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空性)에 대한 고찰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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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공부하면서 공(空)이란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아 갸우뚱거릴 때가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산이 어느 방향에 있느냐 하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강남에 있을 때는 북쪽이라 말하고, 강북에 있을 때는 남쪽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그러므로 동서남북이란 조건에 따른 개념으로 실체가 아니라고 하였다. 나아가 우리 각자가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나라는 것도 시시각각 연기하는 여러 기능의 조합물일 뿐 실체가 없단다. 나라는 게 그렇게 여러 가지 조건에 의존해 생겨나는 임시 가공물일진대 그 외의 것들이야 다 가변적인 것들이 아닌가.
이렇듯 나라는 것도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無我)라는 공성(空性)을 지녔다고 이해되자, 괴로움을 일으키는 욕심이나 분노 또는 교만 같은 것들이 한낱 아지랑이 같은 허깨비로 비쳤다. 나라는 것도 공이고 동서남북도 공일 진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탐진치(貪瞋痴)가 어디에 붙는단 말인가.
나는 이러한 이해를 과거 상처에 꽉 매여 있는 어느 내담자에게 적용해보았다. 그는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 상당히 회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진한 게 남아있다며 나를 찾아왔다.
예전에 동료에게 과격을 당했던 그는 죽을힘을 다해 오랜 기간에 걸쳐 상처를 치료받는 과정을 걸쳤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 동료를 만나 분한 마음을 풀면서 모든 것을 하늘에 위임하였단다.
하지만 그는 상처와 씨름하며 온통 다 흘려보낸 세월에 대해 깊은 회한을 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때의 상처를 떠올리면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온몸을 관통한단다. 이런 호소를 하며 그는 나에게 과연 어떻게 해야 이러한 통증을 물리칠 수 있는지, 나아가 다시금 그런 과격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하여 물었다.
이렇게 말하는 그에게 나는 아직도 분한 마음이 덜 풀린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많이 회복한 게 사실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은 좀 더 깊은 공감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한 대꾸에 나는 그가 상당히 지적인 사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그가 지나치게 상담의 원칙에 치우쳐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처를 푸는 데 공감이라는 것이 중요한 도구로 보편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감성에 기초한 그것이 상처를 희석하는 데 탁월하지만,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함으로써 날려버리는 것도 그 못지않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상처라는 것은 과격을 받아들인 나라는 게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인데 과격에 대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허깨비 같은 관념에 기초한 집착 아니냐고.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고통이 실재한다는 착각에 단단히 빠져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말에 그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며 다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나는 남산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동서남북은 조건에 따라 설정된 개념일 따름이지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설명이 쉬웠던지 선뜻 수긍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남산의 위치를 굳게 믿게 하는 나라는 구심점도 의존에 기초해 변화하는 집합체를 일컫는 개념일 뿐 실재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동료의 과격은 이미 사라진 마당이고, 그것을 받은 나도 시시각각 변화하여 없는 상태인데 무엇을 잡고 괴로워하느냐고 말했다. 즉 환영을 잡고 씨름하는 셈이라고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는지, 뭔가 대단한 의미를 담은 말 같기는 한데 아직 잘 모르겠다며 언제 다시 그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나도 더는 이어갈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나의 주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주어진 삶을 잘 누리도록 돕느냐 하는 거에 있다. 생명 자체를 영위하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우리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집착이나 분노와 같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것을 떨쳐내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모색하고 있다.
고통을 극복하도록 돕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알아주고 달래주는 식의 공감 반응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이성적으로 철저히 분석하는 방식은 어렵긴 해도 일시에 모든 것을 털어내는 것으로 호쾌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공(空)개념은 좀처럼 뿌리 뽑히지 않는 고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공감보다 훨씬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 남자는 내가 하는 말이 쉽지 않아서였는지 잘 모르겠다며 밀쳐냈고, 그리하여 나는 더 이어가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내담자에게 공성(空性)을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제 이것은 상담자인 나로서는 피하기 어려운 과제로 하나의 임무 같다.
다른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연기법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철저하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봄맞이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