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霜 시인 이후 최고의 천재 시인 출현!!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하록
오늘 보았던 눈 속의 연인은
갈라진 겨울로 떨어져
서로를 잊었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
나를 찾는 없는 소리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근간)에서
설원은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아름답고, 이 설원에서의 연인과의 데이트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설원의 만남은 은총이고 축복이며, 최고의 기쁨이고, 흥분 중의 흥분일 것이다. 설원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설원의 연인들은 그들의 이상낙원에서 미래의 아이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설원은 동토이고 불모지대이며, 이 기나긴 아픔과 시련을 이겨낼 힘이 없는 연인들에게는 다만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는 절망의 땅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보았던 눈 속의 연인은/ 갈라진 겨울로 떨어져/ 서로를 잊었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설원은 함정이고 유혹이지,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가 아니다. 요컨대 설원이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소위 ‘강자의 힘’, 즉, 수많은 안전장치와 보호장치가 있을 때 뿐인 것이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하록 시인의 가장 화려한 허장성세의 말장난이며, 이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싸늘하게 식은 얼음인간일 것이다. 그토록 다정했던 연인들도 서로 미련없이 헤어지면 얼음인간이 되고, 따라서 얼음인간이 되고나서야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라는 시구에서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불이고 불꽃이고, 이별은 눈보라이고 얼음이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연인들이 헤어지면 얼음인간이 되고, 이 얼음인간과 얼음인간들이 만나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시적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은 나에게는 다정한 이름이 없다는 것이 되고, “나를 찾는 없는 소리”는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이 시구들은 ‘나는 냉정한, 또는 싸늘한 사람이다’라거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은폐하기 위한 말장난이며 반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추운 설원 속의 맨발과 맨손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늘 혼자이고, 나를 찾는 다정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하록 시인의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는 그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겨울 산장’([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의 독백과 절규의 풍경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원은 동토이고, 마른 나무는 죽은 나무이고,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는 채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다 “쩌렁쩌렁 삭아가는” 이 21세기의 우리 젊은이들의 운명을 뜻한다.
하록 시인은 2024년에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으로 등단한 신진 시인이지만, 그러나 이상李霜 시인 이후 대한민국의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너무나도 신선하고 압도적인 충격으로 인식시켜 준다.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만큼 시의 언어와 미술의 언어(색채)를 상호 중첩시키는 언어 사용능력과 함께, 그의 언어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사용하면서도 해학과 풍자, 또는 반어와 말놀이를 병치시키는 기법은 신기에 가깝고, 그리고 설원의 아름다움과 설원의 차가움(비정함)을 통해 존재론적 성찰을 해나가는 앎의 깊이는 하록 시인이 이상 시인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 시인임을 증명해준다.
하록 시인의 등단작,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외 4편 이외에는 그 어느 지면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전작 시집({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이며, 그 신선한 충격과 감동은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출현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하록 시인의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는 아주 짧고 간결하면서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촌철살인의 언어들도 살아 있고, 더없이 맑고 투명하고 따뜻한 언어들도 살아 있다. 어느 누구도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언어들도 살아 있고, 현대문명사회의 우리 인간들의 삶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성찰의 언어들도 살아 있다. 요컨대 이 언어철학과 삶의 철학이 하록 시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천재는 언제, 어느 때나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가며, 그 고통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으로 시를 쓴다. 하록 시인은 우회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말하고, 자기 자신의 붉디붉은 피로 쓴다.
하록 시집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