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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rand Tavernier는 문제작을 많이 만들어내는 기량 있는 프랑스 감독인데, 우리나라에는 별로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군요.
최근에 Tavernier의 작품들이 많이 인터넷에 릴리즈되어 반가웠는데 자막이 없는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습니다.
1976년작인 '판사와 살인자(Le Juge et L'Assassin)'는 제가 본 그의 작품 중 제일 인상 깊게 본 영화입니다.
19세기말 프랑스에 실제로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정신병자인 범인과 그를 취조하는 판사와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살인사건을 통해 살인사건 보다는 그 시대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시도한 작품인데 제가 보기에는 '살인의 추억' 보다 그 시도에 훨씬 더 성공한 작품입니다.
한 광인의 횡설수설을 통해 그 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비춰 보려는 일종의 사회비평 영화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젊은 날의 이사벨르 위뻬르(Isabelle Huppert)의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육군의 상사인 조셉 부비에는 짝사랑하던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자 그녀를 권총으로 쏘고 자기 머리에도 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집니다. 부비에는 일시적 심신상실로 판정되어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되고, 정신병원에서 3 개월을 보낸 후 부비에는 머릿속에 박힌 두발의 총알도 제거하지 않은 채 정상으로 판정받고 퇴원합니다.
그 후 부비에는 1893년에서 1898년 사이 프랑스 남부지방을 부랑자로 전전하며 혼자 있는 양치기 소년 소녀들을 골라 강간살인에 시체를 난자하는 엽기적인 연쇄살인행각을 벌입니다.
그가 체포될 때까지 12명의 희생자가 그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빠리꼬뮨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기 전이었으며, 드레퓨스 사건의 와중에서 극도의 국론분열에 휩쓸려 있었고,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테러공세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까지 암살을 당해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의 혼란상은 광인 부비에의 횡설수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며 당시 유행하던 혁명가을 읊조립니다.
성모 마리아를 지극히 숭배하여 당시 성모 마리아가 출현하였다고 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가 된 루드르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종교와 성직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자신을 잔 다르크에 비교를 하면서 자신의 살인행각을 잔 다르크처럼 신의 부름을 받고 행한 소명이라고 강변하는가하면, 또 반대로 자신은 광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렸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자신이 광인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퇴원시킨 정신병원의 의사들이 진정한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광인의 이런 횡설수설은 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제 정신으로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주변 세상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그대로 비쳐주는 거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살인을 한 다음에는 스스로도 괴로워서 들판을 뒹굴면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서는 사악한 범죄자라기보다는 세상을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약한 영혼의 방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체포된 부비에를 담당하게 되는 판사인 에밀 루쏘는 자기 일에 충실한 소시민적인 사람입니다.
이미 많은 나이에 어머니를 아직 모시고 살고 있으며 사귀는 애인이 있지만 어머니를 불편하게 할까봐 집에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키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소시민적인 평범함과 안정 속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비에가 의미하는 것은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악들이 한 사람을 통해 응축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하층민의 혁명적 정치운동, 하층민의 범죄성, 지적 도덕적 타락이 부비에 한 사람을 통해 모두 동시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적대시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부비에 한사람을 통해 드러날 때 그 자신의 편견과 적대감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는 자기반성의 의무에서 해방되고 누리는 자로서의 죄책감에서 벋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될 사람을 재판에 걸어 기요틴에 보내고 맙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나키스트고 순교자임을 자처하던 광인은 아나키스트도 순교자도 아니었지만 처형당함으로써 진짜 순교자가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그의 처형을 환영하던 여론은 결국 동정적으로 변하여 부비에를 박해받는 민중의 순교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업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부비에가 즐겨 부르던 혁명가가 울려 퍼지게 됩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하던 곳에서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을 발견하여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사회 기득권층의 하층민에 대한 몰이해, 불신, 경멸, 두려움, 적대감, 특히 정치적 급진주의와 하층민의 범죄, 지적 도덕적 열등성을 관련지어 폄하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경우 계층 간의 거리나 갈등이 아무리 심한 경우라도 다른 많은 나라의 예와 비교해 보면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한국에서의 계층갈등은 아직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정도의 수준이지 이 영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넘을 수 없는 몰이해와 적대감의 벽이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의식도 경멸이나 우월감, 몰이해는 있어도 아직 두려움이나 적대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계층 간의 벽이 점점 높이 쌓아올려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습이 한국사회의 Back to the Future가 아니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부비에가 즐겨 읊조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현장에서 부르는 혁명가의 가사를 번역해서 올려봅니다.
내 사랑이여 우리는 운도 없다네.
전쟁이 터졌는데 우리는 젊었다네.
70년의 겨울은 고통으로 가득 찼네.
봄이 왔건만 더 나빠지기만 했다네.
라일락이 벨빌의 언덕을 가득 덮었고
몽마르트의 언덕바지와 뮈동의 숲을 가득 채웠지.
행복한 시절이라면 우리는 꽃을 따러 갔겠지만,
우리는 꼬문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동지가 말했네.
“베르사이유의 악당들이 빠리로 쳐들어온다.”
당신이 말했네.
“당신과 함께 바리케이드로 가겠어요,
아내가 있을 곳은 남편 곁이니까요.“
P.S. 저는 이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당나귀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씨네스트에 가시면 영어자막을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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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정부주의자, 글쎄요... 비됴점에 가서 꼭 빌려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