에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했었다,
여러분은 무릇 우리 인간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한다"
그 교수는 또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를 대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ᆢ 겸손하고 신중하게 치료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람은 쉽게 말하지 말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되,
넓은 마음을 갖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진심을 담아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마음을 넓히고 표현된 말과 행동은ᆢ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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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UbfF_1ysGA?si=oQdOJc1-yGdSOX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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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작곡에 얽힌 사연 126번째🎋
(한국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
2021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이 89세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백기완 선생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싸운 사람입니다.
한국의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던 민중의 지도자였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처음 구속됐고, 1979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다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습니다. 1992년 다시 독자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완주합니다.
그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어른으로 민중의 투쟁 현장,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백기완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장편 시 <묏비나리> 중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노래 가락에 맞춰 다듬어 가사로 만들어집니다.
<묏비나리>는 백기완 선생이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을 주도했다가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였던 1980년 12월에 쓴 장편 시입니다.
백기완 선생은 민중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한국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한 우리 말을 사랑하는 시인이었습니다.
백기완 선생이 남긴 유산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빛나는 것이 우리 말입니다
선생은 우리 말을 정말 사랑하셨는데, 처음 만들어 제안해준 말들도 많았습니다. '새내기' , '동아리' 같은 말이 백기완 선생이 처음 만들어 쓴 말이었습니다.
한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백기완 선생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노래의 가사가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한 부분을 따왔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사는 백기완 선생이 원 저작자가 된 셈이죠.
그럼 지금부터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영혼 결혼식이 열립니다. 5.18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을 주도하다 1978년 숨진 '박기순' 열사를 기리는 영혼 결혼식이 열린 겁니다.
'윤상원' 열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나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재학 중에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졸업 후에 서울 주택은행에 입사했다가 6개월만에 퇴사하고는 광주 광천공단의 한남 플라스틱이라는 회사에 위장취업합니다. 이후에는 양동 신협에 취업하고 노동자 운동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노동자 야학인 들불 야학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치게 됩니다.
윤상원 열사를 야학으로 이끈 사람이 박기순 열사입니다. 박기순 열사는 1958년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나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사범대학에 입학합니다. 1978년 7월에 광주 광천동 성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노동자 야학인 '들불 야학'을 설립합니다. 그해 10월부터 광천공단에 있는 ‘동신강건사’에 조립 견습공으로 입사하는데요,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 취업이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 열사에게 야학합류를 권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들불야학을 이끌고 가는 주역이되었는데요, 박기순 열사는 1978년 12월 25일 야학당 난로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 동료들과 함께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와서 수업에 참석한 뒤 밤늦게 귀가했다가, 새벽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영원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
두 볼에 흐르던 장밋빛
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들불야학은 5.18 광주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조직이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완전히 고립되고 언론이 통제당했을 때, 윤상원 열사는 당시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시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들불 야학 사람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합니다.
그렇게 투사회보는 광주시민의 눈과 귀가 되었고 윤상원 열사는 광주 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투쟁 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항쟁의 마지막날 윤상원 열사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1982년 2월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이 제안되고 망월동 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이 진행됩니다. 이 영혼결혼식에 끝나고 한 달 후 쯤, 광주지역의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10여명이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 모여 두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극을 만들게 됩니다.
제목은 <넋풀이> - 빛의 결혼식이었습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모두 담요로 가리고 오전에 대본과 노래를 짓고 연습까지 하고 통기타와 북, 꽹과리 정도를 들고 새벽까지 녹음기로 녹음했다고 합니다. 1박 2일동안 7곡의 노래가 담긴 노래극이 만들어지는데요, 그 노래극의 마지막 합창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 노래는 1979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던 전남대생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고 황석영씨가 책 한 권을 들고 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가져와 가락에 맞게 다듬어서 노래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녹음된 노래극은 기독청년협의회를 통해 2천개가 비밀리에 복사돼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노래극을 만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률씨는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1983년 첫 휴가를 나와 신촌을 지나다가 연세대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를 듣게 됩니다. 단 1년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전국의 집회 현장에 울려퍼지게 된 겁니다. 그만큼 노래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이 노래는 거의 모든 집회 현장에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운동의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2019년 홍콩 시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죠. 그 외에도 대만, 인도, 태국,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이 노래가 불리웁니다.
사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세상에 나온 이후 1980년대 초중반부터 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982년 한국과 홍콩의 운동권 학생들의 교류 과정에서 처음 외국에 알려졌고 홍콩 기독교 노동운동 조직에서 일했던 활동가가 영어 가사를 광둥어로 번역해 홍콩에 본격적으로 퍼져나게 됩니다. 당시 번역된 제목은 '애적장전', 영어로 'march for love' 였습니다. 1985년에는 세계기독학생연맹이 주도해 한국의 노동운동 현장을 둘러봤던 인도, 홍콩, 필리핀, 파키스탄 활동가들이 이 노래를 배우고 각국에서 불렀다고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러 나라에서 자기 언어로 바뀌었고 노래 제목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대만에서는 ‘노동자전가’라는 제목으로 1989년에 크게 확산됐고 캄보디아에선 1980년대 후반에 많이 불렸고 태국에선 1990년대 노동자밴드가 ‘연대’라는 제목을 붙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국에서도 2005년 신공인예술단이 ‘노동자찬가’라는 제목으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표준어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가 처음 넋을 기렸던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가 그랬고 1980년 광주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이 그랬고 그후로 수십년간 민주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싸웠던 모든 이들이 그랬고 이 시를 쓴 백기완 선생이 그랬습니다.
민주와 통일, 진보를 위해 싸웠던 모든 열사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스러져간 모든 사람들 그리고, 백기완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그 분들이 남겼던 뜨거운 맹세, 이제 산자의 몫이겠죠. 그 길을 따르는 것,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https://youtu.be/HflAkEir2rQ?si=x2GEVWFyFHxvnyDd
(광주 시민이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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