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제 신부의 서품상본.
신학대학 1학년 때, 선배 신부님들의 첫 미사에 참례하고 받은 상본과 성구들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여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동료들에게 “내 것”이라고 선언하고 감히 1학년 때 미리 정해버린 성구가 바로 마태오복음 10장8절의 말씀입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생이 된 것도, 신학교를 무사히 잘 마치고 사제로 서품을 받은 것도, 모두가 하느님과 신자 분들로부터 ‘거저 받은 은총과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넘치는 은총과 사랑을 평생 잊지 말고 살자며 선택한 말씀이었고, 나를 언제나 되돌아 볼 수 있게 일깨워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26년간 사제로 살아오면서 그 말씀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 무모한 선택을 한 철 없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거창본당 주임을 맡아 새 성당을 짓게 됐을 때 일입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건설업체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후 자금을 마련 못해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멸치, 김, 미역을 판매하며 눈물겹게 노력한 본당공동체, 그리고 전국에서 기도와 정성을 보태주신 신자들 덕분에 하느님의 집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제법 시간이 흘러 지금의 제 모습을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점점 더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적게 주고 있는 저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길에 나서며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도 제대로 못 그리고 있는 저 자신을 나무라는 부담으로 다가올 때 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꾀가 납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루카 10,7) 지금에 와서 이렇게 서품성구를 바꾸면 안 되겠지요? 이 말에 본당 신자 분께서 호통을 칩니다. “신부님, 마 그냥 첫 마음으로 사소.”
‘씰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고양이라도 제대로 그리라고 핀잔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 받아들이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것, 제가 거저 받았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 김용찬 신부(요한 사도, 서울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평양교구 1호 사제, 2016년 2월 5일 서품)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