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단순한 빨갱이인지 아니면 간첩인지는 우리 대한민국
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를 분
석 검토해
보겠다.
* 월남 패망시 월남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월맹의 간첩이었다.
* 레바논의 전 대통령 제마일은 대통령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
CIA로 부터
매월 봉급받는 미국 첩자였다.
* 냉전 시절 영국,독일,프랑스등의 안보담당 장관급들 여러명
이 구 쏘련의
첩자였다. 이들은 민족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 핵무기등 각종 고급 군사과학 기술이 냉전 시절 고급 학자들
에 의해 상대
적국으로 넘겨졌다 .
상기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현 정권을 분석해 보자.
* 냉전 시절 쏘련과 중공은 모두 공산국가였지만 한치의 땅이라
도 상대에
넘겨주지 않기위해 국경선을 놓고 군사충돌을 서슴치 않았다.
김대중 정권은 우리의 국경선을 김정일의 요구대로 조정하여 주
려하고
있다. 특히 중장비 무기를 상륙시킬 수 있는 대형 상선을 자유
로이
통과 시키겠다는 것은 김정일에게 언제던지 원할 경우 나라를 송
두리 채
넘겨 주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다.
* 남침용 장거리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입증되
고 실제
주민에 의해 신고 되었고 확인되었다. 이를 SBS가 시리즈로 방
송하는 중
김대중이 SBS 회장을 불러 박지원,임동원을 배석시킨 가운데 임
동원,
박지원으로 하여금 SBS회장을 위협하여 땅굴관련 방송을 즉시
중단케
했다.
* 지난번 보안사 대공 처장이 이례적으로 해외 출장중 교체되었
다. 당시
대공처장은 청와대내의 적성세력을 감지하고 비밀리에 수사중이
었다고
한다.
*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북괴가 낚시 밥으로 던저주는 간첩
이외는 단
한 명의 간첩도 체포되지 않했다.
* 김대중은 김정일의 답방을 목매어 기다리고 있다. 이유인즉
김정일이
남한 통치를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이를 불식 시키고자 함이
다.
김정일(김일성)이 조총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일이 있다
고 한다.
"남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나 이를 통치하기 위해
서는
수 백만명을 죽여야 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라고 실토
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우익에게 다음 정권을 넘겨 주기보다는 김정일
에게
넘겨 주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고 생각 할 것이다. 노벨평화
상
수상자에 통일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논리다.
* 재래식 무기 감축 협상을 미북간의 협상에서 남북협상으로 끌
어왔다.
핵무기,장거리 유도탄등은 남한을 김정일이 점령하는데 도움되
는 것
이 아니다. 김정일이 남한을 점령하는데 필요한 것은 재래식무
기와
군사배치 상황이다. 특히 북괴는 현재 휴전선에 공격 대형으로
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다. 이로써 김대중은 김정일에게 남한을 점령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마음대로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이 말이 사실인
지 아닌지
는 두고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은 휴전선에 공격 대형
으로 배치
된 북괴군을 결코 뒤로 물리라고는 안할 것이다. 이것은 북괴
가 남침할
의사만 없다면 가장 쉽게 응할 수 있는 군사적 긴장완화 방법임
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 임기말 이전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다.
상기에 열거된 내용과 월간조선,한국논단,김대중과 김정일(일본
인 작가가
씀)등에 실린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김대중은 단순한 빨갱이가
아니라
북괴의 간첩이었음이 입증된다.
간첩이 아니라면 전두환 시절 간첩죄로 사형선고 받았을 때의 판
사논고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라. 그 반론이 입증될 때까지는 법
적으로도
간첩이다.
*** DJ말 믿었다가 알거지 신세 되간다
“민족주의”는 즉 “공산주의”의 위장 용어입니다.
민족주의는 씨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를 가장 소리높이 외치는
현 정권과 그 홍위병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펄벅 세계의 메뚜기
떼처럼 이 나라를 파먹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민족주의
요 씨족주의요, 김정일 도당처럼 사회적 부를 모두 독점해 보려
는 공산주의인 것입니다.
“민중”, “민주화” 라는 낱말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위장 용
어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좋은 낱말들을 선
점하여 그 낱말에 무임승차함으로써 정치공작의 효과를 상승적으
로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작품을 보아야 합니다. 사기꾼일수
록 말을 얼마나 잘 합니까. 말 잘하는 DJ 믿었다가 우리 모두
알거지 신세가 되 갑니다.
-- “제가 대통령이 되면 자식들 한테는 좀 안된 이야기이지만
무재산 가족을 선포할 것입니다. 모든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
습니다. 제게 공을 쌓은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공직은 능력있
는 사람에게만 나눠줄 것입니다”. DJ의 말입니다. 얼마나 감동
적입니까. 눈시울을 적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 북괴의 간첩이 정부 요직에 엄청나게 많다.
저는 지난 7월 경 이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안보
분야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증언은 상당한 설득력과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여
러 분들로부터 확인했습니다. 그의 증언 내용은 평소 저의 주장
과도 일치하며, 황장엽 비서 그리고 남굴사 모든 분들의 주장
과 일치합니다. 아래 글은 제가 지난 7월경에 그 분으로부터 직
접 들었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의 증언내용이 음지에서만 조금씩 알려지고 햇볕을 보지 못해
너무나 안타까웠는데 이제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서 이렇게
귀중한 증언을 해주시니 여간 힘이 되는 게 아닙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이하 가명 오재도 님의 글----
( 간첩단 발견 사례 )
* 나, 오재도는 군 고위층 경호대장으로 근무 후 전역, 쉬고 있
던 중 75년 도에 한 거물 간첩단이 접근해 오자 그들에게 포섭
된 것처럼 행동을 취했다.
* 동 간첩단은 서울시청 앞 쎈터빌딩에 버젓이 사무실을 차려놓
고 있었다. 간첩단 두목은 나에게 한반도 지도상에 표시된 남
침 땅굴 현황을 보여 주면서,
- 동지(오재도)가 수령님을 배알하고 난 후에는 원하는 보상을
해주고
- 서울시내 땅굴 기지 내에 설치된 무기고도 보여 주겠다.
- 중앙정보부는 김일성 수령님의 기관이 되었다. 보안사와 치
안 본부도 요소요소에 우리의 동지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등의
엄청난 내용을 이야기했다.
* 그 후 동 간첩단과 접촉하면서 그들이 제공한 자료들을 확인
한 결과 간첩단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국내 정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포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종래 간첩단은 점조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 간첩단의 일
원이면서도 서로가 신분 등을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73년 경부
터는 조직원간에 "연합 내지는 협조체제"로 활동방법을 바꾸는
바람에 서로 신분을 알 수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히
간첩단내의 조직원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 간첩단 신고 사례(1)
* 전 외무부 장관 최덕신, 해군 참모차장 이용운등 유력인사들
로 구성된 간첩단 정보를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인 친지에게 직
접 신고했다.
* 신고할 때, 나는 중앙정보부 내에도 고정 간첩단이 있다고 전
제하고는 "나는 포상금도 필요없다. 제보자인 내 이름을 빼달
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부장의 단독수사 약속까지 받았다.
* 신고한지 3 일후 새벽 1 시, 나의 집으로 소름이 끼치는 협
박전화가 걸려왔다(국정원에 감첩이 있는 것이다).
"오재도! 조직을 배반하고도 살 수 있을것 같으냐? 공동묘지에
갈 준비나 해라".
* 수사가 진행되자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압력이 쇄도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수사가 계속되자 위험을 감지한 최덕신등은 박대
통령과의 불화를 빙자하여 해외로 도주했다(북으로 넘어갔음).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에 압력을 행사한 유력인사들은 밝혀지
지 않은 간첩집단의 조직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얼마 후 신고자 오재도는 중정 수사관들에 의해 두 차례나 정
신병원에 입원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 조치
는 제보자를 정신병 환자로 모략하여 수사를 종결시키려는 음모
로써 중정내에서 암약중인 간첩 수사관들의 소행으로 판단된
다.
* 나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피 생활
을 한 적이 있는데 한 경찰관이 도피처인 계룡산까지 추적하여
동향감시를 했다. 후일 그 경찰관은 나에게 자신에게 지시했던
상사가 이상하다면서 그 사실을 서면으로 확인해 주었다.
** 간첩단 신고사례(2)
* 88년 당시 카도릭 농민회장이고 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서경원
이 나와 접촉한 바로 그 간첩과 밀회하는 장면을 나는 목격했
다. 그 사실을 청와대 김ㅇㅇ 수석 비서관에게 신고했다.
* 청와대 지시로 치안본부 특수대에서 내사를 시작했다. 그 결
과 간첩단으로 확인되었으며, 이에 대한 수사는 보안사에서 전
담했다. (수사가 핵심조직을 향해 들어가자) 안기부는 "서경원
간첩단 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라내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 그러나 신고자인 본인이 발표내용을 보았을 때 범증이 드러
난 서경원 등 일부 하부조직만 검거해 명분만 세웠을 뿐 실제 핵
심 간첩등은 제외 시키는 등 수사가 미진 되었거나 은폐시킨 것
으로 판단되었다.
** 간첩단 신고사례(3)
* 본인과 동조하는 인사들이 90 년도 노태우 대통령에게 "과거
오재도가 신고했던 간첩단 수사에서 핵심 거물 간첩들을 제외시
킨 점과 안기부 내의 대공수사관(간첩) 포진 실태에 대한 내
용"의 탄원서를 이현우 경호 실장을 경유하여 직보토록 했다.
* 청와대의 특명으로 보안사령부는,
- 서경원 간첩단 수사시 핵심 간첩을 빼돌린 경위,
- 75 년도 중앙정보부 지부장에게 신고했던 최덕신 일당 거물
간첩단 사건,
- 신고자인 본인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문제 등에 대해 수
사를 개시했다.
* 수사가 개시된지 29 일만에 수사중이던 보안사 내에서 사건
이 발생했다. 이른바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이다. 윤 이병은 보
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서 보관중이던 정치인 사찰 디스켓을 절
취하여 언론에 폭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떻게 군 기관이 정치인까지 사찰하느냐 ? " 며 압
력을 가하는 정치인, 언론인, 기관원 등의 농간으로 보안사의
수사는 전격 중단되었다. 그 때 압력을 행사했던 자 등은 간첩
단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 그 후 보안사는 "기무사"로 기관 명칭까지 바뀌게 되고 대공
수사 기능은 극도로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보안사 대공처장 우종일씨는 "빨갱이
부하들에게 당했다"고 탄식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보안사
내 수사관(간첩)들이 자보책으로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사료된
다.
** 동 간첩단 사건 조사 참여 민간인
* 전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진광학과 전 육군 헌병차장 인복수씨
는 내가 제공한 간첩단 정보를 토대로 수년간에 걸처 내사했
다. 간첩단의 규모는 내가 신고한 내용보다도 규모가 크고 위력
이 강해 감히 "간첩 정부"라고 불리울 정도라고 진단했다. 인복
수씨 일행은 동 실태를 보고서로 작성, 이현우 경호실장을 경유
하여 노태우 대통령께 보고
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관철이 않되자 그는 이민을 갔다. 진광
학씨는 의문사를 당했다.
** 간첩단 암약 또 다른 증언
* 황장엽씨는 "남한에 간첩은 5 만명 가량이고 권력 깊숙한
곳, 각 기관에 북쪽 사람있다."면서 간첩색출을 촉구했다.
* 이어 황씨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한 수석비서
관 이름이 거명된 보고서가 그 이튿 날 김정일 책상위에 놓여있
다."라고 증언했다.
* 기무사는 지난 3월 "좌익 세력 대군투쟁 실상"이란 책자를
전 군에 배포 했다. 동 책자에는 군 내에 침투한 적성 세력이
1,000 명이 넘고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에까지 김정일 추종세력
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 그런데 동 책자를 만든 책임자인 방첩처장 염완표 준장은 갑
자기 행임, 전역됐다. 기무사는 일부 간첩단 조직을 파악해 놓
고도 의법조치를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고 오히려 좌익세력에 의
해 제거되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 이로써 암약 중인 간첩단의 조직이 방대하고 위력이 막강하
여 국가 수사기관들이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실상이 입증된
것이다.
* 88 년도 부터 문제 제기된 남침 땅굴 문제도 역시 간첩단의
방해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끝 --
---------------------------------------------------------
* 월남 패망시 월남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월맹의 간첩이었다.
* 레바논의 전 대통령 제마일은 대통령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
CIA로 부터 매월 봉급받는 미국 첩자였다.
* 냉전 시절 영국,독일,프랑스등의 안보담당 장관급들 여러명
이 민족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구 쏘련의 첩자였다. 하물
며 같은 민족간에는 얼마나 간첩이 많겠는가.
* 수많은 고급 과학자들이 핵무기등 각종 고급 군사과학 기술
을 적국으로 넘겨주는 데 참가했다.
--------------------------------------------------------
여기에서 "나" 또는 "본인"으로 표시된 사람은 당시 수사관으
로 이 문제에 깊숙히 개입, 조사한바 있으며 위의 모든 기술내
용은 본인 판단으로는 사실이거나 사실에 매우 가까운 내용입니
다.
그런데 우리만 보안법을 개정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국민들의 안보경각심은 더욱 이완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사회에 준동하고 있는 침투간첩, 고정간첩, 좌익세
력들은 때를 만난 듯 활개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국보법 철폐주장으로 이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때는 누가 그것을 책임지며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국가안보에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다. 7천만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더욱 없다.
*** 수도권일대를 거미줄처럼 뚫어놓은 북괴남침땅굴을 은폐하
는 정부 !
현정권은 친북 좌익 정권입니다. 정지용님이 국정원 요원에 의
해 앰배새더 호텔로 잡혀가서 2박3일간 고문을 당하고,앞으로
땅굴은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제6땅굴과 기타 수도권 일대 20여개소의 땅굴 징후 실상
화성군 송산면 지화리에서 발견된 제6땅굴은 1999년 10월 14
일 민간 시추업자가 화성군으로부터 주민 상수도용 지하수 개발
하청을 받아 밭 가운데 구경 8인치의 시추기로 관정을 파 들어
가던 중에 지하 30-40m 지점의 암반에서 3m 높이의 지하공간
을 발견하자, 수상히 여긴 나머지 콤프레샤를 수시간 동안 가동
시켜 압축공기를 계속 주입시켜 보았으나 무한대로 유입 흡수되
는 지라 폐광이나 거대한 동굴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
간 땅굴탐사자들에게 제보하게 됨으로 알려진 것이다.
10년 이상 땅굴 탐사에 종사해온 민간 전문탐사자들은 현장에
임하여 다우징(dawsing)탐사를 실시한 결과 땅굴과 같은 공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고 1999년 11월 1일 이 지하공간
을 따라 약 100m 서측의 야산 하록에 지하 70m까지 뚫고 내려
간 다음 특수녹음기를 갱내에 설치하여 청음하던 중 11월 4일부
터 11월 7일까지의 기간 중 수차에 걸쳐 기계진동소음과 고압전
기 유도음이 시추공 근거리에서 포착 녹음된 것이다.
동 민간 탐사자들(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서 제2땅굴을 발견한
정명환 사단장과 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을 지낸 윤여길 박사,
대공수사관출신의 예비역 육군 준위 정지용 외 6명의 땅굴전문
가들)은 이를 좀더 과학적으로 확인하고자 그 후 동 발견지점
을 감시 관찰하면서 다우징 탐사를 계속하여 땅굴의 징후를 확증
하는 한편 동지점에서 1.5km 동측의 논과 도로가 마주치는 곳
이 다우징 탐사결과 지하 공간 두 군데가 맞닿는 지점임을 알아
내고 여기에 2000년 2월 12일부터 18일까지 지하 40m까지 시추
공 4개를 뚫고서 청음기를 설치해 놓은 결과 2월 14일 야간에
기계소리 및 충격 마찰음과 함께 “대감께서 총리 되십니다”란
사람목소리가 청취되어 긴장케 했던 것이다
이 쯤 되면 제1,2,3,4땅굴을 발견 탐사할 할 당시의 징후에 비
하면 거의 100% 신뢰성과 정확성이 보장되고 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상세한 발견경위와 시추현장 사진
그리고 녹음테이프를 첨부한 완벽한 “서해안 장거리 남침 땅굴
징후 발견 신고서”를 2000년 8월 23일 국가정보원에 우체국 내
용증명으로 보낸 것이다.
이 시기가 6.15선언 직후로서 김정일에게 마취되었는지 당국은
이 같은 중차대한 정보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강
원도 포수나 다름없이 무소식이었다는 것이다. 동년9월 2일 민
간 탐사자들은 독촉장을 보냈다. 그래도 무소식이라 너무도 안
타까운 나머지 이들은 9월 19일 부득기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을
이적행위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자, 다급해진 국정윈은 9월 18일
자로 문서를 소급 작성하여 국방부에 이첩했다는 회신을 보내고
는 “난 몰라”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이었다.
국방부가 국정원으로부터 이를 통보받고 연천 땅굴 식으로 탁상
공론으로 판단처리 할 것이 .예상되는 바, 이들 민간탐사자들
은 서둘러 서울지검 담당검사(임권수 부장 검사)에게 신중한 조
사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12월 9일 발송하였던 것이다. 예상했
던 대로 한심한 국방부는 현장조사결과 땅굴이 아니란 결론을 얻
었으니 계속관심을 가져달라는 형식적인 회신을 12월 29일 보내
왔다 그 회신 요지는 북한으로부터 너무 장거리이고, 해저공사
시의 해수누수 가능성, 녹음한 기계음과 육성음의 조작 가능성
등을 전제할 때, 땅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참으
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안
보의 대들보라는 군이 이 모양 이 꼴로 사명감이나 공익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국가운명이 가히 풍전등화라 할만하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민간 탐사자들은 2001년 1월 15일 명명
백백한 땅굴 징후를 무조건 부정한 땅굴관련 직에 종사하는 국방
부와 육군본부의 담당관을 직무유기 및 특수 이적죄로 국방부 검
찰부로 정식 고발을 했다. 현제 피소된 자는 국방부 정보 본부
소속 대침투정보과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그리고 육군본부 정
보참모부 탐지과 소속 대령 1명과 군무원 1명 모두 4명이다.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2001년 1월 16일자로 서울지방검찰청
은 국정원장 피소건에 대하여 국방부에서 현장을 탐사한 결과 직
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한 사실을 인정 할만한 자료가 없으므
로 법리오해 및 사실오인으로 인한 것인바 공소부제기 이유를 아
래와 같이 고지한다는 내용으로 사건종결처리 회신을 보내온 것
이다.
이제는 검찰마져 압력을 받아 사건에서 손을 뗄려는 것이다. 이
에 고소자들은 다시 1월 22일 서울 지방검찰청에 불기소결정에
대한 불복항고장을 제출해 놓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항고장
에는 화성 땅굴의 징후 추가 자료와 국방부관련자 허위 판단에
따른 고소장 그리고 청와대 남침땅굴 침투 가능성에 대한 탄원
서 까지 첨부되어 있다.
국정원장과 국방부 및 육본의 땅굴 담당자에 대한 사직 당국의
법적처리가 주목되는 가운데 고소인은 일단 조서를 받은 바 있으
나 피고소인은 지금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
소자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파탄지경에 생존권 마져 위협받으
면서 고소를 취하하라는 당국의 직접 간접 협박과 회유를 받고
있으나 목숨을 걸고 국가안보를 위해 법정투쟁을 할 각오를 다지
고 있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국가정보원과 군의 기무사, 정보사 그리고
통신정보부대와 국방부 및 합참 정보본부는 물론 각군 작전정보
참모부 등에서 전략정보와 전투정보를 위해 해마다 쓰는 돈이 수
조원인데 단돈 몇 억원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고위층의 지령
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인 확인절차도 없이 탁상공론으로 독안
에 던 쥐나 다름없는 결정적인 땅굴 정보를 부정 묵살하는 것은
반국가적 이적행위임에 틀림없다. 2개 여단 규모의 육군공병대
를 투입하여 당장 불필요한 경의선 개설을 위한 기반공사 및 지
뢰제거작업을 하고 몇 십억원을 드려 지뢰제거기를 긴급공수까
지 해왔으나 사용불가품이라서 방치해 놓고 있으면서, 비예산사
업으로 또는 몇 억원의 대민발주 공사로 간단히 땅굴을 절개하
여 의혹을 투명하게 공개 할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땅굴은 연천과 화성에서만 발견 된 것이 아니고 수도권
전지역에 걸쳐 현재까지 20여 개소가 민간인의 신고로 시추 확
인된 바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시추공에서 기계음과 인간의 육성
을 청취 녹음한 증거까지 확보 하고 있으며 민간 탐사자들은 지
하음을 녹음한 테이프 200여개를 증거로 확보하고 있다. 그 동
안 당국에 무수히 신고했으나 “ 또 땅굴이냐?, 더 이상 괴롭히
지 말라” 고 하면서 외면한다. 이들은 지금 보상금을 노린 사
기꾼이나 정신병환자로 취급받거나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당할 위
기에 몰리기도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면 수도권의 대
표적인 땅굴 징후 사례와 당국의 무성의한 대응을 이하에서 소개
한다.
역시 이와 관련한 가장 큰 관심 꺼리는 청와대 인근에 땅굴 징후
가 포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1년 1월 3일 민간탐사자들
이 청와대 비서실장(한광옥) 앞으로 “청와대에 남침땅굴이 침
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란 제하에 그 가능성을 입증하는 자료
와 설명서를 보낸바 있으나 현재까지 무반응이란 것이다. 그 내
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93년에 어떤 젊은이가 김포반도와 행주산성 및 세검정을 경
유한 남침 땅굴이 청와대에 침투했다는 도면을 제시하면서 청와
대에 이르는 땅굴 지상루트를 조석으로 순찰하는 불순분자까지
있다는 제보를 모 국회의원에게 하였던바 그가 관할 3군사령관
에게 이 사실을 통보함으로서 3군사령부의 모 대령이 진상을 규
명코자 ,그 제보자를 수차 만난 다음 어느 날 그제보자가 자신
의 부친 묘소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 미스테리 같은 사건이
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불과 1km지점인 서대문 교도소 뒷산에 하록
민가에서 지하 굴착음을 청취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간 민간
탐사반이 사실임을 확인 한바 있는데, 육군 탐지요원은 아직도
북한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굴착한다는 한심한 소리만 하고
는 가버리더란 것이다. 현재 북한이 300대 가량 보유한 자동굴
착기(TBM: tunnel boring machine)은 고압전기로 작동되고
매연이 없으며 암석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럭으로 나오므로 이
를 해상에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김포반도 북단 해수가 한때
이유 없이 뻘탕물로 뒤덮힌 것을 해병초소에서 관측하기도 한 것
이다.
②김포반도의 애기봉 입구에 거주하는 민간인이 방밑에서 땅굴굴
착소리 및 진동음을 1988년부터 빈번히 청취한 것은 해안초소
해병대 초병들도 같은 기계음을 근무 중에 수차 청취하고 보고했
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이 위치에서 한강을 따라 후방으로 내
료와 한강 하류인 김포군 하성면 후평리의 지하 시추공 110m 깊
이에서 녹음한 음성을 일본 음향분석가인 스즈끼 마스미 박사가
분석한 결과 “이거 만지면, 일만 일천, 감전되지, 예 예”란
두 사람의 대화가 북한 억양임이 판별되었는데 일만 일천 볼트
는 북한에만 쓰는 송전방식이란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89년 9
월 11일 후평리 지하 시추공에서 채취한 양생중인 세멘트를 분
석한 결과 북한제 임이 확인되었고, 이 곳을 당장 시추절개토
록 육군 참모총장(이종구)에게 요청했으나 묵살되자 1990년 6
월 11일 노태우대통령에게 진정서로 호소했으나 결국 아무런 조
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한강 하류인 김포군 고촌면 향산
리 지하 100m에서 갱차 통과음과 자동굴착기 소리가 녹음되었으
며, 행주산성 인근 민가에서는 한밤중에 방안에서 땅속의 큰 진
동음을 수 차례 들었고 시추공 옆 농수로에서 갑자기 물이 치솟
기도 하였던 점을 미뤄보아 김포반도 건너에서 한강 하저 밑을
통해 행주산성을 거쳐 서대문 쪽으로 땅굴이 뚫린 것이 확실시되
나 이 모든 사실을 신고 받고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과학적인
사실확인을 하지도 않고서 무조건 수용치 않으려 하는 것이다.
심지어 민간 시추작업을 방해 중단시키고 땅굴존재를 부정하고
서 지금도 덮어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월간 조선에 1992
년 5,6,7,8,12월호에 연제된바 있다.
그 다음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심지역이 주한 미군 기지인
데, 의정부와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까지 1994년에 이미 땅굴 징
후가 발견되었으니 지금쯤은 미군기지 내 외진 곳의 지표면 직하
에다 출구를 안에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의정부 가능2동 미군기지 바로 앞에 사는 이국진씨는 1994년 9
월부터 방 구둘 밑에서 요란한 착암기 굴착소리가 나서 3번이
나 국방부 당국에 신고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민간탐사자
에게 제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
라버린 사실도 민간 탐사들과 함께 확인 하고는 지하음 청취를
위해 잠복근무를 하여 밤새 현장에서 청취녹음하였다. 1994년
12월에 뒤늦게 육본 탐지과에서 나와서는 민간인들이 보상금을
타려고 하는 수작이라고 일언지하에 확인작업을 거부하고 돌아
가 버린 후에도 몇 주간 동안 이 집 밑에서 지하음은 더욱 선명
하게 계속 들리었다.
그후 1995년 1월 27일 이국진씨 집 우물에 청음기를 설치해 놓
았는데 궤도차 소리가 나더니 이상한 음성이 들려, 청진기를 갖
다 데어 들어보니 “밥 먹으러 가”하는 육성이 청음되었다. 민
간 탐지팀은 땅굴 출구를 만드는 과정의 근거리 음성이란 판단
을 하였다. 2월 4일부터 민간탐사자들이 이 집에서 30m 이격
된 곳에 28개의 시추공을 뚫었는데 드디어 2월 8일 한 시추공에
서 시추기 파이프가 지하에서 부딛히는 강한 금속성 충격음이 들
리었다. 지하 땅굴에서 지상으로 박아놓은 쇠 말뚝을 시추공이
건드린 것이다.
이쯤 되면 시각을 다투는 위급상황이라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제2땅굴 발견 사단장인 정명환 예비역 장군이 안기부에 절개작
업을 정식으로 긴급 요청했는데 그 때가 1995년 2월 19일이었
다. 이에 앞서 1월 4일 충현교회 모 장로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
에게 : “대통령께 드리는 고언과 국방부의 땅굴징후 오판 실
태”란 제목으로 된 장문의 진정서를 전달하였다. 이 내용을 알
게 된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감독하여 현장을 서둘러 절
개 확인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사실을 그 후 연락받아 민간 탐
사자들은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방부를 제쳐놓고 안기부에 대통령이 특명을 하달하
여 절개하도록 함으로서 공사가 안기부 감독하에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현장에 나온 안기부 요원이 현
장에서 시추만 하지 절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오도해가
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 탐사팀의 별도 시추를 방해하면서 지연
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민간 시추자들을 서울로 강제
연행하여 땅굴탐사작업에서 손을 데도록 3일간 연금 협박하여
각서를 쓰도록 하고는 ( 현정권은 친북 좌익 정권입니다. 이 과
정에서 정지용님이 국정원 요원에 의해 앰배새더 호텔로 잡혀가
서 2박3일간 고문을 당하고,앞으로 땅굴은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당시까지 입수된 모든 자료
를 무시하라고 강권하였다.
이어서 서둘러 작업을 종결하면서 ,민간업자들이 보상금을 타기
위한 노름이라고 허위로 작성된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안
기부장(권영해)이 보고함으로서 의정부 땅굴은 절개확인 직전
에 미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권영해의 농간
에 넘어가 1995년 3월 15일 땅굴확인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
이다. 이 때가 6년 전 일이니 지금쯤 만약 그 땅굴이 사실이라
면 미군부대는 물론 서울까지 연결되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격분한 민간 탐사자들은 일단 냉각기를 둔 후에 1997년 11
월 14일 권영해 안기부장(당시)과 불법연행한 수사관 6명을 공
갈협박, 직권남용, 명예훼손, 직무유기, 이적행위 등으로 서울
지검에 고소했으나, 오영성 담당 검사는 1999년 8월 11일 공소
부제기 이유 고지를 고소인에게 보내고는 사건을 불기소처분하
고 말았다. 물론 그동안 직접간접으로 협박과 공갈도 수없이 받
은 것은 불문가지이다.
의정부 땅굴이 이렇게 일단락 될 무렵인 1995년 후반기에 동두
천 미군부대 정문 앞인 동안동과 광암동 일대에 겨주하는 민간인
들로부터 자하 굴착음 청취 신고를 받고 현장 답사를 하여 사실
을 확인한 동안동 파출소장은 파출소 밑바닥에서도 같은 지하음
이 들린다는 근무자의 보고를 재확인한 다음 의정부 경찰서에 보
고했더니 민간 탐사자들에게는 골치 아프니 얘기하지 말라는 핀
잔만 듣고 더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후일 이 사실
을 안 민간탐사자들이 다우징탐사법으로 이 일대를 확인 한 결
과 땅굴 진로가 미군부대임을 확인하였으나, 시추비용 마련이
불가능함은 물론 당국의 방해로 굴착을 해보지 못한 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는 굴착음이 들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공사가 완료되었거나 굴착진로가 바뀌었음을 뜻한
다.
*** 적화된 안기부
1. 의정부 식당주인 식구들이 겪은 공포의 땅굴 일기장
---------------------------------------------------
95'. 1월, 의정부시 가능 3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진국씨
가 제2땅굴을 발견했던 정명환 퇴역소장에게 연락하여 일기장
을 공개했다.
1) 1994년 여름, 방바닥에서 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날이 갈
수록 커졌다.
2)1994. 7.14, 국방부에 신고했지만 무응답
3) 1994.8.21 국방부에 두 번째 신고했지만 무응답, 공포만
지속됐다
4) 9.10, 국방부에 세 번째 신고했지만 무응답, 기계음 점점
더 심해지다.
5) 10월 중순, 마지막으로 신고했지만 무응답, 매우 이상한 현
상은 신고할 때마다 며칠간은 작업 소리가 멈춰지는 것이었다.
6) 12. 4, 밤새내 지하에서 두들겨 대는 소리에 잠을 못 자고
뜬눈으로 새웠다. 딸아이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방바닥 밑에
서 쉬쿵-쉬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요"
기무사 최계장에게 연락했더니 달려왔다. 최계장은 구둘 밑에
서 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7) 12.6, 밤새내 계속되던 소리가 새벽 6:20분에 멈췄다. 정
지용이 국방부에 이사실을 항의하자,
8) 12.6일 오전 9:45분, 국방부 탐사반 대령과 윤상훈 사무관
이 나왔다. 그런데 조사는 커녕 오히려 "당신 보상금 탐나서 신
고했나?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무슨 땅굴이 있어?" 호통만 치
고 돌아갔다. (국방부가 북한에 연락해 기계소리를 멈추게 한
후, 나와서 어디 무슨 소리가 나느 냐? 고 호통친 게 아닐까?)
9) 말싸움 현장:
국방부: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기무사 최계장: "나도 소리를 들었다"
국방부: 잘 못 들은 것이다. 땅굴은 아니다"
10) 12. 9, 쿵쿵 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3:20분. 쿵 크
드드, 쿵 쿠드드, 갱차 지나가는 소리가 분명했다. 가끔 탕,
탕, 탕 하는 쇠 마찰음도 들린다. 너무나 가까이서 들린다. 오
전 10시,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와 유언비어를 조심하라며 겁을
주고 갔다.
11) 12. 19, 오후 2시, 굴착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시쿵, 시
쿵. 때로는 1시간을 쉬었고 때로는 2시간을 쉬다가 다시 작업
을 했다. 무섭기는 하고 하소연할 데는 없고 참으로 답답했다.
12) 12. 29 새벽 3시, 굴착 소리에 잠을 갰다. 소리의 템포
가 매우 빨라졌다. 아내는 집 팔아서 이민 가자고 졸랐다.
13) 95'. 1. 7 새벽 6:45분, 5분간 시쿵 소쿵 하더니 조용해
졌다.
14) 1.9, 초등학교 5학년 조카가 놀러왔다가 놀라며 물었
다. " 방바닥 밑에서 나는 소리가 뭐야?"
15) 1. 13, 처형이 놀러와 안방에서 잠을 잤다. "방고래 밑에
서 웬 소리가 그렇게 나느냐? 밤새 무슨 작업을 하는지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16) 1. 14 아침 6:40분,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는가 싶더니 방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7) 1. 17 새벽 2시, 일기를 쓰고 있는데 방바닥이 진동해 엉
덩이가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18) 1. 18, 부산에서 형이 올라오더니 놀라면 부산으로 이사가
자고 권했다. 우물에 물이 빠졌다가 다시 차 올랐다.
2. 지하 갱차 소리와 함께 "날래날래 타라우"
-----------------------------------------
1) 95'. 1. 27 오후 7:20, 방바닥에 청진기를 대고 있던 민간
탐사자들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궤도차 소리가 점점 가까이 나
더니 무엇을 싣는 소리가 들렸다.
"밥먹으러 가자우"
"날래 날래 타라우"
궤도차 소리가 멀어져 갔다.
2) 땅굴 징후가 명확해지면서 주민들 중에 민간탐사자들을 감시
하는 어두운 눈동자들이 보였다.
3) 식당 주인 이국진씨는 음식점을 세내주고 청주로 이사가 버
렸다.
3. YS 특별지시
-------------
95'. 1. 4, 충현교회 장로가 땅굴 진정서를 들고 YS를 찾았
다. 며칠 후 안기부가 국방부를 배제시키고 자체 땅굴 탐사반
을 구성해, 민간 탐사반과 함께 의정부/동두천 에서 땅굴 검증
작업을 벌였다.
문제가 발생한 의정부와 동두천 미군기지부근에서 안기부와 민간
탐사반 합동으로 시추작업을 벌린결과, 양쪽에서 지하공간및 역
대책 현상이 발견됐다. 동두천은 민간탐사반이 92년도에 이미
지하 24m에서 공간을 발견했고, 사람 목소리, 굴착 소리를 녹음
했었다. 당시 SBS 및 월간조선이 이를 보도했다.
민간탐사반과 함께 땅굴증거를 확인해 놓고도 안기부 직원들은
돌연 태도를 돌변하여 같이 일하던 민간 탐사자들을 비하하고,
감금 고문하고, 각서를 쓰게한후 대통령특명작업을 강제로 작업
을 종료시킨다음, YS에는 땅굴이 없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권영
해 부장시절).
4. 안기부 방해 작전 개시
------------------------
1) 95'. 1. 14 10:00시, 50대 초반의 남자 2명이 정지용씨
를 찾았다.
"정명환 장군님과 공동으로 저술한 '서울 아르덴느의 공포'를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우린 장사꾼이지만 북의 땅굴이 그 지경
에 이르렀다면, 돈을 벌어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민군들이 한밤중 땅굴에서 나와 공격하면 국군은 모조리 포로
가 됩니다. 적화통일이 이뤄지면 회사도 재산도 몰수되고 강제
수용소로 가거나 총살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탐사작업
비용을 대기로 했습니다. 시추작업 비용을 넉넉하게 잡아 말씀
해 주십시오"
2) 정지용씨가 3,000만원이면 된다고 하자, 2명은 1억 이상을
잡으라고 했다. 이들 독지가는 각기 이사장, 송사장이라고 자신
을 소개했지만 명함은 주지 않았다.
3) 미국기지 옆을 포크레인으로 파서 땅굴을 눈으로 확인시켜주
겠다고 제의하자, 2명이 말했다.
"절개작업은 하지 마시오. 다만 징후만 인정되면 100억이든
1,000억이든 대겠습니다" (수상한 냄새가 납니다)
4) 95'. 1. 18, 독지가(?) 이사장이 과천 호프호텔로 정지용
씨를 불러 4,000만원을 건넸다.
"작업 할 때는 여관과 식당을 고정으로 정해놓고 이용하십시
오, 작업비용은 2억이요".
바로, 이 말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독지가를 가장한 두 사람
은 안기부 과장급으로 밝혀졌다.
5) 95. 2. 4일부터 이국진씨 식당으로부터 30m 떨어진 밭에
시추공을 뚫었다. 28개 공을 뚫은 결과, 지하 12m에서 마모된
암석이 나왔다. 누수현상도 발생했다.
6) 2. 8 02:00시, 지하에서 갑자기 시추기 파이프를 탕, 탕
치는 소리가 들렸다.
7) 이상의 징후들을 종합하여 절개작업 건의서를 안기부에 올렸
다. 이남구 서기관은 절개작업을 곧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
는 연막이었다. 이들은 끝내 절개작업을 피했다.
5. 안기부의 마각
------------------
1) 이후 민간탐사반은 10일간 안기부 서기관 이남구, 민병은과
함께 동두천 미군기지 옆에서 시추작업을 벌였다. 이들의 행동
이 수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2) 시추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들어보라고 했더
니,고의적으로 피했다. "내가 들어서 무슨 소린 줄 알겠는가"
3) 그후 이 두 사람은 야간에 은밀히 신원불상의 사람들을 작
업 현장에 데려와 무엇인가 설명을 해주곤 했다. 안기부 직원들
의 목적은 땅굴을 찾아내려는 게 아니라, 은폐시키려는 것 같았
다.
4)어느날 느닷없이 이진국씨가 동두천 현장에서 일하는 정지용
씨를 찾아와 안기부 직원 이남구, 민병은을 가리키며 귓속말을
했다.
이국진: "정형! 저 사람들이 작업비를 대주고 있어요?"
정지용: "네, 맞아요"
이국진씨의 얼굴색이 변했다.
이국진: "다른 데로 가서 조용히 얘기해요"
이국진: "저 사람들 간첩 같아요. 정형이 땅굴 작업하기 전에
저 사람들, 우리 식당에서 식사했어요. 땅굴 얘기를 하더군요.
이번 작업에서 정지용씨를 매장시켜야 한다고 말했어요. 정지용
씨가 묵고 있는 여관, 식당, 인부들까지 자기들 사람으로 만들
어야 한다고,음모를 꾸미는 듯한 말을 하더군요"
정지용은 안기부 직원들이 과천 호프호텔에서 돈을 건네주
며 "여관과 식당을 고정해놓고 작업하시오"라는 말의 의미가 떠
올랐다.
5) 동두천 미군기지 옆에 3개 지역을 시추했다. 3곳 모두에서
땅굴 징후가 나왔다. 이제 땅굴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모두
가 들떠 있었다.
6) 95'. 2. 14 오후 8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중년 신
사 3명이 들어와 신분증을 보이며 정지용씨를 강제 연행했다.
앰배새더 1205호. 10여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노려봤다. 국장급
으로 보이는 사람이 호통을 쳤다.
"당신 말야, 땅굴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무조건 간첩으로 몰
아버리고, 기관간에 알력을 조장하는 이유가 뭐야? 응?"
7) 5명의 조사관이 번갈아 밤을 새워가며 취조와 협박을 했다.
요정에 데려가 "외국으로 나간다면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대책
을 마련해 주겠다"는 회유도 했다. 부르는 대로 각서를 쓰라고
했다.
* 앞으로 절대로 땅굴 작업을 하지 않는다
* 앞으로 땅굴에 관한 진정서를 내지 않는다
* 앞으로 땅굴에 관한 책을 쓰지 않는다
8) 정지용씨는 2. 17일, 2박 3일간의 감금 조사를 마치고 동두
천 작업장으로 갔다. 정명환 장군을 비롯하여 민간탐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는 땅굴 징후를 절대로 기관에
알리지 말자. 대통령의 특명으로 시작된 작업이니 계속 강행하
자"는 의지를 주고받으면서 5일간 정지됐던 작업을 재개했다.
안기부 이남구씨가 협박했다. "정비용씨는 서울에서 조사받을
때 지시를 못받았느냐, 앞으로 현장에 나오지 말고 여관에서 대
기하라.어기면 그냥 두지 않을 꺼다".
9) 안기부 이남구씨는 흰색 횟가루로 선을 그어주면서
포크레인업자 이만덕씨에게 "절개 작업은 이 횟가루선 밖을 벗
어나서는 안된다. 정지용의 말을 들어선 않된다. 우리의 지시대
로만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민간탐사자들이 땅굴 징
후가 있는 곳으로 파내려가자 이남구 등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았는지 호출기와 핸드폰으로 불러내 작업을 중지시키고 장비를
철수시켰다. 95.3.15일이었다. 이리하여 대통령의 특명작업은
강제로 중단됐다.
10) 95.3.23, 안기부 모국장이 민간탐사자 7명을 장충동 산유
화 한정식집으로 초대했다. 향응을 베풀고 여비조로 1,400만원
을 주었다.
11) 그들은 정지용씨를 따로 불렀다. "땅굴 작업으로 가산까지
모두 투입한 애국자임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는 사업을 하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위의 방침이다. 외부
에는 발설하지 말라. 만약 누설되면 정지용씨도 기관에 근무했
으니 어떻게 되는 지 잘 알 것이다".
12) 95.9.4, 정지용씨는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내용증명을 보냈
다. "안기부에서 땅굴 징후를 확인하고도 대통령께 허위보고한
후, 앞으로 민간인들에게는 땅굴 작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
가 무엇인가.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순응할테니 해명해달라".
물론 응답이 없었다.
13) 95.9.21, 안기부에는 그래도 숨은 애국자가 있는 모양이었
다. 놀랍게도 안기부의 모간부가 당시 창간된 자유일보 천금성
주필에게 정지용씨를 소개했다. "정지용씨를 만나보면 땅굴에
대한 좋은 취재 자료가 있을 겁니다".
14) 천금성 주필은 3차례에 걸쳐 땅굴을 은폐한 안기부"라는 제
목으로 은폐를 주도했던 안기부 직원들의 이름까지 실명으로 보
도했다.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지만, 천금성 주필이 끄떡도
하지 않자 안기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15) 96.2.2, 정지용씨는 안기부장 권영해를 이적행위로 대검찰
청에 고발했다. "안기부가 은폐한 장소에서 재작업을 해서 땅굴
이 나오지 않으면 어떠한 엄벌도 달게 받겠다"는 요지였다.
93.3월 초, 서울지검 공안부 강익중 검사가 정지용을 조사한 후
에 한 말이다. "이런 엄청난 문제를 거짓 고소하겠는가. 등골
이 오싹해진다"
16) 검찰에 고발한 후에 정지용씨는 이 사실을 청와대 및 각 기
관에 탄원했고, 유력인사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안기부는 유
력인사를 찾아다니며 그럴듯한 말로 허위해명 하곤했다.
17) 대검에 고발한지 22개월만에 갑자기 육군본부 탐지과장이
정지용씨를 협박했다.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안기부장께서
구속시키겠다고 한다".
18) 97.11.14, 정지용씨는 서울지검에 안기부장을을 공갈협박
및 직권남용 혐의로 추가 고발했다.
19) 97.3월,천금성씨가 재차 보도를 하려하자, 안기부 언론반
직원들이 취재 중단을 요구했지만 관철되지 않자, 권영해는 남
정판 언론특보를 보냈다.천금성 주필을 찾아온 남특보는 "부장
께서 직접 보내셨다. 나도 이곳을 떠난다. 내가 떠난 후에 보도
하던지 하라". 얼마 후 남정판 특보는 공보처 차관으로 전보됐
다.
20) 97.7.24, 예비역 장군 등 유력인사들과 함께 남침저지비상
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97.8.30일자 중앙일보 2면에 "수도권
땅굴 발굴 작업에 전국민이 동참, 남침을 막읍시다"라는 제목으
로 5단 광고를 게재하자, 안기부는 가판에 배포된 신문을 회수
하고 2판부터는 타 광고로 대체시켰다.
6. 드디어 권영해가 1선에 나서서 방해하다
-----------------------------------------
1) 국방부 장관 과학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윤여길 박사(육사 20
기 1등 졸업)가 땅굴 문제를 직접 조사한 후 국방 장관 최세창
에게 "민간 당굴 민원은 신빙성이 있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육
군본부다"라고 보고했다. 그 결과 반대 세력들의 작전으로 윤여
길 박사가 강제 퇴직 당했다. 퇴직당한 후 윤여길 박사는 대우
중공업 부사장으로 일했다.
2) 윤박사는 대우중공업에 근무하면서도 문제의 의정부 땅굴 현
장을 은밀히 방문하여 안기부의 음모를 확인하였다. 그는 권영
해 측근으로부터 "권부장께서는 땅굴 징후가 발견되었다는 보고
를 받은 바 있다"는 내용을 전언 받았다. 그는 이 엄청난 사실
을 주위에 발설하였다. 그 후 윤박사는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러시아로 발령 받았다. 주위에서조차 윤박사의 갑작스런 발령
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3) 6개월 후, 윤박사는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발령의 배경을 알
게 되었다. 권영해가 김우중을 찾아와 "윤박사를 해외로 보내
라. 그 대신 한전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우라늄 수입권
을 대우에 주겠다"고 제안하여 윤박사를 러시아로 보냈다고 말
했다.
2002. 1. 6
--- 이에 남침용 장거리 땅굴 문제를 국제사회와 미국에 호소하
자
남침용 장거리 땅굴 의혹을 그동안 조목조목,논리정연하게 설명
하고, 의혹을 제기해도 들어쳐먹어주지 않는 관계자들에게는 더
이상 상대를 하지 말고, 이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가능하고, 합
리성과 과학기술과 과학적 판단을 잘하는 서방 선진국 나라들에
호소하고, 문제점을 제기해야 한다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또한 미국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 보고서로서 작성하여, 주
한 미 대사관, 주한 미군 사령관, 주한상의 의장, 직접 백악
관, 미 국무부, 미 국방성에 전달해야 한다라고 본다.
국민의 말을 폄하하고, 신뢰하지 않는 바에는 더이상 의협심과
충성을 발휘하지 말고, 그냥 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기 때문
에, 한국 정부에 지대한 영향력과 한국을 권력층을 실제로움직
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미국에 부득이 요청하고,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완강하게 아니, 요소요소에 퍼져있고, 암약하는 불
순불자들과 고정간첩들의 방해공작과 방해책동으로 인해 정상적
인 남침땅굴 발견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라도 영
어로 번역해(약 100부 정도 인쇄작업을 해서)
인터넷으로 발송하든가? 아니면 직접 미국으로 우송해라(반드
시 미국인을 통해 인편으로 발송하라) 그냥 우편으로 발송하면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굴지의 건설회사나, 한국에 소재한 미국 다국적 기
업으로부터 찬조금이나 기부금을 받거나, 미국 정부로 부터 땅
굴 탐사 작업비용을 받아서라도 남침땅굴을 발견해내는 일을 한
국의 민간탐사자들로만 제한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와, 국
제적 관심사항으로 돌려놓고 국제적 정치군사 역학관계로 설정
해 놓고, 과단성 있게 이 작업을 신년 2002년도에 진행시켜야
한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 모임의 저명인사 한분이 미국 의회에 나
가 한국의 남침땅굴 문제에 대한 청문회에 나가서 증언을 하든
가, 미국 신문사나, 미국 방송사에 출연하여 이것에 대한 의혹
이나 그간의 사정 , 진행상황, 남북관계 동향등을 면밀히 소개
하여, 이 문제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 진출한 미
국 거대 기업들과 상사원들과 주한미군부대와 주한미군 군속 가
족들 더 나아가 미국안보와 미국 이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
로 이것에 대해서 미국이 관심을 가져주고, 영향력 행사를 해
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 다는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한다.
*** 임기를 1년도 못 남겨 놓고서 레임덕과 부패로 몸살을 앓
고 있는 김대중 정권은 지금이라도 때가 늦었지만, 일장춘몽으
로 끝난 김정일 짝사랑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국민에게 햇볕정책
과 6,15선언의 폐해를 솔직히 시인 사죄하고, 대북정책을 유턴
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잡고 국민경제를 회생시킴과 동시에 안보
불감증 치유를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아
직도 햇볕정책이나 찬양하면서 잠꼬대 같은 김정일 노래나 부르
고 앉아 있다가는 역대 전직 대통령들 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질머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
기 바란다.
시스템 클럽)에서 인용함.
국민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 모두 일어 섭시다 !
다른 게시판에도 올립시다 !
www.systemclub.co.kr 을 방문하셔서 이 나라의 운명을 가늠
해 보시기
바랍니다.
www.ddanggul.org 싸이트에는 연천에서 민간인이 국정원의 입
회하에
발견한 땅굴의 동영상도 있습니다.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