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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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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
오늘 주님의 동선이랄까 행위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혼자 외딴곳으로 가십니다.
이것을 안 사람들은 극성스럽다 싶은 정도로 육로로 주님 계신 곳으로 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보시어 병을 고쳐주시고
이어서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요한의 죽음 다음에 당신의 시간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주님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성가시다고 생각하시거나
화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엾이 보시고 치유해주십니다.
오늘 저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성찰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열정에 감동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저도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할 수는 있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부터 과부하가 걸리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을 하였고,
일도 힘에 부치니 금세 지치고 그래서
일을 하며 자주 짜증을 내고 화까지 내었으며
제가 잘못하고서는 옆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가지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찰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피정이나 쉼을 통한 재충전의 시간을
제가 가졌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반성하였지만,
오늘 다시 오늘 주님처럼 나의 시간 그러니까 재충전의 시간 없이
모든 시간을 이웃을 위해 내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주님처럼 할 수 없다면 주님의 사랑에 그저 감동과 감탄이나 하며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주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상을 소개하는 마르코 복음 1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시고 다음 날 새벽 외딴곳으로 가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외딴곳으로 가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것은 오늘뿐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외딴곳에 가신 것이거나
요한의 죽음에 당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특별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실로 요즘 사람들은 혼족이라고 할 정도로
혼자 밥 먹고 술 먹으며 병적으로 혼자 지내지만
정작 외딴곳에 홀로 가는 것은 하지 못하거나 않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스마트폰과 종일 지내고
사람들과 대면하고 하느님과 대면하는 시간은 피하고
가상 공간과 폐쇄 공간에서 이상한 내용이나 뒤지면서 하루를 흘려버립니다.
주님처럼
열심히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그런 다음 기도와 쉼의 시간,
곧 사랑 재충전의 시간을 외딴곳에서 갖는,
그런 지혜롭고 조화로운 삶이 실로 요구되는 요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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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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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아마도 의로운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곳, 저곳에서 몰려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저 같으면 휴식을 방해하는 그들에게 짜증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희생적인 삶을 보여주십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양식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환자이며 갈 곳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머무는 장소는 한적한 광야로 음식을 구할 장소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해결책을 예수님께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굶주림에 처해있는 군중에게 양식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요것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적게 여기지 않으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며”하루를 시작하면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첫 시작을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고” 하루의 끝맺음을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며” 정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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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미운 오리 새끼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평화신문 신앙강좌 기획팀’ 모임이 보스턴에서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열성과 깊은 신앙으로 무장된 분들입니다. 토론토에서, 플로리다에서, 뉴욕에서, 버지니아에서 모였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의 열정으로 장재명 신부님의 ‘교부 이야기’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박재찬 신부님의 ‘토마스 머튼과 영성’도 많은 분들의 참여 속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김재덕 신부님의 피정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줌으로 강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신부님을 모시고 피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번 피정에도 벌써 많은 분들이 신청하고 있습니다. 보스턴에 오면 보통은 찰스 강, 하버드 대학, MIT 공대를 보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획팀’은 ‘미운 오리 새끼’들인지라 다른 곳을 찾았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찾았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를 기념하는 슈라인을 찾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것을 찾으려는 분들의 뜨거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은 11월 피정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번 모임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모임방을 마련해 주셨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제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오래 된 차가 있었습니다. 한 독지가가 차를 새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답니다. 신부님은 아직은 필요 없기도 해서 대답을 미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독지가는 ‘새 차’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차가 좋지만 너무 비싸고, 운전하기에 부담스러워서 며칠 가지고 있다고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독지가의 아들이 ‘역시 신부님은 다르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좀 저렴하고, 작은 차를 마련해 주어서 그것은 감사한 마음으로 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편하고, 더 비싸고, 더 좋은 것을 찾지만 신부님은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것을 찾았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부님의 정성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 독지가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여라.”
우리의 몸에는 많은 바이러스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면역기능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활동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의 면역기능이 저하되고 그럴 때, 우리 몸에 있는 바이러스들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본당에는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기도와 활동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기도하는 단체,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단체는 어려움이 다가와도 쉽게 이겨냅니다. 그러나 기도가 부족한 단체, 세상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단체는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 보여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분란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었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분들도 가끔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뜻대로, 멋대로 살았지만 신앙인이 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세상의 풍랑을 이겨낼 수 있는데 순간 자신의 뜻대로 살려했기 때문입니다. 한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신앙강좌 기획팀’과 주님의 뜻을 따르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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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몇 명이 아니라 몇천 명이 모여듭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해수욕장이 참 많습니다. 그중 해운대 해수욕장은 여름철 휴가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광경을 가끔 뉴스를 통해 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모여든 이들도 해수욕장의 사람들처럼 바글바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가끔 하느님을 반쪽짜리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영적인 행복을 얻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의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베푸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의 걱정도 잊은 채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찾을 때 기적은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오천 명을 빵으로 먹이신 기적은 우리의 성찬의 전례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빵이 되어서 아직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먹이고 살려내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누어 주시면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특강 준비
가끔 강연 요청이 들어옵니다.
날짜가 정해지고
시간이 정해지고
장소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대상과 주제가 정해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특강 준비를 시작합니다.
주제에 맞는 성경 속 재료들을 골라봅니다.
그 재료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합니다.
그렇게 처음과 중간과 끝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맨 앞과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특강 준비는
하나의 요리 레시피와 같습니다.
메뉴를 선정하고 재료를 정하고
조리의 순서를 정하고
마지막으로 더욱 예쁘게 보이도록 장식합니다.
특강도 맛나게, 요리도 맛나게….
오늘 하루도 맛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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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회사에 스펙도 좋고 실적도 좋은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스펙도 낮고 실적도 변변치 않은 동료 직원이 먼저 승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스펙 좋고 실적 좋은 남자가 인정하기가 쉬웠을까요? 억울해하는 그에게 상사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자네가 능력 있는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네. 하지만 자네는 혼자 일하는 유형이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도 자네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면 단칼에 거절했어. 회사는 팀이 중요하네. 완벽한 개인은 없어. 완벽한 팀이 있을 뿐이야.”
승진에서 빠진 이유에 공감 가지 않습니까? 사실 함께하는 삶은 이 세상 안에서 분명히 중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는 ‘팀’의 존재는 더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지요. 개인보다 팀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나’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고,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팀을 외면합니다.
현대의 기업에서 팀의 능력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팀’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혹시 당신 뜻과 반대되는 이 모습에 서운하시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팀에서 활동하든, 혼자 활동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팀 안에서 활동하며 최선을 다할 때,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함께하는 모습을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을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먹을 것을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마련해줄 수 있음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해결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십니다. 팀을 이루어야 함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할 이웃에 대해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함께하지 못할 이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할 이유를 찾으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웃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과도 함께할 수 없게 됩니다. 함께하려는 예수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이니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팀’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함께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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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오늘을 처음 산다. 무수한 세계가 생겨나고 자라는, 그 속에서 아주 많은 것이 가능한 오늘을...(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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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눔과 섬김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본받읍시다
-모세, 예수, 프란치스코 교황-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시편81,2ㄱ)
시편 화답송 후렴에 힘이 납니다. 나이 70대를 넘어서면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는 동요들이고, 가장 많이 읽는 책들은 위인들의 평전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여기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아침 산책 때 마다 부르는, 또 피정중 “희망의 여정” 강의시 연세 지극한 피정자들이 한결같이 열창하는 동요는 바다입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참으로 각자 속한 공동체에 희망, 꿈을 주면서 그 희망과 꿈을 실현시켜 가는 희망의 지도자가, 꿈의 지도자가 위대하고 훌륭한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지도자를 지닌 공동체는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명심할 바 지도자는 공동체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공동체의 수준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정말 훌륭한 지도자를 뽑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직접 보고 배우는 훌륭한 희망의 지도자는 공동체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었던 평전은 대부분 위대한 공동체들의 지도자들의 평전이었습니다. 제가 아끼고 보관중인 “퇴계평전(인간의 길을 밝혀준 스승)”이, “율곡평전(나라를 걱정한 철인)”이,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학자)”이 그러하고 무수한 평전들이 대부분 공동체에 기여한 분들입니다.
수많은 위대한 평전보다 오늘 지금 살아 있는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위대하고 훌륭한 희망의 지도자들을 모신 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그러니 2000년 위대한 전통을 지닌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지도자로 모실 수 있는 성인들이 즐비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지도자 없다 실망할 것이 아니라 이런 성인들을, 위인들을 찾아 배우는 것이요, 내 자신 지도자의 덕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 자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의 역할과 영향력은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작금의 혼란중인 국내 상황을 접하면서 누구나 지니는 생각일 것입니다. 정말 지도자 잘못 만나면 공동체도 나라도 망할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 독서중 위대한 지도자 두 분을 만나 배웁니다. 민수기의 모세요, 마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분을 주저없이 추천하니 현재의 위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정말 살아 있는 성인을 교황으로 보신 천주교 신자들은 행복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의 어둡고 우울한 뉴스들을 대하다가 교황청 뉴스에 눈이 번쩍 열렸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Pope Francis: Next World Youth Day in Seoul, South Korea”
(교황 프란치스코: 다음 세계 젊은이의 날은 남한의 서울에서)
사우스 코리아에서 코리아로 통일된 한나라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교황님은 행사를 마치면서 집전한 미사에서 강론후 조마조마 기다리던 관중들에게 “유럽의 서쪽끝에서 극동의 남한 서울로” 2027년 세계 젊은이날 행사가 열릴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은 세계적입니다. 이번 37차 세계 젊은이날 행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희망의 지도자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폐막 미사중 강론에서 “교회와 세계는 지구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젊은이들을 필요로 한다”며 “빛나라shine”, “들어라listen”, “두려워하지 마라be not afraid”는 요지의 명강론을 하셨습니다. 늘 감탄하는 바이지만 저는 교황님 강론보다 더 좋은 강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홈페이지에 오르는 교황님 강론은 가능한 모두 읽으려 노력합니다.
이어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공부입니다.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의 진퇴양난, 고립무원의 처지가 참으로 외롭고 힘들고 불쌍해 보입니다. 예나 이제나 불평하는 배은망덕의 무지의 사람들에 대해, 구제불능의 사람들에 대해 얼핏 절망감도 듭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의 무지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다음 절박한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찬미와 감사 기도만 있는게 아니라 이런 탄원기도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신 건강을 위해 이런 하소연의 스트레스 푸는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느님도 그의 사정을 알고 기도하는 자도 자신의 신원을 더욱 분명히 자각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백성을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다.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너무 실감나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니 하느님은 모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들만이 국민의, 공동체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하는 대통령을, 교회 지도자를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복음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배경은 모세와 똑같은 광야입니다. 광야 여정중의 우리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모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조용한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음에 관한 충격적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감했을 주님은 외딴곳으로 물러가 자신을 추스르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 광야의 외딴곳이 아니라 외딴곳의 광야를 가득 채운 참 가엾은 굶주리고 병든 군중들이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가난한 민초들이, 민중들이 겪는 고난이 참 길고 큽니다.
예수님의 대응이 신속 기민합니다.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빛을 발합니다. 모세처럼 탄원과 탄식의 기도도 바치지 않고 조용히 제자들이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참으로 간절히, 경건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광야에서 모세에 이어 광야에서 예수님이요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위한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당신 사제들을 통해 미사중 성체를 나누십니다. 바로 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지극정성의 사랑과 기도에 감격, 감동한 이들이 마음을 열고 가진 것을 다 나눴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오늘 이야기를 “빵을 많게 하신 (mulitiplication)기적”이 아니라, “빵을 나누게 하신(distribution) 기적" 이라고 부릅니다. 군중이 한 마음이 되어 자발적으로 마음을 열고 가진 것을 모두 나누게 하셨으니 아, 바로 이것이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 예수님의 위대함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을 감동시킨 기도와 사랑이 참으로 지도자의 위대한 자질임을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다 합니다. 없어서 굶주린게 아니라 나누지 않아 굶주린 것이요, 나누기로 하면 오히려 차고 넘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나눔과 섬김의 영성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위대한 주님을 본받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나눔과 섬김의 지도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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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맛나는 세상>
나는
다만 내 힘으로
먹고 살고
너는
다만 네 힘으로
먹고 살면
그게 어디
주님 뜻 따르는
살맛나는 세상인가
너는
바로 내 덕분에
먹고 살고
나는
바로 네 덕분에
먹고 살아야
그게 바로
주님 뜻 이루는
살맛나는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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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13)
물러가신 예수님
그들은 주님께 세례자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적들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또는 양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고 문설주에 믿는 이들의 피를 뿌리는 파스카 축제 날에 돌아가시기 위해 물러가셨습니다. 또는 당신을 배반한 자들의 무모함을 그런 식으로 피하라는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 물러가신 것입니다. 고문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 누구나 끝까지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고 충고하신 적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피하신 것이지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므로, 복음사가가 ‘그분께서 외딴 곳으로 달아나셨다’고 하지 않고 ‘물러가셨다’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9. 번번이 눈에서 사라지는 예수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 맺으면서 체험을 하든 못하든, 어떤 모습을 떠올리든 말든,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이런 상황을 수긍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에 사신 예수께서 부활해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오늘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확신한다: “지금 예수께서 여기 계시다. 지금 그분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그분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어느새 예수님은 우리 눈에서 사라지신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고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혼자서 길을 가는 느낌이다"(22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베드 1,3-11
그리스도인의 소명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자는 근시안이라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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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TP(Ecology Maria Theotokos Platform)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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