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황해도 - 벽성군에 석담구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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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4. 02:22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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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성군에 석담구곡이 있다
강령군의 북쪽에 자리한 벽성군은 해주시 외곽에 있는 군으로, 벽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광해군 8년(1616)부터다. 북쪽의 산들이 마치 푸른 숲이 성벽을 두른 듯 울창하다 하여 벽성(碧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광복 이후 남한 땅에 속하였다가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생기면서 북한에 속하게 되었다. 지남산, 까치봉, 국사봉 등이 솟아 있는 벽동군 고산면 석담리에 석담구곡(石潭九曲)이 있다. 석담구곡은 선적봉과 지남산에서 발원한 석담천이 남서쪽으로 약 8킬로미터를 9굽이로 돌아서 흘러내리는 명승지다. 사계절의 풍광이 뛰어나 선조 8년(1575)에 이이가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고 한다. 『택리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율곡 이이가 이곳에 감사로 왔다가 수양산 밑에서 석담천석(石潭泉石)을 발견하였다.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선비가 많이 따랐다.
율곡이 죽자 그곳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받들었다. 그를 따르던 문인과 자손들은 대를 이어 그곳에 살면서 그의 교화를 숭봉(崇奉)하였는데, 문장의 예의와 과거에 합격한 것을 보면 온 도(道)에서 이 고을이 으뜸이었다.
그 후 학풍이 점점 쇠하자 고을 사람들이 학궁(學宮, 향교를 일컬음)을 빌리고 패를 갈라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같이 하니 세상에서 고약한 고을이라 지목되게 되었다.
이이는 처가가 있던 이곳의 빼어난 경치 9곳에 저마다 이름을 붙이고 석담구곡이라 하였다.
고산구곡담을 사람이 모르나니
주모복거(誅茅卜居) 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하고 학주자(學朱子) 하오리다.
이이가 이름 붙인 고산구곡의 제1곡은 해주성 서쪽 18킬로미터쯤에 있다. 산 위에 우뚝 선 바위가 마치 관(冠)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관암(冠巖)’이라 하였고, 그곳에 관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일곡은 어드메뇨, 관암에 해 비친다.
평무(平蕪)에 내 걷히니 원산(遠山)의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錄樽)을 놓고 벗 오는 양 보리로다.
제2곡은 바위와 돌 틈에 핀 꽃들이 아름다워 ‘화암(花巖)’이라 불렀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곡은 어드메뇨, 화암에 춘만(春晩)하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나니
사람이 승지(勝地)를 알게 한들 어떠하리.
제3곡은 화암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으며, 기이한 바위가 많고 무성한 푸른 송백이 병풍같이 둘러 있어서 ‘취병(翠屛)’이라 하였다. 제4곡은 취병에서 1.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송애(松崖)’다. 석벽의 높이가 300미터는 되는데 이것이 송림에 가려 있고 못 가운데에는 배 모양의 선암(船巖)이 있다. 제5곡은 송애 북쪽에 있는데, 석봉이 높고 계곡물이 깨끗하며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계곡 아래 연못 주위와 바닥이 모두 반석이라 마치 계석(階石)을 쌓고 물을 저장한 듯하였다. 주변에 능허대(凌虛臺)와 철적대(鐵笛臺)라는 층암절벽이 있고 냇가에는 요금정이 있다. 이이는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이곳에 은거할 것을 결심하고, ‘은병(隱屛)’이라 이름을 붙인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오곡은 어드메뇨, 은병이 보기 좋다.
수변정사는 소쇄(瀟灑)함도 끝이 없다.
이 중에 강학(講學)하고 영월음풍(詠月吟風)하오리다.
훗날 이곳을 찾았던 곡운 김수증도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다섯째 굽이라 구름과 안개가 깊고도 깊으니
무이정사가 이 숲 속에 있구나.
한가롭게 지팡이 짚고 맑은 냇가에 서서
자연을 노래하는 이 마음 누가 알리.
제6곡은 은병 북쪽에 있는데, 시냇가에 걸친 바위가 자연 그대로 고기 낚는 터가 되어 ‘조협(釣峽)’이라 이름 지었고, 제7곡은 조협의 서쪽에 있는데 서리가 온 뒤에는 산중턱까지 붉은빛이 화려하게 펼쳐지므로 ‘풍암(楓巖)’이라 하였다. 제8곡은 풍암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옥류천 물소리가 냉연하여 거문고 소리를 내는 듯 들려서 ‘금탄(琴灘)’이라고 하였다. 제9곡은 문산(文山)이다. 장대산 중턱에 있는 문산은 수십 명이 앉아서 연회를 할 수 있는 천연의 반석이다. 대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무리 지어 노닐어 예로부터 문인들의 독서 수련장으로 사랑받았던 곳이다.
석담구곡
벽성군 석담리에는 석담천이 9굽이로 감돌아 흐르면서 돌못을 이루었다 하여 석담구곡이라 부르는 명승지가 있다.
그가 석담으로 내려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시절에는 친척들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살아 어느 때에는 식구가 100여 명을 넘는 경우가 있어 그 자신마저 죽으로도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율곡은 벼슬을 하지 않고 여기서 오로지 후진을 위해 강학에만 전념하려 하였으나 그해 6월에 또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는 임지에서 오로지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또 직접 향약(鄕約)을 만들어 주민들을 통솔하는 기본으로 삼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이가 이곳에서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수록한 책이 『석담어록(石潭語錄)』인데, 편자는 누군지 알 수 없다.
한편 벽동군 가좌면 취야리에는 율곡의 장인인 노경린이 지은 취야정(翠野亭)이 있는데, 율곡이 머물면서 독서를 했던 정지(淨地)다. 넓게 펼쳐진 이 지역의 평야를 두고 취야평야라고 하는데, 영조 초기에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김유가 지은 『취야정기』에 이 지역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사방을 바라보니 끝없이 넓기만 한 평야인데, 촌가의 아지랑이는 신기하기만 하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파도는 1000리인 양 아득하고 아름답기만 하구나.
율곡 이이가 은거했던 황해도 해주 석담의 고산구곡(高山九曲)의 산수를 주제로 그린 실경도. 각 폭의 그림은 구곡계류의 경관 구성요소를 모두 그린 것이 아니고 어떤 특징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또 구도를 지배하는 계류는 횡권(橫卷)처럼 좌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골짜기를 형성하거나 화면을 앞부분에서 대각선으로 분할하였다. 그러나 화폭 변화에 따라 구도가 다양해지고 후기로 무슨 산수화인지 모를 정도로 특징을 잃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벽성군에 석담구곡이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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