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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3 사라의 장례식
본문에는 사라의 죽음을 아브라함이 슬퍼한 후에 장례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사라의 향년이 기록된 것은 그가 아브라함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때문일 것입니다(벧전3:6, 히11:11). 또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을 슬퍼한 사실이 간단히 기록된 것은 내세의 소망을 가진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을 적당한 태도입니다(살전4:23). 또 아브라함이 잠시 슬퍼한 후에 사라의 매장을 위하여 취한 행동도 역시 신앙의 한 행동이었습니다.
1. 본문 1절은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입니다.
1) 여자적(如字的)으로는 ‘사라의 향년은 일백년 그리고 이십년 그리고 칠년이었다’ 입니다.
사라의 죽음을 한마디로 묘사하고 있는 모세가 그녀의 장례에 관해서는 많은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괄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장례에 관한 기록이 필요 없이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녀의 죽음을 그렇게 간략하게 암시하고 있지만 신자들이 그 점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도록 많은 것을 남겨두고 있는 듯합니다.
거룩한 조상들은 타락한 자들과 한가지로 자기들도 죽음을 당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통에 가득찬 생활을 견디며 영유하면서도 목표를 향하여 대담하게 나아가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에서 보다 더 좋은 생활에 지치지 않았던 모세는 사라가 127년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매 숫자 뒤에다 꼭 년(年)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사라가 20세 되었을 때 처럼 백세가 되었어도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일곱 살 때 처럼 꽃다운 나이의 품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고 꾸며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상습적인 습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에 명예가 되게 하는 면에서 갖은 교묘한 수단들을 동원하여 적용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수치스런 무지를 폭로시키는 천박한 것을 고안해 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이런 반복이 가장 일반 용법으로 통용되고 있는데도 그렇게 우겨대니 그들의 언어에 대하여 그들 자신들이 전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겠습니까?
3) 그리고 또한 (하임- : 생명들)라는 말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토론도 분명히 확실성이 결여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생명들’(Lives)이라는 말을 복수로 써서 ‘생명’을 의미하고 있는 이유는 로마사람들이 단수로 된 어떤 것들을 복수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를 적용하는 것보다 더 잘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다중적(多重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발육하는 생명이나 다른 야수적인 동물들과 공통적인 지각을 지니고 있는 것 외에도 인간의 생명은 정신과 생명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리(推理)는 신뢰성이 없이도 그럴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예고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의견에는 더 많은 진리의 색채가 있습니다. 즉 생명이 전혀 인정된 것이 없으며 오직 영구적인 영고성쇠(榮枯盛衰)로 인하여 동요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많은 생명으로 올바로 분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그 말의 관용어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호기심으로 탐구할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절은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입니다.
1) “기럇아르바”가 그 도시의 보다 고대의 명칭이라는 사실이 여호수아 15장 54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후에 이곳을 헤브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어원학적인 면에서는 의견이 구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명칭이 그 도시가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던 사실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그 도시를 세 훈령으로 나누어진 뜻인 ‘트리폴리’(Tripoli)와 또 그 도시가 포함하고 있는 열 도시들에서 주어진 지역이란 뜻인 ‘데카폴리스’(Decapolis)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아르바’(Arba)는 거인의 이름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거인이 그 도시의 왕이거나 창건자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더 지지하고 있습니다.
즉 그 이름은 아담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네 조상들이 그곳에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네’ 조상들은 그들의 아내와 함께 거기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확실한 문제에 관하여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일이 알 필요도 없고, 또 알릴 필요성이 없습니다.
2) 그보다도 어떻게 사라가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서 죽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 지금 이야기에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들 두 사람이 그들의 거처를 바꿨다고 대답했다면 모세의 말은 그것과는 상반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그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려고 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라가 죽은 때에 그가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다른 장막에 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도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도를 하기 위하여 더 중요한 의무를 무시하고 10보나 20보 정도 걸을 수 있는 장막에 별거해 있었다는 것은 별로 타당성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자들은 아브라함이 그때 여행 중이었다고 짐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이 서로 그 당시에 헤브론에 있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도시에 인접해 있는 마므레 계곡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더 그럴싸한 것 같습니다. 그에게 조금 숨돌릴 기간이 허락된 후에는 곧 다시 지금까지 줄곧 습관화되었던 방랑의 길로 돌아가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도 한 남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될 관심을 그녀에게 가졌다고 모세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로써 생략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매장지에 대한 걱정에 관련된 일로서 애통하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각각 별도로 거주했다는 것은 다음에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접된 곳이였지만 별도로 떨어진 장막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간에 어떤 불화의 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가족 규모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간주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많은 종들을 거느리는 데에 많은 문제를 지녔던 것처럼 그의 아내도 역시 정숙하고 정직하게 돌보며 가르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속들이 너무 수효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함께 합친다는 것은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그 가족을 나누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죽음을 애도하려고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답변해 줄 수가 있겠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슬픔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그런 부가적인 자극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사라의 죽음 그 자체만으로도 그에게 설음과 비통이 복받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렇게 몰두됨으로 그 슬픔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욱 증가시키려는 것보다는 그것을 경감시키려는 편이 더 좋은 효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지나치게 울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상처로 자기 마음을 찌르기 위하여 죽은 아내에게 왔다면 그의 행동은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인정이 지시하는 데까지 자기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 자제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그것을 애도하였거나 또한 자진해서 인류의 공통적인 저주를 슬퍼하였다면 그 어느 경우에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슬퍼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불굴의 정신이라기보다는 야만적이며 감각이 마비된 것이라고 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남자였지만 그의 슬픔이 복받쳤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모세가 바로 직후에 추가하기를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의 온건성을 찬양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서 암브로스는 신중하게 추론하기를 우리는 본보기로 죽은 자를 인하여 지나치게 많이 울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외곡되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배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슬픔에 제한을 두고 부활에 대한 교리가 아직도 애매해 있을 때인데도 자기 감정을 자제했다고 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장 풍부한 위로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조급함에 제재를 가하는 자들은 구태여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3. 3절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입니다.
1) 모세는 아브라함이 아내의 시체를 장례 하려고 거행한 의식에 관해서는 잠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덤을 구입하는 일에는 대단히 길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했을까? 그 이유를 그 당시의 장례식 풍습을 간단하게 암시할 때에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이것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준수되어 왔는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의식들은 각각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미신적인 면에 서로 잘해서 다른 사람보다 능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각각 다르지만 시체를 장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례는 어리석은 호기심이나 결과 없는 위로를 받고자 하는 소원에서 기원된 것이 아닙니다.
또 미신적인 것에서 유래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들의 마음 속에 고취시켜 주신 자연적인 지각에서 기원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에게 미래 생명에 대하여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그 지각을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무덤을 경멸하는 아주 터무니없는 표현을 유포하고 있는 자들은 사실상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꾸미고 존귀하게 여기는 무덤의 의식들과 다른 생활의 의식주의들을 넓은 도량으로 무시하여 침착하게 그것들을 박탈해 버려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가 장례를 치루는 일을 전혀 손대지 말고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내야 되는 것은 태초에서부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두신 일입니다.또 사람들은 무덤을 신성시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고백하지만 ‘영혼’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있거나 부활의 소망이 죽은 자들의 ‘시체’에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상이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 주입되어 그렇게 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들이 시체를 무덤 속에 넣을 때마다 이런 경건한 명상을 했을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들이 지각없는 일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눈앞에 놓인 미래의 생에 대한 표현들을 그들이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반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마음 속에 깊숙이 고정되어 있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깨닫고 무덤을 하나의 교차점으로 여긴 그는 열심히 부활의 가시적 상징인 무덤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2) 아브라함이 그 무덤에 부가시킨 중요성은 다음의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아내의 시체를 이방인의 시체와 혼합시켜 놓았다면 오염의 죄의식을 갖게 될 것으로 그 자신이 생각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거룩하고 순수한 무덤을 소유하려고 굴을 샀습니다 그는 자기 장막을 치기 위해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갖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무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그 땅에 자기 가족의 장례지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으로 약속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기 위하여 약속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이 아브라함 자신의 죽음으로나 가족들이 죽음으로 소멸되게 하지 않고 오직 그것이 자기의 대를 통해서 번영이 시작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빛을 박탈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공기를 상실하고 무덤 속에 있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 약속된 기업에 함께 자기들도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특별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들 자신들은 말이 없이 침묵가운데서 누워있지만 그 무덤이 크게 소리쳐서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는 데에 전혀 장애가 없이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상은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지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죽음을 ‘그의 죽음’ 이라고 할 때 죽음은 어떤 관계를 남겨두고 있는 이혼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래의 부활만이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상호관련의 법칙을 소중히 여기며 보존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따라서 특별히 각 과정을 간략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더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