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에 김종진과 함께 간 우루무치의 '얼다오차오 대 바자르'(2003. 8. 15)
트루판의 아침이 소리 없이 밝아온다. 슬그머니 잠자리를 떨치고서 나선 새벽 거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으니, 마치 버려진 도시 같아서 임시로 지은 영화 쎄트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태양은 아직 지평선 아래에 있건만 한번 달궈진 대지는 식을 줄을 모른다. 이 더위를 안고서 아직은 조용히 잠들어있는 아침이다. 잠깐의 여명(黎明)뒤에 밝아오는 대지가 싱그럽다. 이전의 오아시스에서 흔히 보았던 키 큰 백양나무의 우쭐거림은 눈에 띠지 않는다. 대신하여 대로변은 펑퍼짐한 회나무 가로수가 편안하고, 사이사이 작은 길은 포도덩굴로 터널을 이루었다. 짙은 그늘을 안고서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가 소담하다. 텅 빈 팔차선 대로를 무단으로 건너 뒤편의 여염집 골목을 찾아드니 모든 동네가 몽땅 취침 중이다. 트럭의 짐칸을 침대삼아 배꼽을 드러낸 채 코를 고는 사내로 부터 고추를 내놓고서 대자(大字)로 누워 자는 꼬마 녀석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대문 밖에 내어 둔 평상 위에서 각자 편안한 자세로 아침잠을 즐기고 있다. 바람소리마저도 끊긴 가운데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해있다. 새삼 오늘이 일요일임을 떠올린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요즈음 시대와는 달리 우리의 어릴 적 추억 저편에도 일요일아침은 뭔가 특별히 고즈녁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기마저도 한가로운 가운데 예배당의 땡그렁 종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던 그 시절을 정지 된 그림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나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에도 살며시 깨어난 노인의 놀란 눈이 마주쳐 서로 조금 민망하다. 동네 모퉁이에 자리한 ‘난(?)’ 가게는 아침장사 준비로 분주하다. 간밤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밀가루 반죽을 둥굴납작하게 편 다음 달궈진 화덕 안으로 상체를 들이 밀고서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붙여간다. 스카프로 곱게 머리를 동인 젊은 아내는 반죽 위에 참깨 고명을 묻혀가며 남편을 돕는다. 잠깐의 허리 쉼을 위하여 화덕에서 몸을 뺀 사내의 얼굴은 온통 맑은 땀으로 흥건하다. 아침식사를 이걸로 해볼까했지만 삼십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단다. 그냥 왔던 길을 되돌려 호텔로 돌아간다. 연도의 공사판에는 몇몇 인부들이 게으른 모습으로 벽돌을 챙기며 하루 일을 준비하는데 이미 떠오른 햇빛의 열기가 예삿일이 아니다. 호텔 로비가 왁자지껄하다. 큰 단체로 여행하는 중국인들이 출발을 위하여 벌써 식사를 마치고서 한꺼번에 떠들어 대는 중이다.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 공명통(共鳴筒)이 되어 여간 소란한 게 아니다. 소음을 피하여 식당에 가니 우리 일행들도 어지간히 식사를 마치신 가운데 처사님과 자리를 같이했다. 스님은 새로 머리를 밀고서 깨끗이 다림질 된 모시 승복을 걸치셨다. 이제 귀국 길이니 본래의 자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하심이리라. 뜰에는 자귀나무가 자주(紫朱)빛을 자랑하며 정원수로 당당하다. 우리나라에서 워낙 익숙한 꽃인지라 그 만남이 반갑다. 투루판을 뒤로하고 우루무치를 향한다. 대략 150km 거리로 잘 닦인 고속도로가 있다. 다시 천산산맥을 북쪽으로 넘어가야한다. 삼십분만에 오아시스를 벗어난다. 뜨거운 사막 위에는 건포도를 위한 건조장이 세워진 가운데 거대한 송전탑을 세워가는 공사가 한창이다. 인근에 세워진 풍력발전소와 연계된 시설이리라. 풍력발전은 중국 중앙정부에서 진행하는 서북공정의 일환으로 세계 제일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찬 프로젝트이며 바람이 많은 이 일대가 최고의 입지로 알려져 있다. 공로(公路)와 나란히 우루무치로 이어진 철로(鐵路)가 놓여있다. 그런데 두 개 선로의 거리가 대략 백미터 이상이다. 이유인 즉, 극심한 모래 바람에 달리는 열차가 전복(顚覆)될 것을 대비함이라하니 이곳의 바람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공로(公路) 역시 오가는 길을 그만큼 떼어서 놓였음은 마찬가다. 마침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용무(用務)를 위하여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맞이한 바람은 정말 몸을 날려버리려는 듯 맹렬하기만하다. 열시 반. 드디어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톨게이트에 대서특필하였으되 “어려움을 알고서 진입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이고서 올라가자(知難而進, 迎難而上)”하였으니 이 도로가 천산을 남북으로 넘는 험로(險路)임을 일깨워 조심하란 뜻일 게다. 고갯길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골골이 바람 골에 설치된 수많은 풍력발전소의 바람개비들이 그 숫자를 셀 수가 없다. 현재 세계 제일의 풍력발전국인 네덜란드를 곧 따라 잡을 것이라 장담하면서 발전 설비 또한 중국 자체에서 모두 생산된다하니 그들의 저력에 놀랄 따름이다. 고개의 오름길은 쿠얼러에서 투루판에 올 때와 같이 사막의 풍광이 재현되었지만 천산 줄기의 고개마루를 내려오면서부터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루무치(烏魯木齊)라는 지명은 몽고어에서 유래되었으며 ‘푸른 목장’이란 의미를 지녔다. 그 이름에 걸맞게 푸른 초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곳곳에 방목된 양떼의 모습이 다분히 목가적으로 다가온다. 산맥을 넘으면서 사라졌던 기차 길도 다시 나타나 나란히 간다. ‘염호(鹽湖)’ 톨게이트에 이르자 먼발치로 가상자리에 허옇게 소금이 쌓인 호수가 보인다. 저 유럽의 사해(死海)처럼 또 하나의 사해(死海)가 여기에 있다. 그 옛날 바다였던 곳이 융기(隆起)한 뒤 점점 메말라 이제는 그 염도(鹽度)가 튜브 없이도 맨 몸을 띄울 수 있을 정도라니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이곳에서 또 하나의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으리라. 아침에는 북쪽에 놓였던 천산이 이제는 남쪽으로 보인다. 천산 봉우리들의 촉촉한 모습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제 막 정오를 넘겼다. 간단했던 아침 식사 때문에 좀 시장하다. 하지만 조금만 가면 우루무치에 입성하여 점심식사를 하리라는 희망이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도로공사로 인해 완전히 시골 길로 우회해야한단다. 얼마를 가야 도착이 될지 알 수 없다. 에라 모르겠다. 아침에 준비해 둔 호밀빵(난)에 눈길이 간다. 광천수(鑛泉水) 한 모금에 입 안에 씹히는 빵 맛이 고소하다. 노면에 아스콘만 살짝 씌운 구릉 지형 위를 나룻배 저어가듯 큰 파장을 그리며 간다. 좋지 않은 도로사정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날듯하다. 하늘은 푸르고 능선의 풀빛은 아름답다. 차창 밖의 한적한 시골 모습에 마음이 편안하다. 길 가의 푸주간은 이제 막 잡은 양고기를 해체하여 전봇대에 걸고서 바로 고기를 나눈다. 아줌마 아저씨 할 것 없이 한 칼씩 베어 담은 표정이 흐뭇하다. 어릴 적에 동네 고깃간에서 돼지고기라도 살라치면 터럭이 듬성듬성한 채로 한칼씩 썰어서 신문지에 둘둘 싸주던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드디어 우루무치에 입성하였다. 시내 중심을 우회하는 도로가 산 허리에 잘 닦였다. 오른편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가 익숙하다. 칠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묵었던 ‘진인촨(金銀泉)호텔’과 그 곁의 ‘우루무치역(驛)’이 반갑다. 다시 그 건너편으로 시내의 중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신장(新疆) 지역 최대의 도시인 이곳은 계속 몸집을 키워가는 중인지 예전에 비해 훨씬 많아진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하지만 왼편의 초라한 산동네는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중이다. 아마 이곳도 도시빈민에 관해서는 같은 숙제를 안고 있으리라. 시내 중심가로 나서니 바로 한국 식당 OOO이다. 오랜만에 본 한글간판이 반갑다. 현지 거주하는 교포들과 관광객이 주 고객으로 보이는데 제법 영업이 잘되는지 업소가 여간 번듯한 게 아니다. 점심 메뉴는 삼겹살에 상추쌈이다. 풍성한 잎사귀를 가진 꽃상추가 식욕을 돋운다. 여행을 떠나온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하는 한국 음식이다. 무슬림에게는 돼지고기가 금기음식이기에 오아시스도시 어디서도 이런 메뉴는 비슷한 것이라도 절대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반가운 한국식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 냄새가 예술이다. 그간의 여정이 만만치 않았던지 배부름과 함께 식곤증이 밀려온다. 여행 막바지인지라 긴장감도 좀 떨어진 때문이리라. 조금 쉬어가기위해 인근의 발 맛사지 업소를 찾았다. 일행 두 명과 함께하여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니 세상 이처럼 개운한 게 또 있을까싶다. 잠깐 졸린다싶더니 내쳐 사십분을 잘 잤다. 신강 역사박물관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칠년 전에는 이 박물관이 개보수중인 까닭에 방문하지 못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냉방이 잘 되어있어 피서지가 따로 없다. 중앙 로비의 한 복판에 이 지역의 축소모형을 전시해두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한 신강성의 면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이 모형을 들여다보면서 이번의 여정과 함께 칠년 전에 왔던 길까지 되짚어보노라니 또 한번의 여행이 된다. 전시된 여러 유물 중에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삼층의 미이라 전시관이다. 극도로 건조한 이곳의 기후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미이라로 변한단다. 듣던 대로 전시품들의 면모가 머리카락이나 치아는 물론이려니와 살갗이나 핏줄 같은 작은 부분까지도 얼마나 생생한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갈 것 같다. 마른 땅 안에서 그냥 탈수만 되어 말라붙은 채로 수많은 세월을 지낸 것이니 이게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나트막한 산에 공원을 만들어두었다. 홍산공원이다. 주차장에서 잠시 걸어 십분 남짓에 꼭대기부근의 전망대에 이른다. 내려다보이는 시내의 빌딩 숲이 장관이다. 칠년 전에 비하여 그 숫자가 훨씬 늘어나있어 어디가 어딘지 잘 분간하기가 힘들다. 조금 있다가 찾아갈 ‘얼다오차오(二道橋)’가 어디쯤일까 가늠하다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주위에는 일요일 오후를 즐기는 가족단위 탐방객들로 인산인해다. 위구루족과 한족들이 적당히 절반쯤 섞인 가운데 원색의 옷차림에 유모차를 몰고 가는 덩치 큰 위구루족 아줌마들의 수다가 만만치 않다. 공원의 한쪽 벤취에 앉아서 지나온 여정을 반추하노라니 왠 노인이 곁의 쓰레기통을 뒤진다. 선뜻 주머니 안의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어 건네주니 감사를 연발한다. 여행 시작 길에 입에 물기 시작했던 담배도 이제는 원위치를 시켜야한다. 우두커니 앉아서 아내에게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이내 답신이다. “전화번호는 잊지 않았나보네?”하며 약간의 익살이 담아서 “어서 오시라”한다. “그래 이쯤해서 잘해보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너무 오래 끌었어.............” 나그네 길에 올라보면 정말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새삼 눈뜰 수 있다. 홍산 공원에서 내려와 시내 한 중심의 ‘얼다오차오(二道橋) 대 바자르’를 찾았다. 이곳은 우루무치 제일의 상가지역으로서 내지인과 외지인들이 섞여 늘 북적이는 곳이다. 칠년 전 이곳에 왔던 날은 8월 15일로서 공교롭게도 이 큰 건물의 백화점을 개장하는 날이었다. 기념행사기 줄줄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마대의 행렬을 위시하여 행사에 초빙된 많은 악단들이 거리의 모퉁이마다에서 위구루 전통 음악을 연주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 당시 이곳에 함께 왔던 친우(親友) 김종진이가 오늘 역시 함께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념품이라도 하나 마련해볼 양으로 상가를 둘러보니 주로 옥(玉) 제품을 비롯하여 각종 칼 등속과 건포도 등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예상보다 많이 비싸다. 이곳저곳 둘러보노라니 불현듯 건너편 재래시장이 떠오른다. 내가 옛날에도 쑈핑을 해봤던 곳인데 소심한 가이드는 가지 말라며 극구 말린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2008년의 위구루사태 최초 진앙지로서, 아직까지도 한족들에 대한 반감이 가라앉지 않아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설명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길하나 사이에서 무슨 큰 변화가 있을 것이며 더군다나 나는 한족(漢族)도 아니고 외국인 여행자가 아니던가? 도리어 저 건너편의 분위기가 어떨지 호기심이 동한다. 지하도를 통하여 재래시장으로 넘어가니 거리에 인파가 훨씬 덜함이 당장 느껴지긴 한다. 상가 안으로 들어서니 손님이 없어 썰렁한 것이 건너편의 번잡한 대바자르와는 영 딴판이다. 가이드 말이 떠올라 슬며시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의 행색을 보고서 당장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어오며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상인들에게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기우(杞憂)란 이런 때 쓰는 말이렷다. 소심하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 일이다. 억지스런 호객행위가 없으니 참으로 편안하다. 천천히 상가를 둘러보노라니 어디선가 키타 선율에 얹은 노래 소리가 흘러온다. 기웃기웃 근원을 찾아가니 카자흐족들의 전통 악기를 취급하는 곳이다. 각종 현악기와 타악기가 벽에 걸려있는 가운데 종업원 청년이 능숙한 솜씨로 연주를 하며 나의 발걸음을 잡는다. 연주자와 두엇의 청중만이 자리한 곳에 이방이 끼어드니 모두 나를 주시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카자흐 언어이지만 유장한 현악기 리듬에 실린 노래가 다분히 목가적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연주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큰 박수가 나온다. 나의 돌출행동에 연주자는 잠시 멋쩍어 하면서 한국인이냐고 물어온다. 늘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그들의 눈이기에 내가 중국인도 인본인도 아닌 확실한 한국인으로 보이나보다. 나의 앵콜에 부응한 몇 곡의 추가 연주 때문에 결국 본래 목적이었던 기념품 쑈핑은 까마득히 잊혀 진 일이 되었다. 쑈핑 때문에 각자 흩어졌던 일행들이 다시 모였다. 여덟시가 가까우니 저녁의 분위기가 든다. 고개를 들어보니 벽돌로 쌓아올린 바자르 빌딩의 높은 첨탑이 내게 무너져내릴듯하다. 마지막 식사를 위하여 대 바자르의 관광식당을 찾았다. 바자르 빌딩의 사층에 자리한 극장식 식당은 그 규모가 놀랍다. 훌륭한 무대시설에다가 수천 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넓은 홀이 장관이다. 다만 동시에 너무 많은 인원을 수용하다보니 고품격의 식당이 전혀 고급스럽지 않고 도깨비 시장을 방불케 한다. 예약된 테이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데다가 심지어는 수저까지도 미비하여 잘 요리된 위구루 전통 음식들을 재대로 맛볼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떠랴. 곧바로 시작된 위구루의 전통 무용공연이 이러한 불만을 상쇄시켜주었다. 잘 훈련된 남녀 무용수들이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서 펼쳐내는 몸짓들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시간 반의 공연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 모르겠다. 말미에 행해진 대동 한마당도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모두가 함께하는 잔치가 되었다. 밤 열시니 한국은 열한시다. 이제는 귀국을 위하여 공항에 가야만 한다. 시내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국제공항이 자리했다. 겨우 삼십분 거리다. 공항에 들어서니 한가한 대합실에 한국인들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가 대한항공 전세기를 함께 타고 왔다가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일을 보고서 한주일 만에 다시 그 비행기를 타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공항 내부의 광량이 많이 부족한지라 없는 삼각대를 대신하여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몇 차례 셔터를 누르노라니 웬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칠순(七旬)을 훨씬 넘기신 나이로서 천산북로 사막 길을 다니셨단다. 말씀하시는 표정 안에 자신의 노익장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난다. 참으로 여행이란 삶을 풍요롭게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묘약 중에서도 으뜸이리라. 처음 여행을 떠나올 때는 집에 가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어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서 더 좋은 삶을 가지련다.
9일차. 7월 26일 월요일 우루무치 01시 00시 이륙, 06시 30분 인천공항 도착. 끝
牛步 |
출처: 우보조아 원문보기 글쓴이: 牛步 yyun 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