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沙也可)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된게 아마도 유팽로(柳彭老)의 『창의일기(倡義日記)』를 읽고 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한눈에도 창작이구나 하는 것을 금방 파악할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임진년 3월에 선조에게 왜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동인들이 반대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든지, 그래서 난이 터지자 선조가 불러서 그가 왜란을 예언했으니 반드시 해결책이 있을 것이니 물어보라고 했다느니, 와병 중에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 등이 문병을 왔다느니[이 당시 정철은 강계에, 윤두수는 해주에 유배 중...], 파발마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하루에 갈 수 없는 길을 이동하는 등,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학자란 분이 아무런 사료비판도 없이 그 책에 적혀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용해서 곽재우(郭再祐)의 최초 거병은 이제 유팽로의 최초 거병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논문과 책을 쓰는 것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문득 김충선이 머리에 떠올라 몇 가지 조사를 해봤습니다. 읽어보시고 다른 의견이 있으면 서로 의견을 나눠봤으면 합니다.
기존에 김충선에 대한 설명을 보면, 기요마사[淸正]의 (좌/우 ?)선봉장, 3,000명의 병력을 지휘, 4월 13일에 김해(金海)에 상륙, 스스로를 沙也可라고 지칭, 경상 병사 박진(朴晋) 혹은 김응서(金應瑞)를 통한 귀화,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투항, 대충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임에도 그냥 그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대충 지적을 몇 가지 해본다면,
- 4월 13일에 상륙이라면 가토의 선봉장이 고니시의 1번대를 따라 상륙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기존의 고니시가 부산진, 동래를 함락시킨 후에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고 나서 가토, 나베시마의 2번대와 구로다, 오토모의 3번대가 18, 19일에 걸쳐 차례로 상륙했다는 것을 수정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 본인을 沙也可[せやか, そゃやか ?]라고 한 것인데, 강화서(講和書)에 기요마사는 청정(淸正)이라고 제대로 표기했으면서도 본인을 沙也可라고 해서 마치 당시 조선에서 음차(音借)로 표기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가 조선의 한자 발음에 대해서 알 리도 없고, 일본의 인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흔치 않은 성씨에 이름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본인이 가명을 썼거나, 일본 이름에 대해서 잘 모르는 후손에 의해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좌/우 두 선봉장이 있는데 가토군의 전체 병력에 비춰봐서 3,000명이라는 병력은 지나치게 많습니다.
- 상륙하자마자 절도사(節度使) 박진 혹은 김응서에게 강화를 요청했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 박진(朴晋)은 밀양 부사로 있었는데, 밀양성을 잃고 난 후 감사 김수(金수)에게로 가서 용인 전투에 참가한 후에 좌도로 건너가서 이후 경주성 전투 등을 이끌었습니다. 김응서(金應瑞)는 평안도 어딘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만호(萬戶)로 있다가 대동강 방어에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김충선이 도착하자마자 그가 절도사(節度使)라고 지칭한 이 두 사람을 접촉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정도의 문제점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沙也可」는 조선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며, 『모하당문집』은 위작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일한사적(日韓史蹟)』, 靑柳綱太郞, 1910
- 沙也可は乃(すなわ)ち此(この)麗和(混血人)に非(あら)ずんば,或(あるい)は志を得ずして邊海に放浪し,常に麗和或は所謂(いわゆる)倭寇(わこう)と結んで頗(すこぶ)る我が軍國の事情に通ぜる覆面の韓人には非りしか……彼が淸正先鋒の武將に非ず,征韓軍中の我が武將に非ずと云(い)ふ事は玆(ここ)に斷言するに於(おい)て躊躇(ちゅうちょ)せざる也.⇒ 국립 중도에 원문이 있는데, 귀차니즘으로 웹을 검색해서 얻었습니다.
·『조선사화와 사적(朝鮮史話と史蹟)』, 靑柳綱太郞, 1927 ⇒ 같은 사람이 후에 좀더 정리한 것입니다. 요것도 국립 중도에 원문이 있습니다.
·『모하당사론(慕夏堂史論)』, 河合弘民, 1915
- 公然淸國に反抗する能(あた)はざるを以て,壬辰援兵の來りし明朝の高義を論じ一面日本軍大敗の事實を捏造(ねつぞう)して敵愾心(てきがいしん)を鼓舞したるもの」と斷じ,「今日尙(なお),如此(かくのごとき)僞書を信じ,沙也可の如き賣國奴の同胞中にありしことを信ずるものあるは遺憾の極なりと云ふべし.⇒ 요건 국내에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사화(朝鮮史話)』, 幣原但, 1924 ⇒ 요것도 국립 중도에 원문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들의 문제점은 『모하당문집』의 위작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아예 실존인물을 부정해버리는 모습으로 나가는 점에 있습니다. 또한 사료비판도 부족해 보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선 조정에서 조직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그 후 시바 료타로의 『韓のくに紀行』에서 제가 첫 번째 의문으로 제시한 것처럼 4월 13일에 김해에 상륙했다면 고니시 부대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이 나온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의 사이가 마고이치[스즈키 시게히데]니 하라다 노부타네니 하는 설도 있습니다만, 최근에 나온 설이긴 하지만 정말 『모하당문집』이나 제대로 검토했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당연히 『모하당문집』을 직접 보고 검토해봐야 할 것입니다. 1798년의 김충선의 6대손 김한조(金漢祚)가 펴낸 초판과 1842년 김한보(金漢輔)가 펴낸 중간본(重刊本)을 쭉 살펴봤습니다. 이 기록들은 국립 중도에 원문이 있습니다. 일단 행장이나 행록 등 후손에 의한 글들은 제쳐두고 김충선(金忠善) 본인이 기록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모든 글【강화서, 효유서, 각종 서간, 상소, 모하당기, 녹촌지 등등】을 점검했는데, 당시 여러 주요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가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단지 1통씩만 실려있는 것[위작의 경우에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과 엉뚱하게 통신부사(通信副使)로 가는 김응서(金應瑞)에게 고향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편지도 있었습니다. 사행기록 및 실록 등을 상고해보면 분명 김응서(金應瑞)는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간 적이 없고, 뽑힌 적도 없습니다. 더구나 김응서 같은 무장이 통신부사로 뽑히는 것은 임진왜란 중에 박의장(朴毅長)이 정사 황신(黃愼)과 같이 다녀온 이후로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문집의 상당 부분이 후손에 의해 가공되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선조(先祖)이신 모하당(慕夏堂) 공이 남긴 문집이 있는데, 정조 기유년[1789]에 백종형(伯從兄)이신 한조(漢祚)씨가 용강(龍岡) 김 장군(金將軍 김응서)의 후손의 집에서 구하여 얻어서 곧 활자(活字)로 인쇄하여 펴냈다. 아아! 300년 전의 거의 사라져가던 문적(文蹟)이 지금에 이르러 세상에 드러내니 가히 우리 가문의 큰 다행함이라. 그러나 단지 한번 인쇄하는 것만으로는 널리 퍼뜨리기 힘들고, 혹시 그 애써 찾아 모은 것을 잃어버린다면, 인륜을 버린 불초(不肖)가 되어 어찌 감히 여러 문족(門族)들을 다시 대할 수 있으랴. 이에 ......
이렇게 그 경위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김충선(金忠善)의 6대손 김한조가 용강(龍岡)에 사는 김응서의 후손인 김사눌(金思訥)의 집에서 선조의 사적(事蹟)을 찾아서 문집으로 펴내게 되었노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게 이 문집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일텐데요. 역시 생각했던 대로 박진보다는 김응서가 항왜(降倭)와 밀접했기 때문에 김응서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추측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응서의 사적(事蹟)을 찾아보니, 1735년[崇禎紀元後 再乙卯]의 이시항(李時恒)의 발문(跋文)이 붙어있는 『김양의공유사(金襄毅公遺事)』가 있고, 이것에 덧붙여서 1791년[崇禎紀元後 164年辛亥]에 이민보(李敏輔)의 서문(序文)이 있는 『김경서유사속편(金景瑞遺事續篇)』이 있었습니다. 이 두 기록 모두 국립 중도에 원문이 있습니다. 이 중에 김충선(金忠善)과 관련된 기록은 속편에 있는데, 초판을 낼 때에 몰랐다가, 김한조가 오래된 궤짝에서 발견했다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이 때에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항은 공격을 받기 쉽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속편의 기록과 『모하당문집』을 비교해 보면, 沙也可의 강화서(講和書)와 김응서의 답서 그리고 沙也可가 제독(提督 마귀로 추정)에게 보낸 김응서의 죄를 자신이 대신 받게 해달라고 청한 군령장(軍令狀)과 김응서가 그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답서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두 강화서를 비교해보면 앞의 의문점이 상당 부분 해소가 됩니다.
- 계사년 월 일에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조선국 절도사 김공(金公) 합하(閤下)께 글을 지어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저는 섬 오랑캐의 비루한 사람이요, 해구(海區)의 용렬한 사내입니다.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강개(慷慨)함을 지녀 오랑캐의 별나고 더러운 풍속을 싫어하였습니다. 자라서는 아는 바는 없었으나 다만 해동(海東)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오로지 중화(中華)의 제도를 좇아 의관문물(衣冠文物)이 삼대(三代 고대 중국의 하·은·주)와 다를 바 없고, 예악형정(禮樂刑政)은 당우(唐虞 요·순)를 본받아 맑으며, 이륜(彛倫 인륜)이 그대로 지켜지며, 구법(九法)은 바르게 지켜지고, 삼강오상(三綱五常)과 팔정구경(八正九經)은 성경(聖經)에 따라 부끄러움이 없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은 현전(賢傳)을 좇아 극히 밝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이러한 말들을 한번 듣고 난 후에는 강개한 회포가 더욱 마음 속에 간절하여 스스로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 대장부가 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나 중하(中夏)의 문물을 가진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구석진 오랑캐의 옷을 입는 곳에서 태어나서 오랑캐의 처지를 면하지 못하면 죽어도 어찌 이 우주의 영웅으로서의 한(恨)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강개(慷慨)하는 마음은 그치지 않아 혹 눈물을 흘리는 데까지 이르고, 밥을 대해도 밥 먹는 것을 잊고, 베개를 베어도 잠드는 것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청정(淸正)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데, 제가 용력이 남에게 지나고, 담력이 뛰어나다 하여 특별히 선봉장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일찍이 동토(東土)가 예의의 나라임을 들었고, 또 청정(淸正)이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속으로 그르다고 생각하여 비록 청정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봉이 되려 하지 않았으나, 한마음으로 평소부터 원하던 바 한번 조선 땅에 가보고자 한 까닭으로 억지로 선봉이 되어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왔습니다.
비로소 그 문물을 접해 보니 병란(兵亂) 중의 어수선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의관문물은 과연 평생 들어 믿던 바와 같아 삼대(三代)의 예의가 여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하(中夏)의 문물로써 이 오랑캐를 바꿔보자 하는 뜻이 마음 속에 크게 일어나고, 큰 나무로 옮겨가고자 하는 마음[喬木之心]이 더욱 불붙듯이 생겨나서 싸우고자 하는 뜻이 전연 없어 칼을 버리고 화살을 풀어버려, 차마 인의(仁義)의 나라를 해할 수 없고, 삼대(三代)의 백성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아아! 슬픕니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이미 청정(淸正)의 지휘를 어겼으니 청정의 얼굴을 다시 볼 수도 없고, 동토(東土)의 문물을 보았으니 속으로 대인(大人)께 귀의하고 싶으니 저의 진퇴(進退)는 실로 낭패입니다.
이제 이번에 제가 귀화(歸化)하고자 하는 것은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요, 힘이 딸려서도 아니며, 재주가 못 미쳐서도 아니요, 용기가 장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병기가 정밀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기계가 유리하지 않음도 아닙니다. 병갑(兵甲)의 튼튼함은 가히 백만대군을 꺾을 수 있고, 모략의 비책은 가히 천 길의 성가퀴도 압도할 수 있으며, 아직 일전도 겨루지 않았으니 또한 승부를 겨뤄본 적도 없었습니다. 어찌 강약(强弱)이 대적할 수 없어서 이렇게 강화를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구구히 소원하는 바는 예의문물(禮義文物)의 아름다움과 의관풍속(衣冠風俗)의 융성함을 붙좇아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이제 합하께서 허락하여 이 몸을 휘하에 받아들여 주신다면, 저는 의당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할 것이며, 제가 거느리고 있는 3,000명의 병사는 모두 용감하고 사나우며, 재주 있는 검객(劍客)들이니 합하를 위해 선봉이 된다면 족히 한 방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하께서 성심으로 받아들여 곁에 두고서 주책(籌策)을 논의하신다면 함께 큰 공을 세워 사직을 온전하게 하고, 생민을 편안케 하여 동방의 성군(聖君)으로 하여금 밤잠을 못 이루시는 근심을 덜게 하실 것입니다. 이로써 (합하께서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받아 공명(功名)을 끝없이 드리울 것이고, 저는 나무를 잘 가려 앉은 새가 될 것이며, 합하께서는 나라를 지탱하는 주춧돌이 되실 것이니 어찌 저 하나만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역시 합하를 위해서도 크나큰 다행일 것입니다.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립니다.
위에서 보듯이 沙也可가 김응서에게 투항한 시기는 임진년 4월이 아니라 계사년이 됩니다. 이것을 김충선(金忠善)의 후손이[아마도 김한조(金漢祚)겠죠] 문집을 작성하는 과정에 - 초판본은 인쇄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므로 - 임진년 4월 20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와 네 번째의 의문은 해결되는 셈입니다. 병력의 규모도 또한 투항하는 사람으로서의 호기에 의한 과장으로 본다면 세 번째 의문 역시 해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두 번째 의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군요.
- 과분한 서신을 삼가 받았습니다. 읽고서 서신 내에 말씀하신 바를 역력히 살펴보니, 종이 가득 어둠[暗]을 등지고 밝음[明]을 향하고자 하는 뜻과 더러움[濁]을 버리고 맑음[淸]을 취하려는 뜻이 아닌 것이 없으니 (족하께서는) 진실로 소위 영웅호걸(英雄豪傑)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대치하여 승부가 아직 결판나지 않았으니 졸병 한 명이 의탁하여 온다고 하여도 오히려 받아들여 대접하는 도리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영웅호걸께서 누추한 저의 군진(軍陣)에 왕림(枉臨)하시는데 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든지 제 몸을 깨끗이 해서 오면, 오는 사람은 맞으라고 하심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이고,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하심은 맹자(孟子)의 가르침이라, 이제 족하(足下)께서 오시려고 하심은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꼭 같습니다. 어리석으나 제가 어찌 족하의 소원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족하(足下)의 말은 함께 나랏일을 하고자 하는 의(義)가 있으니 동토(東土)의 나라의 운수가 다시 창성(昌盛)하게 될 것임을 점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장군께서 크나큰 공명(功名)을 이룩하실 것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날짜를 정할 것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분연히 여러 적들을 쓸어버려 나라를 편안케 하고, 기이한 공훈(功勳)을 청사(靑史)에 길이 남기며, 의기를 당세(當世)에 떨침은 대장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속히 군문(軍門)에 왕림하시어 주책(籌策)을 같이 논의한다면 천만 다행일 것입니다.
이상 정리를 해보자면 沙也可는 계사년에 대치하던 중에[아마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김응서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혹은 김응서의 공작에 의해서 투항을 하게 되었고, 3,000의 병력은 과장일 것이지만, 이괄(李适)의 난에 20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올라온 것을 감안[『승정원일기』]하면, 대략 100여 명을 전후한 병력으로 투항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니면 이들이 임진왜란 기간 중에 각자 투항했던 자들이었는데, 임진왜란 동안 내내 통솔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수하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원래부터 거느리던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비록 『모하당문집』 수준의 글이긴 하지만 또 다른 항왜(降倭)인 김성인(金誠仁)의 행록(行錄)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공의 본래 성(姓)은 사(沙)씨이고, 이름은 여모(汝某)로 일본 사람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성(姓)을 하사(下賜)받았으니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성인(誠仁)이라 하였다. 명나라 신종황제 만력(萬曆) 20년인 임진(壬辰)년에 공(公)은 일본의 우부장(右副將)으로 본조(本朝)에 들어와 성명을 하사받은 수장(首將) 김충선(金忠善), 부장(部將) 김계충(金繼忠)과 더불어 김해(金海)에 하륙(下陸)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하고 다른 뜻이 있었는데, 김충선·김계충과 더불어 같이 모하(慕夏)의 뜻을 품었다. 이 전쟁에서 공은 마음속으로 청정(淸正)의 명분 없는 군대의 일원이 되지 않고, 평소에 동토(東土 조선)의 예의(禮義)에 대해서 들었던 까닭에 수장(首將)을 따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니 때가 임진년 4월 13일이었다. 이날에 수장(首將) 김충선은 공과 더불어 본도(本道 경상도)의 병사(兵使) 박진(朴晋)에게 강화하고, 방어사(防禦使) 김시민(金時敏)에게 편지를 보내 같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공을 쌓았다. 이때에 방어사가 향화인(向化人 귀화인)으로 공을 세운 것을 행재소(行在所)에 계달(啓達)하니, 상(上)께서 들으시고 가상히 여겨 즉시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올 것을 명했다. 수장(首將)과 공이 명을 받고 즉시 도착하니 상(上)께서 인견(引見)하시고 무예를 시험하시어 크게 총애하시고 관복을 내려주셨다. 그 후 계묘년(1603)에 북방에 급한 일이 계속 일어나니 임금의 걱정이 심히 절박하여 수장(首將)과 공이 자원하여 방수(防守)에 임하였다. 무신년(1608)까지 6년을 변방에 머물렀는데 2월 그믐에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수장이 즉시 경성(京城)에 달려와 공과 김계수(金戒守)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방어(防禦)하게 하였다. 광해군 대에 이르러 ......
또한 문집의 주장에 따르면, 김충선(金忠善)은 임진왜란·이괄의 난·병자호란 3난에 모두 참여해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이괄의 난에서의 행적은 『승정원일기』에 항왜 20명을 이끌고 올라와 어영청(御營廳)에 편입된 기록이 있으니 역시 의심할 바 없고, 병자호란에서는 쌍령 전투에 참여해서 거의 다 이겼는데 화약고에 불이 나는 바람에 패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제 관심사가 우선 임진왜란에 맞춰져 있고,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전편위의 『병자호란사』를 통해 얻은 개괄적인 지식밖에 없는지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는 따지기 힘듭니다.
김충선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을 뒤져보면, 먼저 『선조실록』에 있는 기록으로,
○ 【前略】이때 출신(出身) 양연(楊淵)은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였고, 부정(副正) 정몽성(鄭夢星)은 온 몸에 칼을 맞아 좌우의 두 손바닥이 다 칼을 맞았고 손가락 한 개가 끊어졌으며, 항왜 손시로(孫時老)는 탄환을 맞아 왼편 가슴 밑을 뚫고 오른편 무릎 밑으로 나갔으나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았고, 항왜 연시로(延時老)는 말에서 떨어져 칼을 맞고 바로 죽었으며, 부정 임청옥(林靑玉)은 칼을 맞고 상처를 조금 입었다. 명병과 항왜 등의 참급(斬級)은 많게는 70여 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병은 두 급을 베고, 검첨지(儉僉知) 사고여무(沙古汝武)는 두 급을 베고, 훈련 부정(訓鍊副正) 이운(李雲)·항왜 동지(同知) 요질기(要叱其)·항왜 첨지(僉知) 사야가(沙也加)·항왜 염지(念之)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왜기(倭旗) 홍백·흑백의 크고 작은 것 3면(面)과 창 1병(柄) 칼 15병, 조총(鳥銃) 2병,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되어 갔던 우리 나라 사람 1백여 명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後略】【선조 30년 11월 22일[기유]】
이 기록에서 보이듯이 당연하겠지만 실직이 아닌 중추부의 산직(散職)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를 받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실제 절충장군 교지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沙也可보다 한 품계 위인 동지(同知 가선대부)를 받은 要叱其가 눈에 띄는 군요. 이 기록 외에 실록에는 더 이상 김충선(金忠善)은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이름이 한번 보이기는 하는데 아마도 동명이인 같습니다.
다음 『승정원일기』를 보면 4번 등장하는데, 본인에 대한 기록이 2건, 후손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2건입니다. 그리고 『비변사등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DB화 되어 있는 부분만 검색한 것이니 아직 DB화가 안 된 부분에 기록이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본청(本廳)에 속한 어영군(御營軍)을 부대를 나누어 잡아오고 있는데, 항왜장(降倭將) 김충선(金忠善)에게 소속된 군은 나눴던 부대에 속하지 않았으나 단지 변란의 소식을 듣고서 올라올 뜻으로 약속을 하고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방금 김충선(金忠善)이 자기 관하(管下)의 20명을 이끌고 변란이 있음을 듣고서 밤낮을 잊고 치달려 왔는데, 그 중에 18명은 모두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군사를 모두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마대(馬隊 기병)의 예에 의해서 급료를 지급하고 호위(扈衛)에 대비하게 할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하였다. 【어영청등록】
-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산행 포수(山行砲手 산척(山尺)이라고도 하는 사냥꾼) 17명과 항왜(降倭)의 자손 25명을 진(陣)으로부터 거느리고 올라왔는데 모두 본청(本廳)에 배치할 것을 전에 이미 재가(裁可)를 받았습니다. 그 장수 중에 항왜장(降倭將) 김충선(金忠善)이라 하는 자는 사람됨이 담력과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성품도 또한 공손하고 근실합니다. 이 때문에 이괄(李适)의 난에 도망친 항왜(降倭)를 추포(追捕)할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본도(本道 경상도) 감사(監司)가 모두 이 사람에게 위임하여 별다른 수고로움 없이 쉽게 제거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그가 말하는 바를 들으니, 그 자손 중에 쓸만한 사람으로 군적(軍籍)에 누락된 자가 역시 많은데, 만약 조정에서 따로 뽑아 한 부대를 만들도록 하신다면 곧 그가 소집(召集)하여 변(變)을 들으면 올라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로 이번에 종군한 자는 전례(前例)에 의하여 우선 1결(結)을 복호(復戶 조세나 잡역 면제)하여 주고, 자손 중에서 군적에 누락된 자는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뽑아내어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내게 하소서. (이들에게) 지급할 조총(鳥銃)과 환도(環刀)는 본도(本道)의 군기소(軍器所)에 있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나누어주어 항상 조련을 하여 변란이 있으면 곧바로 올려보내게 할 뜻으로 본도(本道)의 감·병사(監兵使)에게 일체 위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하였다. 【어영청등록】
- 상께서 말씀하시길,
『비록 박필수(朴弼燧)를 시켜 이 글을 쓰게 했어도 내 마땅히 물어볼 것인데, 하물며 이정(李정)이랴?』
하시었다. (한)익모(翼謨)가 다시 계달(啓達)하기를,
『향화인(向化人 귀화인) 김준해(金俊海)를 불러서 물어보니, 그의 6대조인 사아가검(沙阿可劍)이라 하는 자는 왜장(倭將)으로서 우리 나라에 귀화한 사람으로 누차 전공을 세웠고,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에서도 또한 공이 많았다고 하여 인묘조(仁廟朝)에 특별히 어필교지(御筆敎旨)를 하사받아 아직도 받들어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져오게 하였더니 이미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참으로 믿기는 어려우나 준해(準海)의 본명은 치우(致禹)인데 이름을 바꿔서 준해(俊海)라고 한 것은 대개 준해의 부친이 막 군역(軍役)에 충정(充定)되었기에 반드시 준해(準海)라고 이름한 후에야 네 가지(요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4가지 사유?)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에 정한 규정에 어긋나는 것인데, 게다가 향화인이 한번 노역을 면하고 나면 예조(禮曹)에서 다시는 관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홍)봉한(鳳漢)이 말하기를,
『화인(華人 중국인)의 자손과 향화인의 자손을 따지지 않고 같이 일찍이 예조(禮曹)에서 맡게 되어 있습니다. 연전에 균역청(均役廳)이 예조를 대신한 이후에야 예조가 맡지 않는 것입니다. 군역(軍役)을 충당하는 일과 함께 비국(備局 비변사)에서 신칙(申飭)하게 하도록 하교하소서.』
하였다. (이)익정(益炡)이 말하기를,
『신(臣)이 얼마 전에 예조(禮曹)에서 교체되었습니다. 들으니 향화인의 자손의 노역을 면해주는 것에 대하여 균역청이 대신한 이후에 예조가 다시 구관(句管)하는 일이 없는데도 다른 부서의 책임을 침해한다고 할 줄은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익보(益輔)가 말하기를,
『양화인의 일은 신(臣)이 전에 계달한 바 있는데, 향화인의 자손과 외손(外孫)에 대하여 둘 다 군역(軍役)을 지우지 않는다면 조정의 군정(軍丁)의 손실이 많을뿐더러 간사한 자들이 백 가지 계책으로 모면하려고 도모하는 것이 거의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장의 상소를 올린다면 누가 능히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있겠습니까? 본도(本道)에서 조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께서 말씀하시길,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본도에 물어 조사해서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홍)봉한(鳳漢)이 말하기를,
『지난번 대구(大邱)의 향화인(向化人 귀화인) 김준해(金俊海)가 상소한 일로 인해서 비국(備局 비변사)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물어 조사하도록 할 것을 주상께 등대(登待)하여 진주(進奏)하니 전교(傳敎)를 내리셨기 때문에 관문(關文)을 보내서 분부하였습니다. 이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 황인검(黃仁儉)이 조사한 계본(啓本)을 보면 상소를 한 자는 김준해가 아니라 김치우(金致禹)인데, 치우(致禹)는 향화인 김충선(金忠善)의 6대손으로 충선(忠善)은 본래 일본 사(沙)씨인데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성명을 하사(下賜)받았다고 합니다. 보책(譜冊 족보)에 실려있기를, 치우(致禹)는 본래 개명(改名)을 한 적이 없고, 그 아비도 또한 정역【定役 일정하게 부과하는 신역(身役)】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치우가 준해로 개명을 했다는 것은 준해의 부친이 군역(軍役)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니 참으로 맹랑합니다. 치우의 이름이 바뀐 것으로 기만하여 상소하였으니 매우 외람되고 지나친 데가 있으니 준해는 다른 사람과 같이 논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충선(忠善)의 후손으로 군보(軍保 군역과 보인)에 편입된 자가 있다면 마땅히 특별히 사정을 봐서 면제해 주어야 하겠기에 각읍의 군안(軍案)을 조사하도록 하니, 그 중에 김몽기(金夢器) 한 사람이 군적대장(軍籍臺帳)에 착오가 있어서 정축년(1757)에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입되어 있고, 보책(譜冊)에 이름이 올라 있으니 즉시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어필교지(御筆敎旨)가 있다고 하기에 가져오게 하여 보니 단지 사아가검(沙阿可劍)의 절충장군(折衝將軍) 첩지 1장과 김충선(金忠善)의 자헌(資憲)·정헌대부(正憲大夫) 첩지 2장이 있고, 그밖에 다른 문적(文蹟)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준해(金俊海)가 개명한 것으로 사실을 바꿔서 속여 상소한 정상(情狀)이 이미 드러났으니 간사한 자를 징계하는 도리로 심상(尋常)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해도(該道 경상도)로 하여금 각별히 엄단하도록 하는 뜻으로 분부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그대로 시행하라.』하였다.
- 대저 천하의 나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지만,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은 다 각기 그 풍속을 따라 옷깃을 외로 여미기도 하고, 오랑캐의 말을 쓰기도 하고,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기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하여 인륜도 예의도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중하(中夏)의 나라인즉, 위로 당우(唐虞) 3대의 세상으로부터 한(漢)·당(唐)·송(宋)·명(明)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智)·인(仁)·용(勇)의 삼달덕(三達德), 군신·부자·부부·곤제(昆弟)·붕우(朋友)의 오달도(五達道), 삼강(三綱), 오상(五常), 일월(日月) 순행의 천서(天序), 그리고 고하귀천의 천질(天秩)이 갖추어 빛났으니, 아아! 중하의 의관문물과 예악형정(禮樂刑政)은 진실로 천하에서 가장 높고, 천하 오랑캐 나라의 종주국이 되었도다. 오직 이 청구(靑丘) 한 나라만은 바다의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문질(文質)은 유순하고, 예교(禮敎)는 알맞아서 부자·충신·부부·장유(長幼)·붕우(朋友)의 윤기가 있고,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행함이 있으니 요순(堯舜)에 백중하고 삼대(三代)에 버금할 수 있다. 의관문물은 대중하(大中夏)에 비겨볼 때, 소중하(小中夏)는 되리로다.
나는 섬 오랑캐 미개한 나라에서 태어나 남다른 강개(慷慨)한 뜻이 있어 어릴 적에 중하의 예악문물이 빛남을 사모하였다. 그 사모하는 마음이 늘 간절하여 밥을 먹어도 그 맛을 잊고, 베개를 베어도 잠들지 못한 지가 20년이 되었다.
선조대왕 임진년 4월에 청정(淸正)이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매 나를 선봉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바다를 넘어온 날에야 비로소 이 땅의 백성과 문물을 보게 되었다. 살펴본즉, 비록 전쟁중이나 오히려 예양(禮讓)의 풍속이 있고, 어수선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문물의 성함이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삼대(三代)의 예의가 모두 이 땅에 있도다. 이러하니 내 어이 차마 인의(仁義)의 나라에 싸움을 걸며, 의관(衣冠)한 백성에게 활과 칼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본국에 있어 싸움하기 이전부터 이미 예의의 나라를 칠 마음이 없었거늘 바다를 건너 동쪽 땅에 도달한 날에야 어찌 문물의 고장을 침노하여 횡포할 마음이 있겠는가. 오직 이러하므로 백성들에게는 밝게 타이르고 나라에는 강화하였다. 여러 차례 임금의 은혜를 입었으니 성과 이름을 내려주시고 높은 자품(資品)을 더해 주시어 충성을 다하도록 장려하시니 어찌 섬 오랑캐의 천부(賤부)로서 삼조(三朝 선조·광해군·인조)의 은총을 이다지도 입을 수 있겠는가.
이제 한 터전을 빌려 성인의 조정에 백성이 되었고, 또 전장(田庄)을 차지하여 자손들이 거처할 곳을 남기게 됨에 「모하(慕夏)」 두 글자로 당명을 삼노라. 대저 모하의 뜻은 비단 당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토록 강개한 뜻을 그려내고 마음 가운데의 모하의 뜻을 베껴 낸 것이다. 대개 모(慕) 한 자 가운데는 무한한 뜻이 들어있다. 사모한다고 말함에는 중하의 예의를 사모함이며, 중하의 문물을 사모함이며, 그 의관을 사모함이며, 그 민속을 사모하는 것이다.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마음에 기꺼이 사모하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마음에 기꺼이 사모한다. 말과 행동에 모하 아님이 없고, 삶의 행위에 모하 아님이 없다.
그러나 중하에 대한 사모가 이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손에게도 중하를 사모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당명(堂名)인 「모하(慕夏)」는 이 마음을 새겨 그 모하를 내걸므로 내 뜻을 드러내었으니 오직 너희 자손들은 나의 모하의 마음을 본받고 나의 모하의 뜻을 알아 충효를 가문에 이어가고, 예양(禮讓)으로 몸을 닦아 가면 나의 모하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모하 두 글자는 실로 내 평생의 지극한 소원이다. 이에 모하로 내 집을 이름하고 기록해 두노라.
- 나는 곧 섬 오랑캐의 사람이었다. 임진년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의리에 어긋나게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고자 함에 나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나는 이에 마음 속으로 그가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킴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또 나서부터 남달리 강개(慷慨)한 뜻을 가졌었다. 어릴 적부터 미개하고도 오랑캐의 말을 하는 풍속에는 생각이 없고, 빛나는 중하(中夏)의 예의에 뜻을 두었다. 기요마사가 나를 선봉으로 뽑았을 때 거짓으로 기꺼이 받아들여 앞장을 섰다.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동래부(東萊府)를 보니, 의관문물에는 요순시대의 습속이 있고, 예의민물(禮義民物)에는 삼대(三代)의 기풍이 있어, 비록 전쟁으로 몹시 어수선한 때이지만 그러한 풍속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하기 때문에 마음에 기뻐하여 모하(慕夏)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마음에 이미 정벌할 뜻이 없으므로 조선의 백성에게 밝히 타이르고 드디어는 거느린 병사 3천으로 경상도 절도사의 진영에 붙좇았다. 한번 강화한 뒤로는 성주(聖主)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한번 싸워서 남방(南方)에 이기고, 두 번 싸워서 또 남방에 이겨 계속해서 승전의 보고를 올림에 임금님께서 상경케 하시어 불러보시고 성(姓)과 이름을 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일편단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군기(軍器)로서 가장 좋은 것이라 해도 일본에 훨씬 못 미치고 심지어 조총과 화포 등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내가 화약을 만들고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쳤더니 조선 사람이 재주가 많아 몇 달 사이에 다 그 정묘함을 얻었다. 이 조총으로서는 당할 자가 없어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훈국도감(訓局都監)을 특별히 설치하여 총과 화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가장 정예한 군기를 만들게 되었다. 임진란에 전공을 거둔 것은 아마도 조총 훈련에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조총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조선 성군(聖君)의 조업(祚業)으로 전쟁에 이기지 못할 리야 없겠지만, 과연 완전한 승리의 공을 얻을 수 있었을 지는 모른다.
그러하나 내가 조선에 몸을 의탁한 것은 영달(榮達)을 구함도 아니요, 이름을 얻고자 함도 아니었다. 대개 강화(講和)할 때의 처음 마음에는 두 가지의 계획이 있었다. 하나인즉, 중하(中夏) 예의의 습속과 요순 삼대의 기풍을 사모하여 한 터전을 얻어 동방성인(東方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었고, 또 하나는 예의의 나라에 자손을 끼쳐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그들이 예의의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달(顯達)함을 구하지 않고, 내 뜻을 삼가 지켜 준다면 구원(九原)에서 눈을 감고 천대(泉臺)에서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므로 달성(達城)의 남쪽 삼성산(三聖山) 아래 우록동(友鹿洞)에 내 몸소 전장(田庄)을 택하였다. 이곳은 중국의 이원(李愿)이 은거했던 그 반곡(盤谷)은 아니지만 반곡만 하고,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그 율리(栗里)는 아니지만 그만한 율리이다. 그 전장은 산이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이 깊지 않으나 청정하다. 봉암(鳳岩)이 그 동쪽에 서 있고, 황학(黃鶴)의 봉우리가 그 서쪽에 솟아 있다. 남쪽에는 자양(紫陽)이, 북쪽에는 백록(白鹿)이 있다. 차가운 샘물은 그 오른쪽에서 솟아오르고 선유(仙遊)의 골짜기는 그 왼쪽에 깊숙하다. 대개 봉(鳳)이란 문명(文明)의 상서로운 징조로 순문(舜文) 때에도 나타났으니 봉암(鳳岩)이란 이름으로 그 문명의 징조를 볼 수 있다. 학(鶴)이란 신선들의 새로 이적산(李謫山)의 「석인이승황학거(昔人已乘黃鶴去)」란 시귀(詩句)에도 있으니 황학봉(黃鶴峰)이란 이름으로 그 신선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자양과 백록은 주부자(朱夫子)께서 도학을 강론하던 곳이니 내 자손 가운데 혹 도의를 강론하고 의리를 토론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우록(友鹿)이란 동명(洞名)에 내 남모르게 취한 것이 있다. 대개 산인(山人)이 산중에 은거함에 미록(미鹿)을 벗하여 한가로움을 얻은즉, 우록의 뜻이 내 평생 산중에 은거하겠다는 뜻에 과연 부합된다. 그리하여 차가운 샘물에 티끌 묻은 마음을 씻고, 신선이 노닐던 골짜기서 흰 구름을 쓸기 위해 띠를 베고 거처를 정하여 자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니 이곳이 바로 내 소원을 이룰 곳이다.
이것은 내 한 몸의 사사로운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8년 간의 전쟁을 겪은 나머지에 또 북쪽 오랑캐의 침노가 잇달아 근심 없는 해가 없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원하여 방어하느라 10년간 북쪽의 변방에서 밤에도 창을 베고 어려움을 다 겪어 겨우 호란이 끝나 돌아왔다. 광해(光海)의 조정에서 후원(後苑)으로 불러들여 친히 잔치를 열어 위로하고 정헌(正憲)으로 특별히 가자하셨다. 교지 가운데에, 「스스로 원하여 거듭 방어해주니 그 마음이 가상하도다[自願仍防其心可嘉]」라고 임금께서 써주셨다.
그리고 분하고 슬픈 것은 인묘조(仁廟朝)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흉모를 저지르다 죽임을 당한 뒤 그의 부장 서아지(徐牙之)가 평소 날개돋친 왜인으로 칭송되었는데, 동서로 치달아 부딪치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내가 추격하여 머리를 베어 임금께 바쳤다. 조정에서 서아지(徐牙之)의 속공전민(贖公田民)을 사패지(賜牌地)로 나의 공에 보답하나 굳이 사양해 받지 않고 수어청(守禦廳)에 들여 둔전(屯田)으로 하였다.
또 애통한 것은 하늘의 (나쁜) 운수가 쉬지 않고 나라의 액운이 다하지 않아 병자년(1636)에 북쪽 오랑캐 무리들이 강토를 침범해 옴에 내 그 변란의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 서울에 이른즉, 임금님은 남한산성으로 피하시고 도적의 기운은 하늘에 치솟았다. 거느리고 간 150명으로 곧바로 쌍령(雙嶺)의 진으로 가서 싸워 더러운 오랑캐를 섬멸하여 거의 다 이겨 전공을 바치려는 때에 화약창고에 문득 불이 났다. 영웅이라도 무기를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병사는 빈주먹만 펴고 있고 화살마저 다했다. 그리하여 임금님이 계신 남한산성으로 가서 임금님을 호종하고자 베어낸 도적들의 코를 얼마나 되는 지도 알 수 없이 전대에 채워 담고 여정을 재촉하여 산 넘고 물을 건너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나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어찌할 방책은 없고 실성대곡(失性大哭)하니 분한 기운이 하늘에 사무쳤다. 베어낸 도적의 코를 땅에 팽개치니 쓸개와 심장이 찢어지려 했다. 탄식해 눈물을 흘려 「동방 예의의 나라로서 오랑캐의 발아래 차마 무릎을 꿇었으니 주(周)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도리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 천지간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내 한 자루의 칼이 있어 백만 군사도 당해낼 수 있으나 이제 이 지경이니 이 칼을 어디 쓸꼬!」라 하고는 칼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니 노한 터럭은 갓을 찌르고 한숨쉬며 애통하였도다. 만약 이 동토(東土)의 신민(臣民)이 춘추의 대의를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오랑캐의 번득이는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더러운 오랑캐 앞에 강화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매 장사 영웅의 창자 어찌 끊어지고 찢어지지 않으리오.
대개 선조대왕께서 김(金) 자로 성을 내려주심은 본래의 성이 사(沙)씨였기 때문에 모래 가운데 금을 취하라는 뜻을 취했고, 김해(金海)로 본관을 삼은 것은 내가 바다 가운데서 왔기에 바다 가운데의 금(金)이란 뜻을 취한 것이다. 전후 세 임금의 조정에서 잇달아 나라의 은혜를 입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할진대 실로 뼈가 부서지고 살이 문드러져야 할 것이다. 진실로 바라기는 아아! 너희 자손들이 삼조(三朝)의 은총을 몸으로 느끼고 내가 귀화한 뜻을 생각하여 대를 이어 삼가 이 녹촌(鹿村)을 지켜가기를 바라노라. 영달을 바라지말고, 힘써 밭 갈고 부지런히 배워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로지 단충지심(丹忠之心)을 품고 가난한 살림 가운데서도 연군지회(戀君之懷)를 잊지 말아 나의 뜻에 부응하여 구원(九原)에서 눈감지 못하는 넋을 위로하라.
- 이 땅의 백성들은 모두 내 타이르는 말을 듣고, 예전처럼 안도하고 각자 자기 일에 종사하여 동요하지 말고 흩어져 달아나지도 마시오. 내가 다른 나라 사람이고 선봉장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 있을 때부터 여러분의 나라를 공격하고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였다. 조선이 예의의 나라임을 듣고 그 문물을 우러러보아 한번 보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그 갈충지심(竭忠之心)을 늘 그리워하여 성덕(聖德)에 훈도(薰陶)되기를 바랐으니 이 같은 간절한 마음 잠시도 늦추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나를 선봉장으로 뽑아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려 이곳에 오기는 하였으나 내 차마 예의의 나라를 침노하거나 중하(中夏)의 백성을 해칠 수 없으니,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해치면 내 평소 갖고 있던 뜻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에 죄를 지음이 되리니 내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니 여러분들은 나를 다른 나라 사람이 침입해 왔다고 말하지 말고, 늙은이는 편케 하고, 어린 아이는 보살피며,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여 나를 같은 나라 사람으로 보아, 나를 피해 숨거나 직업을 버리지 마시오. 안심하고 밭 갈고 베 짜며 책 읽어 위로는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식을 보살피시오. 만약 횡포하거나 침탈하거나 난잡한 군사의 폐단이 하나라도 있으면 곧바로 와서 알려준다면 군율(軍律)로 다스릴 것이오. 이전처럼 안도하여 소요하지 말아 나의 이 구구한 뜻에 따라 주기 바라오.
-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은 본래 해외의 오랑캐로 객지에 나온 천한 몸입니다. 이 나라 요순(堯舜)의 풍속을 공경하고 앙모(仰慕)합니다. 이 나라 성인의 땅을 빌고, 예의의 나라에 자손을 끼쳐 문물의 고장에 이름 남기기를 바랍니다. 이 큰 소망이 가슴에 가득합니다.
마침 청정(淸正)의 선구(先驅)로 뽑혀 4월 13일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건너온 그 날 처음 이 땅을 본즉, 의관문물이 과연 듣던 대로라 모하(慕夏)의 마음이 더욱 돈독하고 예의에 돌아가고자 하는 뜻이 생각에 매우 간절하여 거느리고 온 3000의 병사로 경상 병사 박진(朴晋)에게 귀순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남방에서 두 번 싸워 다 이김은 신의 공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 성상의 신성한 위엄에 힘입은 것이었는데도 궁궐의 뜰에서 저의 재주를 시험해 보시고 갖은 은혜를 베푸시며 품계를 둘이나 올려주시니 그 영광과 은총이 끝이 없습니다. 외국의 천한 노예로 어찌 이 같은 높은 자리와 빛나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의 분수로 헤아리고 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영광스러움은 다행하고 감격스러움은 깊습니다. 잘못될까 하는 걱정이 더해 절로 눈물을 흘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재주와 용기가 부족하고 또한 지혜와 책략도 없어 더러운 오랑캐를 섬멸하기 기약할 날이 없으니 이는 실로 나라에 충성치 못하는 신으로 말미암음이니 그 죄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워 삼가 죽음을 기다리나 죽을 곳을 얻지 못하여 오히려 한탄하였는데, 성은(聖恩)이 홍대(弘大)하여 벌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갑자기 부귀함은 상서롭지 못하다」는 옛말이 있은즉 제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가선(嘉善)의 자급을 더해 주신다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고 귀신이 반드시 시기할 것이니 신이 어찌 감당해 내겠습니까? 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기 않는다고 하였은즉 신은 또 명분과 절개도 지키지 못하여 마음으로 늘 부끄러워했습니다. 신에게는 상 줄 만한 충절도 없고 드높일만한 업적도 없는데 임금님께서 어찌하여 받아들여 사랑하심이 이 같으십니까? 저의 분수로는 진실로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덕이 넓으셔서 천한 노예라고 버리지 않으시고, 죄 있다고 내치지 않으시니 신이 비록 섬 오랑캐나 또한 하나의 인간이라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은혜 갚을 줄 모르겠습니까?
되돌려 생각하건대 신이 일찍이 이 땅에서 목숨을 보존한 것만 해도 지극한 다행입니다. 바라옵건대 밝으신 임금님께서는 이 신의 어리석은 추정을 살피시고 조그만 정성을 아끼셔서 내리신 은자(恩資)를 다 거두셔서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시고 저의 처지를 편케 해 주십시오. 더 아뢸 말씀이 없나이다.
- 소장은 외국 사람으로 이 나라에 와서 의탁하게 된 것은 오직 김응서(金應瑞)를 통해서이니 응서와 소장은 주객(主客)의 관계입니다. 응서가 지금 큰 죄를 범하여 군율(軍律)을 장차 시행하게 되었는데, 소장이 어찌 감히 그의 죽음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소장이 왜장의 머리를 베어 응서의 목숨과 바꾸고자 합니다. 만약 소장이 제독에게 드리는 약속을 어긴다면 소장의 목을 베어 김응서의 죄를 대신해 주소서. 이와 같이 군령(軍令)에 대해 글을 올립니다.
- 응서(應瑞)는 족하(足下)와 더불어 각기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으나, 전쟁 중에 한번 만나 서로 강화(講和)를 한 이후에는 같은 진(陣)에서 함께 고생한 정의(情誼)가 있어 이 응서는 평상시에 족하가 영웅기남(英雄奇男)임을 인정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족하께서 이 응서를 만나보고 의탁할 주인(主人)으로 되었습니다. 그러하나 불의에 사졸(士卒)의 대오(隊伍)를 읽어버려 대제독(大提督 마귀로 추정)의 진노(震怒)를 사게 되었는데, 진실로 나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다행히 족하의 대의(大義)에 힘입어 죽을 목숨이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사와 은혜는 지극합니다.
무릇 남이 곤란에 처했을 때에 삶을 버리면서 구해주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자에게 있어서 이겠습니까? 응서(應瑞)는 한 평범한 사람이며, 어리석은 사내로 마침 이와 같은 국가가 판탕(板蕩)을 당하는 시기에 진실로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는 않으나 족하의 위급한 사람을 구해주는 의리에 힘입어 남은 목숨을 부지하는 은혜는 이 세상에 영원할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한량없고 도(道)를 말하며 행운을 감사함을 붓으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왜적을 평정되기를 조금 더 기다린 연후에 다시 결초보은(結草報恩)할 것이니 반드시 구구히 하나하나 들어내어 갚을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 실록의 기록으로 보면, 마귀(麻貴)는 김응서에 대해서 거의 주로 호평을 하는데, 어떤 사건으로 이렇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군요.
첫댓글 좋은글이네염.근데 전에 김충선님의 본가 담벼락에서 공사중에 조총이 발굴? 된 사건은 매우 재미있었다는.
글을 읽지는 않았지만(-_-고문수준..) 정말 멋있는 역사속인물중 한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