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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04월28일(월요일) 제주도 여행일정
05:00~05:30 서귀포시 김정문화로41번길 10-6 번지에 있는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 호 객실에서 기상하여 세면 및 양치질
05:30~05:47 렌트한 승용차로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 120-12 번지에 있는 자구리문화예술공원으로 이동 [17분, 7.9km]
05:47~06:10 자구리문화예술공원에서 일출광경을 감상 후 섶섬을 사진촬영
[2025년 04월 28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출시각 : 5시50분]
[자구리문화예술공원
제주도의 아름다운 바다 풍광과 함께 작가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작품을 감상하며 걷는 제주 산책길 코스 중 하나다. 제주도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전망대가 있어 정면에는 섶섬, 오른쪽으로는 서귀포항과 문섬을 볼 수 있다. 해가 지면 공원에 각종 조명이 밝혀져 야간에도 제주를 만끽할 수 있다. ‘문화 예술로 하나 되는 자구리’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예술 작품과 조각들이 공원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공원의 끝에는 담수욕장도 위치해 있어, 잠깐 발을 담그고 놀기 좋다. 서귀포의 문화 예술 트레킹 코스, ‘작가의 산책길(유토피아로)’의 경유지로 산책로가 이중섭 미술관에서 소양 기념관까지 이어져 있다. 이중섭 화백은 자구리 해안에서 부인, 두 아들과 함께 게를 잡으며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서귀포 앞바다의 새섬, 문섬, 범섬, 섶섬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으로 서귀포해양도립공원에 속해 있다. 이 중 문섬, 범섬, 섶섬은 유네스코 생물 보전권 지역으로 등록되었다. 서귀포항에서 이 섬들을 유람선과 잠수함으로 즐길 수 있다. 주변으로 천지연폭포를 비롯한 이중섭미술관,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새섬]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새연교와 연결되어 있다. 제주도에는 띠로 엮은 지붕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띠풀을 새풀이라고 한다. 새섬은 이 새 풀이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서귀포항과 새섬을 잇는 새연교가 개통된 이후 도민과 관광객들이 쉽게 새섬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무인도인 새섬은 난대림 보호구역으로 새섬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2㎞의 산책로와 광장, 목재 데크로, 자갈길ㆍ숲속 산책로, 테마 포토존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꾸며져 있다. 특히, 새연교가 개통됨에 따라 새섬 도시자연공원을 전면 개방하여 서귀포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으며, 연주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문섬]
새섬 남쪽의 문섬은 9만 6833㎡ 크기의 작은 섬으로 전체 모양은 동서 길이가 0.5km, 남북 길이가 0.28km인 긴 타원형이며 60~100%의 급경사를 이루는 단사면의 구조이다. 섬 전체가 수직으로 된 주상 절리가 잘 발달된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서쪽에서 남서쪽으로 이르는 지역은 15~20%의 각도를 이루며 누워 있는 주상 절리층이 있다. 섬 주위는 해안선을 따라 1.5~2m의 파식대가 발달하고 있으며, 특히 남쪽 해안의 만을 이루는 지역에는 장폭이 21.65m의 파식대는 평균 폭이 10~15m이고 길이가 80m로 제주도에서는 가장 넓다. 해양생태계가 잘 보존돼 스킨스쿠버 포인트로 유명하다. 문섬은 2022년 1월부터 섬 주변 해역도 출입제한 지역으로 지정되어 낚시 및 해상 레저 이용 시에도 반드시 허가가 필요하다.
[범섬]
법환포구 남쪽에 위치한 범섬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 하여 범섬으로 불리게 된 섬으로, 면적 8만 4298㎡이며 남북이 0.58km, 동서가 0.45km로 남북이 긴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서, 섬 전체는 단애를 이루고 정상을 이루는 중앙부는 비교적 넓은 평지를 이루고 평지 중앙부 남쪽 가장자리에 용천수가 있다. 역시 스킨스쿠버들 사이에서 유명한 스팟이며 문섬과 범섬은 연산호 군락지로 특별 보호를 받고 있기도 하며 세계적 희귀종인 후박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가 번식하는 남쪽 한계 지역이다.
[섶섬]
문섬의 동쪽에 위치한 섶섬(숲섬)은 0.1㎢이며, 동서 길이가 630m, 남북 길이 380m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섬 주위에는 50m 높이의 주상 절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섬내에 180종의 난대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 중 파초일엽은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제주도 삼도 파초일엽 자생지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은 19.54㎢이다. 특히 섶섬은 일출과 일몰 명소이기도 하다.]
06:10~06:21 렌트한 승용차로 자구리문화예술공원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는 돔베낭골로 이동 [11분, 4.8km]
탐방지 : 제주도 서귀포시 [돔베낭골&외돌개]
탐방코스: [ 돔베낭골~외돌개 전망대~돔베낭골 ] (이동거리 : 3.0km)
일시 : 2025년04월28일(월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9분 소요)
06:21~06:3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는 돔베낭골에서 돔베낭골에서 범섬과 문섬을 사진촬영
[돔베낭골
해안 절벽과 휜히 트인 바다의 경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해안이다. 돔베(도마)같이 넓은 나뭇잎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돔베낭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기묘한 모양의 절벽들과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으로 유명하다. 특히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맑고 깨끗하여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의 중요한 식수원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서귀포 앞바다의 새섬, 문섬, 범섬, 섶섬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으로 서귀포해양도립공원에 속해 있다. 이 중 문섬, 범섬, 섶섬은 유네스코 생물 보전권 지역으로 등록되었다. 서귀포항에서 이 섬들을 유람선과 잠수함으로 즐길 수 있다. 주변으로 천지연폭포를 비롯한 이중섭미술관,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새섬]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새연교와 연결되어 있다. 제주도에는 띠로 엮은 지붕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띠풀을 새풀이라고 한다. 새섬은 이 새 풀이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서귀포항과 새섬을 잇는 새연교가 개통된 이후 도민과 관광객들이 쉽게 새섬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무인도인 새섬은 난대림 보호구역으로 새섬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2㎞의 산책로와 광장, 목재 데크로, 자갈길ㆍ숲속 산책로, 테마 포토존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꾸며져 있다. 특히, 새연교가 개통됨에 따라 새섬 도시자연공원을 전면 개방하여 서귀포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으며, 연주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문섬]
새섬 남쪽의 문섬은 9만 6833㎡ 크기의 작은 섬으로 전체 모양은 동서 길이가 0.5km, 남북 길이가 0.28km인 긴 타원형이며 60~100%의 급경사를 이루는 단사면의 구조이다. 섬 전체가 수직으로 된 주상 절리가 잘 발달된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서쪽에서 남서쪽으로 이르는 지역은 15~20%의 각도를 이루며 누워 있는 주상 절리층이 있다. 섬 주위는 해안선을 따라 1.5~2m의 파식대가 발달하고 있으며, 특히 남쪽 해안의 만을 이루는 지역에는 장폭이 21.65m의 파식대는 평균 폭이 10~15m이고 길이가 80m로 제주도에서는 가장 넓다. 해양생태계가 잘 보존돼 스킨스쿠버 포인트로 유명하다. 문섬은 2022년 1월부터 섬 주변 해역도 출입제한 지역으로 지정되어 낚시 및 해상 레저 이용 시에도 반드시 허가가 필요하다.
[범섬]
법환포구 남쪽에 위치한 범섬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 하여 범섬으로 불리게 된 섬으로, 면적 8만 4298㎡이며 남북이 0.58km, 동서가 0.45km로 남북이 긴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서, 섬 전체는 단애를 이루고 정상을 이루는 중앙부는 비교적 넓은 평지를 이루고 평지 중앙부 남쪽 가장자리에 용천수가 있다. 역시 스킨스쿠버들 사이에서 유명한 스팟이며 문섬과 범섬은 연산호 군락지로 특별 보호를 받고 있기도 하며 세계적 희귀종인 후박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가 번식하는 남쪽 한계 지역이다.
[섶섬]
문섬의 동쪽에 위치한 섶섬(숲섬)은 0.1㎢이며, 동서 길이가 630m, 남북 길이 380m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섬 주위에는 50m 높이의 주상 절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섬내에 180종의 난대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 중 파초일엽은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제주도 삼도 파초일엽 자생지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은 19.54㎢이다. 특히 섶섬은 일출과 일몰 명소이기도 하다.]
06:30~07:0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홍동 794-11 번지에 있는 외돌개전망대로 이동 [돔베낭골~외돌개 전망대 : 1.5km]
07:00~07:05 외돌개를 사진촬영
[제주 올레길 7코스의 시작점인 외돌개는 바다에서 20m 높이로 솟아난 형상의 돌 기둥이다. 바다 위에 홀로 우뚝 서있어 ‘외돌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장군석’, ‘할망 바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최영장군이 원나라와 싸울 때, 이 바위를 장군처럼 꾸며 놓아 적군을 자멸하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 '할망바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래의 전설을 읽어보자.
'할망바위'라 불리우는 외돌개는 뭍에서 홀로 외롭게 바다에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라산 자락에 살면서 고기를 잡아 살아가던 금실좋은 한 할머니(할망)와 할아버지(하르방) 부부가 계셨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족함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어느날, 여느때처럼 바다로 나간 할아버지는 거친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할아버지를 본 사람도 없었으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풍랑에 돌아가신 것 같다며 할머니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매일같이 바닷가에 나가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할머니는 할아버지 시신을 보기 전까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결국, 바닷가에서 하르방을 외치며 통곡하던 할머니는 그리움과 설움에 그대로 바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할머니가 바위로 변하자, 이상하게도 그동안 찾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할머니가 변한 바위 바로 옆에서 할아버지 시신도 곧 바위로 변해 버렸다.
외돌개 끝부분의 소나무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이고, 중간부분 깊게 파인 곳이 할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할머니의 입이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사람의 모습처럼 이마와 눈과, 콧등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외돌개 바로 앞에 있는 얕은 바위가 할아버지가 변한 바위라고 한다.
제주에는 유난히 돌(바위)로 변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은것 같다. 지역적인 특성이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이 또한 어우러진 결과라 생각된다.]
07:05~07:3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있는 돔베낭골로 원점회귀
07:30~07:39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돔베낭골을 출발하여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으로 회귀 [9분, 3.3km]
07:39~08:10 서귀포시 김정문화로41번길 10-6 번지에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식사 [조식 : 4월27일 사전결제 금액 13,000원] [조식시간 : 7시~09시30분]
08:10~08:28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비스타케이호텔 월드컵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2938-1 번지에 있는 중문관광단지 별내린 전망대로 이동 [18분, 10.1km]
탐방지 : 제주도 서귀포시 [별내린전망대&베릿내오름&한라산전망대]
[별내린전망대는 천제연 계곡 하천에 있는 포구의 옛 이름인 성천포(星川浦)의 순 우리말 이름이며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한라산 전망대는 한라산 등성이를 휘돌아 내려오는 바람이 천제연 계곡에 머물다 성천포를 통해 바다로 휘돌아 나가면서 한라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소식을 전해주는 바람과 그리움의 전망대이다.]
탐방코스: [별내린 전망대~(1.0km)~베릿내오름~(1.0km)~별내린 전망대~(132m)~한라산전망대~(132m)~별내린전망대]
일시 : 2025년04월28일(월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7분 소요)
08:28~08:5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2938-1 번지에 있는 중문관광단지 별내린 전망대에서 탐방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3712 번지에 있는 베릿내오름(해발 100m)으로 이동
[시내 이름이 오름 이름이 된 베릿내오름
기자명 한천민 한라오름연구소장·동화작가·시인
서귀포신문 기사 입력 2023.10.06. 09:52
오름의 이름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름들이 다양하게 불리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어떤 오름은 생긴 모양새에 따라서, 어떤 오름은 오름의 식생에 따라서, 어떤 오름은 그 오름에 큰 바위가 있음이나 큰 굴이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오름은 그 오름 근처에 있는 무엇인가와 연관 지어서 불리게 되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오름은 특이하게도 오름 기슭을 따라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 오름의 이름이 된 경우로 ‘베릿내오름’이다.
베릿내오름은 서귀포시 중문동 지경의 오름으로, 중문 마을과 중문관광단지 사이로 흐르는 베릿내(천제연폭포가 있는 시내)를 끼고 베릿내의 하류인 성천포구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오름이다. 중문관광단지의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북동쪽에 있으며, 제주국제평화센터 뒷산이기도 하다.
▲‘베릿내오름’ 이름의 유래
이 오름의 서쪽을 흐르고 있는 시내를 베릿내라고 하는데, 시내의 이름이 그대로 오름의 이름이 되어서 “베릿내”, 혹은 “베릿내오름”이라고 하고 있다. 베릿내는 천제연폭포가 있는 내를 가리킨다. 다른 오름들은 ‘~오름, ~봉, ~악, ~메, ~뫼, ~이’ 등의 이름이 붙는데, 이 오름은 내의 이름이 그대로 오름의 이름이 된 특이한 예이다.
베릿내의 뜻은 벼랑을 가리키는 제주말 ‘벨’과 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잇’에 ‘내(川)’가 합쳐져서 ‘벼랑이 있는 시내’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해석이 되며, ‘벨’은 ‘별(星)’과 관련이 된다고 하여 한자 표기로는 ‘성천봉(星川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이 오름 서쪽 시내 건너편의 도로변에 마련되어 있는 전망대를 ‘별내린전망대’로 명명하였다.
▲베릿내오름 찾아가는 길
베릿내오름을 찾아가는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문관광단지의 국제컨벤션센터 입구 도로의 회전교차로에서부터 서쪽으로 약 550m를 가면 오름 남쪽의 천제2교 다리 동쪽 인근에 이르며, 이곳에 주차장과 화장실이 시설되어 있고, 이곳에서부터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둘째, 중문관광단지의 국제컨벤션센터 입구 도로의 회전교차로에서부터 북동쪽으로 약 190m를 간 곳에 있는 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꺾어 오름 동쪽 기슭을 끼고 약 880m를 가면 오름 북쪽 기슭에 이르며, 이곳에서부터 오름쪽으로 제주올레길이 연결되어 있어 정상으로 이를 수 있다.
셋째, 천제연폭포 주차장 남쪽 끝부분에서부터 출발하여 약 480m를 내려가면 오름 북쪽의 광명사 주차장 앞에 이르며, 이곳에서부터 양쪽으로 제주올레길이 연결되어 있어 정상으로 이를 수 있다.
▲베릿내오름 탐방
초가을까지 이어지던 더위가 어느새 조금 누그러지고 조금씩 선선해지면서 가을 분위기가 느껴지는 맑은 날, 베릿내오름을 탐방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쪽과 북쪽의 오름 입구 중 어디에서부터 올라도 오름에서 느끼는 시원함과 오르고 내리면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들을 볼 수 있기는 하나, 남쪽에서부터 오르는 것이 조금 더 경사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어서 운동이 더 되기에 오름 남쪽의 천제2교 다리 동쪽 입구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름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올라가는 탐방로는 계단 수가 많고 길쭉하여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중턱의 이르러서 오름 북쪽 탐방로 입구에서부터 오름 서쪽을 따라 이어진 탐방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올라가면서 계단 길 좌우를 보니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칡과 환삼덩굴 등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서 나무를 온통 덮어버리고 있었다. 마침 칡꽃이 피는 시기여서 곳곳에 자주색 칡꽃이 피어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오름 중턱의 다른 쪽에서부터 오는 탐방로와 만나는 지점에 팔각정 파고라를 설치해 놓아 잠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갈라져서 한쪽은 오름 정상으로 향하고, 다른 쪽 길은 관개수로를 따라 오름 북쪽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오름 정상부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살펴보니, 동백나무, 예덕나무, 느릅나무, 멀구슬나무, 누리장나무, 까마귀쪽나무, 큰보리장나무, 쥐똥나무, 팽나무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줄사철과 후추등이 키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면서 자라고 있었고, 지면에는 자금우가 자라고 있는 곳들이 있었다.
베릿내 탐방로는 제주 올레길 8코스와 연계되어 있어서 모든 탐방로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남쪽 중턱의 파고라에서부터 정상부까지는 숲이 우거져 있어서 올라가는 동안 주변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부에 올라서니 갑자기 주변 경관이 시원하게 바라 보였다.
정상부에 오르니 소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올라오면서 흘린 땀을 씻어 준다. 정상부에는 데크가 넓게 깔려 있고 벤치도 놓여 있어서 정상부까지 올라온 탐방객들이 편안하게 쉬다가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큰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그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다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시야에 펼쳐지는 풍경도 눈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정상부에서는 동쪽과 남쪽, 북쪽 전망이 시원하게 보였으며 서쪽 전망은 숲이 우거져서 보이지 않았다. 북쪽편에서부터 동쪽을 돌아 남쪽으로 이어서 눈을 돌리면, 한라산 정상부가 바라보이고 중문 마을과 신서귀포 쪽의 고근산과 월드컵 경기장의 하얀 지붕, 구산봉과 섶섬 봉우리 끝부분, 문섬, 범섬, 그리고 오름 바로 아래에는 국제평화센터가 자리 잡고 있고, 지삿개 주상절리 앞에는 제주컨벤션센터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영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눈을 돌리면 남쪽의 넓은 바다와 남서쪽편으로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 절울이까지도 바라보였다.
정상부에서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풍광을 감상하다가 북쪽으로 내려와서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굼부리 쪽으로 내려가자 산담을 두른 묘가 하나 보여서 들어가서 묘비를 살펴보았다. [展力副尉兼司僕 元公(전력부위겸사복 원공)]과 [貞夫人晉州姜氏(정부인진주강씨)]의 쌍묘로 1992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묘비에는 ‘中文境 星川岳(중문경 성천악)’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묘에서 조금 북쪽편에는 여러 기의 가족 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살펴본 [嘉善大夫 元公(가선대부 원공)]의 묘비에는 ‘中文洞 俗稱 別老岳(중문동 속칭 별로악)’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이는 베릿내를 음차하여 비슷하게 쓴 것으로 보였다.
탐방로는 굼부리 서쪽편 능선을 따라 데크 시설이 되어 있어서 걷기에 무척 편했다. 서쪽 능선 탐방로에서는 정상부에서는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는데, 중문 관광단지의 여러 건물 지붕들과 군뫼, 월라봉, 대평리 박수기정,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 등이 시원하게 바라보였다.
오름 북쪽 기슭으로 내려가니 관개수로를 따라 탐방로가 오름 서쪽 중턱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관개수로는 천제연부터 성천포까지 이어진 2km에 이르는 농업용 수로라고 한다. 조선시대 말엽에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채구석(蔡龜錫, 1850~1920))의 주도로 1906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공하였으며, 이 수로를 통해 천제연의 풍부한 물을 성천봉(베릿내) 아래로 유입시켜 23만1000㎡의 논을 조성하였다. 천제연 주변의 암반을 뚫기 위해 불과 물의 온도 차를 이용한 과학적인 공법이 사용되었다. 이 관개수로는 논농사를 짓기에 어려운 제주도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관개수로 옆 탐방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서쪽편 베릿내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이 위에까지 시원하게 들려와서 가슴으로까지 시원하게 들어왔다.]
08:50~08:55 베릿내오름 정상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08:55~09:15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2938-1 번지에 있는 중문관광단지 별내린 전망대로 회귀
09:15~09:25 별내린 전망대 근방에 있는 한라산 전망대를 탐방 후 별내린전망대로 원점회귀
[한라산 백록담에서 발원하여 서귀포 바다로 흘러가는 중문천 하류에 성천포가 있다.
별내린 전망대의 '별내린'은 이 성천포를 순 우리말로 부르는 이름이다.
별내린 전망대에서는 천제연폭포의 칠선녀다리, 중문천이 흘러가는 모습과 요트계류장이 있는 포구까지 두루두루 내려다 볼 수 있다.
나무 그늘과 데크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한적하게 산책을 즐기기 좋다.
주차장도 산책로와 가까워 주차 후 바로 산책로로 진입할 수 있다.
별내린 전망대 근방에 있는 한라산전망대는 한라산 등성이를 휘돌아 내오려는 바람이 천제연 폭포에 머물다 성천포를 통해 바다로 휘돌아 나가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소식을 전해주는 바람과 그리움의 전망대라고 한다.
두 전망대는 여름밤 선녀가 몰래 내려와 노닐었다는 천제연 계곡과 이를 형상화한 선임교, 그리고 담팔수 나무의 가치를 높이고 천제연 주변 관광지를 명소화하기 위해 만들었다.]
09:25~09:29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별내린전망대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0-1 번지에 있는 천제연폭포 주차장으로 이동 [4분, 1.6km] [65세 이상은 천제연폭포 입장요금이 무료]
[천제연폭포 운영시간 : 매일 09:00 - 17:10]
탐방지 : 제주도 서귀포시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선임교&천제루]
탐방코스: [천제연폭포 주차장~(0.2km)~천제연 제1폭포~(0.3km)~천제연 제2폭포~(0.5km)~천제연 제3폭포~(0.4km)~선임교~(0.3km)~천제루~(0.6km)~천제연폭포 주차장] (이동거리 : 2.3km)
일시 : 2025년04월28일(월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16분 소요)
09:29~09:34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0-1 번지에 있는 천제연폭포 주차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천제연 제1폭포로 이동
[천제연 폭포는 한라산에서 시작된 중문천이 바다로 흐르면서 형성된 폭포로, 중문관광단지 내에 있다. 천제연폭포는 3개의 폭포로 나뉘어 지는데, 주상절리 절벽에서 천제연(못)으로 떨어지는 것이 제1폭포, 천제연의 물이 더 아래로 흐르면서 형성된 제2,3폭포가 있다. 제1폭포는 높이22m, 천제연 수심21m로 건기에는 폭포수가 떨어지지 않지만 주상절리형의 암벽과 에매랄드 빛의 연못이 굉장히 아름다워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카메라를 꺼내들지 않는 이가 없다. 1폭포 근처에 있는 암석동굴 천정에는 이가 시리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백중, 처서에 이물을 맞으면 모든 병이 사라진다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영이 금지되어 진입할 수 없다.
천제연폭포 입장요금
일반 2,500원 [65세 이상은 천제연폭포 입장요금이 무료]
청소년,군경 1,350원
어린이 1,350원]
09:34~09:38 천제연 제1폭포를 사진촬영
[천제연폭포
중문관광단지 부근, 천제교(天帝橋) 아래쪽에 상 ·중 ·하의 3단 폭포로 이어져 있다. 천제연 제1폭포는 길이 22 m, 수심 21 m의 소를 이루며, 이 물이 흘러내려 다시 제2 ·제3의 폭포를 만든다. 폭포의 양안 일대에는 난대림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한국에서는 희귀식물인 송엽란(松葉蘭) ·담팔수(膽八樹) 등이 자생하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상록수와 덩굴식물 ·관목류가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난대림지대를 보호하기 위하여 천연기념물 제378호로 지정하였고, 특히 이 계곡의 담팔수는 지방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09:38~09:46 천제연 제2폭포로 이동
09:46~09:50 천제연 제2폭포를 사진촬영
[제2폭포가 천제연 폭포 3개중 가장 으뜸인 풍경을 보여준다.]
09:50~10:00 천제연 제3폭포로 이동
10:00~10:05 천제연 제3폭포를 사진촬영
10:05~10:15 선임교(仙臨橋)로 이동
[선임교는 서귀포시 중문동에 있는 천제연 폭포와 중문관광단지를 이어 주는 아치형 철제다리이다. 선임교는 [하늘에서 칠선녀가 내려온 다리]라는 뜻으로 선녀다리, 구름다리, 칠선녀다리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제연의 제2단과 제3단 폭포 중간쯤에 위치한 오작교 형태의 다리이다. 다리 양쪽 옆면에 칠선녀의 전설을 살려 각각 다른 악기를 든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조각된 일곱 선녀상이 있다. 야간 관광을 위해 1백 개 난간 사이에 34개의 석등을 설치해 밤에는 색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천제연 폭포를 찾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제주 올레 8코스를 걷는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10:15~10:20 선임교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10:20~10:26 천제루(天帝樓)로 이동
[선임교 서북쪽에 있는 2층 누각인 천제루에 오르면 한라산과 천제연폭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천제루 앞에 거북이, 용, 돼지, 원앙, 잉어가 조각된 오복천 조각상이 있다.]
10:26~10:30 천제루를 사진촬영
10:30~10:45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0-1 번지에 있는 천제연폭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0:45~10:52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천제연폭포 주차장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어도로 36-30 번지에 있는 중문대포주상절리대로 이동 [7분, 3.1km]
10:52~11:15 중문대포주상절리대를 탐방
[제주도 중문 주상절리
육각형의 병풍 돌기둥
유형 ; 주상절리(Columnar joint)
행정 구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GPS 좌표
북위 : 33°13´57˝~33°14´43˝
동경 : 126°25´11˝~126°25´55˝
목차
자연의 신비함을 간직한 주상절리
돌기둥 병풍 대포동 주상절리
신(神)이 빚은 최고의 비경
대포동 주상절리는 제주공항에서 한라산 횡단도로(99번 국도)를 타고 중문의 여미지 식물원을 지나 중문민속촌을 거쳐 제주국제컨벤션센터로 우회전하면 대포동 주상절리군을 볼 수 있다. 서귀포시 대포동 해안에는 '지삿개' 또는 '모시기정'이라고 불리는 절경지가 있다. 육각형의 돌기둥이 겹겹이 쌓여 성처럼 우뚝우뚝 솟아있는 돌기둥 사이로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지삿개해안 주상절리는 약 1㎞에 이르는 해안에 걸쳐 높이가 30m 정도인 사각내지 육각형 바위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의 신비함을 간직한 주상절리
주상절리는 일반적으로 치밀한 흑회색이나 암회색의 현무암이나 조면암질 용암이 화산 분출 후 용암 표면의 균등한 수축으로 인해 생긴 수직방향의 돌기둥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는 현상과 유사하며, 주상절리와 논바닥이 갈라진 모양을 비교해 보면 서로 비슷함을 알 수 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분화구에서 마그마를 분출하면 지표에 나온 용암은 지표의 낮은 곳을 따라서 흐르게 된다. 마그마는 약 1,200℃ 정도로 높은 온도이며, 지표의 온도와 비교하면 매우 뜨겁다. 용암이 갑자기 지표에 흐르게 되면 양이 많으면 두껍게, 양이 적으면 얇게 흐르고, 얇은 것은 두꺼운 곳 보다 더 빨리 식을 것이다. 따라서 얇고 빨리 식은 것은 규모가 작고, 두껍고 비교적 서서히 식은 것은 규모가 크게 된다.
대포동에서 볼 수 있는 화산암의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급랭하여 부피가 수축되면서 인장응력(引張應力)이 생긴다. 특히 용암은 흐르는 방향에 수직이면서 서로 120°를 이루는 수직단열(垂直斷裂)이 비교적 규칙적으로 만들어져 대개 다각형(주로 4~6각형)의 모습을 보인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비교적 빨리 식는 환경에서 잘 만들어 진다. 대포동 해안에서는 바다와 접하는 부분의 주상절리가 더욱 뚜렷하지만 암석의 상부로 가면서 주상절리가 흐려져 사라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암석의 표면에는 현재 두꺼운 클링커(clinker)가 덮여 있는데, 암석이 형성될 당시에는 더 두껍게 쌓였을 것이다. 두꺼운 클링커 층은 보온 역할을 수행하여 암석이 서서히 식어 주상절리가 발달하지 못한다.
돌기둥 병풍 대포동 주상절리
대포동 주상절리를 이루는 대포동 현무암은 약 25만년 전에 녹하지악 분석구에서 분출한 현무암으로 맨눈으로 볼 때 반상조직이 뚜렷하며, 사장석, 감람석, 사방휘석, 단사휘석, 불투명 광물로 구성된다. 절리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서 판상절리와 주상절리가 있는데,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유명한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가 이런 지형에 형성된 폭포이다. 녹하지악 분석구는 한라산의 남서쪽 사면 해발 약 520~540m에 위치하는 오름이다. 평면상으로 거의 원형이지만 북동-남서방향이 약간 더 길어 입체적으로는 원추형모양을 보여주며, 분화구를 찾을 수 없다. 오름 산체의 서쪽 끝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스코리아(송이)와 화산탄으로 구성된 오름 화산체의 단면과 이를 피복하는 고지대에서 흘러온 용암류를 관찰할 수 있다. 녹하지악을 구성하는 송이들과 그 남쪽의 구릉들을 구성하는 용암은 그 조성광물이 동일하다. 즉, 이들 용암은 중문동 시가지를 거쳐 대포동 해안까지 연속하여 분포하며, 특히 주상절리로 유명한 대포동 지삿개 해안절벽 또한 이와 동일한 용암이다. 따라서 녹하지악의 화산활동은 분석구 형성을 전후하여 많은 양의 용암을 분출하였고, 아마도 후기에는 주로 용암을 분출하여 중문동 일대를 넓게 피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神)이 빚은 최고의 비경
신(神)이 다듬은 듯 정교하게 겹겹이 쌓은 검붉은 육모꼴의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대포동 주상절리는 자연의 위대함과 절묘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천혜의 자원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대포동 주상절리는 높이가 최고 40m에 이르며, 폭이 1㎞에 달해 색달해안 갯깍 주상절리와 더불어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지질 및 지형학적 학술가치가 뛰어나서 보호가치가 있는 곳이다. 특히, 주상절리 단애의 형성과정 중에 일어났던 해수면 변동과 구조운동, 신생대 제4기의 빙하성 해수면 변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원이 될 수 있다.
입장요금
어른(25세 이상) : 2,000원
어린이(7-12세) : 1,000원
청소년(13-24세) : 1,000원
군인(하사 이하) : 1,000원]
11:15~11:27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중문대포주상절리대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북로35번길 15-28 번지에 있는 법화사로 이동 [12분, 5.5km]
[법화사, 소개령 後 토벌대에 전소
한국전쟁 당시 육군 숙영지 전락
글 : 한금순(제주대 외래교수)
법화사는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 말사다.
제주4.3사건 시기 법화사는 소개령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비우고 부처님을 모시고 하원 마을 안으로 들어가 초가로 절을 짓고 살았다. 장한택 스님은 하원 마을 성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한글과 주산을 가르치는 문맹퇴치운동을 했다. 아이들은 법당에서 연극 연습을 해 마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48년 10월 소개령 이후 토벌대에 의해 법화사는 전소됐고 1950년 3월 장한택 스님이 허술하게나마 복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법화사는 장한택 스님이 드나들며 관리했다.
1952년 한국전쟁 시기 법화사는 육군 제3숙영지로 사용됐다. 대웅전을 숙영지 본부로 사용했고 법화사 경내 논을 메꾸어 연병장으로 사용했다. 경내에 사병 막사가 지어졌고 법화사 위 지경은 군인들의 사격 훈련 등 훈련 장소로 활용됐다.
당시 숙영지 소장의 어머니가 불자라서 대웅전을 군인들이 쓰는 것을 보고, 새 대웅전을 지어놔야 한다고 해 소장이 장한택 스님을 찾아 새 대웅전 자리를 물색하게 했다. 장한택 스님과 신도회장 등이 모여 새로운 위치를 선정해 기반 공사를 군인들과 함께 시작했다. 기반 공사를 하던 중 소장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부임하면서 재건은 지지부진해졌다.
후일 장한택 스님과 신도들이 법당과 요사를 다시 재건했다. 원래 법당과 요사채는 현재 경내 법화수 지경에 있었다. 새로 재건된 법당은 현 대웅전 자리이다. 그 법당을 허물고 1987년 다시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 현재 구품연지는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 전쟁이 격화되며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 22일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 설치됐다.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하루에 500명 정도 입소하던 군인들이 8만 명 정도가 입소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제1훈련소에서만 1951년부터 1956년 1월까지 50만여 명의 신병이 배출됐다. 이 시기인 1952년 2월 13일에 법화사에 제3숙영지가 설치된 것이다. 숙영지는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리됐다.]
[제주도 성지순례 관음사-법화사-약천사]
기자명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법보신문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억불과 토벌로 점철된 역사임에도 불심만은 펄떡인 땅
뭍에서 추사를 만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제주에 온 초의가 6개월을 머물렀다는 산방산 중턱의 산방굴사. 추사가 이 토굴에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고도 전해져 산방산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노란 유채꽃 만발할 때, 아니 푸른 청보리 익어갈 때, 짙은 녹음 우거질 때, 아니 붉은 동백 필 때, 그 어느 날엔가 산방산 올라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 끝 섬 마라도를 바라본다면 산방굴사에 좌복 펴고 삼매에 들었던 고려의 혜일(慧日) 스님을 떠올려봄직하다.
이형기 제주 목사 재임 때
1000개 불상 바다에 던져
‘4·3 항쟁’ 당시 토벌대에
사찰 불태워지고 강제철거
‘3·1운동’보다 1년 빠른
‘무오년 항일’ 법정사가 주도
전통의 관음사·신흥 약천사
제주불교 중흥의 ‘중심 축’
제주의 ‘풍속’과 ‘토산’, ‘과원’ 등을 상세히 담은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 1653년 간행)’에 따르면 혜일 스님은 거상 김만덕, 명마(名馬) 노정(盧正)과 함께 제주도의 삼기(三寄)로 불렸다고 한다. 행장이 없어 스님의 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탐라’가 고려의 ‘제주’로 편입된 직후 이 섬에 걸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머무르며 쓴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법화사를 소재로 한 시 한 편도 남아 있다.
‘법화암 물가 경치 그윽하니/ 대(竹) 끌고 솔(松) 휘저으며 홀로 노닌다/ 만약 세간상이 상주하는 소식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달아나 흐른다 하리라!’(法華庵畔物華幽 曳竹揮松獨自遊 若間世間常住相 梨花亂落水奔流)
노을빛 머금은 구품연지가 고풍스럽게 정좌한 구화루(九華樓)를 안았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붉은빛마저 토해내고 나면 물가 따라 둥글게 줄지어 달린 연등에 불이 밝혀질 터! 고즈넉했던 법화사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해 가겠지만 구화루는 무상법문 한 토막 별빛에 실어 보낼 것이다.
‘그대 머문 이곳이 극락이다!’
법화사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약했던 장보고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어 흥미롭다. 장보고는 바닷길 오르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주요 주둔지에 법화사를 세운 바 있는데,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중국 산둥반도의 법화원이 대표적이다. 제주 법화사 역시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로 확보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법화사는 존자암, 수정사와 함께 제주도 3대 비보사찰이었다. 이 절에는 원나라 장인이 조성한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었는데, 재밌는 사실은 훗날 명나라가 ‘법화사 아미타삼존상 반환’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중국 사신 황엄 등이 제주도의 법화사(法華寺) 아미타삼존상을 도로 가져 가겠다’하는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연간 기록이 방증하고 있다. 조선의 태종은 아미타삼존불을 숨기기 위해 감실을 만들었는데 높이와 폭이 각각 7척, 약 2m12cm이었다고 한다. 나주로 숨겼던 삼존불은 결국 명나라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법화사가 원나라 황실의 원찰로 세워졌거나 또는 그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원나라가 제주를 지배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다.
조선 태종 때까지만 해도 280여명의 노비가 상주했을 정도로 제주 최대 사찰이었던 법화사는 숭유억불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명맥을 잃어갔다. 뭍에서 사찰을 기생관으로 쓰는 유생들의 악업이 자행될 때, 제주 도량 역시 그들의 손에 헐어지고 있었다. 1530년에는 15개의 사찰이 미미하게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18세기 접어들며 그 마저도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졌다. 1703년 제주 목사(牧使) 이형상은 자신의 저서 ‘남환박물(南宦博物)’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온 섬 500리에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니는 없고,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厄)이라 말할 수 있다.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
이형상의 제주 고을 순찰 상황을 그린 도첩 ‘탐라순력도’에 산방굴사가 묘사돼 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실 자리에 의관을 갖춘 사람이 유생이나 벼슬아치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술잔을 받으려는 모습이다. 상석에 앉은 인물은 분명 이형상 목사일 것이다. 그의 재임 당시만 해도 1000개의 불상이 바다에 던져졌다.
4·3항쟁 때 중산간 일대의 마을이 불타면서 법화사지가 드러났다. 1982년부터 발굴이 진행됐고 1987년 대웅전이 들어섰다. 발굴 과정에서 조사단은 혜일 스님의 시에 주목했다.
‘법화암반물화유(法華庵畔物華幽)’에서 ‘반(畔)’은 밭두렁, 땅의 가장자리를 뜻해 길가의 ‘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반’은 물가를 뜻하기도 한다. 연못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발굴한 결과 불국사 앞의 ‘구품연지’와 유사한 연못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2001년 구품연지가 조성됐고, 2004년에 구화루가 지어졌다. 2007년부터 일주문, 사천왕, 나한전 등이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뒤 한쪽에 옛 법화사지가 아직 남아 있으니 복원불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 하겠다.
한라산 동북쪽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음사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초기 때까지도 범종이 울렸던 절이었으나 제주 목사 이형상이 끝내 폐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을 다시 중창한 인물은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觀). 안봉려관 스님은 떠돌이 무당이었다. 비앙도로 가던 중(1901년)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맸는데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의 해월굴(1908)에서 3년 동안 관음정진하며, 불사를 일궈 법당과 요사채를 완공(1912년)했다.
관음사 중건은 제주 불교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불사로 기록될 만하다. 관음사 불사를 시작으로 원당사(현 불탑사)를 비롯해 극락사, 산방사, 용주사, 금봉사, 무관암, 원만사, 용장사, 서림사 등이 연이어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찰 중창은 곧 제주불교협회를 태동(1924년)시켰다. 1940년대에는 승가교육, 선농불교운동, 제주불교 혁신승려대회 등이 전개되며 제주불교가 다시금 펄떡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관음사와 연관된 사찰만도 70여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음사 중건 6년 후인 1918년 한국사와 제주불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항일항쟁의 횃불이 시뻘겋게 타 올랐던 것이다.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스님 등 여덟 명의 스님과 법정사(法井寺) 신도, 주민 등 400여명이 합심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 축출은 물론 국권회복을 갈망하며 일으킨 항쟁이었다. 1918년이 무오년이어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사는 제주 4·3항쟁(1947~1954년) 당시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전소됐다. 제주를 대표하는 주요 사찰도 그때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철거당했다. 고운사, 귀이사, 서관음사, 은수사, 소림사 등은 아직도 복원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 보다 1년 앞서 항일운동이 펼쳐진 고장에, 그 저항운동을 주도한 불교계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악행은 조선 유생들의 훼불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토벌대에 의해 피폐해진 황무지에서 새 연꽃을 피워낸 도량 또한 관음사였다. 1969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종각불사가 진행돼 명실상부한 대가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기점으로 산방산에 자리했던 사찰도 다시 일어섰고, 약천사를 필두로 한 신흥사찰이 제주도 땅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법화사를 참배한 후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약천사로 걸음 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높이 29m 3층으로 구조의 동양 최대 크기의 대적광전 안에 5m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4m의 좌대 위에 안치되어 있다. 좌우 양쪽 벽에는 거대한 탱화가 양각으로 조각돼 있다. 대적광전에 들어선 순간 그 장엄함에 누구라도 절로 일어나는 환희심에 손을 모으고 만다. 이 정도면 대적광전 자체가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천사 내 귤나무 길을 걸으며 내려다보는 제주 해안 풍광 또한 일품이다. 제주불교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도량이다.
푸른 바다를 품에 안은 제주불교는 이제 그 바다 빛깔보다 더 맑고 푸른 청사진을 그려내고 있다. 제주로 불교순례를 떠나 보시라! 뭍에서 느끼던 희열과는 분명 다른, 새로운 환희가 충만된 불심을 얻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 배연이 논문 ‘제주도의 불교와 불교미술 연구’.
[도·움·말]
길라잡이
제주공항서 관음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가능한 아침 일찍 참배하는 게 좋다.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숲길에 들어차는 금빛 햇살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산사는 아니지만 사색에 잠겨도 좋을 만큼 길과 숲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반면 법화사는 오후 늦게 걸음 하는 게 좋다. 구품연지에 떨어지는 저녁노을이 멋지다. 법화사와 이웃하고 있는 약천사에는 귤나무가 풍성하다.
이것만은 꼭!
법화사지: 법화사는 고려시대 비보사찰 역할을 담당했던 제주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법화사지 발굴을 통해 고려 왕궁지인 개성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가 출토됐다. 법화사 대웅전 뒤쪽에 있다.
관음사 해월굴: 관음사를 창건한 해월당 안봉려관 스님이 정진했었다는 토굴이다. 법화사와 불탑사 중창불사를 이끌었고,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도 섰던 비구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닿기 직전 오른쪽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관음사 나한전: 미륵대불을 참배했다면 왼쪽으로 길게 난 계단을 올라 작은 오솔길을 걸어보기 바란다. 그 길 끝에 나한전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11:27~11:47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법화사를 탐방
[법화사(法華寺)
법화사(法華寺)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사찰이다. 1980년대에 지금의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觀音寺)의 말사이다.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이다.
개요
법화사는 수정사(水精寺)와 함께 제주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써,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길게는 남북국 시대까지도 올라간다는 주장이 있다. 1990년 2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 법화사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건물터 다섯 곳과 초석 기단터 세 곳이 확인되었고, 발굴 유물은 당초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등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해무리굽 청자편이나 북송의 화폐인 숭녕중보(崇寧重寶)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기와들이 한반도 육지부에서도 황룡사터나 미륵사터와 같은 왕궁급 유적에서 주로 발굴된다는 점에서 법화사는 단순한 사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문명대 교수는 제주의 법화사가 신라 시대에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청해진(淸海鎭)이 위치한 완도(莞島)의 법화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으며, 두 섬을 거점으로 하는 해상무역의 발달과 관련성을 가지면서 법화사가 세워졌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고려 후기 몽골의 제주 지배기에 법화사는 더욱 중시되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1992년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重創十六年己卯畢', '至元六年己巳始'라는 기와가 발견, 법화사가 원(元) 지원(至元) 6년(1269년)에 처음 중창을 시작해 16년(1279년)에 중창을 마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혜왕(忠惠王) 때 제주로 유배된 승려 혜일(慧日)이 법화사를 들러 시를 지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 법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호의 난(1374년) 당시 목호 지도자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범섬이 위치해 있다.
조선 초기까지 법화사에 배속된 노비가 280명이었을 정도로 큰 절이었으며, 원의 양공(良工)이 제작한 금동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조선 태종 6년(1406년)에 명에서 사신으로 온 황엄과 한티무르가 명의 황제 영락제(永樂帝)의 명으로 이 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제주로 들어갈 것을 청하자 태종은 사신들이 불상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핑계이고 사실은 제주의 사정을 염탐하려는 것이라고 판단, 선차 김도생과 사직 박모를 제주로 보내 불상을 가져오게 하여, 명 사신들이 제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조선 후기 이후 법화사는 폐사되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 1채 등 부속건물 8채를 복원하였다.]
[법화사 구품연지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법화사의 8월은 연꽃으로 물든다.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법화사는 신라 때 장보고가 창건했다고 한다.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구품연지에서는 홍련, 백련을 만날 수 있다. 구품연지 주변에는 수양버들과 배롱나무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배롱나무에 꽃피는 시기가 연꽃 시기와 맞물려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11:47~11:56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법화사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어도로 293-28 번지에 있는 약천사로 이동 [9분, 3.8km]
[약천사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어도로 293-28
좌표 북위 33° 14′ 43.2″ 동경 126° 26′ 58.8″
약천사(藥泉寺)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제주의 명물로 자리잡은 약천사
약천사의 창건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인근 한라산 중턱에 법화사라는 국제적인 큰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속암자가 인근에 산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약천사가 자리한 곳은 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가 솟는 곳으로 1982년 이곳에 약천사를 창건하기 훨씬 전부터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 당시 일제에 끌려갔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방동화 스님이 출소 후 몸조리를 위해 한 동안 머문 곳이 바로 중문의 약수암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960년대 유학자 김형곤 선생이 신병 치료차 자그마한 굴속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약수암을 짓고 수행정진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현지 사람들은 약천사 자리를 돽새미라고 불러왔다. 돽새미는 제주도 말로 도약샘(道藥泉)을 뜻하는 말로 좋은 수질의 약수가 흐르는 약수터를 이른다.
문화재
동양최대의 건축, 국내 최대의 목조불상
창건주인 혜인스님이 약천사를 짓기 전 이곳에는 450평 남짓한 절터에 약수암이라 불리는 18평짜리 제주 전통양식의 초가삼간이 전부였다고 한다. 1982년부터 본격적인 불사가 시작되고 지하 1층 지상 30미터의 대적광전이 지어졌다. 이어서 대웅전과 지하로 연결된 숙소,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진 3층 크기의 요사채와 굴법당, 삼성각, 사리탑, 대형분수대, 연못이 들어선 지금 약천사는 제주도를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다.
법당에 모셔진 국내 최대의 목조 비로자나불상과 1만8천기의 원불, 18톤에 달하는 범종 등이 과거 이 땅에 있었던 법화사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약천사에는 세종의 아들이었던 문종 임금과 현덕왕후,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체험 및 시설
템플스테이
약천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1:56~12:26 동양 최대 크기의 법당을 자랑하는 약천사를 탐방 [30분 소요]
[약천사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포동 1165
동양 최대 규모의 법당
약천사는 동양 최대 크기의 법당을 자랑하는 절로 마당에 올라 제주 해안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멋진 곳이다. 법당의 웅장함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마당에 서서 법당의 크기만 가늠하고 돌아간다면 이곳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는 셈이 되니 신발을 벗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들어가서 고개를 들고 천장을 올려다 보면 내부가 높이 25m에 3층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높이가 무려 4.8m의 국내 최대 목조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 좌우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불이 함께 있으며, 뒤로 후불목탱화가 있는데 만들기가 까다로워 흔히 볼 수 없는 작품이다.
경북 문경 대승사의 후불목탱화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새긴 솜씨와 정성에서 또 하나의 보물이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법당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좌우에 있는 계단을 통하여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2층 또는 3층에 올라 내려다보면 법당의 웅장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법당을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황룡과 청룡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2층에는 절을 만들 때 시주했던 불자들이 동참하여 만든 8만 개의 보살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다섯 개의 윤장대가 있는데 불자들이 그것을 돌리면서 공덕을 쌓고 있다. 오르는 길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오면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는 나한전이 있으니 빠뜨리지 말고 둘러보자.]
12:26~12:39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어도로 293-28 번지에 있는 약천사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 2881-19 번지에 있는 강정중국집으로 이동 [13분, 7.0km] [식당 좌측에 주차장이 있음]
12:39~13:25 강정중국집(전화 064-738-7016)에서 우렁이짬뽕으로 점심식사 [식사 시간 중에 핸드폰 충전]
[강정중국집 메뉴
육미짜장 7,000원
육미짜장밥 8,000원
우렁이짬뽕 9,000원
우렁이짬뽕밥 9,000원
볶음밥 8,000원
군만두 5,000원]
13:25~13:52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강정중국집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 1 번지에 있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로 이동 [27분, 14.6km]
산 : 서귀포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도순천계곡 순자폭포]
산행코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무오법정사항일운동기념탑~의열사~도순천계곡 순자폭포~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
일시 : 2025년04월28일(월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1시간43분 소요)
13:52~13:58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 1 번지에 있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에서 탐방출발하여 무오법정사항일운동기념탑으로 이동 [6분, 298m 이동]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戊午法井寺 抗日運動發祥址)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종목 기념물 (구)제61-1호 (2003년 11월 12일 지정)
면적 40,406m2
시대 일제강점기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1100로 740-168, 외 (도순동)
정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戊午法井寺 抗日運動發祥址)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발상지이다. 2003년 11월 12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사유
1918년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의 항일운동의 효시이며, 1919년 3.1운동 이전에 일제에 항거했던 단일투쟁으로는 최대규모이고, 특히 단순한 종교적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투쟁이며 국권회복운동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지로 학술적, 역사적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됨.
개요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의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 7일(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평소 일본제국의 통치를 반대하던 불교계의 김연일(金連日) · 방동화(房東華)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 ·선도교도 · 민간인 등 7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2일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운동으로서, 1919년대의 3·1운동을 비롯하여 민족항일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당시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 스님 등 30여인에 의하여 1918년 5월부터 10월 7일 거사일까지 무장항일거사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해 나가면서『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음)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제주시)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만들어 법환동 · 호근동 · 영남동 등 각 마을 구장에게 격문을 돌리도록 하고. 10월 7일(음 9. 3)새벽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내’(江汀川)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 무너뜨렸고,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300~400명에 이르렀다. 중문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 중문리로 향하던 일행은 하원리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小泉淸身), 장로교의 윤식명(尹植明)과 일행 부용혁(夫容赫)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중문순사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서귀포순사주재소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었으며, 그 중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1919년 2월 4일. 실형 선고 31명. 벌금 15명. 재판전 옥사 2명, 수감 중 옥사 3명, 불기소 18명이었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 지붕의 초당이었으며, 면적은 87.3m2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무오법정사항일항쟁성역화사업은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되었고, 1994년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주민들의 청원이 있었으며, 1995년 중문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하였고, 1996년 무오법정사항일항쟁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항일운동발상지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2004년도에는 4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등이 준공되었다.]
13:58~14:30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戊午法井寺 抗日運動發祥址)에 있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과 의열사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전시관을 탐방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항거...무오법정사 항일항쟁 104주년
강동삼 기자
서울신문 기사 입력 2022-10-02 15:43
제주특별자치도는 2일 오전 11시 서귀포시 법정악 의열사에서 제주도내 최초이자 1910년대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인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을 거행했다.
올해 104주기를 맞은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새벽에 시작됐다.
불교계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7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한 가운데 이틀간 대한민국 주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다.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운동은 ‘기미(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내 최초의 항일운동으로 그 횃불은 이듬해인 1919년 3월 1일 조천 만세운동, 1932년 제주 해녀 항일운동까지 이어지는 등 민족 항일 의식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영훈 지사는 기념사를 통해 “제주 역사상 최초·최대 무장 항일운동은 도민들의 항일의식을 일깨웠고, 일제 항거의 구심점이자 제주인의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를 키우는 역사적인 분수령이 됐다”며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이어 “자랑스러운 제주 항일의 역사는 우리 제주인의 자부심이자 소중한 유산”이라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무오법정사 항일의 역사를 후손에게 계승하고 새로운 제주의 빛나는 미래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역설했다.
한편 도는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사업 추진과 법정사 내 항일교육장 및 전시 공간 조성사업 등을 통해 항일의 역사를 계승하고, 법정사 항일운동가 및 유족에 대한 예우를 높여나갈 방침이다.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면적 87.3㎡의 작은 절로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사찰 법당은 우진각 지붕으로 된 초당이었으나, 당시 일본순사들이 항일지사들을 체포하면서 불태웠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의 흔적만 남아 있다.
지금은 의열사와 상징탑 등이 만들어져 있다. 기념탑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700여명에 대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으며, ‘항일운동 송치자 66인 형사사건과 수형인 명부’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설명, 관련 기념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의열사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해 송치된 66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현재는 초상화들이 전시돼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전시관 4일 개관]
김나영 기자
삼다일보 기사 승인 2024.12.04. 17:05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입구 일원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전시관’이 4일 문 열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는 4일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입구 일원에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전시관을 개관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 앞선 1918년 10월에 일어났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과 제주인들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맞서 항거한 이 운동은 제주인의 강인한 독립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전시관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인근의 기존 관리사무소를 리모델링해 126.72㎡ 규모로 조성됐다.
3개로 구성된 전시실의 입체적이고 다양한 콘텐츠가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한다.
제1전시실에서는 당시 작성된 격문 등을 통해 법정사 항일운동의 전개과정을 시간순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다큐멘터리 ‘불씨’ 전편(50분ㆍ30분ㆍ8분)을 원하는 버전으로 관람할 수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일제 탄압으로 왜곡된 법정사 항일운동의 실상과 의의를 재조명한다. 특히 당시 기록과 전문가, 유가족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역사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
강석찬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장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널리 알리고 기리고자 전시관을 개관했다”며, “일제의 무력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의지를 보여준 제주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다큐멘터리 ‘불씨’는 제주도청 홈페이지와 공식 유튜브(빛나는 제주 TV)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14:30~15:00 의열사에서 도순천계곡 순자폭포로 이동
[도순천
[정의] 한라산 영실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귀포시 대천동에서 강정천과 합류하는 하천.
[개설] 도순천은 한라산 영실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귀포시 영남동·도순동·하원동을 차례로 거쳐 흐르는 2급 지방하천으로서, 서귀포시 대천동에서 강정천과 합류한다. 우회도로 제2도순교에서 상류 400m 지점은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총 유로 연장이 13.0㎞, 하천차수(河川次數)는 3차수를 보인다. 하류에서는 강정천이라 불린다.
[명칭 유래] 도순천은 하류에서는 강정천이라 불리지만, 서귀포시 도순동 지역의 지명에서 하천지명이 고시됐다. 제2도순교 방면이 영실로 향하는 주류이고, 동북쪽으로 이어진 하천은 녹나무자생지로 이어진다. 도순천[강정천]의 분수령이 된 곳이다. 도순 주민들은 이 합류 지점을 ‘거린내’라 부른다.
[자연 환경] 도순천은 한라산 영실 부근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서 하류에서 강정천과 궁산천 등과 합류한다. 한라산의 남쪽 산록을 흘러내리는 서귀포시의 하천은 급사면의 영향으로 대부분 직선에 가까운 직류 하천을 이루는데, 도순천도 직류 하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천의 곡류 정도를 나타내는 굴곡도[sinuosity]는 1.1~1.2에 불과하여 1.5 이상의 굴곡도를 지닌 충적평야의 사행 하천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현황] 도순천 주변의 역사·문화 유적으로는 서귀포 우회도로 탐라대학교로 통하는 세거리 서측에 위치한 법화사와 강정천 두 주류 사이에 있는 왕자묘를 들 수 있다. 도순천변 법정악 일대에는 산림욕을 할 수 있는 서귀포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숲 자체가 휴양림이기도 하지만, 삼림욕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15:00~15:10 도순천계곡 순자폭포를 사진촬영
[순자폭포
한라산 영실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귀포시 대천동에서 강정천과 합류하는 하천인 도순천에 위치한 폭포로서, 법정악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15:10~15:35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 1 번지에 있는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5:35~16:04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 1 번지에 있는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서건도 전망대로 이동 [29분, 16.9km]
산 : 서귀포시 강정동 서건도
산행코스: [서건도 입구~서건도~서건도 입구]
일시 : 2025년 04월 28일(월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26분 소요)
16:04~16:09 서건도 입구에서 탐방출발하여 간조시각에 제주도 본섬과 연결되는 서건도로 이동
16:09~16:25 서건도를 탐방 [2025년4월28일 서건도 간조시각 : 16시08분]
[서건도에서 범섬과 문섬을 조망할 수 있다.]
[서건도
서건도 면적은 13,367㎡이며, 육지와의 거리는 300m이고, 제주월드컵경기장 인근해안(강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서건도는 썩은섬이라고도 하는데 하루에 두 번 썰물때마다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섬이다. 바닷물이 갈라지면 서귀포 해안에서 걸어서 들어갈 수 있으며, 해안에서 섬까지 걸어가는 동안 조개와 낙지 등을 잡는 재미로 체험관광객들의 발길이 잦다. 서건도에 방문 예정이라면 바다갈라짐 시간표나 물 때를 확인해야 한다.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한 달에 10차례에 걸쳐 앞바다가 크게 갈라지는데 이 바다 갈라짐 현상은 보름이나 그믐에 규모가 특히 크며 음력 5월 26일, 28일, 9월 7일, 11월 5일, 8일, 12월 3일, 7일의 사리기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다가 갈라지게 되면 좌우 10m 이상 넓어진 갯벌이 드러나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서건도를 왕래하면서 신비감을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파편과 동물뼈, 주거 흔적 등이 발견돼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서건도는 수중화산으로 섬 자체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조이동굴에서 기원한 풍부한 개울물이 서건도 앞 바닷가로 흘러드는데 이 조간대 지역을 너븐물이라고 부른다. 썩은섬 앞 바다에는 종종 돌고래떼가 출현하기도 한다.]
16:25~16:30 서건도 입구로 원점회귀하여 서건도 탐방 완료
16:30~16:44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서건도 입구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홍동 2565 번지에 있는 솜반천 물놀이공원으로 이동 [14분, 7.3km]
16:44~17:00 솜반천 물놀이공원과 고냉이소를 탐방
[서귀포시 서홍동에는 아름다운 솜반천이 있다. 솜반천은 5.5㎞의 내천으로 사계절 용천수가 흐르고 주위가 숲으로 둘러싸인 도심 속 하천이다.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해 ‘선반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독 이곳의 물이 맑고 차가운데 한라산에 내렸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이곳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물의 온도가 한여름에도 15~17도를 유지할 정도로 차갑다. 여기서 솟아오른 물들이 흐르고 흘러 천지연폭포의 거친 물줄기가 된다.
솜반천은 특히 아이들의 기억을 품은 곳이다. 지금은 상수도가 정비돼 흔적을 감추었지만, 과거에는 천연 수영장이었던 물웅덩이가 많았다. 종남소와 고냉이소가 대표적인데, 수심이 5~6m가 넘었지만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 푸르고 깨끗했다. 여름이 되면 서홍동의 꼬마들은 친구들과 팬티 바람으로 물웅덩이에 뛰어들었다. 몸이 차가워지면 여름 해에 달궈진 바위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그렇게 물과 바위를 몇 번 오가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솜반천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걸매생태공원’과 ‘걸매예술마을’이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걸매생태공원은 솜반천 주위 170여 종의 식물과 습지성 초본류, 야생화초류, 매화 군락 등 다양한 식물과 흰뺨검은오리, 직박구리, 박새 같은 조류를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원이다. 걸매생태공원 동남쪽에 있는 가파른 언덕 계단을 지나면 걸매예술마을이 나온다. 마을 건물들이 대부분 70~80년대 지어져 동네 곳곳에 좁은 골목길이 많다. 몇 해 전 골목길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마을 곳곳에 작고 소소한 예술 작품을 설치해 더욱 운치 있고 아름다운 마을이 되었다.
걸매생태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당미술관이 있다. 흔히 서귀포를 대표하는 작가로 이중섭을, 대표 미술관으로 이중섭미술관을 떠올리겠지만 서귀포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민들은 변시지(1926-2013)와 그의 작품을 소장한 기당미술관을 첫손에 꼽는다. 변시지 화백은 서귀포를 배경으로 사람, 새, 말, 초가를 주로 단순하게 형상화해 그렸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귀포의 외로움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온다. 기당미술관은 제주에서도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현지인들만 아는 비밀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17:00~18:00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솜반천 물놀이공원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54 번지에 있는 낭끼오름 입구로 이동 [1시간, 43.4km]
산 :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낭끼오름&벌라리왓&벌라릿굴&수산한못]
산행코스: [낭끼오름 입구~낭끼오름 정상~낭끼오름 입구~(승용차로 이동)~수산리 4083 번지에 있는 선사유적지 벌라리왓~벌라릿굴~벌라리왓~(승용차로 이동)~수산한못]
일시 : 2025년04월28일(월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1시간15분 소요)
18:00~18:1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54 번지에 있는 낭끼오름 입구에서 산행 출발하여 낭끼오름(해발 185m) 정상으로 이동
[낭끼오름은 점성 있는 흙 나안끼가 어원
삼다일보 기사 승인 2024.12.05. 18:00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54번지의 낭끼오름은 땅 번지가 산 번지가 아니듯이 낭끼오롬은 해발 185.1m, 비고 40m 밖에 안 되는 매우 낮은 오름이다. 그래서 낭끼오름을 정상까지 탐방하는 데는 고작 10분이 안 걸린다. 그러나 낭끼오름의 둘레는 1.6㎞이니 그리 작은 편은 아니다. 더구나 넓은 수산 평지이니 낭끼오름은 낮고 펑퍼짐해 보인다.
낭끼오름은 낭곳·낭껏·남케 등으로 불렸는데 ‘낭’은 제주어로 나무이고 ‘낭곳’의 ‘곳’은 제주어로 숲이며 낭궤(한글 고어 자판으로도 표기가 어렵다)는 이는 제주어 ‘나무’의 변형들로 보이며 ‘끼’는 변두리를 뜻하는 말이라 하나, 큰 의미 없어 보인다. 같은 뜻으로 일본어의 ‘키(き)’도 나무를 뜻하는 말이다. 아래서 말하겠지만 이는 단지 몽골어의 음차이다.
낭끼오름은 한자로 남거봉(南居奉)이라고 하는데, 수산진 남쪽 들판인 수산평에 있는(거居:있을거, 차지할거) 오름이란 뜻이다. 이는 ‘남쪽의 큰 벌판 중에 위치한 오름이란 뜻으로 클 거巨자를 써서 ‘남거봉南巨奉’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낭끼·낭게를 한자로 음차한 것뿐이다. 탐라지초본 ‘산천(山川)조’에도 남거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낭끼오름의 존재는 미미하다.
700년 전 몽골에서 처음으로 말이 들어 온 곳이 성산포이다. 말들이 중산간 방목지로 옮겨 가기 전에는 수산평 일대에 방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몽골과 다른 방법으로 사육되었을 것이다. 내몽골(중국)이나 고비사막 건너 외몽골 초원은 삭막하다. 몽골에서도 소나 양은 가까운 곳에서 방목하나 말들은 멀리 말 떼를 풀어놓는 것은 제주와 같다.
700년 전 제주도 들판은 거의 버려진 상태였을 것이다. 제주 주민들은 농사하기 좋은 중산간에 사는 예도 있지만 고려 시기에 성산포로 말이 들어오며 이웃 왕메에 몽골인 좌형소가 목마총관부장으로 부임하며 수산평 초입의 낭끼오름은 아직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으나 이 오름이 몽골어로 불려졌을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낭끼오름의 어원은 몽골어 ‘나안끼(НААНГИ)’로 그 뜻은 ‘점성이 있는 흙’이란 뜻이다. 수생식물인 마름 또는, 찹쌀을 죽순 등에 싸서 찐 것을 일컫기도 한다. 지금 낭끼오름 입구에 식수 탱크가 자리 잡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부터 이 지역은 물을 머금은 점성이 있는 흙이 있었기에 ‘나안끼(НААНГИ)’라는 말이 합당해 보인다.
몽골인들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제주를 불태워 목축을 시작할 때 다른 곳에는 불에 잘 타는데, 이 주변은 불에 잘 타지 않앴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보니 이 오롬 주위는 질척하게 물을 품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나안끼(НААНГИ)’라고 했던 것이다.
낭끼오름은 도로상에 표지판이 없어서 눈으로 오름을 보고도 지나쳐버린다. 그래서 뒤돌아 와서 한참 동안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서 오름 한 바퀴를 돌게 되었다. 걷다 보니 비포장 된 곳이 나오고 계속 걸으니 오름 입구가 나온다. 서쪽을 보니 수송로(수산~송당) 아스팔트길 서쪽 정면에 길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수송로 서쪽 벌판은 푸른 숲이 우거졌는데, 좌측 저수탱크를 따라가면 주차장, 조금 더 가면 표지판이 보인다. 목재 계단을 조금 따라 가면 정상까지 150m로 5분 안 되어 정상에 이른다. 서쪽에서는 뒤집힌 조각 배같이 납작해 보이나 남쪽에서 보면 조금 높게 보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동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며 피라미드 모양으로 변해간다.
동북쪽으로 기울어지고 북쪽으로는 비탈이 깊어진다. 동북쪽은 침식되어 형체가 불확실하나 굼부리는 둥글고 얕은 원형이다. 서남쪽은 길에 접한 벌판인데 소나무·편백·보리똥·가막살·예덕·졸참·침식·구럼비·사스레피·청미래·찔레 등이다. 골등골꽃은 지는데 이질풀꽃이 피었다.
정상에 서면 동쪽의 멀미·왕메·소섬·바오름·청산오름·큰머리오름과 서쪽은 한라산과 영모(ㅁ+아래아)루·개오름·뒤굽은이가 보인다. 북쪽으로는 수산풍차단지 뒤로 구좌읍의 동거미·높은오름·손지오름·돌오름·둔지·다랑쉬·용눈이오름, 남쪽은 모구리·나시레·유가메 등이 가까이 보인다.
낭끼오름은 내세울 것 없는 촌색시 같다. 노꼬메·다랑쉬 같이 높지도 않고, 청산오름(일출봉), 굴오름(산방산)같이 수려하지도 않고 거슨세미나 우진제비 같은 좋은 숲도 없는 그저 수수한 촌색시 같다. 모(ㅁ+아래아)쉬(마소)떼나 키워내는 갑남을녀 같은데 곤주시(작은매미)가 가을을 부른다. 가을로 가는 해 저무는 벌판에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귀가하는 저녁이다.]
18:10~18:20 사진촬영 후 휴식
18:20~18:30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54 번지에 있는 낭끼오름 입구로 원점회귀
18:30~18:32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4083 번지로 이동 [2분, 0.4km]
18:32~18:55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4083 번지에 있는 범선 전망대와 근방에 있는 벌라리왓 신석기 후기 유적과 함몰 지형에서 마주보고 있는 2개의 동굴인 벌라릿굴을 탐방
[수산 벌라리왓 신석기 후기 유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4,097-1 일대에 있는 신석기 후기 유적.
개설
제주도에서 확인되는 대부분의 선사유적은 해안 저지대의 비옥한 평탄유지와 음용수 확보에 유리한 하천·용천수가 자리한 곳, 해산물 채취에 유리한 조간대가 인접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수산 벌라리왓 유적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 서사면 중산간지대의 넓은 목초지대가 형성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수산 벌라리왓 유적은 중산간지대에서 생활터로서는 처음 발굴조사된 예이다.
위치
수산 벌라리왓 유적은 성산읍 중산간지대인 수산2리 ‘벌라리왓’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조사는 남제주군 수산2리와 대천동을 잇는 도로 확포장공사로 실시하게 되었다. 2001년도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2002년도에는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분포범위와 계절적 일시주거(Camping Site) 흔적으로 판단되는 주혈 및 일부 소토유구와 점렬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등의 유물을 확인하였다. 이에 2003년도에 시굴조사에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는 성산읍 수산리 4097-1번지 일대에 대하여 8월 18일부터 10월 16일까지 3,500㎡[약 1000평]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벌라리왓 유적은 대략 2만여 평에 걸쳐 확인되며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유적의 동편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총 23개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구는 수혈유구 11기, 소토유구 4기, 다짐유구 5기, 석곽유구 1기, 집석유구 2기, 소수의 주혈군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시굴조사 시 제토과정과 인접지표에서 신석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삼각점렬문토기와 조흔문토기, 탐라시대 곽지리식토기, 자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반면에 발굴조사에서는 대부분 적갈색경질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부 유구와 문화층 제토과정에서 석착, 갈돌, 지석 등이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에서 탐라시대에 이르면 생활에 유리한 비옥한 토질의 평탄대지, 하천·용천수 부근의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마을유적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에 반해 수산리[벌라리왓] 유적은 해발 300m의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생활유적으로 주목된다. 다만 현재의 발굴자료로 추정되는 이 유적의 성격은 사냥을 중심으로 하는 계절적 캠핑장소 혹은 일시적인 거주 장소로 판단된다.]
[금백조로 도로변에 숨어 마주 보는 벌라릿굴
벌라릿굴 가는 길은 옛 수산평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에 탐라의 목축문화를 엿보는 길이고 시공(時空)과 대화하는 길이다. 게다가 옛 탐라목장 지대에 들어선 풍차들이 목가적 풍경을 더하는 길이다. 제주시와 성산포를 잇는 금백조로를 따라가다 보면, 백약이오름을 지나 궁대오름 가까이 이를 즈음 수산2리 이정표와 함께 회전 교차로가 나타난다. 이어 성산포 방향의 큰길을 따라 곧장 달리면 이내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우측 한 길가에 돛단배 모양의 2층 구조물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선사유적지인 벌라리왓(수산리 4083번지) 일대이다. 그리고 그 근처에 벌라릿굴이 숨어 있다.
벌라리왓 주차장 남쪽에 위치한 한적한 숲으로 내려서면, 70여 m 거리를 두고 마주 보는 2기의 동굴 입구와 계곡 속에 조성된 아담한 정원이 나타난다. 1㎞가 넘는 벌라릿굴을 단편적으로나마 둘러볼 수는 이곳은 지하세계를 가로질러 내려온 용암동굴 일부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진 함몰 지역이다.
제주어 ‘벌르다(깨뜨리다)’는 함몰의 의미이고, ‘벌리다’라는 양쪽이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벌라릿굴이란 이름은 함몰 지형 사이로 2개의 굴이 마주보고 있음에서 유래된 듯하다. 대로변에 숨어 있는 벌라릿굴을 만난 것은 ㈔질토래비에게 주어진 행운이고 벅찬 감동이다.
굴 내부는 무너진 지 오래돼서인지 외부에서 유입된 점토가 두텁게 퇴적돼 있다. 용암종유·용암유석·동굴산호 등의 동굴 생성물들과 아아용암·용암선반·용암폭포 등을 관찰할 수 있는 벌라릿굴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이 굴은 4·3 당시에는 수산리 주민들의 피난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다. 벌러릿굴에서 500여 m 떨어진 남쪽에도 ‘알벌라릿굴’이라는 이름의 벌라릿굴 남쪽 입구가 있다 한다.
기대치 않은 곳에서 만난 벌라릿굴을 둘러본 이들은 곧잘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대로변에 숨어 있는 대형동굴인 벌라릿굴 2개의 입구를 보고 놀라고, 중산간 지대에 출현한 돛단배 형태의 구조물을 보고 의아해한다.
벌라릿굴 주변 일대를 사적 공원화하는 데 앞장섰던 당시의 수산2리 양만길 이장에 의하면, 바다를 내려다보고 또한 선사유적지와 벌라릿굴이 있는 이곳에서 ‘제주에서 세계로’ 오가는 탐험의 과거사와 미래사를 그려보려 돛단배 모형의 안내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1274년과 1281년 2차에 걸쳐 일본원정에 참여한 원제국 연합전함들 중 일부는 이곳에서 자라던 나무들로 만들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삼별초가 입도하기 전인 1268년 원나라는 탐라에 전함 100척을 건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전한다. ]
[선사인이 남긴 역사를 찾아 나서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5.23.
(174)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중산간 평탄지대 위치한 벌라리왓
3차례 발굴조사로 선사유물 발견
부종휴, 꼬마탐험대와 만장굴 알려
수산동굴·빌레못굴 등 탐사하기도
▲수산리 선사유적지 벌라리왓
벌라릿굴(벌라리궤)이 있는 주변 밭이 벌라리왓이다. 한때나마 벌라리왓에서 거주하던 선사인들은 외부의 침입 등 생존을 위해 벌라릿굴을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철기시대인 탐라전기에 해당하는 기원 전후 2~3세기경 제주에서는 해안지대에 발달한 하천과 용천수 부근의 비옥한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다. 그러나 수산리 벌라리왓 유적은 해안지대가 아닌 중산간 전망 좋은 평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벌라리왓 선사유적지(수산리 4,097-1 일대)는 2001년 수산2리와 좌보미 사이를 잇는 도로 확장·포장 공사 당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지표조사(길이 160, 너비 15m)에서 처음 확인된다.
2002년에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해 유적의 분포 범위, 주혈 및 일부 소토유구(燒土遺構: 불을 피운 토목건축 등의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구조물 흔적), 점렬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등의 유물이 확인된다. 2003년 조사에서는 현무암 암반이 넓게 노출된 지표면에서 총 23개의 유구와 점열문토기와 적갈색토기 등이 재확인된다.
3차례의 발굴조사로 벌라리왓 유적에서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삼각점렬문토기, 조흔문토기, 적갈색경질토기, 석착, 갈돌, 지석, 탐라시대의 곽지리식토기, 자기편 등이 발굴된다.
이렇게 소중한 선사유적유물들이 발굴된 이곳에는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석이 아직은 세워져 있지 않다. 이곳은 전문가 집단만이 알뿐 일반인들은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그래서 공유할 수 없는 무명의 지대로 남아 있는 선사유적지이다. 이곳에서의 출토과정과 관련된 사진과 유물에 대한 안내의 글 등이 당국에 의해 전시되고 게시될 때 이곳의 가치도 또한 커질 것이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2006년 발행한 ‘벌라릿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적인 주거지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벌라리왓 선사유적지는 어떤 특수한 상황으로 형성된 일시적인 거주지로 판단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지의 수산동굴 관련 최초 신문 기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수산동굴(4003-1번지)의 유일한 입구는 지금 철책으로 막혀 있다. ‘그 먼 길을 물어왔는데…’하고 발길을 돌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굴 내부를 조금은 들여다보고 안내판에 그려진 사방팔방으로 뻗은 가지 굴 등을 보며 미지의 지하세계를 그려보는 것으로도 위안이 됨직은 하다.
총 길이 5.520m의 3층 구조로 된 동굴 안에는 용암다리와 가지 굴, 그리고 종유석·석주·석순·산호 등이 잘 형성돼 있다고 한다. 수산동굴을 마을에서는‘낭못굴’이라 부른다. 동굴 입구 인근에 있는 낭못에서 유래되며, 낭은 참나무의 제주어이다. 동굴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또한 낭못동산이라 부른다. 2021년 발간된 ‘水山里誌’에는 수산동굴을 알린 최초의 제보자와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 水山里誌 편찬위원장을 지낸 한석중 박사(수산1리)의 도움으로 구한 신문기사(濟南新聞: 1970년 2월 23일)에는 미지의 수산동굴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본다.
‘성산면 수산리 서남쪽 2㎞ 지점 속칭 차목지벌판에서 만장굴(길이 6978m) 길이에 가까운 큰 동굴이 발견되었다. 지난 20일 성산면 수산리 오남종(32·성산면사무소 근무, 수산2리)씨에 의해 발견된 이 동굴은 입구에서 서남쪽(성산면 신산리 방향)으로 약 6천미터(보측步測 및 시측時測에 의한 추정)나 뻗어있으며 반대 방향인 동북쪽으로도 약 7백미터나 뚫려있다.
입구는 한 사람이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있고 바닥까지는 약 15미터나 되어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며 굴 바닥은 지금까지 발견된 도내의 동굴과는 달리 포장로처럼 평평한 돌바닥으로 되어 있고 천정은 콘세트형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5미터에서 끝 지점에는 약 90센치미터의 높이이고 나비(넓이)는 3미터에서 12미터나 되는 대형동굴이다. 굴 내부에는 입구에서부터 50미터 지점에 8평 정도의 웅덩이가 있고 그 속에 1평 정도의 나비에 30센치 깊이의 물이 고여 있다.
또한 1천5백미터쯤 들어가면 약 12미터 높이 돌기둥이 서 있으며 3시간쯤 걸어 들어가면 낙시배 모형의 암석이 굴 한가운데 1미터 높이로 돌출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커브와 층계를 이루면서 땅속으로 들어가며 기온은 19도(외부온도 섭씨 7도)에서 들어갈수록 차츰 낮아 마지막에는 섭씨 10도로 내려간다.
이 굴은 지금까지 전문진에 의해 답사된 바가 없어 동식물의 서식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벽에는 이끼가 돋아 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어 도내의 동굴연구나 지질연구에 큰 자료를 제시해줄 것으로 보여진다. (기사 원내는 동굴입구와 발견한 오씨)’
▲수산동굴과 만장굴 등을 탐험한 부종휴
제주에서는 동굴 주제로 우선 거론되는 이가 부종휴 선생이다. 수산동굴의 실체를 전해 들은 부종휴는 1970년 수산동굴 역시 탐사한다. 구좌읍 세화리 출신인 부종휴는 초년교사 시절인 1946년 김녕사굴과 만장굴 등을 먼저 탐험한다. 당시 김녕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종휴는 제자 30여 명으로 구성된 ‘꼬마탐험대’와 함께 1년간 5차에 걸친 답사와 측량을 통해 만장굴의 전모를 밝혀낸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이야기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자 제주세계지질공원 대표명소인 만장굴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역사이다. 이들의 동굴 탐험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쾌거로 알려져 있다.
1970년 수산동굴에 이어 1971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동굴탐사 사건이 알려진다. 길이 11.7km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장의 굴인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의 존재가 부종휴 등에 의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에 더해 한라산우회 등과 함께 빌레못동굴에 대한 9회의 탐험을 통한 구석기시대 유물과 황곰뼈 등의 발견으로 고고학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인 부종휴는 이후에도 교육자·동굴탐험가·식물학자·산악인·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제주의 숨겨진 가치를 발굴하는데 발 벗고 나선다.
한라산 정상을 365회나 오르며 새로운 식물 333종을 밝혀내기도 했던 부종휴는 만장굴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이로 인해 만장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금백조로
은빛 물결 일렁이는 길을 달리다, 제주 억새 드라이브
제주시 수정일 : 2019. 10. 31.
하늘거리는 바람결을 따라 이리저리 물결치는 억새 군락이 눈부시다. 깊어가는 가을 들녘엔 초록빛 움튼 밭과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은빛 억새 군락과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어댄다. 길 따라 달리는 여행자의 마음은 이미 길 너머 반짝반짝 빛나는 억새밭에 가 있다. 제주의 가을은 역시 억새다. 섬 전체가 억새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을이면 제주도 어딜 가나 억새를 만날 수 있다. 드라이브로 만끽하는 제주의 가을. 길 따라 억새가 만발했다. 동부 중산간 도로 중 하나인 금백조로는 가을철 억새 드라이브 코스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주도로인 비자림로(1112번)에서 백약이오름 방향으로 빠져 나오면 바로 금백조로로 이어진다. 이곳부터 시작된 은빛 물결은 굽이굽이 길을 따라 서귀포시 수산리까지 이어지며, 또 다른 주도로인 1119번과 합쳐지면서 점점 사그라진다. 마치 숨겨진 비밀의 도로처럼 금백조로 구간에 들어서면 예상치 못했던 풍경들과 만나게 된다. 너른 평원에 펼쳐진 은빛 억새길이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기분에 젖게 만드는가 하면, 때때로 굴곡진 언덕길이 나타나 그 너머 풍경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오름들 사이로 거대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도 이색적인 볼거리다. 따스한 가을 햇살을 머금은 억새는 바라만 봐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물결칠 때면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가 된다. 멋진 풍경을 차창 밖으로 스쳐 보내는 게 아쉽다면 수산리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도로변에 주차시설과 함께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범선 모양의 전망대가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에도 좋다. 전망대에 오르면 억새로 뒤덮인 길을 따라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보인다. 수산리 언덕길을 내려가면 곧 1119번 도로와 만난다. 약 30분에 걸쳐 펼쳐지는 억새의 향연은 가을철 제주 여행을 빛내는 특별한 순간으로 남는다. 동부 산간 지역과 성산을 두루 둘러볼 요량이라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금백조로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이동하는 길마저 훌륭한 여행 코스가 된다.
주변 경치가 끝내주는 산록남로
서귀포 산록남로(1115번)는 주변 경치와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난 억새 군락을 감상하기 좋은 길이다. 한라산 중턱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위쪽으로는 한라산, 아래쪽으로는 서귀포 앞바다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가을이면 찰랑대는 억새까지 더해져 한층 더 멋스럽게 느껴진다. 돈내코유원지 위쪽에 자리한 산록도로 휴게소를 지나면 곧바로 산록남로로 연결된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억새의 호위를 받으며 달리는 기분이 유쾌하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서귀포 동홍동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그대로 지나치기엔 너무 아깝다. 전망대에 오르면 서귀포 시내와 더불어 바다 위로 솟아오른 문섬, 범섬, 섶섬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벅찬 감동이 차오른다. 그대로 뒤로 돌면 봉긋이 솟은 미악산과 그 너머로 운무에 휩싸여 신비로운 자태로 서 있는 한라산과 조우하게 된다. 운무가 걷히는 날엔 백록담 남벽까지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다. 천하일품 절경이 어디 따로 있을까. 꽤 오랜 시간 앉아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도로변에 피어난 억새와 멀리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며 가는 길은 여유롭기만 하다. 한라산 자락이 길게 이어져 초록빛 평원을 이룬 구간에 다다르면 산록남로 억새 드라이브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간혹 바쁜 길을 재촉하는 이들이 옆을 쌩쌩 지나쳐가긴 하지만 대체로 차량 통행이 적어 한적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길을 가는 동안 녹차미로공원, 방주교회 등 볼거리도 몇몇 나타난다. 드라이브 길이 좀 길다 싶으면 한두 군데 정도 돌아보고 가도 좋다. 특히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는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한다. 건축물이 무척 특이하고 아름다워 일부러 물어물어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곳이다. 황야처럼 펼쳐진 너른 들판도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들어준다. 교회 옆에 있는 앤티크풍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겨도 좋다.
억새가 손짓해 부르는 산록북로
좀더 호젓하게 드라이브 기분을 즐기고 싶다면 산록북로를 추천한다. 산록남로와는 반대로 한라산 북쪽 중턱을 가로지르는 길로 잘 닦인 길을 전세 낸 듯 한가롭게 달릴 수 있다. 한라산 전경을 한쪽에 두고 사방이 신록뿐인 산간의 운치를 마음껏 누리기에 좋은 길이다. 서부 오름의 랜드마크인 노꼬메오름을 지나면 본격적인 억새길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파도쳐대는 억새 군락이 마치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길 너머로 억새밭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누가 일부러 키운 것도 아닐 텐데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벼같이 억새가 아주 풍년을 이뤘다. 노을빛 아래 펼쳐진 억새길은 좀더 차분하고 사색적인 기분을 만들어준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억새풀이 솜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진다. 아쉬운 마음에 차에서 내려 지나온 길을 한참 바라본다. 바람에 몸을 내맡긴 억새는 질풍노도의 시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청춘을 닮았다. 해질 무렵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가는 억새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의 자화상 같다. 산록북로는 한라산 정상 등반길 중 하나인 관음사 코스 입구를 지나간다. 사시사철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곳을 지나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5.16도로와 만나게 된다. 억새길은 계속 이어지지만 이곳부터는 차량 통행이 많기 때문에 호젓한 드라이브는 포기해야 한다. 또 연속 커브길이 많아 운전에 유의해야 한다.
여행정보
주변 음식점
닐모리동동 : 한라산빙수 / 제주시 서해안로 452 / 064-745-5008 http://nilmori.com/
황금륭버거 : 황금륭버거 / 서귀포시 대정읍 칠전로 434 / 064-773-0097
숙소
바다하우스 : 제주시 애월읍 애월해안로 218 / 064-799-6192
제주올레하우스 : 제주시 구좌읍 덕행로 450-23 / 064-783-1152 http://www.ollehouse.kr/
제주에코스위츠 : 서귀포시 중문상로 207-13 / 064-738-9975 http://jejueco.com/wordpress/
글 : 정은주(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10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흔적 따라 걸으니 역사의 중심에 닿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5.02.
(172)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수산진성 원형 남아 있는 1리와 산간마을인 2리로 이뤄진 ‘수산’
벌라리왓 유적지·정의현성 등 탐방하며 마을의 역사문화 공유
▲제주역사문화의 중심마을 성산읍 수산리
선사시대부터 최근세까지 제주의 주요 역사문화들을 품고 있는 마을이 수산리이다. 그러기에 수산리를 제주 역사문화의 중심마을이라 칭해본다.
수산리는 제주의 9진 중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수산진성의 원형이 더러 남아 있는 아랫마을 1리와 제주 역사문화의 여러 층위가 깃들어 있는 산간마을인 2리로 이뤄진 촌락이다. 예전의 성산포 지경 역시 수산리에 속했다. 성산일출봉 동남쪽 해안을 지금도 수마포(輸馬浦)라 부른다. 제주어로 수뫼밑(밋)이라 부르는 수마포는 1276년부터 수산평에서 기르던 마소 등이 몽골 등지로 오가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제주어 수뫼밑은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수뫼’는 ‘일출봉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뜻과 ‘수산리의 포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수산포는 지금의 오조리 포구이다. 지금의 고성리에 포함된 수산봉이란 지명도 수산리와 관계가 깊다. 탐라순력도(1702)에는 지금의 고성리 일대를 수산성조(首山城操)에 포함해 그려져 있다. 이렇듯 예전의 수산은 지금의 고성리, 오조리, 신양리, 성산포 등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이었다.
▲㈔질토래비가 뽑은 수산리의 역사문화 10선
수산리에 산재한 주요 역사문화를 공유하려 ㈔질토래비에서는 지난 3월 ‘수산리가 품은 역사문화의 길’을 개장해 회원들과 함께 탐방길을 거닐었다. 당시 답사했던 수산리의 10대 명소를 연대순으로 소개한다.
△벌라리왓 선사유적지와 벌라릿굴=수산2리의 속칭 벌라리왓 유적에서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토기들과 탐라시대의 곽지리식토기와 자기편 등이 발굴됐다. 벌라리왓의 지명은 함몰된 벌라릿굴에서 유래한다. 제주어 벌르다(깨뜨리다)와 벌리다(마주보다)에서 파생된 이름인 벌라릿굴이 있는 일대가 곧 벌라리왓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등이 실린 선사유적 안내판이 설치되는 소원 하나 품어본다.
△천연기념물 수산동굴=수산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산동굴과 비지정 둥굴인 벌라릿굴을 포함해 동굴이 8기나 있다. 가히 동굴왕국 동네이다. 도내 용암동굴 중 빌레못동굴과 만장굴에 이어 세 번째로 긴 동굴인 수산굴은 1969년 한산 부종휴에 의해 탐사됐다.
△제주 최초의 민란인 ‘양수의 난’ 추정지=1168년 제주 최초의 민중봉기라 할 수 있는 양수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추정(제주도교육청 ‘우리고장이야기’2014년)되는 곳이 수산2리 양수동에 있다.
이곳은 오래전 양수라는 지명으로 불리며 사람들이 거주하다 주민들 모두 4·3 당시 아랫마을로 소개돼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서면 예전의 마을 모습이 그대로 그려질 정도로 대나무 등 담장들이 더러 남아 있다.
△제주 최초의 목장 수산평=1276년부터 원나라는 탐라목장을 수산리 넓은 들인 수산평에 조성해 말 160여 필과 목호들을 배치했다.
제주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목장인 탐라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원은 아막(阿幕)을 설치했다. 아막은 목장운영의 본부이자 목호들의 거주지이다. 동아막을 1277년 수산평에, 서아막은 다음 해에 차귀, 즉 한경면 고산리 해안지역에 설치했다.
△제주 최고의 탐라목장 잣성=목장지대와 경작지와 거주지 경계지점에 쌓았던 잣성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덤불 속에 숨어 있는 6㎞ 정도의 잣성은, 제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잣성으로 추정된다.
△성산읍 유일의 수산곶자왈과 곶앞마을·동박낭가름 터=탐라목장 잣성 서북쪽에는 경작지와 주거지 터가 있고, 그곳 일대에는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고, 대나무 숲 너머로는 백약이 오름 곶자왈이 펼쳐진다. 백약이 오름 곶자왈이 성산읍 유일의 수산리 곶자왈이다. 그곳 어딘 가에는 곶자왈에서 구한 나무들로 숯을 굽던 가마터도 있다.
특히 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고잡)’이라 불렸던 마을에는, 4·3 직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바다 쪽으로 1㎞ 지점에도 수산리 설촌이 시작됐다는 ‘동박낭가름’이 있었다. 각각 50호 이상이 살던 곶앞·동박낭 마을에도 휘몰아친 4·3 광풍으로 전 주민은 아랫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직 잃어버린 마을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나지 못했다.
△궁대오름 생태공원=활처럼 보인다 해 궁대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있어, 수산리 풍광이 더욱 돋보인다. 궁대오름에서 보는 옛 탐라목장 터와 제주바다와 일출봉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궁대오름 주변에는 또한 조류보호협회에서 운영하는 제주자연생태공원도 있다. 제주의 하늘을 날다 상처 입은 조류들이 이곳에서 치료받고 있다.
△목축문화의 명소 수산한못=수산리의 깊은 역사를 모를 적에는 수상한 못인지 수산한 못인지 헷갈리기도 했던 지명이다. 이 못이 몽골의 제주도 지배 때부터 있었던 큰 못인 대지(大池)이다.
탐라목장 이후 최근세까지 마소에게 물을 먹였던 수산한못을 복원해 목축문화의 명소로 가꾸고 있는 수산리가 자랑스럽고 고맙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넓은 수산평을 휘둘러 볼 수도, 오래된 제주역사와 함께 목축문화를 그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산에 세워진 최초의 정의현성=1416년 제주목과 정의현·대정현 삼읍으로 나뉠 때, 정의현청은 당시 수산(首山·현재의 고성리) 지경에 뒀다. 그러나 수산은 현청 소재지로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수산리에 있던 정의현성은 지금으로부터 꼭 600년 전인 1423년 지금의 성읍으로 옮겨갔다. 그 후 최초의 정의현성이 있던 수산리 지경은, 옛 성이 있던 마을이라 해 고성(古城)이라 불리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담은 그림이 탐라순력도 수산성조(首山城操)이다.
△최고의 수산진성=제주의 9진성 중 가장 이른 1439년 지어진 수산진성은, 일부라도 원형이 보존되기론 제주 최고이다. 또한 도내에서 유일하게 진성 안에 ‘진안할망당’이라는 당도 있다. 마을에서 할망당으로 가는 골목이 참으로 가슴 저미게 한다. 당시 선인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순례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외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수산본향당과 오래된 비석들인 황구하 어사, 윤구동 목사, 홍달한 정려비를 비롯한 여러 역사문화 관련된 유물유적이 산재된 곳이 또한 수산리이다.]
18:55~19:10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90 번지에 있는 수산한못으로 이동 [15분, 9.3km]
[수산한못은 과거 수산정(벌판, 초원)의 마장의 말과 소에게 물을 먹이고 화산 지형으로 인해 물이 귀한 제주 지역 주민들의 식수로도 사용해왔던 유래 깊은 곳이다. 수산한못 이름의 한은 크다라는 뜻으로 수산평에 있는 큰 못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말물통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는데 고려시대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 연합군이 일본 정벌 목적으로 군마를 키우면서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니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곳은 8~9월 경 보라색 꽃을 피우는 멸종위기 야생 식물인 전주물꼬리풀 복원지이기도 하고, 가을에는 억새의 조화가 멋진 풍경을 자아내어 가을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제주에서 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나 연못에서 한라산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수산한못은 연못에서 한라산이 그대로 펼쳐져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준다.
잔잔히 퍼지는 연못을 따라 길지는 않지만 산책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고 정자가 두 군데 있으나 그늘이 별로 없으므로 풀이 아주 무성하게 자라는 한여름은 피해 방문하길 권하며 가을엔 억새도 가득하다. 특히, 여기는 곳곳의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반영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곳이므로 맑은 하늘과 뭉게구름이 못에 비치는 날에 방문하거나 가족이나 연인끼리 피크닉 세트를 준비해 방문한다면 잔잔하고 고요한 풍경의 SNS 감성 가득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늦은 오후 멋진 노을과 일몰도 마주해 보는 것도 좋겠다.]
19:10~19:15 수산한못을 탐방
[천 년 역사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깃들다
제주일보 승인 2023.06.13.
(177)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곶자왈 앞 여러 가름 품은 ‘곶앞’…4·3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로 전해져
고려부터 牛馬 물을 먹이던 수산한못…복원작업으로 명소로 탈바꿈
▲탐라목장 잣성과 오래된 마을 곶앞(고잡)
수산리 주변에는 산이 많다. 그중 지형이 활처럼 생긴 궁대오름 등정 초입에는 제주자연생태공원(금백조로 448)도 있다. 자연생태공원에서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독수리도 볼 수 있다. 한때 제주 하늘을 날아다니다 불의의 사고에서 구조돼 회복한 후에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들이 이곳에서 보호되고 있다.
게다가 궁대오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덤불 주변에서는 700여 년 전에 쌓은 잣성(담)도 만날 수 있다. 잣성을 경계로 하는 양쪽의 지형이 판이하다. 동북쪽에는 탐라목장 지대가 펼쳐지고, 서북쪽에는 오래전 농사를 지으며 거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작지와 주거지가 펼쳐지거나 수림에 감춰져 있다. 경작지 너머로 무성한 대나무 숲이 길게 이어지고, 대나무 숲 너머로는 백약이오름 곶자왈이 펼쳐진다.
제주에서 대나무 숲이 있다 함은 예전에 마을이 있었음을 대변한다. 제주선인들은 대나무를 이용해 구덕 등 다양한 생활도구를 만들고 편의시설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곳 어딘 가에는 곶자왈에서 구한 나무들로 숯을 굽는 숯가마 터도 있다고, 특히 곶자왈 앞에 있다 해 ‘곶앞’이라 하는 오래된 마을도 있었다고 전한다. 곶앞에는 자그마한 여러 가름(동네)들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전래되고 있다. 무성한 대나무 틈 사이로 마을이 있다 해 대틈곶, 수림이 짙은 곶자왈 근처에 있다 해 황무술이(黃茂藪), 수산리 설촌이 시작됐다 전하는 동박(백)낭가름(木橋藪), 양수의 난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양수 등등.
적게는 10호에서 많게는 50호 수백 명이 곶자왈 품 안에서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은 4·3을 전후해 아랫마을로 흩어져야 했다. 그리고 여러 가름을 품었던 곶앞도 사라졌다. 지금 이곳에는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다. 그래서인지 곶앞 마을은 4·3 이전에 폐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에 대한 연구검토가 추후 이뤄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산리지(2021)에 따르면, 1785년 수산1리 거주자가는 368명, 수산2리는 325명으로 엇비슷하다. 1910년에는 1리가 1092명인 반면 2리는 253명에 불과하다. 2020년 현재는 1리가 979명이고, 2리는 413명이다.
▲곶앞과 뒷곶 그리고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제주의 곶자왈과 관련해 전래되는 특이한 지명 중에는 ‘곶앞과 뒷곶’이 있다. 수산곶자왈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곶앞이라 불리듯, 교래곶자왈을 그곳 사람들은 ‘뒷곶’이라 부른다. 뒷곶은 마을 뒤에 있는 곶자왈이란 의미이다. 교래곶자왈과 관련한 뒷곶과 수산곶자왈과 관련한 곶앞이란 지명은 곶자왈 지역에서의 목축과 사냥을 통해 삶을 이어온 선인들의 역사문화의 흔적이다.
이와 관련된 탐라순력도 교래대렵(橋來大獵)은 교래곶자왈 일대에서 행해졌던 대규모 사냥에 관한 기록화이다. 1702년 10월 11일, 교래 지경에서 진상(進上)할 대규모 사냥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과 수확물이 엄청나다. 그날 사냥에 참여한 관원으로는 삼읍 수령과 감목관(監牧官)이고, 동원된 인원수로는 말을 타고 짐승을 쫓던 마군 200명, 뛰어다니며 짐승을 한곳으로 모는 보졸 400명, 포수 120명 등 720여 명이다. 사냥으로 잡은 산짐승과 날짐승은 사슴 177마리, 노루 101마리, 멧돼지 11마리, 꿩 22마리 등이다. 당시 제주의 산짐승으로는 노루·사슴·돼지·지달·오소리 등이 서식했고, 날짐승은 꿩·까마귀·솔개·참새 등은 있었으나 황새·까치 등은 없었다 한다.
곶앞이 있던 수산곶자왈이 곧 백약이오름 곶자왈이다. 백약이오름 곶자왈 주변 탐방은 이름난 산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구좌·성산에 산재한 동거문이오름, 백약이오름,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능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약이오름이 위치한 표선면 성읍리 산1번지에서 성산읍 수산리까지 5.5㎞에 달하는 길이로 용암이 흐르며 만들어진 대지는, 무수한 세월이 골짜기와 오름과 산 사이를 흐르며 숲을 이루고 세월 꽃과 같은 곶자왈을 이뤘던 것이다.
제주선인들은 곶자왈을 한자로 꽃 화(花)로 기록했다. 제주의 심장이자 허파인 곶자왈의 쓰임을 미리 내다본듯한 작명이다. 수산곶자왈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대교수(大橋藪)로, 증보탐라지 등에는 목교수(木橋藪) 등으로 기록돼 있다. 제주삼현도와 탐라지도병서 등의 고서에도 수산2리를 화남촌(花南村), 흘전촌(訖前村), 화전(花前)마을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래전 설촌 돼 여러 가름을 품으며 다양한 이름으로 전승되던 곶앞은 4·3을 전후해 사라져, 이제는 이름과 함께 곶자왈 지대 대나무 숲으로 남은 셈이다.
▲절경으로 복원된 수산한못
수산평에 위치했던 옛 탐라목장 도처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레 들리는 곳이 수산리 2835-1번지 일대에 조성된 수산한못이다.
고문서인 탐라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지도인 탐라순력도와 김정호의 동여도 등에는 수산한못을 대지(大池) 또는 한지(漢池)로 표기돼 있다. 1276년 이후 설치한 탐라목장은 元史에도 등장하는 원나라가 세계의 주요 복속국가에 설치한 14개 황가목장(皇家牧場) 중 하나였다.
탐라목장 지경에 위치한 수산한못은 몽골이 탐라를 군마 사육장으로 집중 육성할 때부터 조성돼 사용해오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최근까지도 수산한못은 마소에게 물을 먹이고 주민들의 식수로도 사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수산리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 번을 정하여 우마에게 물을 먹이기도 했다 한다. 당시에는 못 동쪽에 테우리들이 사용하던 ‘물통’도 있었다. 그동안 방치됐던 이곳을 마을에서 복원해 붙인 이름이 수산한못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수상한못은 수산평에 있는 큰 못이라는 의미이다.
수산리는 이름에 어울리게 마을 도처에 용천수·연못·습지가 예전에는 27개나 있었다. 그동안 빗물 등에 의해 토사가 유입돼 연못으로써의 기능을 못해 방치되던 이곳을 마을에서 2011년부터 제방을 보수하고 잔디 등을 심고, 환경부 멸종위기의 야생식물인 전주물꼬리풀도 복원하여 오늘의 명소로 탈바뀜 시킨 것이다.
수산한못 정자에 앉아 또는 못 산책길로 오가며 주변 풍경을 살피는 것은, 이곳에 깃든 오래된 역사와의 만남이고 미래를 위한 안식이리라.]
[역사 깃든 지명…선인의 기억으로 전해지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5.30.
(175)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엄격한 사료보다 전래된 지명 많아
성밖내서 선반내로 유추할 수 있어
양수의 난 추정지 수산리 양수동
두 갈래 물 흘러 兩水라 전해지기도
▲제주 도처 지명에 실린 역사문화 찾아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엄격한 사료 중심의 실증주의 역사관과 연구자 중심의 주관주의 역사관 모두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제주에는 엄격한 사료에 해당하는 오래된 기록은 적은 편이나, 역사문화가 깃든 지명은 적지 않은 편이다. 제주 도처의 지명 중 대표적인 사례 몇을 찾아보자.
서귀포시 걸매공원과 제주시 무근성 근처에는 ‘선반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선반과 같은 지형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반면 선반내 근처에는 제주시에는 무근성과 병문천이, 서귀포에는 서귀진성과 홍로천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유추해본다면, 성 밖을 흐르는 내의 뜻을 지닌 ‘성밖내’가 수백 년 동안 음이 변천하며 선반내로 불려왔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에는 당캐(포)로 불리는 지역도 몇 있다. 할망당이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불려지는 당캐(堂浦)는 표선리와 추자도에도 있다. 반면 안덕면 대평포구의 옛 이름은 당나라와 교역을 했다는 의미를 담은 당포(唐浦)로 전래되고 있다. 탐라순력도(1702)와 대동여지도(1861)에도 대평포구를 唐浦로 표시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포구를 통해 제주말(馬)들이 국내외로 실려 나갔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말들이 당포로 향했던 길이 올레꾼들이 다니고 있는 말길인 ‘공마로(貢馬路)’이다.
한림읍 옹포리에는 ‘마대기빌레’라는 지명도 있다. 제6소장 등에서 기르던 말들은 순풍이 불 때까지 옹포리 외곽에 있는 너럭바위와 곶자왈 지대인 마대기빌레에서 잡풀을 뜯으며 대기하다가 명월포(옹포)를 통해 실려 나가곤 했다. 지금은 농경지와 주택지 등으로 바뀌어 있는 마대기빌레 일대는 바위투성이 지대를 농경지로 개간한 선인들의 억척스러움과 고단한 일상이 묻어나던 삶의 현장이다. 이렇듯 예시한 지명들에 대한 엄격한(?) 사료들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기록 못지않게 선인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해지는 구전 역시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고 문화일 것이다.
▲수산리 지명인 ‘양수’에서 ‘양수(良守)의 난’을 떠올리다
탐라목장의 말들이 물을 먹었던 ‘수산한못’ 아래 동네(2,011번지)에는 ‘양수’라는 지명으로 전래되는 독특한 지형이 있다. 이곳은 1168년 일어난 양수의 난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고려사 등 여러 문헌에는 탐라에서 일어난 양수의 난이 기록돼 있으나, 난의 진원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오래전부터 양수라는 지명으로 불려오다 최근에는 ‘양수동’에 속한 이 지역은 수산2리에서도 한참 떨어진 옛 탐라목장 지대에 위치해 있다. 양수라 불리는 곳 뒤에는 낭끼오름(남거봉南擧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듯 둘러쳐져 있다. 제주어 낭(나무)과 끼(변두리)로 이뤄진 낭끼오름은 수산리에서도 남쪽 높은 르(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름 화구(굼부리) 안에 조성된 초지는 오래전부터 양수의 후예들이 경작한 흔적이라 여겨진다. 당시에는 제주도 도처에 들어선 중심마을마다 토호세력 주도로 마을 자치가 이뤄지기도 했을 것이다.
수산2리 양만길 전 이장의 안내로 찾아간 그곳에는 무성한 대나무 숲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4·3 당시 중산간 소개령으로 인해 소개돼 지금은 빈 마을이 돼 있다. 안내자의 증언에 의하면 양수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주거 유적들이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밭으로 변했다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곳 도처에는 당시의 집터와 골목길로 추정되는 담장들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하다.
한편, 큰비가 내리면 이곳에서는 두 갈래로 물이 흘렀다 하여 양수(兩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지난 호에 일시주거지(camping site)로 소개된 벌라리왓 선사유적지가 있다. 양수 등 봉기군들이 벌라릿굴이 있는 그곳 평탄지역에 모였던 것은 아닐는지 하고 괜한 상상도 해본다.
▲첫 탐라현령 최척경
기록상 첫 탐라현령인 최척경은 양수가 일으킨 봉기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천년왕국 탐라는 고려와 몽고 시대를 거치며 1105년 탐라군으로, 1214년 제주군으로, 1295년 제주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사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고려는 탐라군을 1153년 탐라현으로 명칭변경하면서 지방관으로 현령을 파견했다. 그러나 반란조짐이 조정에 보고될 정도로 탐라에 부임한 현령들은 폭정과 착취를 일삼곤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탐라현령으로 능력 있고 청렴한 인물을 찾았는데, 그가 곧 최척경이다.
1162년(의종 16) 탐라에 온 최척경은 전임 현령들의 비리와 폐단들을 고치며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아쉬워하는 백성들을 뒤로 하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년 후인 1168년 탐라의 지배층이었던 양수 등이 과중한 조세부담과 수탈을 자행하는 지방관을 축출하기 위해 민중봉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고려조정에는 탐라현령의 폭정에 시달려 반란이 일어났다는 비보와 함께, 탐라현령으로 최척경을 다시 보낸다면 무기를 버리겠다는 투항 조건도 전해진다. 왕명을 받은 최척경은 가족과 함께 탐라에 부임하길 청했고, 이를 허락받은 최척경은 가족을 동반한 최초의 수령이기도 하다.
최척경이 현령으로 오자 탐라선인들은 스스로 봉기를 마무리했으나, 장두였던 양수 등 7명은 참수됐다. 다음은 고려사에 기록된 관련 대목이다.
“탐라 안무사 조동희(趙冬犧)가 왕(의종)에게 ‘근자에 관리의 불법으로 적의 괴수 양수(良守) 등이 모반하여 수령을 축출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조동희에게 명하여 부절(符節: 신임장과 함께 사신이 가지고 다니던 돌이나 나무로 만든 물건으로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소지하였음)을 가지고 가서 선유케 하였는데, 난민들이 스스로 항복하자 양수 등 7명을 참하고 나머지는 곡식과 포백(布帛)을 내려서 무마하였다.”
양수의 난은 기록상 전국 최초의 민란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수산리 양수동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양수는, 백성들을 위해 장두가 된 최초의 제주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양수의 난은 백성들을 등에 업은 탐라국의 주도세력과 소외된 토호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산야 가득한 牛馬의 모습이 그려지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6.06.
(176)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수산리
탐라목장과 경작지 경계지역에 1276년 이후 쌓은 잣성 현존
원나라, 탐라목장 관리로 목장운영 본부 설치…국영목장 중 하나
▲수산평에 들어선 탐라목장
옛 탐라목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은 공식적인 지표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나, 지금의 궁대오름 주변의 잣성을 경계로 한 동북쪽 평야지대 수백만 평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탐라목장을 찾아가기 위해 양만길 전 이장의 안내로 수산2리 곳곳을 누볐다. 수산한못과 수산동굴 입구, 벌라리동굴과 선사유적지 등을 품고 있는 수산리는 제주 역사문화의 보고라는 생각을 하며 도처를 걷고 또 걸었다. 특히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는 잣성(담)을 발견하곤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탐라목장과 경작지와의 경계지역에 1276년 이후 쌓은 잣성은 제주에 현존하는 잣성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약 6㎞) 것이다. 물론 1270년 입도한 삼별초와 관련해 바다를 에둘러 쌓은 환해장성이 있다지만, 오늘날 그곳을 가늠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애월읍 항파두리에 삼별초가 쌓은 15여 리 토성의 상당 부분이 복원돼 있기는 하다.
고려가 탐라를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란 의미를 담아 1214년 제주군으로, 1295년 제주목으로 국명(지명) 명칭을 지은 것에 반해, 원은 몽골군과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둔 1275년(충렬왕 1) 전후해 지속적으로 제주를 탐라국으로 칭했다. 고려의 땅이 아닌 독립국 탐라를 다스린다는 점에 방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탐라4절(의술 진국태·점술 문영후·무술 양보성)의 제일인으로 알려진 고홍진이 감교(勘校)해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1653)에 따르면, 원은 1276년부터 수산평에 말 160필과 노새·나귀·양들을 점차 방목하고 목호들을 배치해 탐라목장을 조성해 나갔다.
옛 탐라목장의 위치는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 궁대오름 주변의 잣성을 경계로 한 동북쪽 평야지대 수백만 평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산평에 동아막을, 차귀평에 서아막을 설치
원나라는 탐라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아막(阿幕)을 설치했다. 아막은 목장운영의 본부이자 목호들의 거주지 등을 아우르는 용어이다. 동아막을 1277년 수산평에, 서아막은 다음 해에 차귀평(한경면 고산리 해안지역)에 설치했다. 이후 동서 아막을 통한 목장의 관리체계는 동도현과 서도현을 설치하는 기초가 됐다. 이후 말이 크게 번식해 산야에 가득했으며 사육된 말은 동아막에서는 수마포, 서아막에서는 와포(지삿개, 한경면 용수) 등을 통해 원으로 실려 갔다 전한다.
몽골은 또한 일본 정벌을 위해 탐라 도처의 거목들을 베어 전함을 만들도록 했다. 그 후 탐라에서는 수많은 전선이 제작되고, 원시림지대는 광활한 초원으로 변화돼 갔다. 특히 동아막이 있는 수산평 지역은 여느 지역보다 목초지 개발이 일찍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담을 쌓아 농경지와 거주지와 목장을 경계 지었다. 목호들과 탐라선인들 사이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또한 통혼도 이뤄지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의 영향으로 선인들은 몽골식 목축방식을 종래의 목축에 접목해 우마사육을 확대하기도 했을 것이다. 기온과 강수량이 목초생육에 적당해 마필이 잘 번식하자, 원나라 궁정 소속의 마필과 노새도 탐라목장에서 방목됐다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말들이 산야에 가득했던 탐라목장은 원제국이 점령지 도처에 설치한 14개 국영목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막을 설치했던 장소를 수산리에서는 ‘가막자리·아막(阿幕)좌리(座里)·막짓은 자리’ 등으로 불려 온다. 탐라지(1653)에는 ‘수산평(首山坪)은 마을 서남쪽에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달로화적인) 다라치(塔剌赤) 등이 와서 이 들판에 말·소·낙타·나귀·양 등을 방목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탐라국에 세운 원나라의 관부
원나라는 삼별초를 평정한 뒤 탐라국을 직할령으로 해 지방정부인 관부를 이 땅에 설치했다. 탐라에 설치한 원의 관부는 4차례에 걸쳐 개편되는데, 원이 1273년 처음 세운 관부는 ‘탐라국 초토사(耽羅國 招討司)’였다. 원제국의 초토사는 주로 연해(緣海)의 요지에 설치돼, 연해 주민의 위무나 토벌에 관한 일을 처리했다.
1년 후인 1274년에는 초토사가 ‘탐라국 군민도달노화적(軍民都達魯花赤) 총관부’로 개편됐다. 탐라국 총관부는 원대의 지방행정인 행성(行省), 노(路), 부(府)에 설치됐던 관부로, 탐라 역시 원의 지방행정 가운데 노(路)로 지정돼 총관부가 설치됐던 것이다. 총관부에는 몽골족이 지방관(장관)인 다루가치로 부임했고, 총관에는 토호세력들이 임명됐다. 당시의 총관은 고인단(高仁旦)과 문신(文愼) 등이었다. 성주인 고인단은 삼별초가 입도할 당시 중도를 지켰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지총관인 문진은 문가(文家)에서의 첫 탐라왕자인 문창우의 부친이다.(1270년 토호세력인 양호에 이어 탐라부사인 문창우가 탐라왕자에 봉작된 이후 탐라왕자는 문가에서 세습됐다. 1272년 성주 고인단과 함께 왕자 문창우가 원나라를 방문해 탐라를 고려에 복속해 줄 것을 요청한 기록도 보인다.)
총관부는 1284년 다시 ‘탐라국 안무사(安撫使)’로 개편됐다. 안무사로의 개편은 제3차 일본 정벌과 관련해 군정을 보다 강화하는 조치로 작용한 바, 이 시기에는 원군이 증파되기도 했다. 일본 정벌에 집착하던 원 황제 세조가 1294년(충렬왕 20년) 서거한 후 원으로부터 탐라를 돌려받은 고려조정은 1295년 탐라의 행정단위를 승격해 제주목으로 삼았다. 한편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는 탐라의 고려환속에 기여한 공로로 충렬왕으로부터 아홀, 홍정, 모개, 화(靴) 등을 하사받기도 했다.
5년 후인 1300년 원은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원의 직할령이 되는데, 탐라목장의 말들을 원에 바치기로 한 약속을 고려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1301년에는 총관부가 ‘탐라군민만호부’로 개편되고, 55년 후인 1356년(공민왕 5)이 돼서야 폐쇄됐다.
총관부가 원의 직접지휘를 받는 관할 아래 있었던 반면, 만호부는 고려왕이 장관을 겸직하는 정동행성 관할 하에 있었다. 원은 관부를 4차례 개편했으나 항상 토착세력을 관부의 관리로 기용해 탐라 경영에 참여케 했다. 이는 원제국이 흔히 구사했던 오랑캐를 빌어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의 일환이기도 하다. 관부 폐지 후에도 목호는 1394년 최영 장군 군대 입도 때까지 잔류해 목마에 관여했다.]
[고려와 목호세력 격전지…제주사회 수난으로 남다
제주일보 승인 2023.06.20 댓글 0
(178)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1295년부터 원나라 등 탐라마 반출
탐라목장 2곳서 10소장으로 확대
공민왕 반원정책으로 목호들 반란
제주서 총력전 끝에 고려로 재귀속
▲탐라목장 거쳐 10소장으로
원제국은 탐라인과 고려인의 탐라목장 접근을 초기에는 금지할 만큼 목호들을 내세워 군사기밀을 다루듯 목장을 운영했다. 또한, 일본원정을 준비하려 말을 반출하지 않다가, 정벌을 포기한 후인 1295년부터 탐라마를 반출하기 시작했다. 탐라목장 중 수산평인 동아막에서 길러진 말들은 수마포(受馬浦:수뫼밋) 등을 통해, 차귀평인 서아막의 말들은 와포(瓦浦:지삿개, 용수포구)와 당포(唐浦:대평포구) 등을 통해 원나라 등지로 실려 간 것으로 여겨진다.
탐라목장 관리체계는 1300년 이후 동도현과 서도현 등 제주가 두 지역으로 분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277년 동서 2곳으로 출발했던 탐라목장은 1300년대 8곳으로 분화되고, 8개의 목장은 조선시대 10소장의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마정기(大元馬政記, 1324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의하면, 말뿐만 아니라 소도 원에 공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동아막에서는 말을, 서아막에서는 모동장(毛洞場)을 둬 소를 기른 것으로 추정된다.
1350년대부터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이에 불응한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목호의 난은 1374년 최영 장군 부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탐라목장은 쇠락하기도 했다. 탐라목장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선인들은 목호들과의 접촉이 자연스레 이뤄졌고, 또한 종래의 목축에 몽골 방식을 접목하며 우마사육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 개국 초에는 제주의 산야가 우마방목지로 변해갔다. 이로 인해 제주의 농가는 마소의 농경지 침범으로 많은 피해를 당했다. 그러자 1429년(세종 11) 영곡 고득종의 제안에 의해 한라산 중허리(해발 200m~600m 사이)에 목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성종 때에는 옛 탐라목장을 확대해 10소장으로 분할해, 제주목에는 1에서 6소장을, 대정현에는 7소장과 8소장을, 정의현에는 9소장과 10소장을 뒀다. 이외에도 정의현에 산마장을, 대정현에 모동장을, 우도에 마목장과 가파도에 우목장을 설치했다.
▲고려와 목호의 격전지 제주
이전 내용에서 보듯 목호의 난은 원나라의 쇠퇴기를 맞아 과감하게 시행한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에서 기인했다. 공민왕은 원에 빼앗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함께 제주를 또한 되찾고자 시도했다.
그러한 공민왕(1352~1374년 재위)의 반원정책으로 제주는 고려와 목호세력이 수차례 부딪치는 싸움의 무대가 돼야 했다. 목호들은 고려조정이 보낸 관리들을 세 차례나 죽였고, 이에 공민왕은 1366년 100척의 군선을 파견해 목호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목호군에게 밀려 오히려 퇴각해야 했다. 특히 세 번째 목호의 반란은 원이 중국에서 물러난 지 1년이 지난 1369년에 일어난 사건이라 더욱 충격적이다. 원의 지원 없이 100척의 배를 타고 입도한 고려군을 쫓아낼 정도로 목호들은 자체적인 방어능력이 대단했던 셈이다.
제주에서의 본격적인 싸움은 명나라의 개입과 말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원 소유의 말은 명의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1374년에 탐라마 2000필을 고려에 요구했다. 결국, 명은 원의 속국이던 탐라를 고려에 넘겨주는 대신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고려관리가 제주마 2000필을 취하려 하자, 탐라목장의 목호는 300필만 내주었다.
명나라가 2000필을 재차 강력히 요구하자, 공민왕은 목호정벌 출정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정예군 2만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된 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 장군이었다. 1388년 요동정벌군이 3만8830명이던 것과 비교하면 목호토벌에 동원된 고려군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결단에는 명의 제주 복속기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었다. 1374년의 ‘거대한 전쟁’으로 목호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탐라는 다시 고려에 귀속됐다. 하담이라는 사람이 들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1374년)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라는 전투 목격담이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목호의 난은 제주사회의 공동체를 와해시킨 사건이자 제주선인들에게 큰 희생을 초래한 수난의 역사였다.
▲정의현 한남리 정씨 정려비와 법환리 최영장군 승전비
기병과 보병 3000여 명을 거느린 목호군에는 몽골족, 이들과의 혼인으로 태어난 반(半) 몽골족화 된 이들과 고려관리의 잦은 수탈에 반감을 품은 제주선인들이 가세해 있었다. 처음에는 목호군이 명월포(한림읍 옹포) 등지로 상륙하는 고려군을 무찌르며 기세를 올렸으나, 이후 새별오름으로, 홍로로, 탐라 전역으로 밀리며 밤낮으로 한 달여간 싸움이 계속됐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인 초고독불화·관음보·석질리 등이 범섬으로 대피하자 최영 장군은 배 50여 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범섬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도망가는 목호들을 쫓아가 전부 살해케 했다. 이를 기념해 법환 바닷가에는 현무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된 최영 장군의 거대한(?)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목호세력이 산남 중앙에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했던 이유는 동서 아막이 위치한 산남 지방이 그들의 근거지였고, 특히 목호의 정신적 위안처인 법화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화사는 원나라가 중창한 목호의 성지였다. 하원동에 있는 법화사는 조선 초기 노비 280명을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목호의 난과 관련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비석이 또 하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열녀 조에 등장하는 정씨의 비석이 그것이다. 열녀 정씨는 고려시대 직원(職員)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의 아내였다. 목호의 난 때 지아비가 죽자 평생 절개를 지켰고 그 사실이 정의현 지역은 물론 제주 전역에 알려졌다. 그녀의 미모를 탐낸 고려군 장교가 그녀에게 결혼을 수차례 강요했으나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고 수절했다.
1428년(세종 10) 정씨는 열녀 칭호를 받았고 열녀문도 세워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열녀문이 없어지고 비도 마멸됐는데, 이를 애석하게 여긴 한응호 목사가 1834년(순조 34) 빗돌을 마련해 비문을 새겨 놓았다. 이 비는 원래 한남리 원님로 길가에 세워져 있던 것을 2006년 한남리 복지회관 마당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성산에서 다시 수산으로…왜구 방어 천연의 요새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04.
(180)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조선시대 초 9진 중 처음 축조
주 거점지 성산진성으로 이동해
1597년 일시적으로 폐성되기도
일제강점기 거치며 일부 철폐
▲제주9진 중 앞서 쌓은 수산진성
제주에는 외적을 방어하는 관방(關防)시설로 3읍성·9진성(25봉수·38연대)이 있었다. 읍성이 군사기능과 행정기능을 겸한 반면, 진성은 방어기능을 수행하는 군 주둔지였다. 조선조정은 우도 부근에 출몰하는 왜구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1439년(세종 21) 한승순을 목사겸 안무사로 임명해 9진 중 최초로 수산진성을 축성토록 했다. 같은 해에 차귀도 앞에 차귀진성과 새섬 앞에 서귀진성도 쌓았다.
1510년 명월·별방·애월 방호소에 진성이 축성되고, 이후 조천포·모슬포·화북포에도 진성이 구축됐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철폐령’으로 성문이 먼저 사라지고 1920년대부터 대부분의 진성이 읍성과 함께 항구를 구축한다는 구실 등으로 바다에 매립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1702) 수산성조(首山城操)에는 정의현 소속의 수산진성과 옛 정의현청이 있었던 구수산고성(舊首山古城)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산도(島) 터진목 등을 매립하면서 바닷가 인근에 있던 구수산고성 성담들이 주로 사용되고, 수산진성 역시 성문·여장·성가퀴 등이 철폐됐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수산진성 성곽은 덜 철폐돼 성곽유적이 9진성 중 가장 양호한 편이다.
2005년 도지정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된 수산진성은 축조방식과 평면형태 등이 읍성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바닷가에 위치한 다른 진성에 비해 내륙으로 꽤 치우쳐 있어, 군사기능 이외에 읍성 역할도 겸해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가 550여 미터에 달하는 수산진성은 규모로는 명월·별방·차귀 진성에 이어 네 번째 크기이다. 성안 시설로는 성문·우물·객사·익랑·군기고 등이 있었고, 연계된 관방시설로는 수산봉수·독자봉수·성산봉수·협자연대 등과 동남쪽 해변의 환해장성 등이 있었다.
1597년 이경록 목사가 일출봉 바닷가 인근에 축조한 성산성이 왜구침입에 대비한 거점지로 활용되면서 수산진성은 일시 폐성되기도 했었다.
▲성산진성 거쳐 도로 수산진성으로
1592년 부임한 이경록 목사는 1597년 제주의 주 방어진으로 삼을 진성을 성산에 축성하면서 제주읍성의 병력을 성산으로 옮겼다. 성산을 천연의 요새로 여긴 이경록 목사는 삼읍의 군병기와 창고를 모두 이곳에 옮기는 한편, 수산방호소도 이곳에 이전해 왜구침입을 방어하려 하였다. 여러 전시 상황을 맞아 주 방어진 옮김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이경록 목사는 1598년 주성을 다시 제주읍성으로 옮겼으며, 일부 병력만을 성산에 남겼다.
임진왜란 중 부친상을 당하고도 유임돼 성산외성 구축에 전념하던 이경록 목사는 성산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599년 이곳에서 병사했다. 수산진성을 성산으로 옮긴 것을 두고 1601년 안무어사로 입도한 김상헌은 ‘성산진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방어한다는 것은 적에게 스스로 포로가 되는 최악의 계략’이라고 주청했다. 이에 따라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성산에 남아있던 병력을 수산으로 옮겨 진성을 정비하였다.
다음에 소개될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이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나고, 이에 위무 차 제주에 왔던 김상헌(제주오현)의 주청에 따라 성산성에서 다시 수산진성으로 왜적 방어기능을 환원시켰던 것이다. 현재 성산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수산진성의 유허는 수산초등학교 울타리에 상당량 남아있으며, 서문이 있던 곳에는 해자가 시설되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수산진의 장두로 1705년 만호를 두었다가 1718년 조방장으로 환원되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돌로 쌓은 수산성은 주위가 1164자, 높이가 16자이고, 좌우에 문이 하나씩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방 전에 민가가 몇 있던 수산진성 터에서 해방 후인 1946년 지금의 수산초등학교가 개교했다.
민심 흉흉한 틈타 반역 도모…주모자 참형으로 다스려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이 퍼지고, 이후 여러 차례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1589년(선조 22)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정치권력의 지형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도 그러한 영향 중 하나였다. 정여립 첩의 친척으로 육지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에도 가담했던 소덕유는 비밀이 샐 염려가 적은 제주에서 역모를 꿈꿨는데, 이렇게 해서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른바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사(謀士)인 길운절은 앞서 제주에 온 소덕유와 제주에서 1601년 만나, 토호세력 등을 회유해 제주에서의 모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호 문충기는 납마첨지(納馬僉知)로 제주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양대 전쟁으로 조정의 행정력이 제주에 덜 미치는 시대 상황에 더해, 특히 도민들을 학대하는 성윤문 목사가 민심을 잃고 있는 상황이 역모 사건에 가담할 자를 끌어드리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한겨울에 성윤문 목사는 성을 쌓도록 강제해 도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고, 진상과 부역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모 가담자들은 목사와 경래관을 죽이고 무기와 전마를 징발해 바다 건너 한양을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러는 도중 음모를 엿들은 구생이란 기생이 길운절을 추궁하며 고발하겠다고 하자, 길운절은 성윤문 목사에게 거사 2일 전 변란계획을 몰래 알렸던 것이다.
이에 제주목과 조정에서는 주모자 18명을 체포, 한양으로 압송해 소덕유·문충기·홍경원·김정걸·혜수·김대정·이지·김종·강유정 최구익 등을 능지처참으로 다스렸다.
또한 제주 유림 30여 명이 심문을 받고 길운절도 처형되니 제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1601년 안무어사 겸 안핵사로 청음 김상헌을 제주에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게 하고, 동요하는 도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제주에서 과장(科場)을 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적군 방어에 헌신…7년간 섬 수호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11.
(181)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목사 이경록, 숨질 때까지 방어시설 정비·군사 양성 힘 쏟아
청음 김상헌, 안무어사로 입도해 제주 체험 ‘남사록’에 기록
음침한 구름과 시든 풀로 덮인 황량한 성은(寒雲衰艸掩荒城)/ 원나라 오랑캐가 말을 기르던 곳이라네(云是胡元放馬垌)/ 옛날 목호들이 여기저기 발호하였을 때(舊致牧胡多跋扈)/ 도통사가 멀리서 여러 번 군대를 일으켰네(屢權都統遠興兵)/ 가을날의 반딧불은 김통정의 놀란 핏빛 같고(通政驚血秋螢碧)/ 파란 도깨비불은 초고(목호의 거두)의 요사한 넋이라네(肖古妖魂鬼火靑)/ 나라 안과 밖이 임금님 교화를 입은 지금(聖化只今覃內外)/ 바다 나라 백성들은 밭을 가고 샘을 파네(海邦耕鑿遺氓矣)
▲무너진 수산진성(시제: 水山廢城)
위의 시는 어사로 제주에 온 김상헌이 수산진성을 돌아보고 읊은 시이다. 학창시절 암송했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는 김상헌이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읊었다는 시이다.
화친보다 척화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그의 시는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상헌이 입도 당시의 제주목사는 백성들을 학대한 것으로 알려진 성윤문이다. 성윤문은 조천진성의 쌍벽(雙碧)루 라는 정자(누각)를 임금 향한 연모의 정이 깃든 연북(戀北)루로 개명한 이다.
임금을 향한 연모지정을 노래하는 김상헌과 성윤문. 하지만 김상헌은 척화로 병자호란을 초래해 인조를 청태종에게 무릎 꿇게 해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한 선봉장이 됐고, 성윤문은 제주 백성들을 혹사한 목사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5현 청음 김상헌
김상헌은 그의 나이 30세인 1601년(선조 34) 제주에서 있었던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을 조사하고 민심을 안무(按撫)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제주에 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체험한 것을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일기체 문집에 남겼다. 한라산에 올라 산신제를 지낸 것 등을 담은 남사록은 1601년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6개월 동안의 제주체험을 기록한 고서이다.
남사록 원본은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존 중이다. 김상헌과 상반돼 회자되는 이경록 제주목사는 임진왜란 당시 방어업무에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우도에 숨어 있는 왜구와 대접전을 벌이려 수산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외성을 축조하다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 후 입도한 김상헌이 성산성을 돌아보고는 ‘외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어 계략치고는 졸작이다.’라고 혹평했다. 김상헌의 혹평으로 제주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목사 이경록은 평가절하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이경록에 대한 김상헌의 혹평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울대규장각 책임연구원인 이숙인은 ‘명가의 탄생, 빛과 그림자’에서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라고 혹평한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제주5현 중 한 분이자 척화파의 거두로 알려진 김상헌의 가문은 어떤가. 김상헌의 친형인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청나라 침공 시 김상용이 남한산성의 화약고를 잘못 터뜨려 발생한 사고사는, 동생 김상헌과 친족·측근들에 의해 의로운 자결을 한 충절지사로 바뀌었다.
이에서 보듯 이숙인은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한 가문으로 김상헌의 가문인 장동김씨를 꼽는다. 이번에는 이경록 목사의 목민관을 엿보고자 한다.
▲7년 재임한 최장수 목사 이경록
제주는 조선시대 때 총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100번째 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성웅으로 회자되고 있는 반면 이경록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이름이다.
서른 살 넘은 나이인 1576년(선조 9년) 이순신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함경도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 이일은, 여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순신·이경록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했다. 이 일로 희생자가 대거 발생하자, 이 일은 이순신과 이경록의 잘못인 양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백의종군을 명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앞서 이경록과 함께 첫 백의종군을 겪은 것이다. 그 후 선조는 1591년 이경록을 나주목사,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했다. 전라도 좌수영을 총지휘하는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이어 선조는 이경록을 1592년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임진왜란으로 의병들이 봉기해 왜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긴장된 순간에 선조가 이경록을 군사요충지인 제주목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원병 300명을 제주에 보냈다.
이경록 목사는 오히려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주목사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조정의 하명을 청합니다.’하고 장계를 올리자, 비변사(조선 최고의 의결기관)가 답하기를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섬의 힘만으로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주장(主將)이 진(鎭)을 떠나 바다 건너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경록의 충분(忠憤)은 가상하나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위에 제승정(制勝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목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이경록은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가량을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기생 하나를 두고 판관과 싸우고, 판관 안극효는 이뿐만 아니라 법을 어긴 채 가족을 데리고 와 갖가지 민폐를 끼쳤다. 한겨울인데도 성윤문 목사는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하니, 결국 길운절과 소덕유의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601년 봄에는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민원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성윤문 목사 등의 파직이 논의되기도 했다.
반면 ‘제주목사 이경록은 해외에 거주한 지가 7년이 되었는데 왜적의 변란으로 인해 체환할 수 없었다. 그가 나라를 위해 극히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니 가자(加資)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가자란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더 올려주던 것을 말한다.]
[굶어 죽는 백성 구한 관리의 선정, 돌에 새겼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18.
(182)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아기 바쳐 만들어졌다는 진안 할망당
영험하다고 소문나 소망 빌러 찾아와
정의현 장교 현윤경 효행 기린 정려비
황구하 어사·윤구동 목사 德(덕)도 비석에
▲수산진성 ‘진안 할망당’
도내 9진성 안에 유일하게 할망당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진안할망당은 수산진성 축성과 관련이 깊다.
1439년 수산진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성을 쌓으면 무슨 영문인지 자꾸 무너지곤 했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모두 부역을 하고 공출을 내는데 유독 한 여인은 그러지 못했다. 축성관리가 방문해 공출을 독촉하자 아기가 ‘으앙’하고 우는 게 아닌가. 여인은 집안에 공출할 게 없으니 저 아기라도 데려가라고 했다. 관리가 어처구니없어 웃어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축성 현장을 지나던 한 도인이 ‘왜 주겠다는 원숭이띠 아기를 바치지 않으시오.’ 하는 게 아닌가. 지난 일이 생각 난 관리가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망설임 없이 아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아기를 땅에 묻고 성담을 쌓으니 진성은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구축됐다.
어느 날 밤 아기 우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이를 가엽게 여긴 어떤 부인이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 퇴물을 아기 울음소리 들리는 그 자리에 갖다 놓으니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 후 부인은 하는 일마다 잘 됐다.
세월이 흐르며 진성 안은 신앙의 성소가 되고, 신당 영험이 좋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지금도 자녀의 진학과 사업 성공 등을 위해 인근 마을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단골들과 학교 측에서 할망당 주변을 정비하니, 신당의 품격 역시 되찾은 듯하다.
▲수산마을 도처에 있던 오래된 비석들
제주도에서 역사문화 깃든 비석이 많기로는 화북·조천 비석거리가 유명하다. 그곳에 못지않게 다양한 비문들을 품은 곳이 또한 수산리이다.
수산리지(水山里誌·2021)에 따르면 26개의 비석이 마을 도처에 전시되고 있으나,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공궁연휼민(鄭公躳淵恤民)선정비’와 1880년 세워진 ‘군수강공우진(郡守康公祐鎭)선정비’ 등 고비 3기는 행방이 묘연하단다.
오래전 정의현 사람들은 제주목 관아를 오가기 위해 수산2리와 선비들이 순력을 다니다 쉬던 지역인 ‘선비동산’을 경유해 수산진성과 대왕산·소왕산을 거쳐 구좌읍 하도리를 지나 제주목에 이르렀다고 한다.
통행인이 많은 수산리 한질(대로) 도처에는 여러 형태의 비석들이 세워졌다. 그중에는 정의현 장교 현윤경의 효행에 대한 찰리사 이재수의 치계(馳啓: 말을 달려 임금께 올리는 보고)로 포상돼 1814년 대왕산 근처도로변에 세워진 ‘효자유향별감현윤경지정려(孝子留鄕別監玄胤慶之旌閭)’와 1823년 조정에서 효열정려(孝烈旌閭)가 내려와 세워진 ‘효열고씨지정려(孝烈高氏之旌閭)’의 비석이 지금도 행인의 이목을 끈다.
그동안 마을 도처에 산재해 있던 주요 비석들은 보호 차원에서 2018년 수산1리 사무소 동쪽 구석진 곳에 모셔져 있다.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는 비석 중에는 충혼비, 재일교포 후원 기념비, 특히 4·3 과 관련한 당시 경찰응원대인 ‘충남중대제1소대공덕비·복구기념비·돌아온 3인 비’등도 있다. 수산1리 사무소에 전시되고 있는 오래된 비석 2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황구하 어사 지성 진민비
수산리에 소재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는 단연 ‘황구하 별견어사의 지성 진민비(別遣御使 黃公龜河 至誠賑民碑)’이다. 지성 진민비란 성심을 다해 백성을 구휼한 이를 칭송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다. 1716년(숙종 42)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치제(致祭)하고자 임금이 보낸 어사가 황구하다. 치제란 임금이 보낸 제물과 제문으로 죽은 백성을 제사하고 산 백성을 위무하는 위령제를 말한다.
황구하 어사는 조정에서 가져온 조 3만여 섬을 제주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진상품인 전복의 양을 줄여 공납하도록 했으며, 진상품을 감축하고 환곡도 절반으로 줄이도록 주청해 실현시켰다. 또한, 제주유생의 전시직부를 임금께 주청했다. 제주에서 치르는 초시인 향시에 합격한 급제자는 중앙에서 보는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며, 전시에서는 탈락시키지 않고 등위만을 매겼다.
이에 황구하 어사는 제주에서 초시를 거행해 급제한 고처량(화북), 정창선(상도), 고만갑(이호)에게 전시에 응시하도록 했다.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1724년(경종 4)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수산리에 황구하 공덕비가 세워진 이유로는, 여느 마을보다 목사의 시혜를 많이 입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사상 윤구동 목사 휼민선정비(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
사상은 은퇴한 높은 관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1815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윤구동은 관리를 단속하고 주민을 안무하고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1817년 형조참의로 제수돼 제주를 떠난 윤구동 목사는, 재임 중 선정으로 이름을 남겨 제주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815년 외국선박이 본도에 표류됐을 때 표류민을 구휼하기 위해 민폐를 없애려 공적 자금을 사용했다.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식을 옮겨와 구휼했으며, 이후 환모조(還耗租) 즉 환곡으로 2500석을 미리 준비해 흉년에 대비했다.
홍경래난(1812) 시 창의병을 일으키려던 대정현 義士 구제국과 양위국의 가문에 부역을 면제시키기도 했다. 외도동 월대, 김녕리, 화북동 비석거리 등에 윤구동 목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충효 홍달한 정려비(忠孝洪達漢之旌閭)
수산1리 남쪽 세칭 효자문거리 인근에는 후손들이 조성한 아담한 ‘홍달한 정려 공원’이 있다. 당시의 수산 지경인 지금의 고성리(동유암)에서 태어난 홍달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봉양하며 효도를 다 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이 죽자 여묘(廬墓), 즉 고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또한, 부친상을 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으로 3년 상을 추복(追服)하였다. 1720년(숙종 46) 숙종이, 1724년 (경종 4) 경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를 때마다 다랑쉬 오름 등에 제단을 마련하여 분향하고 북향재배했다. 한억증과 김윤 목사가 홍달한의 충효에 대한 행장을 조정에 알리니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조 때의 판서 정실은 ‘홍효자전’을 지어 그를 널리 알렸다.]
[떨어져 있을 땐 마을에 흉년이…부부석의 애틋한 전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25.
(183)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남편바위는 밤이면 서럽게 울기도
흉흉한 소문에 못 옆에 나란히 배치
장수 오누이 설화 전해져 내려오는
수산리 진빌레 동네 ‘대봉이터’
수산리 노인회관 앞 팽나무 옆에 놓여 있는 부부석. 옛날 세찬 급류에 떠내려온 부부석이 같이 있지 못하면 마을에 큰 흉년이 들거나 남편바위가 서럽게 운다는 전설이 있다.
오래된 마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는 부부의 애달픈 사연이 깃든 이전(伊全)물 설화와 (혼)착 죽은 심방과 대뱅이 이야기 등 구비전승되는 이야기도 많은 편이다. 그중 정의현의 여러 마을에서도 비슷하게 구전되는 장수설화와 수산리에서 특히 구전되는 부부석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봉이 남매 이야기
수산리 ‘진빌레’동네에 ‘대봉이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살았던 대봉이 부부는 마소를 기르며 넉넉하게 살았으나 4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용하다는 절에 가서 황소를 한 마리 시주하고 지극정성으로 빌었더니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다.
기쁨에 들뜬 대봉이가 매달 소 한 마리씩 10마리를 잡아 먹였더니, 부인이 낳은 자식이 딸이었다. 딸은 체구가 유달리 크고 힘이 넘쳐 동네에서는 여장사가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다음 해에도 부인이 임신을 하자, 여아를 낳으면 어쩌나 해서 소 아홉 마리만 먹였다. 이번에는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지성으로 음식을 먹이니 누나 못지않게 체구와 체력이 대단했다.
오누이가 스무 살이 넘어갈 즈음 제주목 조천리에서 전도 씨름대회가 열리니, 3읍 씨름꾼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대봉이는 아들을 씨름판에 보내면서 딸도 남장시켜 아들 몰래 보냈다. 아들이 씨름왕이 될 순간, 당시에도 지역세가 있었던지 제주목 관중들이 왁자지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목 안 사람들이 발모둠치기로 아들을 혼내주려는 순간, 남장한 누나가 ‘목 안 서촌 출신인 내가 저 정의놈과 대결하겠소.’하고 나섰다.
결과는 황소 열 마리를 먹고 태어난 딸의 승리였다. 기가 꺾인 아들이 귀가하니, 샛길로 재빨리 집에 온 누이가 풀 죽은 이유를 물었다. 그제야 남장한 목 안 사람이 누나였다는 것을, 아버지가 힘자랑만 하던 아들이 걱정돼 몰래 누나를 보낸 것을 알게 됐다.
이리하여 아들은 인생을 사는 법도도 깨달았다 전한다. 물론 온 동네는 대봉이 오누이를 무등 태우고 흥겨운 잔치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후 대봉이 딸 하면 제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미인인 데다 힘이 세 함부로 추파도 못 보냈지만, 그리도 동네 총각 마음 설레게 하는 선망의 대상자였다고 전한다.
▲부부석 이야기
지금의 수산1리 사무소와 ‘학교 살리기’ 임대주택이 있는 일대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동쪽은 식수로, 서쪽은 우마 급수와 빨래터로 이용했다는 이 못을 마을에서는 ‘도로못’이라 했다. 옛 도로못 빨래터 바로 옆에는 오래전부터 어디선가 떠내려온 큰 바위 2개가 나란히 누워있다. 이 바위를 수산리에서는 ‘부부석’이라 부른다.
지역에서는 ‘앞 내 세 번 치면 솥뚜껑 엎어불라.’라는 옛말도 회자된다. ‘솥뚜껑 엎어불라’라는 말은 폭우가 쏟아지면 동네 계곡물이 크게 불어나니, 밥해 먹을 생각 말고 피난 갈 준비나 하라는 뜻이다.
당시의 세찬 급류에 의해 떠내려온 부부석은 지금 수산리 노인회관 앞 팽나무 옆에 다정하게 놓여 있다. 2m 20㎝ 내외의 부부석은 오래전 표선면 성읍리 좌보미오름에 나란히 있었다 한다. 여러 해를 보내며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터지자 부부석은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면서 ‘쇠선동산과 웃물밭과 소싯내와 천외동’을 거쳐 이곳까지 떠내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부부석이 같이 있지 못한 기간에는 마을에 큰 흉년이 들거나, 도로못에 먼저 와 있던 남편바위가 밤이면 섧게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흉흉한 소문이 떠돌자 진빌레 동네에서도 천외동에서도 자기네로 부부석을 옮기겠다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결국 세가 큰 동네에서 부인바위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다정하게 놓았다. 이후부터 신기하게도 물난리나 밤에 들리는 괴상한 울음소리도 없어졌다고 한다.
▲수산리 지명에 깃든 역사문화
수산리에는 이곳만의 역사문화가 깃든 지명이 많은 편이다. 그중 몇 개를 골랐다. 사장(射場)에서 파생된 ‘사시’라는 곳은 활을 쏘던 군사훈련장이었다.
위막동산은 수산진 주변에 분포했던 수산·성산·지미 봉수대와 협자·오조포·종달 연대 등지에서 통신연락을 받아 수산진으로 중계역할을 하는 막이 있었던 동산이다.
삼셩제궤는 수산2리의 옛 이름인 곶앞(고잡) 마을들인 큰가름·통개낭물·동백낭가름 등 세 동네 사람들이 모여 협의하던 동굴이름이고, 석곽불(굴)미는 석곽분묘(石槨墳墓)의 변음으로 수산2리 사무소 서쪽 200m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의 묘로 추정되는 방묘이다.
소자문으로도 불리는 효자문거리는 홍달한의 효자정려문이 있는 곳이고, 솟대왓은 수산초등학교 동쪽 길가의 지명으로 마을에 문문과의 급제자가 나오면 마을의 요지에 솟대를 세워 널리 알리고 잔치를 베풀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솔대왓은 병사들이 사장(射場)에서 화살대로 사용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던 지역이고. 사싯(四時)동산은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한 4계절 기원제인 四時祭를 지내던 동산이다.
또앉은모르는 고성리가 정의현청 소재지이던 시절 사또(원님)인 현감이 지나가다 쉬던 동산이다. 선비동산은 선비들이 순력을 다니다가 쉬었던 높은 지역으로 이곳에 많은 선정비가 세워졌었다.
신술모르는 숲이 울창해 신이 사는 숲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근처에 신술일뤠당이 있다.
별과원(別果園)은 수산2리 사무소 서북쪽에 있는 수산방호소에서 관리하던 과원이고, 수마포는 일출봉 남쪽의 포구로 수산평에서 기른 말들을 수송했던 포구이다.
▲제주도 민속문화재인 수산본향당
2005년 제주도 민속자료(9-4)로 지정된 수산본향당은 마을의 생산(生産), 물고(物故:죽음), 호적(戶籍), 장적(帳籍) 등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당이다.
‘올뤠모르 하로산당’이라 불리는 수산본향당은 수산1·2리, 고성, 오조, 동남, 성산리 등 여러 마을에서 본향으로 모시는 통합형 신당이다.
수산리에는 올렛모르 하로산당인 본향당을 비롯해 진안할망당, 신술(일뤠)당, 거문머들당 등이 있다.
제주도의 신당 중 민속(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본향당은 수산본향당을 비롯해 송당본향당, 새미하로산당, 와흘본향당, 월평다라쿳당 등 5곳이다.
수산본향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신과세제, 2월 영등굿, 7월 마불림제, 10월 시만국대제를 맞아 신에게 정성을 들이고, 매월 음력 이렛날, 여드렛날과 집안의 우환에 따라 당을 찾기도 한다.]
19:15~19:33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3990 번지에 있는 수산한못을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일주동로 4282 번지에 있는 성산일출봉농협하나로마트로 이동 [18분, 11.5km]
[2025년 04월 28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몰시각 : 19시13분]
19:33~19:50 성산일출봉농협하나로마트에서 여행 중 먹을 간식과 음료를 구입
19:50~19:55 렌트한 승용차로 성산일출봉농협하나로마트를 출발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일주동로 4186 번지에 있는 코델리아S호텔로 이동 [5분, 2.3km]
[코델리아S호텔 (전화번호 : 064-783-0053)
아고다 11월5일 예약(예약번호 : ) 4월22일 스탠다드 트윈룸(성인2) 1박 숙박요금 : ₩36,688(세금 및 봉사료 포함) [월일 현대카드로 결제]
조식 이용 가능(1인당 13,000원, 전날 저녁 10시 이전에 결제를 하면 11,000원)
조식 시간 : 7시~9시30분
조식 내용 : 밥, 미역국, 어묵볶음, 소세지볶음, 샐러드, 샐러드소스, 빵, 바나나, 단호박, 요거트, 우유, 시리얼, 커피, 차종류, 탄산음료, 김치, 콩나물무침, 누룽지 등
옥외 주차장 넓음
편의점이 호텔 내에 있음 ]
19:55~20:05 코델리아S호텔 층 호 객실로 입실하여 짐 정리
20:05~20:13 걸어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오조로97번길 17 번지에 있는 ‘지은이네밥상’ 식당으로 이동 [468m, 8분 소요]
[지은이네밥상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오조로97번길 17 (우)63640
지번성산읍 고성리 1174-1
운영시간 월~토 07:00 ~ 20:30
월~토 휴게시간 15:00 ~ 17:00
연락처
064-784-2915 대표번호
매뉴
비빔밥 10,000원
청국장 백반 10,000원
보말미역국 10,000원
김치찜 (1인분) 15,000원 (2인 이상 주문)
갈비찜 (1인분) 15,000원 (2인 이상 주문)]
20:13~21:00 ‘지은이네밥상’ 식당에서 청국장 백반에 공기밥을 1개 추가하고 막걸리 1병을 반주로 저녁식사
[저녁식사 비용 14,000원=청국장 백반 1만원+공기밥 1개 추가 1천원+막걸리 1병 3천원]
21:00~21:08 걸어서 코델리아S호텔 층 호 객실로 회귀 [8분 소요]
21:08~22:30 코델리아S호텔 층 호 객실에서 샤워 후 TV를 보면서 휴식
22:30~ 코델리아S호텔 층 호객실에서 취침
제주도 관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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