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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71회>
고창전투의 승리 이후 왕건은 북방순시를 위해 서경으로 향하고 도중에 만난 북방 이민족들이 유금필에게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황도의 공신들은 이를 계기로 유금필에 대한 문책을 논하고... 한편, 왕건의 서라벌행과 일길찬 염흔의 고려 귀부소식에 격노한 견훤은 여전히 후계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 신료들이 답답하기만 한데... 경순왕의 초청을 받아드린 왕건. 드디어 천년사직의 수도인 서라벌로 입성하는데...
씬 어느 들녘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모두 숨소리 하나 없다. 바람이 깃발만을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견훤이 다시 소리쳐 묻는다.
견훤 너는 나를 도우러 올 수 있었다. 허나 오지 않았다. 네 목숨과 온 힘을 기울였다면 분명히 올 수 있었어. 우리가 싸운 저 낙동강으로 올 수가 있었어. 그렇게 되었다면 그토록 형편없이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검 ................
견훤 적어도, 적어도 형편이 그토록 어려워 올 수 없었다면 너는 우회길로 해서라도 네 성의를 보였을 것이다. 헌데 너는 그것도 포기했어. 꼼짝 않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며 이 애비와 여기 금강이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것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
애술 폐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견훤 닥치지 못할까? 너 애술이 이놈...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였는가? 유금필이가 그토록 무서웠는가? 일만에 가까운 대병이 유금필이 하나를 넘지 못해서 그 산기슭에 주저앉아 있었다는 말이더냐?
애술 송구하옵니다, 폐하. 죽여주시오소서.
견훤 신덕 장군...?
신덕 예, 폐하.
견훤 최필 장군...?
애술 예, 폐하.
견훤 김총, 상귀 장군....?
그들 예, 폐하.
견훤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는가? 언제부터...? 너희들 말 대로라면 황제인 나는 죽던 말던 너희들 목숨이 급하고 두려워서 오지 못한 것이 아니더냐? 그런 것이냐?
김총 폐하.... 죽여주시오소서. 총사의 명령이.....
견훤 그렇지, 암... 총사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지. 그렇고 말고... 신덕 장군, 아니 그러하냐?
신덕 송구하옵니다, 폐하. 참으로 일이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태자마마께서는 열심히 싸우려하셨사오나....
견훤 너, 종훈이는 듣거라.
종훈 예, 폐하.
견훤 너는 예전에 이찬이 참으로 쓸만하다 천거하여 군사로서 많은 전투에 임했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냐?
종훈 송구하옵니다. 전략을 마련해 올렸사오나....
견훤 너희 계책이 채택 아니 되었다 그런 말이 아니냐? 그러나 나를 돕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소성까지 빼앗긴 것을 보면 군사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 것은 분명하다. 신검아, 아니 그러하냐?
신검 용서하시오소서, 폐하.
견훤 양검아, 용검아...?
두 형제 (벌벌 떨며) 예, 폐하.
견훤 네 형 신검이가 뭐라고 하더냐? 말해보거라. 여기에 있는 장수들에게 뭐라고 하더냐?
두 형제 ...............
견훤 (버럭) 뭐라고 하더냐고 묻지 않느냐?
용검 예, 예, 예... 아바마마.... 싸우러 가기는.... 가야겠사오나... 길이 막혀... 갈 수 없다 하였사옵니다...
견훤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었겠지? 아니 그러냐, 신검아?
신검 .......................?
견훤 왜 말을 못하느냐? 아비가 살아오니까 꽤나 실망하였겠구나? 더구나 금강이까지 함께 살아왔으니 얼마나 낙심이 크겠느냐?
최승우 폐하, 고정하시오소서.
견훤 하하하..... 신검아...
신검 예, 폐하.
견훤 그런다고 해서 때가 오는 것이 아니다. 알겠느냐? 네가 잘나야 때가 오는 것이다. 황제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이놈아. 너의 검은 속을 애비가 잘 안다. 다 알고 있어 이놈아. 다 알아.....
신검 ...............
견훤 못나 터진 놈 같으니라고.... 아무튼 이번에 네 놈의 속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비록 군사는 많이 잃었다마는 그것이 어디 나라를 잃는 것에 비하겠느냐? 할 말이 있느냐?
신검 소자가 어찌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처분을 바라옵니다.
견훤 너무 기가 막혀서 어찌해야 할 지 생각도 아니 난다. 길거리에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철군을 해야겠다. 회군을 서둘러라.
모두들 예, 폐하.
견훤 이 고창 땅은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다. 속히 서둘러라. 행군도감은 금강이가 맡도록 해라.
금강 예, 폐하.
신검 .................. (입술을 깨문다)
금강 돌아갈 것이오. 제장들은 모두 서두르시오. 회군할 것이오.
제장들 예...
아직도 그렇게 신검을 내려다보는 견훤의 표정에서.. 디졸브되면...
씬 고려 황도
개선군이 들어서고 있다. 김행선을 비롯한 문무백관들과 정윤 무, 왕식렴, 황후들이 마중하고 있다. 왕건이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지나쳐 가고 있다. 디졸브 되면서... 그 중에 해설
해설 왕건은 승리했다. 고창 전투의 위력은 참으로 컸다. 수많은 읍성들이 고창 전투의 승리와 더불어 고려에 투항해 온 것은 물론 백제의 견훤이 세워놓은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에게 문안을 드리며 치하해 온 것은 또 하나의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씬 동 황도 편전
왕건의 주재 하에 모든 문무 신료들이 다 모여있다. 김행선을 비롯하여 최응, 최지몽, 복지겸, 정윤 무, 왕식렴, 왕규, 추언규, 유금필, 박술희, 홍유, 배현경, 염상, 왕충, 윤신달, 박수문, 박수경들이다. 거기 신라에서 온 사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왕건 허허허.... 신라에서 온 사자라고 하였느냐?
사자 예, 폐하. 본국의 폐하께오서 고창전투의 대승을 축하해 올리랍시는 영을 받자와 왔사옵니다.
왕건 고마운 일이로다.
사자 또한 더불어 본국의 폐하께오서 대 고려국의 황제폐하를 본국의 황도 서라벌로 청하신다는 초청의 안을 뫼셔왔사옵니다.
왕건 짐을 초청하겠다고...? 허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로세. 허나 일전에 백제국의 왕이 서라벌로 돌아가 온갖 만행을 다 저질러 신라의 백성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떤다고 들었네. 아직도 놀란 마음들이 가라앉지 않고 있을 터인데 짐이 다시 또 간다면 귀국의 조정에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먼.
사자 아니옵니다, 폐하. 백제국의 왕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적처럼 힘으로 밀어 부치고 들어와 본국의 황도를 어지럽혔나이다. 허나 폐하는 인자하신 군주로 이미 삼한이 다 알고 있지 않사옵니까? 본국 폐하의 청을 가납 하여 주시오소서.
김행선 폐하, 정중한 신라국의 초청이옵니다. 가납하시오소서.
최응 저들의 지극한 청을 외면하실 필요는 없는 줄로 아옵니다. 가납하시오소서, 폐하.
무 허나 싸움터에서 이제 막 돌아온 폐하이십니다. 나라의 일이 많고 처결할 것이 많으니 그 이후에 한번 생각해 보시오소서.
왕건 정윤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리 하자꾸나. 자 그만 사신은 물러가시도록 하오.
사자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사신이 물러간다.
복지겸 폐하, 또 하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백제에서 일길찬이라는 벼슬을 했던 염흔이라는 자가 귀순해 왔사옵니다. 한번 보시오소서.
왕건 편전으로 들면서 잠깐 들었소이다. 백제에서 일길찬이라면 꽤 높은 벼슬인데 어떤 영문으로 귀순을 했는지 들라 하시오.
복지겸 예, 폐하. 염흔 공을 안으로 들여라.
복지겸의 소리에 내군들이 염흔을 이끌고 들어온다. 모두들 본다. 염흔이 엎드려 크게 절한다.
왕건 그대가 염흔이라 하는가?
염흔 예, 폐하.
왕건 그대 같은 백제의 고관이 어찌하여 우리 고려국에 투항하였는가?
염흔 신은 오랫동안 백제 조정에 종사하였사오나 백제국은 오래 전부터 심한 내분과 반목으로 나라의 앞날에 희망이 없어 오랜 생각 끝에 고려로 오게 되었사옵니다.
추언규 처음 듣는 소리오. 내분과 반목이라니...? 그건 무얼 말하는 것이오?
염흔 백제국은 그 동안 나라 밖의 일은 성공적이었으나 백제왕의 자식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신료들이 갈등을 겪고 있으며 또한 반목하고 있사옵니다. 그 맏아들이 나이 사십이 넘었음에도 아직 다음 보위를 잇게 하는 일조차 결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식들도 반목을 하고 있고 황실은 물론 신료들도 편을 갈라 나누어져 있사옵니다. 이 어찌 희망이 있는 나라라 하겠사옵니까?
왕규 단지 그것만으로 자신이 섬기던 군주와 나라를 버리고 왔다는 말이오?
염흔 어찌 그것 뿐이겠사옵니까? 백제국의 왕은 오만과 고집으로 뭉쳐 있어서 옳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것을 독선으로 행하니 이 또한 어찌 오래 몸담아 신하로서 일신을 바칠 수 있겠사옵니까? 이에 투항을 결심한 것이옵니다.
왕식렴 폐하, 듣자하니 염흔 공의 말이 구구절절이 일리가 있사옵니다.
박술희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하로서 그 군주를 버릴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지금 듣고 보니 과연 그럴만하옵니다. 백제국의 앞날도 이로써 다시 한번 드러난 것 같사옵니다.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야말로 백제가 붕괴하고 있다는 조짐이 아니겠사옵니까?
왕건 염흔 공이 귀순해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것이오. 아무튼 우리 고려로 잘 왔네. 이 나라 조정을 많이 도와주도록 하게나.
염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건 우리가 고창전투를 승리하면서부터 삼한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소이다. 수많은 읍성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항복하고 있소이다. 그리고 반대로 백제는 조금씩 그 헛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소이다. 이제부터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오. 때가 왔을 때에 그것을 놓친다면 다시 잡는다는 것은 몇 배의 시간과 피땀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오. 신료들은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이제부터는 고려의 때이올시다. 고려가 삼한을 이끌어 나가고 통일할 것이라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 본분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몇 배 몇 십 배의 새로운 노력과 고통을 우리 모두 감수해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모두들 예, 폐하.
씬 황후전
황후 오씨와 유씨가 차를 마시고 있다. 넉넉한 표정이다.
오씨 모처럼 우리 둘이 이렇게 편안하게 차를 마시는 것 같네 그려.
유씨 왜 아니겠사옵니까, 황후마마? 폐하께서 황도에 돌아오시고 수많은 성들이 머리를 숙여 항복해 오고 있다 하니 그 동안 조렸던 마음들이 편안해지옵니다.
오씨 정말 그렇다네. 하지만 이런 평온함이 언제까지 갈 지....
유씨 이제 계속 그렇게 되리라고 소인은 보옵니다. 신라에서도 폐하를 초청하여 뫼시고 싶다는 사신이 왔고, 백제에서는 높은 관리가 투항해 왔사옵니다. 다 좋은 소식들뿐이고 또한 잘되고 있지 않사옵니까?
오씨 듣고 보니 그도 그러네 그려.
유씨 오늘 조회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나라의 장래를 의논할 일들이 많은가 보옵니다.
오씨 그런 모양일세. 하긴 그럴 만도 하네. 많은 상황들이 급격히 변하고 있지 않은가?
웃는 두 여인의 모습에서...
씬 다시 편전
회의가 계속되고 있다. 왕건이 다시 말한다.
왕건 나라 일들이 모두 다 순조롭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데 평양은 어떠한가, 식렴아우...?
왕식렴 그야말로 평양은 눈부시게 달라지고 있사옵니다. 주변의 호족들이 모두 합심하여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으며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거란과의 사이에는 여러 오랑캐 부족들이 있사오나 비교적 우리의 영을 잘 따르고 있사옵니다.
왕건 그야말로 좋은 소식일세. 평양은 옛 고구려의 도읍이었어. 그리고 우리 나라 이름이 지금 무엇인가?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고려가 아닌가? 마땅히 그 영화를 되찾아야 할 것이야.
왕식렴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사옵니다. 자체적인 군사만도 오 천이 넘사옵고 이 황도와 똑같이 행정체계를 만들어 놓았사옵니다.
왕건 알고 있네. 그래서 우리가 서경이라 하지 않는가? 서경이 무엇인가? 서쪽에 있는 나라의 도읍지라는 뜻이야.
왕식렴 그래서 신은 이 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차라리 도읍을 이곳 송악에서 평양으로 옮기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왕건 도읍을 옮긴다...? 생각해 볼 일이로세.
유금필 아니 되옵니다, 폐하. 도읍을 옮기다니요...? 한 나라의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큰 사안이옵니다.
왕식렴 .............?
유금필 아직 통일을 이루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평양은 거란과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이옵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최전방에 둔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없는 일이옵니다.
왕식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평양은 옛 고구려의 수도였소이다. 더불어 이곳 송악과 마찬가지로 행정체계가 다 세워져 있을 뿐더러 군사력만 더 늘리면 위험같은 것은 염려할 것이 없소이다. 깊은 생각은 아니 하고 반대부터 한다니 유감입니다, 유장군.
유금필 한 나라의 도읍지는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란과 바짝 붙어있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고려해볼 일이올시다.
홍유 허허, 당장 옮기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장군께서는 좀 과민하신 것 같소이다.
유금필 소생은 누구보다도 북쪽을 잘 아는 사람이올시다. 그곳에서 태어났고 아직도 그곳에 많은 기반을 가지고 있소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왕건 허허... 지금 막 나온 이야기일세. 너무들 과민한 것 같네. 천도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세. 이보게, 식렴 아우..?
왕식렴 예, 폐하.
왕건 내가 한번 이 기회에 서경에 다시 가 봐야겠어. 기왕에 천도 이야기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일단 서쪽의 도읍지가 아닌가..? 국방력도 더 단단히 하고 학교도 세우고 보다 더 내실을 기하도록 하세.
왕식렴 예, 폐하.
왕건 말이 나온김에 곧 떠나도록 하세. 금필 아우가 이번에는 함께 가세나.
유금필 예, 폐하.
왕건 서경이라..... 서경이라...? 나는 서경이야기만 나오면 힘이 나오. 옛날의 고구려가 얼마나 강성하였는가? 저 중원의 만리장성까지 국력을 뻗쳤던 나라가 고구려가 아닌가? 서경이라.... 서경이라...? 정말 의미있는 곳이지, 암....
그렇게 상기가 되어 끄덕이는 왕건의 표정에서... 디졸브 되면...
씬 길
서경으로 가는 왕건의 행찻길이다. 유금필, 왕식렴, 복지겸과 더불어 오십 여 기가 가고 있다.
해설 서경. 고려사 실록에 보면 왕건이 얼마나 서경이었던 평양에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는가가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의 매년이다시피 그곳을 다녀오곤 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그가 죽으면서 남겼던 유훈인 훈요십조에서도 후세의 제왕들이 일년에 한번 씩 백일 이상 반드시 그곳에 머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그가 서경을 중요시여겼나 하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여러 번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업군주로서 고구려의 옛 영화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씬 평양성 근처 길
왕건 일행들이 가고 있다. 가면서 왕식렴이 설명한다.
왕식렴 폐하, 거란은 아직 국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거란과 우리 고려의 국경에 대하여 이렇다할 간섭이 없사옵니다.
유금필 하지만 저들이 우리 형제였던 발해를 다 점령한 이상 곧 어떤 조짐을 보일 것이오이다.
복지겸 그럴 것입니다. 이미 대국을 이룬 거란이옵니다. 우리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조용히 있을 리는 만무하옵니다.
왕건 그럴 것일세. 그 때를 대비해야 하네.
왕식렴 안심하시오소서. 그만한 대책이 없겠사옵니까?
그렇게들 가고 있는데 한쪽 산비탈에서 수많은 군사들이(여진족들) 달려 내려오고 있다. 모두 놀라서 본다.
왕건 웬 군사들인가?
유금필 (보다가) 오랑캐들이옵니다. 아마도 신을 보러 온 것 같사옵니다. 허허허...
왕식렴 여진족들이 맞사옵니다. 흑수말갈족도 있사옵니다.
복지겸 ...........?
그들은 가까이 온다. 달려와 왕건에게 형식적인 군례를 한 후, 유금필을 본다.
족장 유금필 장군님, 소생은 흑수말갈족의 족장이옵니다. 이쪽은 여진족 추장이옵니다.
유금필 허허허... 어쩐 일들인가?
족장 북방일대는 모두가 이곳 출신이신 장군님의 명성을 크게 자랑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막료들과 달려왔사옵니다.
유금필 허허허.... 고맙네.
족장 장군께서 계시는 한 이쪽 북방은 염려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왕식렴 ....................(불쾌하다)
족장 자, 무엇들 하느냐? 북방 출신이신 유금필 장군께서 오셨다. 모두 만세를 보내자. 유금필 장군, 만세.... 만세....
유금필 어허... 이게 무슨 짓들인가..? 폐하께서 계신데....?
족장 만세..... 만세.... 유금필 장군 만세.....
복지겸 만세라니...? 어허, 이런... 이런, 이런...
유금필과 복지겸은 당황하고 왕식렴은 불쾌해서 본다. 왕건은 그저 담담하게 웃고 있다.
왕식렴 이게 무슨 짓인가? 만세라니...? 만세란 황제폐하만이 받으실 수 있는 인사가 아닌가? 이게 무슨 무례인가?
왕건 아하... 잘들 몰라서 그러는 것일세. 무얼 나무라는가?
왕식렴 아니옵니다. 이럴 수는 없사옵니다.
복지겸 소장이 보기에도 저들이 예법을 모르는 것 같소이다, 왕총관.
왕식렴 그렇지가 않소이다. 몰라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왕건 반갑다고들 그러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놓아두게. 배우지 못한 오랑캐들이야. 그냥 놓아두게.
유금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왕건 아닐세. 오히려 아우의 그 큰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어 흐뭇하네 그려. 자, 그만 가세.
유금필 너희 족장들은 오늘 큰 무례를 저질렀다. 이후 주의하도록 해라. 만세는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니라. 알겠느냐?
족장 예, 장군. 어쨌든 잘 오셨사옵니다. 신들이 뫼셔가겠사옵니다. 얘들아... 유금필 장군을 뫼셔라. 우리들의 주인이신 유금필 장군이 오셨다.
왕식렴 (중얼거린다) 이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로고..... 폐하의 영광을 그 신하가 모두 받다니... 그리고 내가 평양의 총관인데 나는 안중에도 없지 않는가? 음......
왕건 무얼하는가? 어서 가세.
왕식렴 예, 폐하.
이미 왕식렴의 표정은 불쾌의 극치를 넘어서고 있다. 유금필은 모르는 척 웃으며 그렇게 가고 있다. 디졸브되면....
씬 동 평양성
호족들과 그곳의 장졸들이 모두 나와 맞고 있다. 긴 성벽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화려한 전각들이 수없이 보여온다. 왕건이 끄덕인다.
왕건 과연 서경이로다. 그 동안 식렴아우가 정말 고생이 많았어. 개경과 서경을 오가면서 많은 일을 했구먼 그래.
왕식렴 과찬이시옵니다.
왕건 아닐세. 이 많은 전각들하며 저 끝도 없는 성곽하며 이게 모두 자네가 이룬 일이 아닌가? 정말 고생이 많았네.
왕식렴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주변의 많은 군현에서 백성들을 이주시켰사옵니다. 하옵고 많은 호족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성을 축성하는 비용을 대고 군비를 대고 있사옵니다.
왕건 고마운 일이로다. 그대들 호족들은 듣게나.
그들 예, 폐하.
왕건 예나 지금이나 이곳 서경은 고려의 중심이었어. 그대들이 노력한만큼 반드시 보상들을 받을 것이야.
그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식렴 자, 안으로 드시오소서. 저쪽에 폐하께서 머무실 행궁이 있사옵니다.
왕건 그리 하세.
그들 그렇게 전각 안으로 향해서 간다.
씬 동 성 행궁 외경 (밤)
씬 그 안
연회가 벌어지고 있다. 호족들과 족장들 그리고 그곳 장수들이 함께 해 있다. 수박치기가 한창 그 묘기를 부리고 있다. 끄덕이며 술을 마시는 왕건들...
왕건 저 수박치기는 우리가 늘 보는 것이지만 장졸들의 체력단련에는 그만이야. 특히나 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말일세.
유금필 그러하옵니다.
왕건 이 평양성의 중요성은 천번 만번 말을 해도 모자라네. 이곳이야말로 북방으로 가는 첫 관문이 아닌가? 우리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게 되면 형제국이었던 발해를 지나서 만리장성을 넘고 중원일대를 도모하는 것이 앞으로의 대 과업이 되지 않겠는가?
왕식렴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옵니다.
왕건 암.... 그래서 나는 자주 서경을 오는 것일세. 이 가슴속에 품은 웅지를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일세. 삼한 땅 안에서 다툴 것이 아니라 저 중원을 넘어 온 우주를 도모하는 것이 단군의 자손들이 해야 하는 일일세.
유금필 그 말씀을 들으니 신은 어깨에 힘이 절로 솟사옵니다. 반드시 그 웅지를 이루실 것이옵니다, 폐하.
왕건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이보게, 금필아우..?
유금필 예, 폐하.
왕건 나는 새삼스럽게 아우의 그 명성과 인품을 보았네. 변방의 오랑캐족들이 자네 앞에서 이토록 충성심을 보이는 것을 보니 북방은 안심일세. 정말 안심이야.
유금필 망극하옵니다, 폐하.
왕식렴 ..............?
그때, 한쪽에서 복지겸이 무언가 달려온 내군 부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장계를 건네 받는다. 왕건에게 온다.
복지겸 폐하, 개경에서 온 장계이옵니다.
왕건 아니, 이제 막 도착하였는데 무슨 장계요?
복지겸 신라의 왕이 폐하께서 서라벌로 오시기를 재차 청하여왔다 하옵니다.
왕건 허허.... 이런.. 아니 생각해 보겠노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유금필 폐하, 이미 서경은 폐하께서 다 보셨사옵니다. 어찌되었든 신라의 왕이 두 번 씩이나 간곡히 청하고 있사옵니다. 허락하시오소서.
복지겸 신이 생각하여도 가셔서 나쁠 것이 없사옵니다. 이미 고창전투에서 백제는 큰 고배를 맛보았사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신라마저 백제와 담을 쌓고 폐하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가시오소서, 폐하.
왕식렴 신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기회가 좋은 것 같사오니 서라벌로 가시오소서.
왕건 (생각하다가) 허면 그렇게 하세. 기왕 말이 나온 것이니 이곳에서 서라벌로 바로 가도록 하세나. 육로로는 먼길이니 수군에 연락하여 배편으로 가도록 하세. 이틀이면 충분할 게야. 이런 사실을 조정에도 알려 주게나.
왕식렴 예, 폐하. 바로 전령을 띄우겠사옵니다.
왕건 자,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모두 마십시다. 한번 취해 보십시다. 하하하.... 자, 드십시다.
모두들 예, 폐하.
그들 그렇게 술잔을 들고 마신다.
씬 길 (밤)
달빛을 받으며 두 명의 전령이 개경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카메라 앞을 스쳐 사라져가면....
씬 송악 황도 외경 (낮)
씬 동 광평성 전각 안
홍유와 배현경, 염상, 윤신달, 박술희가 함께 해 있다. 김행선과 더불어 왕규와 추언규, 최응도 보인다. 김행선이 장계를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쉰다.
김행선 허허, 이런...
홍유 왜 그러시옵니까?
김행선 폐하께서 서경에서 바로 서라벌로 가신다 하오이다. 신라 왕의 초청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이올시다.
염상 잘한 일이 아니십니까? 어차피 몇 번씩 청하는데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김행선 보시구려. 또 이런 말도 씌어있소이다. 왕총관의 말인데... 허, 이것 참... 이런 일이... (장계를 추언규에게 건넨다)
윤신달 왜 그러시옵니까?
추언규 (한참 장계를 받아서 보다가) 허허, 이런 이런...
왕규 왜 그러십니까?
추언규 이런 결례가 있는가...? 글쎄 유금필 장군이... 허, 이런..
박술희 ..............? 금필 형님이 왜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추언규 폐하를 대신하여 오랑캐들에게 만세를 받았다고 하는구려.
모두들 아니, 그런....?
최응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장군이 만세를 받다니요...?
김행선 여기 그리 써있소이다. 그 일로 서경의 왕총관이 몹시 화가 난 것 같소이다.
홍유 폐하를 대신해서 만세를 받다니...? 그것은 결례가 아니라 대역죄에 버금가는 행위올시다.
배현경 그럴 수 있지요.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신하로서 황제를 대신해 예를 받다니...? 이런....
염상 평소에 유장군이 그런 분이 아니지 않소이까?
박술희 그렇구 말구요.. 어디 금필 형님이 그런 분이십니까? 장군들도 그리 보십니까?
홍유 어흠, 흠... 물론 박장군께서는 유장군과 의형제 간이시니 듣기 거북하실 줄로 압니다. 하지만 유장군께서 뭐랄까... 좀 신하의 예를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올시다.
박술희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홍유 삼년산성의 전투 때부터 작은 공을 가지고 크게 부풀려졌소이다. 신하로서 폐하를 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디를 가나 유금필 장군의 이름이 폐하보다 앞서 있었소이다.
배현경 그런 점은 있소이다. 이번 고창전투에서도 그랬어요. 모두다 똑같이 공을 세웠는데 유독 유장군만 칭찬을 도맡아 듣고 있소이다. 그런 오만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폐하를 대신해서 만세를 받는 불손한 대역죄를 짓게 된 것이 아니겠소이까?
박술희 말을 삼가하시오, 대역이라니....?
홍유 폐하를 대신해 만세를 받았다면 대역이 분명하오.
추언규 그렇소이다. 얼마나 당황하고 무참했으면 왕식렴공이 이런 일을 조정에 알려온다는 말이오? 보시구려. 조정에서 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라 했소이다. 즉, 죄를 물어달라는 것이올시다.
김행선 어허, 이것 참 이런.... 이 일을 어찌하나..? 이보시오, 병부령..?
최응 예, 시중어른.
김행선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그냥 넘기자니 아니 될 것 같고... 죄를 묻자니 그것 또한 어찌 물을 것인지 낭패로구려.
홍유 낭패는 무슨 낭패라는 말씀이십니까? 물을 죄는 물어야지요.
최응 폐하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 일은 폐하께서 결론을 내실 줄로 압니다. 서라벌에서 돌아오시면 그 때 다시 논의하시지요?
김행선 뭐, 하긴... 당장 급한 일은 아니올시다마는...
최응 지금 당면한 일은 폐하게서 서라벌로 가셔서 앞으로 있을 국가간의 문제를 어찌 푸시는가 하는 일입니다. 소생이 그 동안 마련해 놓은 계책이 있사온데 그것을 우선 폐하께 급히 보내 드려야겠습니다.
김행선 그리 하십시다. 유장군에 관한 일은 다음에 의논하기로 하고....
홍유 아니 될 말씀이올시다. 죄안이 분명한데 다음으로 미루다니요...?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이 문제에 관한 신료들의 입장을 정리해야 합니다.
박술희 ............ 홍장군은 우리 형님에게 뭔가 오해가 많으신 것 같구려.
홍유 오해가 아니올시다. 잘못나가는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올시다.
박술희 이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뭔가가 있어요.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홍장군..?
홍유 어허, 글쎄올시다.
분위기는 그렇게 냉랭하다. 최응은 뭔가를 느낀 듯 홀로 끄덕이며 그렇게 그들은 본다. 그 표정에서....
씬 경주 가는 길 (바다)
왕건이 배 위에서 먼 바다를 보고 있다. 석양이 지고 있다. 복지겸이 갑판 위로 걸어와 장계를 전한다.
왕건 이보게, 금필아우..?
유금필 예, 형님.
왕건 좋은 바다일세. 얼마만에 배를 타보는지 모르겠네. 역시 배는 빠르고도 좋아. 내일 아침이면 서라벌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
유금필 그렇사옵니다. 벌써 바닷길이 하루가 지났으니 내일이면 서라벌로 드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왕건 그럴 것일세. 내가 처음 궁예왕에게 들어갈 때 아버님은 말씀하셨다네. 이 바다를 이용하여 삼한의 주인이 되라고... 이제 그 염원이 이루어져가고 있네. 바다야.... 우리 왕씨 가문에는 이 바다가 참으로 인연이 커. 허허허....
그때, 복지겸이 걸어온다. 그리고 장계를 올린다.
왕건 이건 무엇이오?
복지겸 병부령이 쾌속선으로 전해 온 장계이옵니다.
왕건 그렇게 급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쾌속선까지 띄우는고..? (받아 읽는다, 읽으며 끄덕인다) 하하하... 과연 병부령이야. 그렇구 말구...
유금필 병부령이 뭐라 하였사옵니까?
왕건 서라벌에 들어가면 신라의 왕이 여러 방면의 지원을 구할 것이라 하였네. 대부분 그것을 모두 들어주라는구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라의 군권을 넘겨받으라고 하는 게야.
유금필 하하하... 그렇게야 되겠사옵니까? 군권을 넘겨 받으면 결국 나라를 받는다는 이치가 성립되옵니다.
왕건 그러니까 이참에 신라를 받으라는 이야기인 모양일세. 허허허.... (계속 읽다가) 음..? 이건 무슨 얘긴가..?
유금필 .................?
왕건 (계속 보다가 불쾌하다) 이런, 이런....
복지겸 왜 그러시옵니까, 폐하...?
왕건 서경의 식렴아우가 금필아우의 일을 문제삼는 모양이오.
복지겸 아, 폐하를 대신하여 만세를 받은 일 말이옵니까?
왕건 그것은 저 무지한 변경의 오랑캐들이 모르고서 한 일인데 이것을 문제삼다니...? 조정에서 논의 중이라는구려. 이렇게들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복지겸 실은 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조마조마 했사옵니다. 저들이 무지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죄를 논한다면 크게 부풀려 질 수도 있는 일이었사옵니다.
유금필 다 소생이 부덕한 탓입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발전하다니...? 어허, 이런...
왕건 그러기에 매사를 조심하게. 그 동안 아우의 공이 눈에 띄게 많았어. 공이 많으면 시기하는 자가 늘어나고 그만큼 어려워지는 법일세.
유금필 예, 폐하.
왕건 잊어버리게. 지금은 서라벌에서 들어가서 어찌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하네. 내일이면 서라벌에 도착을 할 테니까 말이야.
그들 그렇게 낙조가 지는 바다를 보고 있다. 배는 계속해 나아가고... 디졸브된다.
씬 신라 서라벌 황궁 외경
씬 동 편전
경순왕이 신료들과 함께 회의중이다. 마의태자도 함께 있다.
경순왕 지금 고려의 왕이 짐의 청에 의하여 이곳 서라벌로 오고 있소이다. 귀빈을 맞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외다.
모두들 예, 폐하.
마의태자 폐하, 소자는 도무지 납득이 아니 가옵니다. 어찌하여 범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옵니까?
경순왕 말이 심하다, 태자야. 범을 우리 안으로 들이다니...? 고려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 신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난을 감수했느냐? 짐은 그 보답을 하기 위해서 청하는 것이니라.
마의태자 고마워할 것 없사옵니다. 우리 신라를 노리기는 고려도 백제와 다를 바 없사옵니다.
경순왕 그러나 어찌하느냐? 지난 번 고창전투 이후로 그나마 서라벌 주변에 남아있던 얼마 아니 되는 읍성들마저 모두 다 고려에 항복해 버렸다. 무슨 영토가 있어 나라라 하고 무슨 백성이 있어 황제라 할 수 있겠느냐?
마의태자 그럴 수록 더욱 이를 악물고 사직을 보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경순왕 무슨 힘으로 보전을 한다는 말이냐? 군사가 있어야 적을 막고 영토가 있어야 백성과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경들은 말해 보오. 여기 태자의 말이 일리있으나 짐은 아둔하여 그 방법을 모르겠구려. 경들은 말해 보오. 이 신라가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말해 보오...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폐하.
경순왕 억울하게 돌아가신 경애대왕을 생각해 보시구려. 백제는 마치 포악한 도적과 같이 쳐들어와 이 황실을 어지럽히고 경애대왕을 시해하였소이다. 그런 백제보다는 그래도 고려가 얼마나 인륜과 예의가 바른 나라이겠소이까? 아니 그렇소이까?
모두들 망극하옵니다.
경순왕 백성들은 짐을 보고 의아해 할 것이오. 백제의 왕이 세워준 이 자리인데 짐은 백제를 버리고 고려로 향한다고 말이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오. 신라의 앞날은 고려가 아니면 의지할 곳이 없소이다.
마의태자 (울먹이며)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폐하. 신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옵니다. 이 험난한 정국을 어찌 하필이면 폐하께서 맡게 되셨는지 운명치고는 너무도 가혹하옵니다, 폐하...
경순왕 어찌하겠느냐? 이 모두가 백제가 저지르고 간 만행의 뒤끝이 아니겠느냐? 어찌하겠느냐..? 이제 내가 어찌하겠느냐?
그런 경순왕의 표정에서....
견훤 (소리) 뭐라...? 고려의 왕이 서라벌로 가고 있어..?
씬 백제 황궁 외경
씬 동 편전
견훤이 대노한 표정으로 신료들을 보고 있다. 능환, 최승우, 능애,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박영규, 종훈, 영순, 애술, 신덕, 최필, 김총, 상귀들이다.
견훤 왕건 아우가 서라벌로 간다...? 그것도 신라의 왕이 두번 씩이나 거듭 초청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능환 그렇다 하옵니다, 폐하.
견훤 허, 이런 배은망덕한.... 아니, 제놈이 누가 세워준 왕인데 나를 배신하고 고려의 왕을 청한다는 말인가? (사이) 이런 괘씸한... 아무래도 군사를 다시 일으켜야겠다. 용서할 수가 없어.
최승우 참으시오소서, 폐하. 고창전투에서 우리 백제가 패하자 신라는 더욱 고려를 무서워하는 것 같사옵니다. 앞으로도 혼을 낼 기회가 많사옵니다.
견훤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못된 것들이 있는가? 에잉........ 그리고 뭐라고들 하였는가? 일길찬 염흔이가 고려로 가 붙어버렸다..?
능애 예, 폐하. 자신의 심경을 밝혀놓은 서찰을 남기고 고려로 투항해 버렸사옵니다.
견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놈이로구나. 고창전투로 해서 온 나라가 힘에 겨워 있는데 적국으로 투항을 해...? 그 놈의 가족들을 모두 끌어내서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거라. 당장 시행하라.
능애 예, 폐하.
견훤 그래, 그 놈이 서찰에 무슨 소리를 주절거렸더냐?
능애 신검 태자마마의 일과 나랏일을 걱정하였사옵니다.
견훤 (벌떡 일어나며) 신검이의 일을......? 나라의 일........? 허, 이런...
신검 .............?
견훤 (한참 신검을 보다가) 너 때문에 갔다는구나. 신검아...
신검 예, 폐하.
견훤 너 때문에 갔다는 게다. 너를 황태자를 시키지 않아서 갔다는 게다. 허허, 정신나간 것들 같으니라고... 도대체 이 나라가 왜 이리 되어가는지 모르겠구나. 적군에 둘러싸인 아비를 모르는 채 등돌린 자식을 황제에 앉히라는 이 못난 신료들을 보았는가?
모두들 ..................
견훤 이런 것들을 신료들이라 믿고 있는 이 황제가 한심하도다. 너무도 한심해...
영순 폐하, 신이 알기로는 신검 태자마마께오서 워낙 강력한 고려군의 저항에 부딪혀 그리 되셨다 하옵니다. 노여움을 푸시오소서.
견훤 네 지금 뭐라 하였느냐? 네가 전투 현장에 나와 보았느냐?
영순 그렇지는 못하였사옵니다마는....
견훤 그렇다면 입을 닫아라. 더 중얼거리면 네 입을 찢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으면서 함부로 중얼거리다가는 네 일신을 망치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영순 예, 폐하.
견훤 장수들의 본분은 적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움직이지 않았기로 이 만의 장졸이 다 당했다. 그 중 전사자만 팔천이야, 팔천...... (사이)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를 할 수가 없어. 이해를 하려해도 할 수가 없어.
신검 ..................
견훤 더군다나 그 중 내 아들이, 내 맏아들이 총사로 지휘하는 군대가 그 모양이었어. 이 백제국의 명장들이라는 장수들이 다
그 모양이었어.
신검과 더불어 그들의 면면이 지나쳐 간다. 최승우는 여전히 말없이 눈만 감고 있다.
견훤 짐이 분명히 이를 것이다. 정신들 바짝 차리라. 한번은 용서해도 두 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진실로 이 황제와 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 보거라.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이다. 또 이르노라. 황태자의 문제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마라. 내 소신대로 할 것이다. 입에 올리는 자는 불문곡직하고 그 목을 벨 것이다. 알겠는가?
모두들 예, 폐하.
견훤 다시 이르노라. 황태자의 문제는 누구도 거론하지 말라. 누구도....
씬 황후전
박씨가 안절부절이다. 이상궁이 눈치를 보고 있다.
박씨 어이고... 날이 갈수록 왜 나라 사정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구나. 지금 우리 신검 태자가 혼이 나고 있다고...?
이상궁 예, 조당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는 내관의 말이 그러했사옵니다. 일길찬 염흔이 고려로 투항한 것이 신검 태자마마 때문이라 하여 더욱 대노하고 계신다 하옵니다.
박씨 어찌하여 그렇게 일이 되어간다는 말인가? 갈수록 꼬이네 그려.
이상궁 그러게 말이옵니다.
박씨 지금쯤 승주부인 그것이 아주 신이 나겠구먼. 신이 났겠어.
씬 고비전
고비가 간드러지게 웃고 있다. 최상궁이 함께 맞장구를 친다.
고비 어찌 아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아니, 아비가 사경에 처했는데 그 아들이 외면을 하다니...? 이야말로 천벌을 받을 일이 아닌가?
최상궁 왜 아니겠사옵니까, 마마?
고비 지금 조당이 시끌벅쩍 하다지..?
최상궁 그렇다 하옵니다. 특히나 신검 태자마마에 대한 폐하의 진노가 대단하시다 하옵니다.
고비 그렇겠지.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그렇겠지. 암, 그렇겠지... 그러니 폐하께서 우리 금강이 이야기를 자꾸 하시는 게지. 암...
씬 황궁 안
신료들이 퇴청하고 있다. 능애와 능환이 가다가 서로를 본다. 능환이 한숨을 거푸 내쉬고 있다.
능환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소이다. 이 나라의 앞날이 갈수록 걱정스럽게 되어가고 있어요.
능애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조당에서의 일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폐하께서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의사를 표하신 것입니다. 신검 태자는 아니 된다고 말입니다.
능환 (끄덕이며) 그렇소이다. 결국 그런 말씀이셨소이다. 허허.... 이 일을 어찌하노.... 이 일을 어찌해....
그런 능환의 표정에서...
씬 동 대전
최승우와 견훤이 마주해 있다.
견훤 파진찬은 왜 조당에서 아무 말이 없었는가?
최승우 신이 무어라 말할 수 있겠사옵니까?
견훤 내 말이 틀렸는가...? 신검이 얘기를 내가 잘못했다는 말인가?
최승우 폐하, 신이 다시 한번 간곡히 청하옵니다. 신검 태자마마에 대한 우려를 버리시오소서.
견훤 지금 우리 둘 뿐일세. 자, 말해 보게. 고창전투의 일을 한번 말해보아. 내가 망령이 들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신검이를 죄도 없는데 몰아 부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인가?
최승우 폐하....
견훤 하기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금강이를 너무 이뻐하다 보니까 맏이가 더러 금강이에 비해서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고창전투에서의 일은 그게 아니야. 신검이는 내가 죽기를 바랬어.
최승우 폐하...
견훤 (긴 한숨) 나도 이제 늙기는 늙은 것 같으이. 옛날 같으면 혼구멍을 내고 따귀 한번 올려 부치고 다 끝낼 수도 있는 일인데... 자꾸만 화가 나. 생각할수록 말이야. 이것이 늙었다는 것일 게야.
최승우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시오소서. 그리고 신검 태자마마께 한번 더 기회를 주시오소서.
견훤 얼마나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얼마나 더...? 그리고 저렇게 비뚤어져있는 놈에게 무얼 더 주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정말이지 실망했네. 실망이 아니라 절망했어.
최승우 폐하, 그래도 맏이시옵니다. 어여삐 보시오소서.
견훤 허허허, 글쎄... 고창전투 하나로 하여 너무 많은 것을 잃었네. 너무 많이 잃었어. 내가 저를 왕을 시켜주었건만 신라왕은 고려에 아예 찰싹 붙어 버렸고 눈치를 보고 있던 그 많은 읍성들이 무더기로 고려에 넘어갔네. 그리고 비뚤어진 자식의 속을 확인하였고 말일세. 늙었는가봐..... 정말 늙었는가봐.... 허허...
씬 서라벌 도성 성문 앞
신라의 문무백관들이 가득히 도열하여 서 있다. 왕건 일행들이 들어서고 있다. 상국인 김유렴이 신료들을 대신하여 큰
소리로 외친다.
김유렴 대 고려국의 황제폐하께서 납시오.... 신료들은 모두 예로써 맞으시오.
그러자 신료들이 일제히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왕건과 유금필들이 감격스럽게 본다. 서라벌로 들어온 것이다.
김유렴 폐하, 저 대궐 문 앞에 대 신라국의 폐하께오서 기다리시옵니다. 어서 저쪽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고맙소이다. 이처럼 환대를 해 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김유렴 어서 안으로 드시오소서.
왕건 그렇게 하십시다.
왕건들은 다시 가기 시작한다. 김유렴이 다시 소리친다.
김유렴 고려국의 황제폐하께서 드신다. 근위대는 예로써 뫼시어라. 자, 안으로 드시오소서, 폐하.
왕건 고맙소.
그들은 그렇게 도성의 열려진 성문 안으로 들어선다. 수많은 문무백관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른다.
씬 동 도성 안 길
도성 안 길을 왕건들이 오고 있다. 백성들이 구름처럼 연도에서 보고 있다. 그렇게 지나쳐가면....
씬 동 궁궐 정문 앞
의장병들이 기치창검을 펄럭이며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문무신료들과 황후들과 마의태자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점차 멀리서 왕건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는 마의태자의 참담함과 경순왕의 무표정한 모습들이 지나친다. 왕건은 점차 가까워진다.
씬 그곳
왕건의 시야로 경순왕의 모습들이 보여온다.
김유렴 폐하, 아국의 폐하께오서 저기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왕건 그렇구려. 자 말에서 내려야겠소이다.
왕건이 말에서 내린다. 모두들 따라서 말에서 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경순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곧 가까워진다. 그리고 서로를 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경순왕 어서오시오소서, 폐하. 처음 뵙사옵니다. 이 사람은 신라국의 황제이옵니다.
왕건 아직 미천한 고려국의 황제올습니다. 신라국의 황제께서 이처럼 청하여주신 은혜, 참으로 크오이다.
경순왕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이제 삼한의 어른은 고려이옵니다. 절을 받으시오소서.
경순왕이 절을 하려고 움직인다. 마의태자를 비롯해서 모두들 경악한 표정으로 본다.
마의태자 아니, 세상에... 신라의 황제가 절을 하신다니...? 오, 신라의 황제께서... 오오... 하늘이시여...
그렇게 경순왕이 천천히 절을 한다. 왕건이 그렇게 서서 보고 있다. 모두들 경악해서 보고 있다. 그들의 여러 가지 표정들이 면면으로 하나씩 스쳐가면서....
해설 단기 3264년, 서기로는 931년인 그해 2월, 왕건은 경순왕의 거듭된 청해 의해 서라벌을 방문하였다. 이때의 일을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봄 이월 정유일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어 만나기를 거듭 청하였다. 신해일에 왕이 오십 여 명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신라로 갔다. 신라왕이 백관들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왕을 영접하고 자신의 사촌동생인 상국 김유렴을 보내 성밖에서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신라왕 자신은 정문 밖에서 왕을 맞으며 절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답배하였다' 라고 씌어있다.
경순왕의 절하는 모습과 양쪽 신료들이 경악하는 표정이 스쳐지나가면서 해설과 함께 그 절이 끝나면 왕건이 다시 말하며 답배를 한다.
왕건 천년의 사직인 신라국이올시다. 홀로 절을 받음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이 사람의 절도 받아주시오.
경순왕 아니올습니다, 아니올습니다... 아이구 이런..
경순왕이 어쩔 줄을 모르며 안절부절이다. 신료들이 비로소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쉰다. 왕건이 절을 끝내는 동안...
해설 (계속) 그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라왕이 먼저 절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비록 왕건이 답배를 하였다고는 하나 천년제국의 신라 황제가 고려의 황제에게 절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신라가 그 국력을 다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왕건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두 황제는 서로를 본다. 그리고 왕건의 그 모습에서...
<171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