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월요일 강론>(2024. 3. 25. 월)(요한 12,1-11)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1-8)”
1)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2코린 2,15-17ㄱ).”
사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유 냄새는 구원의 향기였고,
생명의 향기였습니다.
그러나 배반자 유다에게는 그 향기가 ‘돈 냄새’였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죽음의 향내’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라는 말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자신이 향유였고, 향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향유가 비쌌다는 것은,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바친 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향유가 순수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라는 유다의 말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나는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라는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유다의 말은 위선자의 ‘빈말’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라는 말은, 유다에게 ‘도벽’이 있었다는 뜻은 아닌 것
같고, 공금을 자기 돈처럼 썼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늘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왜 그런 사람에게 돈주머니를 맡겼을까?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모르지만,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맡긴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자신이 맡겠다고
자청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었더라도, 남을 도와줄 돈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합니다.>
3) 마리아와 마르타와 라자로 남매는 부자였을까? 가난했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 남매를 사랑하셨다는 것이(요한 11,5)
중요하고, 그리고 그들 남매가 예수님을 사랑했고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든 마리아에게 돈이 많아서 그 비싼 향유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으로,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난한 이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마리아에게 주었고,
그 돈으로 마리아가 향유를 마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한 말에 대해서, “가난한 이들은
받기만 하는 존재인가? 가난한 이들도 주님께
무엇인가를 봉헌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무엇을 얼마나 바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전 두 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도(루카 21,3-4)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삼백 데나리온어치 향유’와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은, 그 사랑과 정성에서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4)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고,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특별한 비상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나는 늘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또 가난한 이들 안에서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나의 장례를 미리 거행했음을
기억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희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한 장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가 됩니다.
[출처] 성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