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과 솔로몬의 지혜
1열왕 3,4-13; 마르 6,30-34 / 연중 제4주간 토요일; 2024.2.3.
오늘 독서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는 대목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오래 살거나 많이 가지거나 복수를 청하지 않고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한 데 대해 마음에 들어 하시고 부와 명예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열왕 3,12). 과연 솔로몬 임금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분별력을 가지고 현명한 재판을 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배움에 굶주린 군중이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이 흩어져 사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마르 6,34). 많은 무리를 뜻하는 군중이 몸으로는 모여 있어도 마음으로는 제각기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한데 모아줄 수 있는 중심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하며 살아가는 군중의 상태를 개인주의 집단이라 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솔로몬이 하느님께 청해서 받은 지혜를 예수님께서는 직접 군중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몸소 체험하시면서 또한 보여주신 진리였습니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갇혀 있는 군중이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게 되면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하는 백성이 됩니다. 교회는 군중이 아니라 백성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지혜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한편 사도들은 각지에 파견되어 군중을 위해 도와주고 가르치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고나서 예수님께 모여 와서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쉬도록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군중을 백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도움과 가르침이었고, 그들의 휴식은 단지 피곤한 몸만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지냄으로써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익한 고독이자 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활동과 관상이 사도직의 리듬이었습니다. 활동함에 있어서는 군중의 현실에 투신하는 일이 필요했다면, 휴식함에 있어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일 즉 관상이 필요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주 바쁘게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몸이 피곤해지거나 아프게 되면 병원으로 가서 강제로 쉽니다. 이러한 매카니즘 안에서는 활동의 성과도 경제적 수치로는 많이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이 피폐해 지기 마련입니다. 휴식도 몸 위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혼이 생기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군중을 백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활동과 하느님 안에서 쉬는 관상으로 방전과 충전이 선순환되는 사도직의 리듬을 지키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3주일에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냈습니다만, 이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선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성경을 쓰신 바로 그분이신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은 늘 새로워집니다. 구약 성경은 결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일부입니다. 성경에 영감을 불어 넣으신 바로 그 한 분이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변모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교황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12항).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이들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데, 그 제자들이 돌아와서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스승에게 다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셔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갔지만 군중은 거기까지도 쫓아왔습니다. 진리에 굶주리고 목마른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보여서 쉬는 것을 단념하고 많은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같은 마르코의 보도는 백성의 처지와 제자들의 상태를 기준으로 그에 맞추시는 예수님의 목자다운 처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처신이 아닐 수 없고, 여기에 가르침을 넘어서는 삶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전 생애를 간략하게 평하자면 이러합니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으뜸이 아니었음에도 다윗의 편애로 맏아들 압살롬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초기에는 오늘 독서에서 들으신 대로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해서(1열왕 3,9) 백성 사이의 송사를 지혜롭게 처리함으로써 단결을 가져왔고 따라서 나라 살림도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에도 재능이 있어서 백성을 훈계하는 잠언을 지어서 이스라엘 문학의 시조로도 불릴 정도였습니다(1열왕 5,12). 부왕 다윗이 주변 여러 나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 번영을 이루고자 폈던 외교정책의 성과가 아들 솔로몬대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이스라엘 왕국에는 모처럼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찾아오는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강대국 이집트의 도움을 기대하여 그 공주와 결혼하면서부터 불행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1열왕 3,1). 솔로몬의 지혜가 널리 알려지자 남쪽 나라 시바의 여왕도 귀한 예물을 들고 찾아왔는데(1열왕 10,1; 2역대 9,1), 이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여인 중에서 들인 수많은 왕비를 거느리고 그들의 우상숭배 풍습까지 허용하는 바람에 예루살렘 궁전에 사치와 향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1열왕 11,5). 파라오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출신의 여인들을 가까이했는데, 도합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1열왕 11,1-3). 솔로몬은 그는 부왕 다윗이 못 다한 숙제를 하겠다고 성전을 짓기도 했는데(1열왕 6,2), 그 핑계로 다시 궁전도 지으면서 성전보다 더 크게 지었습니다(1열왕 7,2). 그 바람에 백성들의 강제노역이 갈수록 심해졌고 세금도 과중하게 물렸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르하브암 대에 가서 왕국은 북쪽 열 지파와 남쪽 두 지파로 쪼개져 버렸습니다(1열왕 11,34). 말년에 솔로몬은 코헬렛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으나(코헬 1,2)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덧붙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코헬 12,13)이라는 깨달음을 남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했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처신하신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의 열매로 얻은 부와 명성에 취해 우상숭배와 향락에 빠진 솔로몬은 무척 대비됩니다(1열왕 5-9).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 제자로 불러 모으기도 하시고 그 제자들을 곳곳으로 파견하시기도 했으며 귀환한 다음에는 쉬게도 해 주셨는가 하면, 군중에 대해서는 배우고자 하면 가르쳐주시기도 하다가 굶주리는 듯 하면 빵의 기적을 일으켜서 배불리 먹이기도 하시는 등 군중의 상태와 백성의 처지에 맞추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솔로몬보다 더 큰 이’(마태 12,42)라고 자처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면, 신구약 성경 전체는 말씀에서 자양분을 얻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예언적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12항). 말씀에서 자양분을 얻은 이들의 삶이 세상에 대해서 다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비추어질 때, 성서는 성경으로 바뀝니다. 다만 거룩한 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을 담은 진리를 담은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지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넘어서서 개인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를 꿰뚫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논리와 분석에 바탕한 서구적 사유방식으로 형성된 교리 체계보다는 직관과 종합에 바탕한 아시아적 사유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본시 아시아 세계에서 형성된 성서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훨씬 더 적합합니다. 그리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은 선교 활동에 있어서도 성경에 입각한 관상적인 삶이 병행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보여주신 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직 활동의 리듬과 부합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탐구, 형제적 친교 생활 그리고 이웃에 대한 봉사는 오늘날 아시아의 민족들에게 매력적인 그리스도교의 증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봉헌 생활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아시아 특별 총회는 봉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함으로 초대하는 보편적인 부르심에 대한 증인이 되고, 모든 이 특히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자기 헌신적 사랑으로써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감각이 자주 쇠퇴되는 세상 속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최고성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예언적이고 확신에 찬 증거를 주어야 합니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의 가치들과 기쁜 소식의 변화시키는 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봉헌 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특히 아시아의 많은 형태의 영성과 금욕주의에서 잘 나타나며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느님 추구에서 지도자들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아시아의 수많은 종교 전통들 속에서 관상 생활과 금욕 생활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큰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증거는 큰 설득력을 지닙니다. 평화롭고 조용한 증언 가운데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삶은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더욱 큰 조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볼 때 봉헌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가난과 검소함, 정결과 진실함, 그리고 순명하는 자기희생과 같은 조용한 모범은 선의의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주변의 문화와 종교들뿐 아니라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과 결실 풍부한 대화를 낳는 품위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봉헌 생활을 효과적인 복음화를 위한 특권적인 수단으로 만들어 줍니다”(요한 바오로 2세, ‘아시아 교회’, 44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