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에 있는 경찰청 인권센터는 작년에 한번 왔었지만 문이 닫혀 외관 밖에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내부까지 다 보게 되었다. 남영역까지는 집에서 멀어 일찍 나왔는데 너무 일찍와서 30분이나 기다렸다. 오늘도 멤버는 조촐했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도 연관이 깊다. 지금은 인권센터이지만 예전에는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위장을 하고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들을 취조,고문하던 곳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87년 1월 14일 시국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하지만 기자에 의해 보도기사가 나가게 되고, 경찰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옯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가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며 사건은 1월 19일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되고,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층에 올라가보니 고 박종철열사가 쓰던 물건들과 편지등이 있었고 민주화운동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께 지난 '두개의 문'과 관련해 질문했다. 경찰청인권센터에서는 이렇게 자신들이 인권에 대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용산참사에서 경찰이 민간에게 폭력을 행사한것(과잉진압)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이곳은 인권교육을 하는 곳이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으니 어떻게 확정지어 단언할 수 없다고 하셨다. 별로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조금 휴식을 취하고 진짜 민주인사들이 고문 및 취조를 받던 그 곳으로 올라갔다. 나선형 계단이 너무 무서웠다. 취조를 받기 위해 이 계단을 올라갔던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참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해야하는지 방이 참 많았고 방음도 잘되었다. 그리고 카메라로 언제든 방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다. 너무 무서웠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받던 방을 복원해논 곳도 들어가봤는데 욕조가 눈에 띄었다. 화려하게 꾸며 놓았지만 저기서 물고문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으스스하게 보였다.
나랑 별로 나이 차이도 안나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도 많았는데 얼마나 무서웠을까싶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목숨바쳐 이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준 당시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정말 감사를 드린다. 말로 떠드는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다. 이들의 고통을 기억해 우리나라를 짊어질 멋진 청년이 되도록 청소년기를 의미있게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