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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
시편 24:1-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하는 생활을 한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일예배를 드리는 일은 얼마나 귀한가?
이 시간 주일예배에 나오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했는가? 크고 작은 포기를 하고 이 자리에 나왔을 것이다. 잠을 포기하고, 약속을 포기하고,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일상의 우선순위를 포기했을 것이다.
흔히 ‘썬데이 크리스찬’이라는 말이 있다. ‘썬데이 서울’이란 주간지처럼 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일요일에만 그리스도인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속뜻은 365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먼저 제대로 된 ‘썬데이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썬데이 크리스찬’도 못되면서,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어찌 좋은 크리스찬이 될 수 있을까? ‘웨슬리안 크리스찬 애드보케이트’는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그런 사람은 학교에 안 가는 학생과 같고, 부대에 안 들어가는 군인과 같고, 세금을 내지 않는 시민, 기지가 없는 탐험가, 독자가 없는 저자, 오케스트라가 없는 지휘자, 팀이 없는 축구선수, 벌집이 없는 벌과 같다.’
왜 ‘선데이 크리스찬’이 중요한가? 그는 예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의 격언이다.
“내가 안식일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안식일이 나를 지켜주었다.”
1)
구약성경의 예배서라고 할 수 있는 레위기의 주제어는 ‘거룩’이다. 레위기의 주제는 ‘어떻게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뵈올 수 있을까?’이다. 이것이 예배의 주제이다.
우리 색동교회 예배 순서 속에는 이러한 고민이 담겨있다. 그런 절차와 형식을 통해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종종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 예배는 새로운 유행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전통을 고수하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편의주의가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제물이 아닌 상한 마음이고, 인간의 자구노력이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태도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오늘 말씀은 예배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것이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예배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6)라고 부른다.
본문은 성전에 들어가려는 예배자를 위한 예배 형식을 담고 있다. 먼저 찬양으로 시작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1).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주님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의 두 가지 태도는 감사와 찬양이다.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드리지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서, 내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예배할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자비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주님의 마음이 내 삶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주님의 얼굴을 찾도록 구하는 것이다.
예배는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향하는 일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과 죽음까지, 내 인생의 터를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나의 주님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2).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문제, 연약한 인생, 허구헌날 인생의 여러 가지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진리와 생명 안에 거하는 삶, 그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나를 온전히 맡긴다. 값없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평화를 구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언제나 피조물로서 나를 돌아보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세계관의 문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복된 예배를 언제나 정성껏 지키고, 그 시간을 마땅히 사수해야 한다.
2)
시편의 기도자는 묻는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3).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뵙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예배자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 어떤 희생이나, 다소의 예물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의 삶, 그의 중심을 보신다.
색동교회 주일예배 봉헌기도에서 집례자는 이런 말로 시작한다. “주님, 이 시간 나 자신과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카인의 제물이 아닌 카인의 삶’을,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과 귀한 예물’을 드린다고 고백함으로서 나 자신, 내 삶, 나의 중심과 존재의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배자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4).
흔히 손을 씻는다는 말이 있다. 조폭 세계에서나 쓸법한 이 표현은 사실 성전에서 먼저 사용하였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물두멍에서 손을 씻었다. 세상의 먼지와 티끌만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허물과 범죄를 용서받는 절차이다. 그러나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예배는 한 걸음 더 미래로 나아가는 일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과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으려고 나아오는 죄인이다. 하나님이 죄인으로 나아온 그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용서받은 결과 그의 마음은 청결하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란 의미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6).
하나님의 얼굴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엄마와 아기가 얼굴과 눈동자를 맞추듯 예배자는 하나님과 친밀하며, 온전히 사귄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복되다. 도망자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 무려 20년 동안 피난과 노동과 배신과 아픔을 겪었다. 드디어 형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실토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
하나님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주님의 품을 거부한 사람들, 더 이상 주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부르신다. 제사장은 예배하러 나아온 사람을 향해 이렇게 축복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이 말씀은 아론의 축복문으로,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이 말씀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의미한다. 내 가정에 하나님이 거주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시며, 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 고난과 괴로움에도 함께 하시길 기원하는 것이다.
3)
시편 24편에서 본문은 놀라운 경험을 말한다. 전반부는 예배자가 성전에 들어가면서 부르는 기도이고, 찬양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예배자가 아닌 바로 하나님이 성전에 입장하시는 의식문을 소개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9-10).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올 때를 기억하며 불렀던 예전적 찬송이다.
예전에 전농동은 유명한 서울의 낙후지역이었다. 청량리 뒷골목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전농동은 새로워졌다. 세계적인 서울시도서관도 준비 중이다. 도서관 부지를 바라보는 곳에 전농감리교회가 있다. 몇 해 전에 전농동지역 부활절새벽 연합예배 때 설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재개발 지역에서 교회를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전농교회는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하였다. 새 예배당 완공하고 처음으로 입당하는 주일 아침, 구약시대 언약궤 모형을 만들어 성전에 들어오는 의식을 하였다. 그냥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퍼포먼스는 교인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이곳은 수십억을 들여 지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고, 재개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목이 좋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법궤는 대단히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법궤가 놓인 지성소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상징하였다. 그 발판만으로도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였다. 얼마나 거룩한지 이동할 때는 제사장들이 손으로 들지 않고 반드시 어깨에 메도록 정해졌다.
그런데 구약 역사를 보면 이런 법궤가 사람들의 편의적인 사고방식에 휘둘렸다. 엘리 제사장 시절,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전쟁터까지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 그런 법궤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요행수로 여기고 수단으로 활용한 까닭이다.
다시 되찾은 법궤를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다윗이 임금이 되자 예루살렘 시온성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 시도가 여의치 않았다. 법궤를 옮기는 도중에 인사 사고도 났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옮기다가 소의 요동으로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웃사가 손을 댄 것이 그만 화를 불렀다.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함은 자주 인간이 자기 주장대로 편법을 행한다. 인간의 편리주의는 편법을 낳는다. 매사에 편리하게만 살려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편리주의가 과연 내 신앙을 왜곡하지는 않는지 따져볼 이유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법궤를 내 편의적 생각에 따라 둘러대고, 엉뚱한 다른 것으로 대신하지는 않는가? 내 어깨에 메어야 할 멍에를 짐승으로 끌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의 물질만능주의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수단화하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선지자 미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미가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7).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답한다. 선지자의 정답을 들어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의 모습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예언자 미가는 제물 따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믿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고난당하는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하나님은 무엇이 선한 일인지, 또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공의와 자비와 신실함,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공의보다는 힘과 권력을 섬겼고, 인간의 존엄성을 재물보다 업수이 여겼으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 세상의 이익과 즐거움과 짝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하늘의 뜻보다 사람의 이익을 더 추구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주장을 더욱 추종하였다.
예배는 다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회복하는 일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내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이다. 비록 나는 세속적인 삶을 살아도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영광이 내게 깃들어 나는 거룩한 삶을 산다. 그 빛이 내게 순간순간 섬광처럼 작용하여 내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
바라기는 주일 아침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서 내가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통해 복된 삶, 변화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