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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 - 비돔 라암셋에서
출 1: 8-14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1953년 미국 뉴욕 브르클린의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 운동을 좋아했고 운동으로 인생의 성공에 도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미식축구 선수 쿼터백 장학금을 받고 노던 미시간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의 출구를 찾아 대학 졸업 후 제록스 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합니다. 제록스에 이어 가정용품을 파는 해마플라스트(Hammarplast)에 취업한 그는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작은 성공을 경험합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로 그는 회사의 부사장과 총 매니저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제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고급 레스트랑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고급 파티를 즐기게 되었지만 왠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잘 살고 잘 노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되고 있었던 어느 날 출장차 찾은 시애틀의 한 커피 가게에서 그윽한 원두커피 향을 맛보는 순간 그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합니다. 그는 커피 향을 만들어내는 그 커피점이 마치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거룩한 성전처럼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마셨던 커피는 커피도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이 커피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마침내 그가 누리고 있던 회사의 모든 특권을 저버리고 이 시애틀의 작은 커피숍의 매니저로 다시 인생을 출발합니다.
그리고 1985년 원두 구매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출장갔을 때 그는 에스프레소 바에 앉아 거기서 사람들이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 연인들 그리고 사업 파트너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현대인들에게는 가정도 직장도 아닌 이런 제3의 땅, 약속의 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의 일생의 비전이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커피를 파는 사람이 아닌 신비와 로맨스의 문화를 파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 날, 그 비전을 꿈꾸던 그 순간에 천년의 커피 역사를 새로 쓰는 스타벅스가 사실상 태어나는 것입니다.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1200년대의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잘 나가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리더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고 그들에게 분배된 고센 땅을 잘 가꾸어 그들은 번영하고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존재를 잘 모르는 새로운 애굽의 지도자가 최고 통치자로 등극하자[8절-오늘날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람세스 II(1299-1232BC)로 봄],이스라엘 민족은 준비되지 못한 채로 고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소위 고센 지역에 속하는 비돔과 라암셋(창47:6,11/지도 참조)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학대를 받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고통의 시간이 바로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한 위대한 로드맵”의 시작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라암셋(라암세스)은 본래 당시 애굽의 통치자로 믿어지는 람세스 2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라암셋에서 주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으로 금년도 약속의 땅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희망의 새해가 왔지만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고통 속에 새해를 맞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의 본문에서 고통의 시간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관점을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고통의 시간을 이해하는 두 가지의 관점-무엇일까요?
첫째는 소명의 관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많은 경우, 고통의 시간이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시간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는 시간, 왠지 내 인생의 현실이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어떤 부르심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관점인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화란의 미술가 반 고흐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반 고흐는 본래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신학생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이 목사였기에 목회의 길이 사실 더 편안한 인생의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뜻대로 공부도 안 되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화가로 부르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던 날 그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의 운명의 길이 열렸다. 새로 태어난 나 빈센트--내 나이 스물 일곱 --나는 이제 화가의 길을 가련다. 이 길은 하나님의 약속속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길.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고 그 속에서 나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내 영혼의 자서전,pp.30-31) 그가 만일 이런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목화자의 길을 갔다면 인류는 위대한 화가를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소명은 목회의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이스라엘의 민족사적 고통에는 도대체 어떤 소명이 있었을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이런 바로의 압제를 인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만일 번영의 지속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애굽을 떠날 생각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그들로 애굽을 떠나 시온의 땅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많은 경우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바로 소명의 마당인 것입니다.
자, 다시 한번 11절을 보십시오. “감독들을 그들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국고성은 아마도 통치자 람세스가 전쟁을 위해 군대들의 식량, 무기등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 역할을 한 성으로 건축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실제로 오늘 날 이곳을 방문해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를 위해 노역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람세스의 석상과 비문들이 발견됨, 사진들 참조)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통의 현장이 아닌 소명의 자리이었음을 말입니다. 결과는 고통 그 자체로만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 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더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섭리의 하나님이 개입하신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번성하고 오히려 새 역사를 준비하는 마당에 서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고통의 마당을 인하여 절망하지 마십시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오늘의 고통의 마당은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하는 현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관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통이 올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시간을 주시는 것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고성을 건축하는 동안 그냥 고통스럽게 견디며 노동만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3:7-8의 말씀을 보시지요.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 가려 하노라” 그래서 출애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그래서 이제 출애굽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주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 출3:9에도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의 현장에서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올 때 걱정은 낭비입니다. 걱정한다고 염려 한다고 나아질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약속의 다이얼 333’이라고 일컫지 않습니까? 고통스럽거든 즉시 약속의 다이얼 333을 기억하십시오. 예레미야33:3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르짖어 부모의 도움을 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달려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손을 내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필요한 도움을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부르짖음의 기도가 필요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인생의 시간들은 평범한 기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인생의 위기에는 비상한 SOS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상한 기도는 비상한 응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이라는 왕 앞에서 체포될 위기를 맞이했을 때(시34편 제목 참조)그는 바로 이런 부르짖음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시34:6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고.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런 주의 백성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마침내 모세가 등장하고 출애굽의 위대한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1992년은 제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적으로는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목회 9년째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부임 8년만에 꾸준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던 교회는 새 성전 증축을 완료하고 이민 교회로서 이제 모든 것을 갖추고 워싱톤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교회가 되어 비교적 탄탄한 목회의 미래를 내다보던 전망할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교회당 건축 후 잠시의 안식의 시간을 갖고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제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제 가슴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한 석 달이 지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 교회 개척에 도전하라는 인도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3학년이어서 환경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3개월여의 고통스런 기도 후에 “순종 하겠습니다”고 응답했을 때 그때 말할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이 제 가슴을 채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래서 1993년 11월 저는 가족들을 떠나 마침내 한국으로 나와 지구촌 개척을 준비했고 1994년 1월 첫 주 정식으로 우리 교회의 탄생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개척의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회집 장소만 5번을 옮겨 다니면서 때로는 환경적 요인들 때문에 때로는 리더로서의 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밤을 지새워 눈물을 흘려야 했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4년 정말 행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실 제 목회의 남은 시간동안도 아름다운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섬길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스타벅스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스타벅스-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 이야기”라는 책을 읽다가 제가 굉장히 도전받은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하워드 슐츠가 시애틀 출장에서 스타벅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흥분하여 자기의 기존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며 그는 자기 아내 세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보,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와 있소. 난 이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았소. 여기는 워싱톤 시애틀이라오. 난 여기서 스타벅스의 비전을 펼칠 것이오. 여보, 난 드디어 성지에 온 것이라오”(p.38)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워드 슐츠가 커피 사업 하나 때문에 이렇게 흥분하며 이 비전을 위한 헌신을 고백했다면 진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 복음의 역사를 이룰 교회를 위하여 헌신 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이제 저와 함께 우리가 도달해야 할 그 약속의 땅을 향한 남은 하나님 나라의 모험의 여정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출 1: 8-11, 요 15: 18-19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한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적대관계이다. 교회는 세상을 압도할 힘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교회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영화가 예배보다 재미있고 세상 유행가가 찬송보다 재미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란 옛 역사를 무시하고 정책적으로 왜곡하는 왕이다. 힉소스 왕조가 망하고 18왕조로 바뀐 것이다. 인물이 다르고 생각과 정책이 다른 왕이 나온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이다.
1. 세상을 섬긴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8-9).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는 말은 경계하는 말이다. 원문에는 "보라"라는 말이 초두에 나와 강조하고 있다. 숫자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잠재적 능력과, 번식의 속도, 체력 등이 월등하였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세계의 중요한 금융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아무리 아랍권이 많아도 당하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본래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강하기에 세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며 동시에 핍박의 대상이다.
2.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10).
이스라엘이 강하면 전쟁 때에 적과 합세하여 우리에게 대적할까 하는 두려움을 애굽사람들은 가졌다.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세상의 눈이다.
다른 민족이 강해지는 것은 나에게 위협이 된다. 이것이 힘이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중 일본인을 포로수용소에 감금하였다. 본토인인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살게 한다. 강해져서 적이 될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고 한다.
세상적 지혜로 이스라엘의 번성을 억제하자는 의미이다. 자신이 교활하므로 다른 사람을 교활하게 보는 자신의 거울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11)
바로는 이스라엘의 강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강압하는 정책을 취한다. 강제 중노동은 고대 전주군주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정책이었다.
강압하는 정책은 이스라엘에게 세상의 성을 건축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힘에 눌려 세상의 일을 하게 한다. 세상에서는 일시적으로는 세상의 힘이 이긴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성경은 말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알지 못하는 자로부터 잠시 고통을 당하나 우리의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한다.
결론
승리하는 해가 되자.
힘 있는 나라
출 1: 8-14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을 때, 야곱을 비롯한 그의 식구 70여명이 애굽에 와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고 강해지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억압정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억압정책으로는 생활의 곤고함, 흙 이기기와 벽돌 만드는 일, 그리고 농사일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낮에는 애굽사람들의 노예생활을 하며 밤에는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힘이 없는 민족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굴복을 당하고 억압을 받습니다.
힘 있는 일본이 힘 없는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36년 동안 억압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억지로 일본말을 가르치고, 성과 이름도 일본말로 바꾸도록 강요하고, 그들의 방식대로 우리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한, 일본의 전쟁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서 피를 흘리게 했고, 피땀 흘려 농사지어놓으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다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인들의 위안부로 사용했습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때,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도왔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찾는 일에도 미국의 전폭적인 도움이 있었고, 6.25 동란 때도 미국과 유엔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공산화 될 뻔했습니다. 미국이라도 여러모로 우리를 돕기는 했지만 그들이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군사에 간섭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한 예로,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사고를 치면 일본경찰에게 심문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미군이 재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픈 것, 서러운 것만 생각하지 말고 빨리 힘을 키워야 합니다. 힘이 있으면 다른 나라가 우리를 간섭하지 못합니다. 힘도 없으면서 발버둥 쳐보았자 오히려 손해보기 일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힘을 키울 수 있을까요?
Ⅰ.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축복하시고 통치하시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전체가 각성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나라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웠겠습니까?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바벨론이 망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우리나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 망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해방시켜야 너희들이 해방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라의 망하고 흥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17:20)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19:6)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백성을 진멸하고 너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2:10)
모세가 가나안에 보낸 정탐꾼 12명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신장이 장대 같고,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 같다 라고 보고하니 백성들이 듣고 소리높혀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했더라”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미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위로하고 권면했으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니님이 축복하셔야 나라가 흥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힘을 얻고 축복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
1. 정직해야 합니다.
왕도 정직해야 하고, 백성도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면 인정을 받고 신뢰감을 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에서도 하나님이 옆에 계시고 하나님이 보시고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숨기려고 하지 말고 정직하게 드러내 놓으면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29:17)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9:29)
․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1-2)
(예화)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찍다가 도끼자루를 깊은 못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나무를 하지 못하면 당장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못 가운데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의 손에는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세 개의 도끼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노인은 금도끼를 가리키면서 묻습니다. “이것이 네가 잃어버린 것이냐” “아닙니다” “은도끼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이것이 네 도끼냐?” 노인이 마지막으로 쇠도끼를 내밀어 보이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기뻐하며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노인은 청년의 정직한 마음을 보고 “청년아! 내가 이 도끼들을 네게 주겠다” 하고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욕심 많은 청년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이 나무하러 갔다가 일부러 도끼를 물에 던져버리고 구슬피 울었습니다. 이번에도 노인이 세 개의 도끼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노인이 물었습니다.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눈이 휘둥그래진 욕심 많은 청년은 그만 “네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노인은 “에이 천벌을 받을 욕심쟁이야 네가 빠뜨린 쇠도끼도 주지 않겠다” 라고 말하고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됩니다. 친밀해 집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지혜를 얻고,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기적과 표적을 보게 됩니다. 통치자가 기도하고 백성이 기도하면 이북이 핵으로 위협하지만 핵이 무용지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세계 강대국인 미국은 우리를 돕는 자로 하나님이 붙혀 주실 것입니다.
수산에 있는 유대인들이 하만의 계획에 의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를 찾아가서 구명운동을 벌였습니다. 에스더는 왕을 만나지 못한 지가 30일이요, 왕이 불러야 왕 앞에 갈 수 있는데 부르지 않으시니 가면 죽게되는 것이 궁의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지 않으시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지만 지금 왕후가 돕지 않으면 왕후의 집안이 망할 것이며 이때를 위해서 왕후가 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에스더는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이 3일 동안 금식하고 자기도 시녀들과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고 난 다음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심으로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결단을 내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왕이 어전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기도했더니 왕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유다 백성들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도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왕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면서 기도했더니 나라가 구원 받았습니다.
대하 20:1-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연합해서 유다왕 여호사밧을 치려고 왔습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유다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무기력화 시키시고 유다와 여호사밧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3-14)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통치자와 국정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 정직하게 일하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온 국민이 하나되어 우리민족이 힘있는 민족이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Ⅲ.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거민이 살고 있었고, 기름지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에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그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우리의 밥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났다는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도 믿음의 싸움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완전무장한 사람이고, 전쟁의 경험이 많은 무기를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장수는 홍안소년 다윗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칼과 창으로 무장했으나 다윗은 살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무기는 양칠 때 사용했던 물매돌 5개였습니다. 그런데 승리는 골리앗이 아니라 다윗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매우 염려가 컸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할 터이니 염려하지 말고 담대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