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글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적인 글귀이다. 정말 우물쭈물하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 죽어가는 것이다.
서양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지만, 우리의 관습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멀리하고 별개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무덤이 삶터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있으며 화장터가 집 주변에 들어서기를 결사코 반대한다. 우리는 무덤에 조화를 바치지만, 서구의 나라는 생화를 바치며 그들의 무덤은 도심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죽은 이들이 삶의 공간만 달리할 뿐 함께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유럽의 서구사회는 죽음도 본인의 문제로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관철되고 있다. 스위스는 조력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으며 네덜란드나 벨기에 등도 안락사를 법으로 인정하며 미국은 주에 따라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안락사에 대한 화두가 이슈화하며 공론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 사상으로 사람은 하늘의 뜻이라며 살고 죽는 것은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시대가 급속도로 변함에 따라 삶의 문화도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며 집안에 들여 장례를 치렀다. 그러던 것이 주거 공간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죽은 이의 관을 엘리베이터에서 세워서 내려와야 함은 유교적 관습으로 맞지 않아 장례식장으로 옮기며 거기서 죽은 이를 떠나보낸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가 살고 죽는 권한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살고 죽는 것은 내가 선택할 영역이 아니라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맞을까. 안락사 대신에 호스피스(완화적 의료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 환자 본인이 거룩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더 이상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직접적 의료 행위를 하지 않는다.
환자의 뇌사는 죽음이 아니며 심장이 정지해야 죽음이다. 병원에는 생명의 연장을 위해 의료 행위를 하고 있다. 환자의 고통은 물론 가족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망 한 달 전에 치료에 드는 돈이 평생 환자 의료비의 1/3 이상이 든다는 통계가 있다. 사람의 죽음도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며 죽는 일은 사는 일에 마지막 일이다. 세상은 누구나 죽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 것처럼 굴러가고 있다.
말기 암 환자에게는 항암제보다 진통제를 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항암제를 많이 쓰며 진통제는 적게 쓴다고 한다. 이때는 적극적인 치료보다 환자의 고통을 더러 주는 진통제를 써야 하며 그 용량은 제한이 없다. 병원은 환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의료 행위를 하는 게 마지막 임종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환자의 고통은 물론 경제적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다.
응급으로 환자가 병원에 가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삽입이 기본이다. 마지막 순간을 오히려 무의미하게 마감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사전에 연명 의료를 중단하고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여론이 이슈이며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있다.
안락사가 이슈화되고 있지만, 반대도 있다. 질병이나 장애를 갖고 나온 사람을 아예 안락시키는 경우도 생긴다. 이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것으로 문제가 된다. 이런 현상은 예부터 있었다. 아우슈비츠라든가 나치 시대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다인 뿐만 아니라 우생학적 질병인 사람도 죽였으니 말이다. 건강한 인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말기 암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죽여달라고 호소하는 이면에는 고통에서 벗어나 살게 해 달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럴 때 섣불리 안락사를 신청할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의 완화 의료를 해야 한다. 이는 마지막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안락사의 문제는 정상적인 삶이 아니면 죽어도 괜찮다는 의식의 착각에 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으며, 죽음에서 오는 이질감을 바꾸어 주는 역할을 호스피스가 하고 있다. 호스피스는 특수 의료가 아니라 일반 의료로 수분공급이나 영양제, 진통제 정도로 공급만 한다. 자연적 죽음을 맞도록 가족들과 상봉이나 사랑 안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람은 어떤 순간에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을 형이상학적 인간의 가치에 치중되어 현상의 가치에 인간을 평가하며 생명의 존엄을 해치고 있다. 출산의 산고는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기쁨으로 변한다. 고통을 승화시킬 때 더 나은 가치를 만든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인류에게 베푸셨다.
죽음에 대한 가치관은 성사적 상황이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한다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상황이 죽음이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사랑이 전달되고 있다. 병자성사로 거룩한 죽음을 맞도록 한다. 신학적으로 죽음은 성사의 가치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거룩한 순간이다.
2024. 05. 18. 신학대학원 동문 유스티노회 김정우 신부 생명 윤리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