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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4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의 말씀보다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따르려 하는 해묵은 습관을 내려놓기 원합니다.
내 안에 한 몸처럼 굳어져버린 이런 습관이 나를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임을 깨닫습니다.
나 자신을 잘 살펴서 한 걸음 더 가까이 주님께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은 업신여기면서 장로의 유전에 목을 매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안에 내가 있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새롭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13:1-12
제목 : 부득이함으로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노를 달래고자 하는 우매무지(愚昧無知)였습니다.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40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에
2 이스라엘 사람 3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1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치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 나의 묵상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인간 왕을 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무엘이 책망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왕을 구하는 악까지 범하였노라고 자백하며 긍휼을 구하였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하지만 왕을 언약 조건의 규정 안에 두심으로 왕과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손에 두셨다.
한편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다른 번역본에서는 1절의 말씀을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1, 표준새번역)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 두 해였다.
(1, 쉬운성경)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는 42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은 왕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 3천 명을 택하였고 그 중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1천 명은 요나단과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냈다.
요나단이 게바에 주둔해 있던 블레셋의 진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른 블레셋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사울은 이스라엘 온 땅에 나팔을 불게하고 히브리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을 듣게 하라고 하였다.
그 말은 사울이 블레셋의 진을 쳤다는 것과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갈에 모여 사울을 따랐다.
블레셋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모였다.
그들은 전차 3만 대와 마병이 6천이었으며 백성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리고 벧아웬 동쪽에 있는 믹마스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곤란에 처했음을 알고 동굴과 나무숲으로 가서 숨었다.
바위틈과 구덩이 그리고 우물 속에 숨은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히브리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길갈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의 군대는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는 사무엘과 합류하는 날까지 7일을 기다렸지만 사무엘은 길갈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곳에서 백성들의 사울을 떠나 흩어졌다.
그것을 본 사울은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져오게 하고 그 제물을 드렸다.
그가 제물을 다 바치고 나자 사무엘이 도착하였고 사울은 그를 환영하고자 마중 나갔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일을 행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사울이 대답하기를 백성들은 나에게서 떠나고 당신은 오지 않았으며 블레셋은 믹마스에 진을 친 것을 내가 보았다.
그래서 혹시 그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 올까봐 두렵기도 하고 아직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못하였기에 부득이하게 제물을 바쳤노라고 하였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의 모습은 정말 겸손하였고 또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웠으며 그 승리의 결과 또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음을 인정하였던 자이다.
그런 그에게 왕이 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물론 그가 당한 상황은 사면초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블레셋은 싸우려고 당시 이스라엘 땅인 믹마스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무섭고 두려워서 하나 둘씩 사울을 떠나고 게다가 블레셋은 전차만 3만 대를 동원했고 마병이 6천이나 되었다.
그 외에도 군사들이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사울 그가 정말 믿음이 있었다면 전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전쟁을 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런 믿음이 없었다.
오직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흩어지는 이스라엘의 군사들과 블레셋의 무수한 전차 그리고 그들의 군인들이었다.
사울을 이어 2대 왕이 된 다윗은 모든 전쟁에 100전 100승이었다.
그것은 자기의 힘도 아니고 군사의 숫자로 인함도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던 것이다.
그의 신실함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이기게 하셨던 것이다.
(대상 1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처럼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울의 상황이 아무리 사면초가에 놓였을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해결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또한 얼마 전 길갈에서 그가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 그는 사사인 사무엘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그리고 제사 등 제사권과 예언에 관한 일 등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번제와 화목제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사무엘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월권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12절에서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여서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렸다고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부득이하게, 부득이하게...
이 말이 우리의 상황을 좀 충분히 해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해명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로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을 지키면 너는 살고 나 또한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율법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다 지킬 수 없다.
(롬 3:10,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모두 잘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깨달으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나는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데 율법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 내가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는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는 사형을 언도하지만, 작은 거짓말을 한 사람은 죄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어겨 살인을 한 사람도 사형이며, 작은 거짓말을 한 것도 하나님을 속인 죄이기 때문에 그 결과 역시 사형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복음 때문이다.
그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이시고, 그가 행한 메시야적 행위가 복음이다.
이 메시야적 행위의 십자가와 무덤에 장사됨은 우리를 살리신 복음 중에 복음이다.
나는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그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우리 주님을 붙드는 것, 그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다.
사울은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님 앞에 엎드렸어야 했다.
이는 말씀을 그의 왕권 곧 통치권 위에 두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권을 말씀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가 제사를 드린 것 또한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12절에서 ‘은혜를 간구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힐리티’의 원형 ‘할라’의 원래 뜻은 ‘누그러뜨리다, 달래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 엎드려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난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달래고자 제물을 드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죄가 된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달래고 얼러서 그들이 원하는 그 무엇을 얻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그런 종교의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을 두고 행하시는데 그 언약이 바로 생명을 얻게 한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결국 그것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작정하셨던 당신의 아들을 때가 되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게 하셨다.
아들이신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셨다.
(빌 2:6-8) 그(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고 그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 목사가 되었지만 그런 내 안에 사울이나 이방 종교인들과 다름없는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아주 이상한 신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어려운 상황, 사면초가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고 돌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했던 나의 무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를 잘 들어준다는 것을 믿었고 또한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으니 이런 우매무지한 자가 목사라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리오.
그저 빨리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복음을 깨닫게 하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얻어 살아갈 수 있게 하셨음이 그저 감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은혜를 주신 우리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생각하고 그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달래려고 했던 이 우매무지한 자를 용서하옵소서.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이 죄인 중에 괴수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었는지 그저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살기 원하여 주님께 엎드립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연합을 통하여 주님의 길을 걷는 의의 삶을 살게 하소서.
내가 입어야 할 옷은 의의 옷이오니 주님이 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옳은 행실이 되게 하소서(계 19:8).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