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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 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채와 지붕을 얹져 있고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현재 남아있는 탑의 높이는 5,75m입니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채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고요
층마다 몸채와 지붕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번쩨 층이 유달리 높습니다. 각층 몸채의귀등이에 기등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등이 아래를 약간 지켜올렸습니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여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채사이에
넒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합니다. 이곳에 여스님이 1500백명 되었는대 온대 간대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제사지내줄
사람도 없고 핏줄이나 형제자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추춧돌만 남아 새월이 말해 주고 있으며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 불타버렷지만 다시 지었으며 임진위란으로 또다시 불타버려 지금은 추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만복사지 이석좌는 불상을 옮려놓았던 육각형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우면서 함께 만든었습니다. 아랫부분은 각 축면에 꼿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 을 새기고 그위에 연꼿을 조각하였지요, 중간부는 아래쪽보다 너비가 줄어 들었는데, 모서리마다 짦은 기둥모양을 새겼고 웟부분은 다시 넒어지며 그옆면 역시 연꼿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위쪽바닥 중앙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놓은 사방 30cm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있고요, 이 석좌는 높이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전채를 조각했는데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이곳은 20년전에 만복사지를 발굴하였는데 아직 까지 복원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곳에 있던 1500백명 스님들이 죽어서도 이름이 없으니 주변에 문화재 급은 복원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북대학교 박물관팀들은 이곳을 발굴연구 해갔지만 이곳에서 나온 문화재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 불타 버렀고 임진왜란때도 불타 버렀으니 1500백명 된 스님은 온데간데 없고 새월이 많해주는 주춧돌만 남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남원에 박물관 하나없는 상황이고 소중한 문화재가 나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고 남원인구는 줄어 들어서 벌어먹고 살기 힘들고 타지역으로 나가 버리니 농촌에는 늙은 부모들만 지키고 있는 우리 남원의 애처러운 실정입니다.
전라도 남원지방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옛 문학작품으로는 <춘향전>과 <만복사저포기>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조선시대 초기와 후기의 작품으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당시대의 내면에 흐르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입신출세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부질없고 덧없는 사랑이야기’로 상반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의 사랑이야기는 남원시내에 위치한 광한루원과 만복사지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소설적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춘향전>과 광한루원은 이제 세계적인 러브스토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주변이 새롭게 단장되어 지역축제문화로서 완연하게 자리매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터만 존재하는 <만복사지>와의 관련성은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만복사지>를 단순한 불교 사찰로서의 존재 의미를 두기보다는 남원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적극 발굴하고 조성해서 새로운 지역문화벨트를 만드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지요.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독특한 설화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설화란 세부적으로 보면 신화와 전설과 민담을 총칭하는 문학용어인데,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전설은 이야기의 중심에 증거물이 현존하여 반드시 그것과 연관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지요. 한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한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납양특집극의 주제가 되기도 했으며, 안방극장의 단골메뉴가 되었던 ‘전설의 고향’은 대표적인 우리 옛 이야기인 전설을 재미있게 재구성한 것이지요.
이처럼 설화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이야기담론이었지요. 특히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은 불교이념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지배해왔습니다. 전국의 명산에는 수많은 사찰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찰마다 불도의 심오한 깨달음을 설법하곤 하였지요.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사찰마다 고유한 불도의 신비스러움과 관련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수되면서 수많은 이야기가 창작, 재창작 되어서 많은 인구에 회자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속에는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많은 증거물이 등장하여 사찰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볼 때 사찰과 관련된 설화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지요.
당시에 남원지방에 위치해 있는 <만복사>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복사저포기>도 이와 유사한 관련성을 갖습니다. 다만 증거물이 먼저이고 관련된 이야기가 나중에 생기게 된 일반적인 전설의 속성과는 달리 <만복사>라는 사찰이 먼저 존재했고, 이와 관련해서 시공을 초월한 양생과 죽은 처녀의 환타지적인 사랑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만복사>의 또 다른 미의식을 천착해 볼 필요가 있지요.
먼저 <만복사저포기>의 줄거리는 이렇지요.
“전라도 남원에 양생(梁生)이라는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라는 절에서 방 1칸을 얻어 외롭게 살고 있었지요. 젊은 남녀가 절에 와서 소원을 비는 날 그는 모두가 돌아간 뒤 법당에 들어갔는데 저포를 던져 자신이 지면 부처님을 위해 법연(法筵)을 열고, 부처님이 지면 자신에게 좋은 배필을 달라고 소원을 빈 다음 공정하게 저포놀이를 했는데 양생이 이기게 되었습니다. 양생이 탁자 밑에 숨어 기다리고 있자 15, 16세 정도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배필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축원문을 읽은 다음 울기 시작했답니다. 이를 들은 양생은 탁자 밑에서 나가 처녀와 가연을 맺은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고요, 얼마 뒤 양생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나 자신이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양생은 처녀의 부모가 차려놓은 음식을 혼령과 함께 먹고 난 뒤 홀로 돌아왔구요.
어느 날 밤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 자신은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양생도 불도를 닦아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했답니다. 양생은 처녀를 그리워하며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혼자 살았다고 한답니다.”
이 <만복사저포기>가 가진 소설적 특징은 <금오신화>에 실려 있었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불가의 이원론적인 세계를 환원구조로 하여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불법의 윤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시습은 주인공을 재자가인(才子佳人)으로 등장시켰으며, 주인공의 심리를 운문의 필법을 통해 잘 묘사하면서 불교의 연(緣)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소설이 갖는 특징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김시습은 경주의 금오산에 칩거하면서 <금오신화>의 첫 작품으로 남원을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창작하여 수록했을까요. 김시습은 <만복사>와 주인공 양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을까가 궁금합니다. 당시에 김시습의 생활지와는 지리적으로도 상당히 떨어진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지요. 물론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이 9주 5소경에 속할 만큼 교통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지방의 거점 지역이기에 문호가들의 눈에 쉽게 띌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적어도 당시에 남원의 <만복사>는 전국으로 널리 알려진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절집이었을 것이 확실하답니다.
더욱이 문학이란 재미있고 풍부한 소재거리가 많아야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것이기에, 남원은 <금오신화>의 한 작품인 <만복사저포기>의 적절한 문학적 배경이 될 수 있었다고 본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남원지역은 숱한 전란과 민란의 상처가 끊이지 않았답니다. 임진, 병자,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동학혁명이 일어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남원지방의 지역민들이 안고 가야할 상처들이 너무 많은 곳이 기도 하지요. <임진록>에 형상화된 전란의 자료나 정유재란 때에 희생된 만인의총은 남원지역민이 겪었던 지난 세월의 상흔들입니다. 실지로 <만복사저포기>에 형상화된 양반집 죽은 처녀도 정유재란에 희생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지요.
이 이야기를 쓴 김시습은 아마 남원지역을 방랑하면서 정유재란 때에 희생된 처녀원혼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그 원혼의 씻김을 불법과 스님과 양생의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김시습은 저포놀이라는 윷놀이와 비슷한 놀이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이야기의 실마리로 풀어가고 있지만, 결국은 정유재란 때에 희생된 한 많은 여인의 죽음과 윤회를 통한 여인의 원한 씻음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형상화하고 있지요. 여기에 불교의 심오한 연(緣) 사상을 통해 양생과 죽은 여인과의 한바탕 부질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만복사>와 스님과 윤회사상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복사>는 어떠한 규모의 절집이었을까요. <만복사지>는 남원의 중심지에서 상당히 벗어난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내 외곽에 있는 <만복사지> 근처에는 큰 건물은 없고 옹기종기 작은집들이 모여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한적한 곳으로 볼 때, 당시에도 인적이 드물고 삼림이 우거진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만복사>는 이미 퇴락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작품에 형상화하고 있다.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서 머물고 있으며,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있고, 행랑이 끝나는 곳에 아주 좁은 판자 방이 있지요. 이것으로 보아 정유재란이라는 혼란기에 <만복사>의 모습도 어수선하고 쇠락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소설내적인 모습과는 달리 현존하는 절터의 모습을 보면 당시에 <만복사>의 모습이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할 수 있지요. <만복사지>의 절터에서 보면 길가에서 볼 때 제일 먼저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큰 당간지주는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5m 정도에 아무런 장식 없이 투박한 모습으로 서 있지요. 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만복사지> 당간지주는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당시 <만복사>의 웅장했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답니다. 작품에서도 양생은 당간지주 사이로 몸을 숨겨 처녀의 모습을 훔쳐볼 정도였으니 그 크기와 규모가 웅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여기저기 솟아 있는 법당 터는 어림잡아 10여 개는 넘어 보이는데, 그리 넓지 않은 <만복사지> 안에 오밀조밀 꾸며져 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서면 꽤 큰 석좌가 있고요. <만복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모셨던 연꽃무늬를 조각한 육각형의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던 것입니다. 이 석좌만 보아도 만복사가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절집이었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급니다.
한편 보물 제30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겨 마모가 된 부분이 있고 몸체에 얹었던 지붕은 떨어져 나갔것입니다. 현재는 4층만 남아있는데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이지요.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답니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죽은 처녀가 이 탑을 중심으로 한 탑돌이를 통해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고 배필을 얻게 해달라는 축원문을 읽는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옆쪽으로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는데, 바위에 부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고려 초기의 작품입니다. 석불입상의 뒷면에도 부처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소실되어버린 <만복사>가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의 다섯 작품 중에 첫 작품이자 <만복사저포기>의 문학적 배경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절집이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터로만 남아있는 <만복사지>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볼 때 소실 이전의 <만복사>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재현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절터만 존재하는 <만복사지>가 옛날의 웅장하고 화려한 <만복사>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이 절집이 정유재란 시에 불에 타지만 않았다면 고색창연한 법당들이 즐비한 만복사지가 현재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존재했을텐데 아쉬움이 크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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