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가정] 삼포 세대의 혼인
경제적 부담·개인주의 만연, 혼인은 필수 아닌 선택… 가톨릭의 좋은 혼인 프로그램, 일반에도 개방해야
“혼인은 혼인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꽃과 드레스, 사진이 전부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5월 6일 수요 일반 알현 때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혼인성사의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하며 이같이 당부했다.
교황이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혼인할 때 중요한 것이 예식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신랑과 신부가 평생을 함께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기보다 단 몇 시간 만에 끝나는 ‘식’ 준비에만 매달리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교황이 언급한 ‘꽃과 드레스, 사진’에서 한국 사회의 결혼 문화를 대표하는 ‘스ㆍ드ㆍ메’가 겹쳐진다. 스ㆍ드ㆍ메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의 앞글자를 딴 줄임말이다. 어느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어떤 드레스를 입고, 어떻게 화장(메이크업)을 하는지가 혼인을 앞둔 예비 신부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이와 함께 예비신랑·신부는 혼인식 전까지 예식장과 집을 구하고, 혼수품을 사고, 신혼여행지를 고르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어떤 가정을 꾸려 나갈지를 고민하고 대화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혼인 자체를 안 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간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했다는 ‘삼포 세대’가 요즘 20~30대다. 극심한 경제 불황과 취업난 속에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이들에게 혼인은 부담스러운 일이 돼 버렸다. 또한 ‘초라한 커플보다 화려한 싱글’을 선호하는 삼포 세대는 혼자 사는 게 훨씬 자유롭고 좋은데 왜 굳이 혼인해야 하는지 되묻는다.
이처럼 우울하고 서글픈 현실에서 “혼인은 성사로서 신앙과 사랑의 위대한 행위”라며 혼인을 독려하는 교황의 발언은 청년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갈까. 비뚤어진 혼인 문화 속에서 혼인 자체를 꺼리는 청년들을 향해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보여줘야 할까.
예식에 매몰된 혼인
혼인을 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이 대부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혼인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예식에 관한 정보를 얻으며, 혼인식 준비를 시작한다. 평일엔 직장에 휴가를 내면서까지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주말엔 예식장을 답사하고 혼수품을 사는 일정이 혼인식 때까지 계속된다.
모든 것이 혼인식 준비에만 맞춰져 있다. 다른 예비부부들은 어디서 식을 올리고, 혼수품은 뭘 사고, 비용은 얼마를 썼는지 끊임없이 검색하며 남들과는 좀더 다르게, 좀더 저렴하면서도 아름다운 식을 올리기 위해 열을 올린다.
그러면서 혼인 준비 기간 중 다툼은 필수요소가 됐다. 예비부부 중 십중팔구는 혼인을 준비하며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다”느니 “이 혼인을 하네 마네” 하며 언성이 높아지곤 한다.
김안젤라(33)ㆍ이성훈(32, 가명)씨는 혼인한 지 2개월 된 신혼부부다. 두 사람은 2014년 여름 혼인하기로 하고, 양가 부모님 상견례를 시작으로 8개월간 혼인을 준비했다. 정확히 말하면 혼인식을 준비했다.
아내 김씨는 “남편과 2년 동안 연애하면서 싸운 적이 없었는데, 혼인을 준비하는 8개월간 정말 많이 싸웠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남편이 부모님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더라. 남편을 통해 시부모님과 소통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무척 답답했다”고 말했다. 또 혼인은 신랑과 신부 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이 얽힌 집안 행사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어디서 살지, 식장은 어디로 할지 정하는 것부터 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솔직히 예단, 예물 같은 건 생략하고 싶었지만, 양가 부모님께선 ‘요즘 젊은 애들이 몰라서 그러는 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고 하셔서 하는 수 없이 남들 하는 만큼 다 했어요.”
김씨 부부는 “막상 혼인하고 한 달 정도 지나고 보니, 혼인을 위해 준비했던 대부분이 혼인 예식을 하는 딱 하루를 위한 것이었다”면서 “정작 혼인한 뒤 부부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준비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 예식장에서 혼인한 이들은 남편 이씨가 신자가 아니어서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했다. 주말에 겨우 시간을 내 혼인교리를 수강한 부부는 “들을 땐 좋았는데, 듣고 나선 또 집 보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좀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남자 친구와 내년에 혼인을 계획하고 있는 이유리(스텔라, 30)씨는 예식장을 어디로 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는 1년에 미사 몇 번 안 드리는 ‘무늬만 신자’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예식장 혼인보다는 성당에서 하는 게 더 분위기 있는 것 같아 좋은데, 성당 혼인 비용이 싸지도 않은 데다 이런저런 제약이 많아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요즘 이씨가 혼인 준비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곳은 혼인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다. 틈만 나면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후기’를 읽으며 ‘스드메’ 검색에 빠져 있다. 이씨는 또 “혼인할 때 양가 부모님께 챙겨 드려야 할 것도 많고, 절차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면서 “왜 다들 혼인 준비하면서 지치고 싸우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혼인을 포기한 2030
지난해 중소기업에 취직한 김진명(32)씨는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해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취직을 준비하는 동안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김씨는 “주변에 혼인을 준비하거나 혼인한 친구들을 보면 혼자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다들 빚을 내 혼인을 하는데 (빚을 져가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특히 남자들은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이 큰데, 요즘 집값이나 전셋값이 한두 푼이 아니지 않느냐”고 푸념했다.
서른 살을 앞둔 회사원 김지희(보나, 29)씨는 “혼인을 하면 여자가 훨씬 손해인 것 같다”면서 “아무래도 가정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하게 되니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한 김씨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건 좋지만, 그러기엔 희생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올해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혼인ㆍ이혼 통계에 따르면 혼인 건수는 30만 5500건으로 2004년(30만 8600건)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는 6건으로 1970년 통계를 시작한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처음 혼인을 하는 나이는 점점 높아져 남자 초혼 평균 나이는 32.4세, 여자는 29.8세로 집계됐다.
혼인율이 줄어들고, 초혼 나이가 많아지는 것은 젊은이들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막대한 혼인비용이 주된 이유다.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결혼 비용은 2003년 9088만 원에서 2013년 2억 2500만 원으로 10년 사이에 2.5배나 껑충 뛰었다. 한 결혼 전문업체가 최근 2년간 혼인한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제 혼인 비용은 평균 2억 3800만 원이었다. 이 가운데 주택 비용이 1억 6800만 원으로 71%를 차지했고, 예식 비용에 1900만 원, 신혼여행과 예물, 예단, 혼수 등에 5000만 원을 쓴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함께 삼포 세대에겐 혼인은 선택일 뿐 필수가 아니다. 통계청 2014년 사회조사 결과에선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2명 중 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거꾸로 말하면 미혼 남녀의 절반은 혼인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미혼 남자는 51.8%가, 미혼 여자는 38.7%만이 혼인에 찬성했다.
이는 우리 사회 전반에 퍼진 개인주의 문화를 대변한다. 나 홀로 살면 편하게 잘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복잡하고 힘든 혼인을 하느냐는 인식이다. 지난해 ‘결혼과 출산’을 주제로 열린 가톨릭 인본주의 포럼에서 한금윤(연세대) 박사는 88만 원 세대의 사랑과 결혼 문화를 발표하면서 “(삼포 세대는) 전통적인 가족 윤리보다 현대 사회의 물질적 소비가 주는 자족적 쾌락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관계 맺기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는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불안한 청년들이 상대방과 갈등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돈까지 써야 하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관계 맺기에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혼인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예식이 아닌 성사를 준비시키는 교회의 노력
한금윤(연세대) 박사는 “경제적 불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포기하는 일은 분명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 때문에 자발적으로 혼인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된다고 해서 혼인이 늘어나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혼인을 인생의 위험과 방해물로 판단하는 젊은 세대들의 의식과 물질만능주의 세태가 바뀌지 않는 한 혼인이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서울대교구 한남동본당 주임 이형전 신부는 “돈이 많아서 거창하게 혼인한 이들이 잘사는지 살펴봐야 한다”면서 “돈이 없어서 혼인할 수 없다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난한 청년들에게 혼인 미사 장소로 성당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이 신부는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혼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혼인에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첫댓글 혼인성사의 의미와 가치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