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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직吳冕稙(吳冕植, 吳晃植)은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양산학교 중학부를 중퇴하고, 경성측량강습소에 들어가 3개월 간 수학하였다. 이후 평양 대성중학에 들어갔지만 그 역시 중퇴하고, 1911년 6월 평양 사동광업소 고방(高坊)출장소에서 약 1년간 측량기술 견습으로 있었다.
사직한 뒤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구장(區長)에도 취임하였다. 1917년경 다시 사동광업소에 취직할 의도로 평양으로 갔다가 1919년 1월경 귀향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에는 진남포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조선일보」 안악지국 기자와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로서 활동하였다. 민족주의자인 김동우, 한정교 등과 교류하는 한편, 해외로부터 들어온 「독립신문」을 탐독하였다.
조선 말기부터 전개되어 오던 자주적 근대화운동은 실패하고, 결국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하였다. 국내에는 선실력양성후독립론자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사회진화론적 사고에 입각하여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서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 제1차 세계대전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점차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회개조론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사회개조론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국내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파악하고 독립을 도모하였다.
마침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이를 기화로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당히 고무되었고,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국내에 연통제를 구축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로 파견되었는데, 홍완기(洪完基)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21년 8월 국내로 밀입국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홍완기가 황해도 은율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오면직은 1921년 음력 7월 중순 그를 찾아가 임무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일제 경찰이 홍완기의 입국사실을 탐지하자 선생은 김동우와 함께 일제 경찰의 거동상황을 정탐하면서 홍완기를 서울로 탈출시켰다. 하지만 홍완기가 그해 10월에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선생은 김동우와 함께 인천과 신의주 등지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921년 11월 20일경 단둥, 펑텐, 톈진을 경유하여 상하이로 갔다. 선생은 옛 스승인 김구를 만나 상하이에 있던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1922년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자 김구와 조상섭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고, 한국노병회의 파견원으로 하난성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펑위샹이 경영하던 육군병공창 좌도부에 들어갔다. 1925년 1월경 좌도부를 사직하고, 광둥・청두를 경유하여 1929년 여름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로 간 선생은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1930년 10월 말 재 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만주행에 동참하였다. 1930년 3월 신현상과 최석영이 국내로부터 58,000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가자, 이 자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무정부주의자동양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대회는 갑론을박 끝에 이회영의 중재로 이 자금을 만주에서의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제 경찰에 의해 숙소를 침탈당해 신현상과 최석영은 일본영사관에 넘겨지고 자금은 중국 경찰에게 약탈당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부터 베이징 무정부주의자동양대회에 파견되었던 이을규마저 자금 확보를 위해 톈진에서 상하이로 가다가 1930년 9월 선상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긴급총회를 열어 중국 중남부에 산재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북만주로 집결시키는 것만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데 합의하고,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즉시 북만주로 초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초청을 받은 재 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만주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던 오면직은 1930년 12월 말 이회영의 두 딸 이규숙・이현숙과 정화암・백정기・김지강・장기준 등 14인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 집결한 아나키스트들은 북만중학 개교를 서두르는 한편, 연말연시의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방조직과 사상계몽, 생활개선과 지도 등 2대 목표를 가지고, 각 부락을 순회하면서 강연・공연 등을 하였다.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 상호부조의 협력과 각인의 자주 자치적 단결에 의해서만 발전할 수 있고 민족해방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면서 협동자주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의 이러한 활동은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족총연합회의 내분과, 아나키스트들과 민족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한족총연합회의 활동을 위축시켰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나키스트들과 민족주의자들 간의 갈등으로 아나키스트들은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를 포기하고 1931년 8월 하순 이후 류자명이 보내온 돈으로 여비를 삼아 순차적으로 중국 관내로 철수하였다.
상하이로 돌아간 오면직은 상해연맹1)과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0년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는데, 그 결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1930년 3월 신현상과 최석영이 국내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가자, 류기석은 신현상과의 협의 하에 대규모 파괴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동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갔다. 류기석은 상하이에서 1930년 4월 류자명, 장도선, 정해리, 안공근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자본주의사회의 기구를 근본부터 타도하고, 일체의 권력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며, 상호부조・자유연합의 정신에 기초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창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① 우리들의 일체 조직은 자유연합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② 일체의 정치적 운동과 노동조합지상운동을 부인한다 ③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한다 ④ 위도덕적(僞道德的) 종교와 가족제도를 부인한다 ⑤ 우리들은 만인이 절대적으로 자유 평등한 이상적 신 사회를 건설한다” 등의 강령을 제정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결성된 이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1930년 말 이회영이 상하이로 가면서 점차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으며, 1931년 8월 하순 이후 만주에서 철수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대거 합류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1년 8월 중순과 10월 중순 2회에 걸쳐 백정기의 숙소 등에서 정기집회를 개최하여 개편작업을 진행하였다. 오면직을 비롯하여 류자명, 이회영, 이달, 원심창, 김야봉, 백정기, 정화암, 이용준, 박기성, 정해리, 김광주, 유산방, 나월환, 김지강, 김동우, 이규창, 안우생, 현영섭, 최동철, 곽흥태, 변혁(卞革), 창얼캉(常爾康) 등이 회합하여 각 지역의 변화된 사정과 앞으로의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한 결과, 류자명을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하고, 산하에 남화구락부를 설치하여 선전 작업을 담당케 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연구・토론 등 각종 회의를 개최하여 아나키즘 이론을 연구하였으며, 각종 기념일에는 격문을 살포하여 재 중국 한국인 청년들에게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등 일반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오면직은 이용준, 백정기, 이달, 김지강, 엄형순, 이규창, 박기성 등과 함께 1931년 12월경부터 1932년 3월 하순경까지 상하이 시외 난시앙 입달학원 부근의 독립가옥에서 동거하면서 아나키즘연구회를 개최하여 아나키즘을 연구하였다.
오면직은 아나키즘 선전 작업에도 참가하였다. 1931년 11월 중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2) 간부 왕야챠오와 고문격인 후아준시의 제안으로 결성된 항일구국연맹3)은 프랑스조계 싱먼로(騂門路)에 공도인쇄소를 설립하고 1931년 11월부터 기관지 『자유』를 주간으로 발행하여 아나키즘 이론투쟁을 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오면직은 12월 8일 백정기의 권유로 김지강, 이달, 엄형순 등과 함께 항일구국연맹에 가입한 뒤, 류자명, 정해리, 백정기, 정화암, 왕야챠오, 후아준시, 바진 등과 함께 공도인쇄소 경영에 참가하였다. 오면직이 맡은 역할은 정해리와 함께 『자유』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인쇄소 설립은 정해리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는데, 1932년 3월 상하이 백정기의 숙소에서 백정기, 이용준, 이달, 오면직, 정해리 등이 회합한 자리에서 정해리가 “중국인 동지 왕야차오에게 자금 2만 원을 거출 받아 공도인쇄소를 신설하여 우리 남화한인청년연맹으로 하여금 경영케 하여 운동자금 조성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후, 왕야차오로부터 자금을 제공받아 인쇄소를 설립한 것이다. 하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활발한 활동은 전개하지 못하였다. 결국 1932년 4월 『자유』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당국에 의해 발행정지 당하고 정해리는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오면직의 아나키즘 선전 작업은 1933년에도 이어졌다. 1933년 3월 1일 한국독립선포기념일을 맞이하여 동년 2월 하순경 이용준의 집에서 이용준, 백정기, 원심창, 류자명, 박기성, 정해리, 이규창, 정화암, 이달, 엄형순, 김지강 등과 회합하여, 한국의 독립과 무정부주의사회의 필요성 등을 선전하는 유인물 약 60매를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 1일에는 메이데이투쟁의 의미로 동년 4월 하순경 이용준의 집에서 이용준, 류자명, 박기성, 정해리, 정화암, 이달, 김지강 등과 회합하여, “메이데이의 의의와, 국가권력과 사유재산제를 부인하고 무정부주의사회 건설을 요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선전유인물 약 500매를 작성 배포하기로 협의하였다.
1923년 1월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 민중직접혁명론과 의열투쟁적 직접 행동론을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론과 그 방법론으로 정립한 뒤, 아나키스트들은 의열투쟁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로 삼았다. 재 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30년대 중반까지 의열투쟁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1년 8월 하순 이후 만주에서 철수한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 개편작업에 참가한 뒤, 정화암의 주도하에 의열투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민족해방운동기지로서의 만주를 상실한 이들은 ‘악랄한 야수와 같은 전 세계의 지배자’가 식민지 민중을 강력하게 억압하는 상황에서 식민지 민중에게 남겨진 무기는 직접행동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의열투쟁 수단을 고집했다. 이들은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투쟁활동을 전개했다.
오면직도 의열투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대상은 일본제국주의 요인이나 기관, 친일파 등이었다. 오면직의 의열투쟁 활동을 일본제국주의 세력 척결 활동, 친일파 처단 활동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① 일본제국주의 세력 척결 활동오면직이 일본제국주의 세력 척결을 위해 참가한 의열투쟁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모의에 참가하였다. 1932년 4월 초순 오면직은 백정기의 숙소에서 개최된 이용준, 백정기, 류자명, 이달, 중국인 화쥔스 등과의 회합에 참가하였는데, 이 회합에서 류자명은 4월 29일 천장절을 맞아 상하이 훙커우 신공원에서 개최될 봉축축하회에 각 요로의 대관 다수가 참집할 예정인 바, 당일 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그들을 폭살하자고 제의하였다. 다들 거기에 찬성하고 수단방법을 협의한 결과, 화쥔스는 폭탄, 권총, 탄환, 자동차 및 자금 등을 준비하고, 이용준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후 김구와의 절충으로 거사는 김구 측에서 실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둘째, 상하이에 있는 일제 기관을 파괴할 것을 모의한 회합에 참가하였다. 북경연맹을 결성한 류기석이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이기 위해 거사를 이행할 것을 계획하고, 재북평동북의용군후원회와 푸젠 방면의 항일회 등으로부터 자금 7,000원을 받은 뒤, 거사에 참가할 동지를 물색하러 1932년 10월 상하이로 갔다. 류기석은 난시앙 입달학원에 근무하던 류자명의 주선으로 11월 하순 상하이 프랑스조계 백정기의 숙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 오면직도 이용준, 엄형순, 이달, 정해리, 백정기, 원심창, 박기성, 정화암, 김야봉, 야타베무우지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 자리에서 류기석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하여 일본제국 세력이 북중국에 파급되는 것은 명료한 것으로, 동 방면의 인심은 동요하고 있다. 고로 이때 우리 동지들은 북중국 방면의 일본 군부 또는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그 수뇌를 암살하고 인심을 외포케 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일본제국의 북중국 진출을 방해”할 것을 제안하고, 중국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을 밝혔다. 일본의 북중국 진출의 방지책과 기타에 대해 협의한 결과, 오면직은 백정기, 정화암, 야타베무우지, 박기성, 정해리, 이달, 엄형순 등과 함께 자금을 상하이 방면에서 폭탄을 투척하고 향후의 운동자금을 조성하는 데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원심창, 김야봉, 이용준 등이 류기석의 제안에 찬성하는 바람에 결국 류기석, 원심창, 이용준 3명이 북중국 방면의 치안 교란공작을 실행에 옮기고, 김야봉은 지린성 하이린 방면 동지와의 연락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셋째, 아리요시아키라 주중일본공사 암살미수사건에 참가하였다. 1933년 초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아라키 육상의 밀명에 의하여 4,000만 엔을 휴대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국민당정부 군사위원장 장제스를 매수하여 2월 중순에 국민당정부와 군벌로 하여금 만주를 포기하게 하는 내용의 밀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1933년 3월 5일 무렵 백정기・원심창・이강훈・오면직・엄형순・김성수・정화암・이이덕・박기성・정해리・허열추 등 항일구국연맹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회합을 개최하여 위기를 타개할 대책을 논의했다. 원심창이 아리요시 공사가 귀국하여 밀약이 성립되면 아나키스트들이 설 땅을 상실하게 될 것인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리요시를 암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하였다. 이들은 3월 17일 밤 아리요시가 육삼정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암살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착수했다. 암살을 결행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백정기가 당첨이 되었고, 백정기는 이강훈을 지명하여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회합을 하여 살해용 무기, 살해 장소, 살해 방법, 살해 후의 처치 등에 대해 결정하였으며, 류자명,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등과 모인 자리에서 아리요시를 암살하고 난 뒤 흑색공포단의 명의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 오후 오면직은 정화암・원심창 등과 함께 백정기와 이강훈의 송별연에 참가하였으며, 미리 준비해놓았던 폭탄을 프랑스조계 민구오로 서성리자동차부 앞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에게 교부하였다. 오후 8시 반 정화암・야타베무우지 등과 함께 백정기와 이강훈을 암살 장소 육삼정 부근까지 배웅하였다. 아리요시 암살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다음날 아침에 상하이, 베이징, 난징, 톈진 등지의 각 신문들이 아리요시공사 암살미수사건을 일제히 대서특필하여 보도하는 바람에 장제스와 아리요시의 밀약은 세상에 폭로되었다. 이는 중국인들 사이에 반장(反蔣)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반장(反蔣) 세력을 결집시켜 장제스 정권을 위기로 몰고 가는 등 중국 정계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② 친일파 처단 활동상해연맹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친일파를 대상으로 많은 의열투쟁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 오면직이 참가한 활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의 밀정 이규서와 연충렬을 살해하는 데 참가하였다. 1932년 12월 정화암이 이규서와 연충렬이 이회영을 일제 경찰에 밀고하였다면서 이들을 살해할 것을 제안하자, 오면직은 정화암, 이달, 백정기, 원심창, 김지강, 박기성 등과 이들을 살해할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달이 아나키스트운동의 특별공작을 공동으로 실행할 것에 대해 논의하자고 이규성와 연충렬을 입달학원으로 유인하였다. 오면직과 이달은 상하이로 공작자금을 입수하러 가자면서 그들을 남상역 철교 부근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로부터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것을 자백 받고 교살하였다.
둘째, 1933년 남화한인청년연맹 조직개편 당시 백정기, 이달, 박기성, 김야봉, 김지강, 이용준, 엄형순, 야타베무우지과 함께 실행부에 배치된 오면직은 일제의 밀정 이종홍(안경근의 처생질)을 교살하는 데 참가하였다. 오면직은 1933년 5월 난시앙 입달학원에서 정화암, 엄형순, 김지강, 안경근 등과 회합을 가지고, 이종홍을 일본 총영사관의 밀정으로 단정하고 처단하기로 하였다. 동일 오후 3시경 안경근이 이종홍을 난시앙 입달학원 부근 창얼캉의 집으로 유인한 뒤, 오면직은 엄형순, 김지강 등과 함께 그로부터 일본 총영사관 밑에서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자백 받고 그 자리에서 처단하였다.
셋째,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하는 데 참가하였다. 1933년 7월 22~23일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 원어치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 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 이에 오면직과 엄형순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잠복하여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 1933년 8월 1일 밤 엄형순이 옥성빈의 집 앞으로 오던 옥관빈을 사살하였다. 상해연맹에서는 8월 9일 한인제간단의 명의로 <역도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참간장을 각 방면에 살포하여 옥관빈의 주구적 죄상을 6개조의 죄목으로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자싱(嘉興)에 도착하여 민족주의운동에 전념하던 오면직은 김구와 함께 한국독립군특무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4년 12월 말경 난징에서 안공근, 안경근, 노태연, 이의흥 외 군관학교 졸업생 약 30명이 회합하여, 김구의 발안으로 무력적 직접행동으로 한국을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독립군특무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규약을 결의하였다. 김구를 대장, 안공근을 참모장으로 추대하였다. 오면직도 한국독립군특무대 결성에 참가하여 비서에 임명되었다. 한국독립군특무대는 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35년 1월 이후 군관학교 입학예비생 약 30명에게 중국어와 수학 등을 가르쳐서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이들이 졸업하면 난징으로 데려가 합숙시키는 등 이들을 지도하여 특무대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면직은 1935년 말 내지 1936년 1월 무렵 류형석, 한도원 등과 함께 김구와 결별하였다. 이후 그는 김동우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아나키스트들과 합류하였다. 이를 계기로 1935년 3월 이용로 암살 이후 침체에 빠져 있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남화통신』을 발행하여 각 방면으로 배포하면서 아나키즘 선전과 동지 획득에 노력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전개했다.
③ 독립운동 자금 확보 노력1933년 6월 초순경 오면직은 이용준 숙소에서 이용준, 김지강, 정화암, 이달, 박기성 등과 회합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정화암이 평안북도 모 금융조합 이사 김창우와 박모(朴某)가 동 조합의 공금 약 4만 엔을 휴대하고 프랑스조계 대성여관에 투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습격하였으나 자금 확보에는 실패하였다.
자금 확보노력은 한국맹혈단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한국국민당으로 복귀하였다가 김구와 결별하고 상하이로 가서 아나키스트 대열에 합류한 오면직은 김승은 등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별동대로 맹혈단을 조직하였다. 1936년 1월 상순경 김창근이 맹혈단에 가입하였으며, 맹혈단 결당식은 1936년 2월에 거행되었다. 오면직은 김창근, 류형석 및 한도원 등과 함께 1936년 1월 중순경부터 동년 2월 중순경까지 조상섭, 이갑성, 공개평, 이철진, 박진, 정찬성, 김하종, 황복용, 최영택 등에게 모금활동을 벌여 최영택으로부터 200원, 박진으로부터 10원, 이철진과 황복용으로부터 각각 15원씩을 제공받았다. 이 자금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맹혈단은 김동우와 오면직을 단장 및 재정부장으로 선출하고 다음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一 금후 한국독립당재건파와 제휴하고, 새로이 혁명단체를 조직하여 중국인 방면으로부터 활동자금을 얻어 대대적으로 활동할 것
一 김동우는 항저우로 가서 재건파 조소앙, 박창세와 교섭하고 그것을 합체하여 강력한 혁명단체로 발전시킬 것
一 오면직 기타는 당분간의 활동자금을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부터 모집할 것
一 우리들은 난징에 있는 야심정치가 등처럼 타락하지 않고 혁명도덕에 비추어 행동할 것
위의 결정에 따라 오면직은 김승은 등과 함께 상하이에 있던 한국인 자산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해줄 것을 강요하였다. 2월 23일 류형석 등은 상하이 영국조계 징안시로 장두철 집에서 활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류형석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한도원은 2월 25일, 오면직과 김승은·김창근 등은 3월 5일과 3월 6일 이틀에 걸쳐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수명이 부상당하였다. 오면직은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면직은 3·1운동 이후 1938년 일제에 의해 사형당하기 전까지 민족해방운동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로서 출발하였으나, 1930년 무렵부터는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운동에 주력하였다. 그가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취한 것은 의열투쟁이었다. 그는 의열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세력과 친일파들을 척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면직 - 의열투쟁으로 친일세력을 응징하다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