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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영남 순례 비슬산
2003. 4. 27
1회(98. 3.29) 남해 금산 보리암
2회( 10.25) 양산 영취산 통도사
3회(99. 4.25) 영주 소백산 부석사-소수서원
4회( 10.3) 평창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5회(00. 4.30) 경주 남산
6회(00.10.22) 대구 팔공산 동화사-백흥암
7회(01. 5.26) 김천 황악산 직지사
8회( 10.21) 합천 가야산 해인사 3회
9회(02. 5.26) 봉화 청량산 청량사-도산서원
10회( 10.27) 창녕 화왕산
□ 비슬산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053-616-0408)
비슬산(毘瑟山)---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
비슬산: 법상종 미륵신앙지
신라 원측법사, 대연법사는 학문계통 법상종,
신라시대 包山이라 불림.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음(包山二聖).
백제유민이던 진표율사는 업장참회를 통한 미륵용화세계를 주창. 금산사, 법주사(제자 신라왕자 영심은 그후 동화사 창립)
팔공산(앞산)과 비슬산은 10여시간 소요되는 능선으로 연결. 한 줄기는 창녕 화왕산과 닿는다. 유가사(요가), 소재사 등의 명칭도 법상종 용어. 이 일대의 사찰은 모두 백제계 법상종 절들이었다.
견훤과 왕건의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대패한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었다. 그는 포위되어 김락, 신숭겸 장군등 대신들을 잃고, 포위망을 벗어나 앞산자락으로 도주한다. 절 이름도 이 일들과 관련이 있다. 자취를 감춘(隱跡寺) 후, 임시로 쉬다가(臨休寺), 편하고 한가해진(安逸寺) 후, 直指寺 능허스님의 도움을 얻어 개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一然스님
무주암, 보당암, 인흥사, 불일사 등 비슬산 자락에서 30년 수행. 그가 11년간 수행했던 인흥사는 임란때 소실된 후 남평문씨 세거지가 됨. 이 일대에서 자료를 모아 그가 편찬한 것이 《삼국유사》이다. -가지산문파
60세에 80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군위 위락사에 거주, 유덕사, 모친 산소, 그의 부도의 삼각지형.
현풍 도담암, 무주암에서 공부, 1264년 인홍사를 인흥사 로 개칭.
용천사는 삼국유사의 년표를 만든 곳
□ 용연사(龍淵寺)
신라 선덕왕1년(912) 보양국사가 창건(용연사중수비,임수간 짓고 남한명 씀,1722)
조선 세종1년(1419) 해운당 천일 중창-임진왜란 소실
사명대사가 인잠, 탄옥, 경천스님 등으로 하여금 재건케 함
효종1년(1650) 화재로 소실
현종14년(1673) 불사리탑-적멸보궁 건립
영조4년(1728) 승통 혜조를 중심으로 중건
* 삼층석탑-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28호,고려시대
* 극락전-대구시 문화재자료 41호,정면3칸 측면3칸 겹처마 맞배지붕
후불탱-영산탱,영조7년(1731),효장세자(영조 큰 아들)의 빈궁 조씨 등의 시주로
조성
삼장탱화 - 영조20년(1744), 천장 지장 인장보살
* 石造戒壇
통도사 금강계단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 사리탑, 범종형 탑신,
상층기단-팔부중상 조각, 하층기단 네 모서리 - 사천왕상: 표정 자세 등 빼어난 조각, 극락전으로 옮김, 1673년 조성
석종부도 원형은 신륵사 나옹화상 부도에서 시작. 용연사, 통도사, 금산사 - 석종계 단형
[부처님 진신사리]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수학 후, 진신사리를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에 봉안. 宋 元 중국 사신들이 올 때 마다 사리 참배하던 중, 元 지배 시, 사리를 서울로 가져 간다. 운반 도중 사리함에서 사라진 사리가 통도사에 와 있었다.
그후 임란 때 왜군이 다시 탈취했으나, 거사 한 분이 되찾아 4과를 2과씩 2개함에 보관. 2과는 서산대사 있던 묘향산 보현사로 보내고, 나머지 2과는 통도사에 1과, 용연사에 1과를 모시도록 했다.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 석가여래중수비, 석가여래비(1676) 기록)
圓覺山中生一樹
開花天地未分前
非靑非白亦非黑
不在春風不在天 ---극락전 柱聯
□ 南平文氏 世居地 달성군 화원읍 본리
고려말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18대손 경호가 150 년 전에 인흥사 절터의 대웅전 자리에 종택을 짓고 문씨들이 세거하게 됨. 井田을 본뜬 9 채 종택은 9촌내 장자만 거주 가능.
* 수봉정사(壽峰精舍)---정면6칸 측면2칸,일자형 겹처마 팔작지붕, 위창 오세창의
전서체 현판. 19세기 초반 건축기술의 정수.
* 광거당(廣居堂)---壽石老苔池館(수석과 묵은 이끼와 못이 있는 집,추사의 편액)
* 인수문고---1.059종 만 여권의 고서들이 완본으로 보관되어 있음.
□ 현풍곽씨 : 곽재우, 곽종석(한말),
현풍곽씨 12정려각(玄風郭氏 12旌閭閣) : 달성군 현풍면 구지리 1348-2
1598년(宣祖 31) ~ 영조 연간, 率禮村 곽씨 一門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신 정려각. 영조 때 12칸 다포식 팔작집.
효자 郭履常, 郭履厚, 烈婦 居昌 愼氏, 郭氏 등은 1598년(선조 31)에 정려를 받았고,
사효자 郭潔 郭淸. 郭洞, 郭浩와 열부 廣州 李氏는 선조때, 열부 密陽 朴氏는 중종 때에, 열부 安東 權氏는 인조 때에, 열부 全義 李氏는 영조때 정려를 받았다.
□ 현풍향교
석축에 양각된 연당무늬, 깨진 蓮座臺 등 과거 이곳이 절터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 道東書院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영남유학의 뿌리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로 이어지는 조선 영남유학의 정통.
한훤당 김굉필(1454-1504) :
김종직의 제자, 26세 생원시 합격,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지냄,
연산군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80대와 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회천으로 유배된 후,
연산군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때 무오당인이라는 명목으로 귀양지 순천에서 50세에 사약을 받음. 직계제자 조광조. 사후 복권되어 동방오현(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퇴계)의 한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됨. 그의 학풍은 학문, 문자 중심에서 실천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
1604년 사당 건립---외증손 한강 정구와 퇴계가 주도
1607년 賜額됨
* 수월루---정문 1855년
* 中正堂---강당
* 동재,서재---기숙사
5대 서원 :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 순천박씨 세거지(六臣祠)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
1479年(成宗 10) 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膨年 후손(묘골 박씨) 집성촌.
1455年(世祖 원년) 선생의 일가족이 참화를 당하고 여자들은 관비로 전락하는 처지를 당하였으나 이곳 묘골이 친정인 둘째며느리 「성주 이씨」는 경상감영의 관비로 청원하여 경상감영 소속이 되었다.
때마침 성주 이씨는 유복자를 낳았다. 이때는 죄가 아직 풀리지 않았으므로 아들을 낳게 되면 죽이고, 딸은 관비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데 같은 무렵 이씨의 여종이 딸을 낳게 되자 아이를 서로 바꾸어 유복자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종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 뒤 1472年(成宗 3), 이씨 부인의 형부이며 당시 경상감사였던 이극균의 권유에 따라 이러한 사실을 자수하자 성종(成宗)은 크게 기뻐하며 유복자의 이름을 일산(一珊)이라 고쳐주었다 한다. 이때부터 묘골 박씨 일가를 이루었다.
마을의 맨 안쪽에 사육신을 모시고 있는 사당인 육신사가 있고 우측편에 자리한 태고정(太古亭)은 유복손 박일산이 창건한 정자.
그 후 1592年(宣祖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았던 것을 1614년(光海君 6)에 중건 하였다 일명 “一是樓[안평대군 글씨로 추정]라고도 하며,
장방형의 축단 위에 세워졌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건평 30평으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묘골의 많은 건물들이 불타버렸지만, 그런 중에도 사당과 태고정(太古亭)만은 남아 있다.
□三可軒 달성군 하빈면 묘리 하엽정(荷葉亭)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 정원. 사육신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三可軒) 박성수가 영조45(1769) 사랑채와 안채를 세우고 삼가헌이라는 편액을 건 데 이어 이듬해 서편에 정각을 세웠다.
주변에는 국화를 심고 100여평의 연못에는 연꽃을 심었는데 정자 이름을 하엽정이라 불렀다. 하엽정은 삼가헌에 딸린 정자.
삼가헌 - 나라를 고르게 하고(天下國家可均), 명예와 벼슬을 능히 사양하고(爵祿可辭), 갖가지 어려움을 능히 참고 밟을 수 있다(百忍可踏). -『中庸』3장
하엽정은 원래 서당으로 썼던 4칸의 '一'자형 집이었으나 나중에 현재의 모양과 같이 돌출된 누마루를 부설해 연못과 어우러진 별당채를 완성시켰다.
본 건물에 사랑채가 있으면서도 바깥에 별도의 사랑채격인 별당을 만든 사실에서 집주인의 풍류를 짐작하고 남는다.
앞의 연못과 뒤편의 대나무숲이 잘 어우러진다. 연못은 장방형. 연꽃이 만발하게 되는 한여름의 경관이 매우 인상적 (관리가 제대로 안돼 다소 어수선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아쉬움).
“예의염치효제충신” 전서 현판은 미수 허목(삼척 陟州東海碑) 의 글씨이고, 하엽정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빈면 묘골(순천박씨의 집성촌)이 있다.
2003.3 봄 영남순례- 비슬산, 달성(2)
[印象記]
자정에 출발하는 비슬산행 버스에 몇 개월만에 만난 벗과 자리를 함께 했다. 갓 지천명의 나이에 들었다. 자기분야에서 화려하게 꽃 피워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力能排南山, 文能絶地紀의 기개와 재능도 이제는 접어 가야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주위에, “회사인간”의 길을 걷고 있던 이들도 새로운 길을 찾아 하나 둘 떠나고 있다.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사회 - 구성원들이 각자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임무가 주어지고, 일한 만큼 대우를 받고,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에 매진하는 그러한 이상사회에 가장 근접한 조직이 20세기에 발전한 “회사”라는 조직이었다. 혹자는 이를 ”20세기의 파라독스“라고 하였다. 그러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체험하는 괴리는 여전하다.
한반도와 북핵 이슈도 대화에 오른다. 이라크전에서 보듯 승패는 명약관화하다. “Realpolitik”. 당사자인 남쪽 절반의 피해도 그 의사와 상관 없이 불가피할 것이다. 졸지에 통일 대통령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외교와 역사에 대한 원대한 통찰력이라는 개인적 역량 유무는 별개의 문제이다.
유학의 길과 고시의 두 길이 있었다. 어느 길이 현실참여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더 빠른 길이었을까? 바뀐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잘나가는” 이들이 있다. 주위의 또다른 많은 이들의 처지와 비교된다.
그리하여 현실은 또 다른 번뇌의 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이유라고, 결국에는 산다는 게 별개 아니라고 스스로를 그렇게들 위안하고 있을까.
도착하여.......
용연사 참배 후 두 번째로 들른 곳이 남평문씨 세거지 였다. 돈을 벌어 수만 권의 장서를 수집하여 인수문고를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학자들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돈을 번다는 것과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한 참석자는 “이곳의 남평문씨들이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이렇게 명문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본향의 남평문씨들은 무엇들 했느냐” 하며 문씨성을 가진 다른 참석자에게 힐난 아닌 힐난이다.
돈을 벌려고 한다 해서 마음대로 벌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귀와 명예를 마음먹은 대로 얻을 수 있다면, 마부의 노릇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그러나 뜻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고 일찍이 공자는 말했다.
도동서원 참배.
배산임수 형국이다. 낙동강을 바라보도록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정문격인 수월루를 지나 계단을 오른다. “내 안에 있는 주인을 불러온다”는 뜻의 喚主門이다. 몸을 굽혀야 지날 수 있을 만큼 문이 좁다. 환주문 지나 中正堂이 아기자기한 석축 위에 서있다. 강당으로 쓰이는 이 곳은 전후가 개방되어 있다. 기둥이 뒷뜰을 두 개의 공간으로 분할하고 있다. 나누어진 두 개의 틀 속에 아침햇빛으로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한 뒷뜰의 모란이 보인다. 중정당 마루와 명암의 극대비를 이루고 있다. 중정당 뒤로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중정당에서 참배객을 사로잡는 것은 눈 앞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이다. 참배객들을 몸소 맞이하러 나오신 팔순 넘은 종손 말씀에 의하면, 과거 소금배가 낙동강을 따라 인근 현풍 나루까지 올라왔었다. 강화도에 있던 팔만대장경도 배로 낙동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운반 후 다시 육로로 해인사에 옮겼다. 현재 남아 있는 경북의 40여 서원 중 6대 서원이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다 한다.
영남인맥의 뿌리를 생각하게 한다. 섬진강은 영호남을 가르는 경계이다. 섬진강과는 달리, 낙동강은 영남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다. 출세하여 경륜을 펴다 실권하여도 낙항하여 재기를 도모할 수 있다.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향토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도 실의로 일관하지 않고 학문을 천착하며 후학양성에 진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분노와 좌절을 종국에는 일시적이고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는 저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보수적이라는 영남에서 삼국 이래 이 나라의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폐쇄되어 편협해 지기 쉬운 의식구조를 강을 통하여 소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엉뚱하게 확대 해석해 본다.
또 하나, 한훤당이 東方五賢의 첫째 분으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경지 보다는 오히려 그가 배출한 제자들 덕(?)이 아니었을까. “외람된”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제자들은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영남 사림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그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스승의 복권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出藍의 제자를 두어야 성공한 스승이라 했다. 남명 조식의 門人들이 인조반정 이후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곳 한훤당의 후손들은 불천위 포함, 5대 봉사로 1년에 15 번 제사를 모신다 한다. 안내를 맡으신 有司는 영남과 호남의 차이를 말씀하신다. 남아 있는 서원의 수와 함께 한문학과가 개설된 대학의 수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이곳이라고 피할 수 없는 듯 하다. 과거에는 제례행사의 참석자 명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다. 요즈음엔 초대하여도 여러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다. 일전에 퇴계 종가에서는 宗婦 구하는 문제로 집안 어른들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티브이에 나온 적이 있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해서는 안될 것들을 몸소 지켜나가고 있는 이들.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을까.....
순천박씨 세거지...
일주일 연장된 철쭉제에 참가하기 위해 차량인파가 몰려든다는 전언이다. 교통체증 때문에 비슬산 본격산행은 부득이 취소했다. 대신 들른 곳이 순천박씨 세거지이다. 관비로 전락한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유복자 아들을 바꿔치기 하여 대를 이은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다.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묘골과 삼가헌 등 인근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안평대군 현판, 미수 허목의 전서현판 등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지방 사대부들의 문화적 안목과 식견을 반영한 것일까. 철이 일러 삼가헌 별당 정원인 하엽정 蓮塘의 연꽃을 볼 수는 없었다.
[사족]
달성의 남평문씨, 순천박씨, 안동 오천마을 광산김씨 등 그 뿌리는 호남이었다. 어찌 어찌 영남으로 흘러간 후손들이 영남의 명문가가 되었다. 반면, 순천은 한훤당이 유배 중 죽임을 당한 곳이고, 인근 화순에서는 조광조가 사약을 받는 등, 전라도는 고려, 조선조의 유배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배는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안식년제”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설도 있다. 나름의 유배문화(?) 전통이 생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산” 이다.
오늘날의 큰 문제의 하나라고들 이야기하는 “동서갈등”은 자기 성씨의 뿌리찾기를 통하여 자연스레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