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엇 폴라드 선교사는 독신으로
2대신명여고 교장으로 26년 헌신하며 대구 지방 여성 교육에 헌신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11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대구 선교부로 배속되어 1912년 4월 대구 신명 여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초대 교장인 마르타 브루엔 선교사의 후임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취임한 그해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고 당시 재학생은 51명이었다.
그녀는 교장으로서 비교적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여학생에게 보수적인 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신명 여학교는 1903년 마르타 브루엔 선교사(부마태)에 의해 설립된
대구 최초 여학교로서, 1907년 정식 여학교로 인가받아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녀는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13년 본관 2층 벽돌 교사를 신축하였고,
1916년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현재까지 신명 고등학교에는 폴라드관으로 명명되는 건물이 있다.
그녀는 주일에 대구 제일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맡아 운영했으며,
대구 성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방학 중에는 경북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920년에 신명 여학교 졸업생과 함께 신명 전도대를 만들어
고령, 의성, 안동 등을 방문하며 순회 전도하였고,
그녀는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학교가 앞장서서 자주독립을 외치도록 하였다.
1927년 근속 15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여 그녀의 학교 발전을 치하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0년에는 지정학교 승인을 받기 위해 미국 고향에 재정을 요청하며 노력한 기록이 있다.
1929년 독신으로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스위처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
그녀가 기록한 추모의 글이 남아있다.
<스위처는 재정적으로 고국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열정으로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다.
보수를 받지 않으면서도 하는 일은 전심전력으로 지칠 줄을 몰랐다.
한국의 부녀자와 아이를 사랑하면서 선교 사업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매력적인 인품과 인자한 영향력을 지닌 교양 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크리스천의 아름다움과 능력으로 주님의 찬란한 광채 속에서
두드러지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를 알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에게 그의 삶과 사랑의 노고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
1936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 등 각 학교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고,
심지어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1938년 26년을 근무한 신명여고 교장 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학교는 경북 노회가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그리고 1941년 2월 평양에서 시작한 세계 평화 기도문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11월 출국 당하여 필리핀 마닐라로 떠났다.
그녀는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1944년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여생을 마쳤다.
“복음”이라는 용어의 의미와 유래를 정리한다.
“복음”을 영어성경에서는 Good news 또는 Godspel 이라 하는데 이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죄로 인하여 형벌 받을 운명에 놓여 있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죄를 사하시고
크신 복을 주시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알려주셨는데 그 예언이 이제 성취되어 이미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곧 크리스토 예수가 복음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복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이에 적절한 용어를 찾다가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용어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 원어인 그리스어(헬라어)로는 “유 앙겔리온”이라 하였는데
이 말에는“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유 앙겔리온“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채택하여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유 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의 유래를 좀 더 살펴보겠다.
“유 앙겔리온“의 유래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로니아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의 권좌에 올랐다.
그동안 바벨로니아가 지배하였던 많은 나라들을 페르시아가 인수하고서 행정구역 개편,
납세부과 등 새로운 정책으로 통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후 페르시아는 지배영역을 더욱 넓히기 위하여
먼 지방까지 자주 원정을 나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지역을 벗어나
마게도니아(유럽)로 진출하여 거기에서 그리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리이스는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리이스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기로 최종 결정하고
모두 전쟁터로 나가 맞섰다.
당시 전쟁에서 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민족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항하였다가 패하면 그 결과는 참혹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들의 재산은 모조리 약탈당하고 건물들과 도시들은 불에 타 페허가 된다.
모든 남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붙잡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간다.
전쟁에서 대항하였다가 패한 나라는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종말을 맞는다.
그리이스가 페르시아를 대항하여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이제 페르시아에 의하여 그리이스의 종말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무서운 죽음의 종말을 기다려야 했고
더러는 들이나 산속으로 피난하여 거기에서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전쟁터의 소식은 감감하였고 그리이스 주민들은
매일 불안과 두려움과 함께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멀리 한 군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 군인을 지켜보았다.
42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달려온 그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동포들 앞에 다가와서는 힘없이 쓰러지면서
“승리는 우리에게” 한마디를 웨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유 앙겔리온”하며 웨치기를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큰소리로“유 앙겔리온”하며 즐거워 하였다.
이때의 전쟁을 역사에서는 필로폰네서스 전쟁이라 하는데
그 후 그리이스 왕 알렉산더가 B.C.331년에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서 세계제국이 되었다.
“유 앙겔리온”은 그리스어로“ευαγγελιον”으로 표기하는데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으로
이 두 단어를 합하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란 뜻이 된다.
이 단어는 그들이 그 때의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준 그 병사를 생각하며
즐겨 사용했던 새로 만들어진 단어였다.
초대교회에서는 크리스토의 복음의 기쁨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약350년전 한때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유 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크리스토교 복음의 특성
첫 번째 특성으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경험되는 기쁨은 관계된 자들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쪽은 기쁨이 되지만 패한 쪽은 기쁘지 않다.
그러나 크리스토교 복음은 양쪽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나에게도 기쁨이 되지만 너에게도 기쁨이 되고 그에게도 기쁨이 된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웃나라나 먼 다른 나라 사람이나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한다.
이와 같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결같은 기쁨을 제공하는 신비한 특성이 있다.
복음의 두 번째 특성은 기쁨의 지속성이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그때 잠간이요 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물거품처럼 식어지고 사라진다.
행복을 안겨 줄것 처럼 보였던 그 기쁨은 사라져 없어지고 허전함과 아쉬움만 남겨준다.
잠시 나타나 보였다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온통 쉽게 변하고 사라지고 부패해버리는 거짓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참 기쁨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오래토록 지속하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어제도 기뻐했지만 오늘도 기쁘고 내일도 기쁨이 된다.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어도 기쁨의 감정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
어려움과 가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참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참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리스토 안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이해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복음은 변하지 않는 참 기쁨을 제공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비한 복음의 특성이다.
복음의 세 번째 특성은 큰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쁨들은 순간적이면서도 극히 작은 것들 뿐 이다.
사람들은 유치하고 저급하고 작은 기쁨에 매달려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다 허풍스럽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처럼 복음의 신비스런 특성 때문에
세상의 일반적인 기쁨과는 차별을 두려고
“유 앙겔리온“ 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롬1:16)
오늘날에도 복음이 바르게 전하여 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참되고 크고 신비한 기쁨의 삶을 누구나 체험하며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해리엇 폴라드, 대구 신명여고 교장으로 여성교육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
&&&&&&&&&&&&&&&&&&&&&&&&&&&&&&&&&&&&&&&&&&&&&&&&&&&&&&&&&&&&&
대구여자성경학교 설립자 스위쳐(Switzer) 선교사
독신 여성으로 18년간 교육 선교에 헌신한 스위쳐(1880-1929)
대구시 중구 동산동 424번지(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에는
미국 북장로회 대구·경북지역 여성 운동의 선구자
스위쳐(Switzer, Martha C.) 선교사 묘가 있다.
또한 이곳에는 대구 선교부 창설자 중 아담스 넬리(Adams, Nellie Dick) 선교사와
안동선교부 개척자 소오텔(Sawtelle, C. C.) 선교사 묘도 있다.
이들은 1909년 2주일 간격으로 별세하여 대구에 처음으로 선교사 묘지가 조성되었다.
스위쳐(Switzer, Martha C. 한국명: 成馬利多)는
1880년 8월 22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Saint Louis)에서 출생하였다.
뉴욕에서 컬럼비아 대학과 시카고에서 무디 성경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여 미국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지만 크리스토를 위해
몸 바쳐 일하려는 신앙심이 불타 해외선교사로 자원하여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리하여 1911년 12월 1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한국에서 그는 대구선교부에 배속되었으며 부산(범일동)에 잠시 거주한바 있으나
주로 대구(남산동)에서 거주하며 1929년까지 18년간 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모든 정력을 쏟았다. 특히 대구·경북지방 선교 활동 기간 중
자비량(自備糧) 선교사로 헌신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재산을 여성 교육선교에 아낌없이 바쳤다.
여러 교회 부인들과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헬라어: 유앙겔리온)을 전하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대구여자성경학교를 설립(1912)하고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대구 시내 5개 교회의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16개 농촌교회의 사경회도 인도하였으며
경북 도내 35개 교회에 부인전도회 조직을 지도하고 협력하였다.
그는 여러 교회에 자신의 돈을 지원하여 교회 활성화에 도움을 주었는데
그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16년 아담스(安義窩) 선교사가 동사목사로 겸임 시무 중이던
대구 범어(泛魚), 침산(砧山)교회에 오르간(風琴)을 구입하도록 헌금하여
예배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1917년 대구 신정(新町)교회가 남여연합전도회를 조직하고, 유년 주일학교 지부를 횡정구(橫町區)에 설립할 때, 교실로 사용하도록 집 한 채(3칸 초가집)를 사서 증여함으로서 신정교회의 복음 전도와 교육의 활성화에 이바지 하였다.
셋째, 1920년 상주 보성여자학원과 부인야학교 설립을 위하여 헌금하였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尙州 西町敎會 普成女學校와 婦人 夜學을 爲하여
大邱 宣敎師 婦人 成 마르다가 金 200圓을 寄附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넷째, 1926년 경북 달성군 범어동교회의 야학교 운영을 위하여
전도부인(송명숙)의 파송 비용을 부담하였다.
1928년 7월 그는 미국에서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여러 해 동안 선교 사업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 계획하며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배안에서 발병(發病)하여 일본 고베(神戶)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며 서울 도착 즉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1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그는 대구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다시 시작하며 이동도서관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1929년 4월 3일 49세의 젊은 나이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대구에서 별세하였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순직한 처녀 선교사이다.
그의 유증(遺贈) 재산은 대구·경북 지방의 부인전도사업을 위하여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 구체적 사례로 첫째, 대구 남산교회 안에 설립된
명도여자학원(命道女子學院) 설립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둘째, 일본 나고야 한인교회를 위하여 선교사(전도부인 姜聖淑)를 파송하고
3년간의 체재비용을 지원하였다.
셋째, 1930년 평양 부인성경학교 운영을 위한 기금으로 1,000 $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그의 유증 재산은 가난한 부인들을 위한
교회 내 야학교 설립 기금 등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선교사업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대구신명여학교 교장 폴라드(Pollard, Harriet E. 한국명: 方解禮)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추모의 글을 발표하였다.
“스위쳐는 재정적으로 고국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려는 열정으로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였다.
보수를 받지 않으면서도 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며 지칠 줄을 몰랐다.
한국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선교 사업에 가장 큰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매력적인 인품과 인자한 영향력을 지닌 교양 있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크리스천의 아름다움과 능력으로 주님의 찬란한 광채 속에서
두드러지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를 알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삶과 사랑의 노고를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고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스위쳐 선교사가 살던 집은 현재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1989년)되어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에서 선교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건평 146평(지하 50평포함)의 선교박물관 1층(48평)에는 각종 성서와
선교 유물을 비롯한 기독교 전래 과정 등의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2층(48평)에는 성막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출처/교회복음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