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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대호군파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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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소개 스크랩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도봉서원(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을 병향(竝享))
조병식 추천 0 조회 9 06.11.22 06: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12번지
  - 교  통 편 : 지하철 7호선 도봉산역 하차 산행 60분 정도 소요
                    초록(지선) 1018,1019번,1139,1148,1151
                    파랑(간선) 100,106,107,140,150,160,161번
                    버스종점 하차 산행 55분정도 소요
  - 입 장 료 : 도봉산(북한산국립공원) 입장료
                   어른 / 1.600원, 청소년 / 600원, 초등학생 / 300원
                   단체(30명이상) 어른/1.400원, 청소년/500원, 어린이/250원
  - 입장시간 : 평일 오전 7시30분, 공휴일은 오전 7시
                   ※ 입장시간 이전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음.
  - 문      의 : 도봉문화원 (905-4026)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1573년(선조6)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선생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고 도학(道學)을 강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해서 다음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696년(숙종2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을 병향(竝享:위패를 나란하게 모심)하고, 1755년(영조51) 영조대왕의 친필현판을 받아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양주군 도봉산 계곡에 있는 영국동(寧國洞)으로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났으며 일찍이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었다. 정암 조광조선생은 한양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이곳의 자연경관을 매우 사랑하여 자주 왕래하면서 심신을 가다듬었는데, 청년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와서 학문을 토론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벼슬을 할 때에도 휴가때면 찾아와서 사색하며 쉬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유배지인 능주(綾州)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1573년(선조6) 계유(癸酉)에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지역주민의 청원에 따라 이곳을 탐방하고 정암선생의 유적을 더듬어 보고는 감개하여 마을 선비들과 더불어 서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암선생이 사약을 받은지 55년만에 이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서원을 설립하게 되니, 이듬해 여름에 낙성식을 하고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매년 봄 2월과 가을 8원의 중정일에 정암선생을 기리는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였다.

   서원 본건물은 남언경 목사 재임중에 대부분 완공되었으나 식당과 장서각 그리고 제수용 주방등은 후임목사로 온 이제민, 이정복이 계속 추진하여 6년만에 모든 공사가 끝났다. 공사의 비용은 사문(斯文)의 선후배가 공동으로 찬조금을 모아서 충당했는데 당시 부제학 허엽공이 중심이 되었고, 우참찬(右參贊) 백인걸과 이조참판(吏曹參判) 박소립의 공로도 적지 않았다. 도봉서원의 학규와 학령은 부제학 허엽이 제정하였는데 원장(院長) 1인과 교수 약간명을 두며 하재생(下齋生, 기숙생)의 정원은 20명이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의 방화로 서원은 20년만에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이후 16년간 폐교되었다가. 1608년(선조41)에 사우(祠宇)와 서원을 다시 세워서 옛날의 모습을 복원하여 서원의 학풍을 다시 일으켰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事)하니 도봉서원은 문묘에 종사한 유현(儒賢)의 서원이 되어 하재생이 30명으로 증원되어 더욱 번창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우암(尤庵) 송시열선생이 62세의 나이로 도봉서원에 와서 정암선생의 사당에 참배하고 시를 지어 남겼는데, 이러한 일로 인하여 도봉서원의 학생들은 큰 감명을 받고 도학(道學)을 계승하는 사명을 스스로 자부하였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 왕자위호(王子位號)사건으로 우암선생은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83년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우암선생이 서거한지 7년 뒤인 1696년(숙종 22)에 재학생들의 건의에 의하여 우암 송시열선생을 도봉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1723년(경종 3)에 김범갑과 최탁등의 상소로 인해 우암선생을 도봉서원에서 출향했으나 1726년(영조 원)에 복향되었으며, 1756년(영조 32)에 이르러 우암 송시열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게 되니 도봉서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에는 영조대왕이 친필로 ‘도봉서원(道峯書院)’네 글자의 현판을 사액(賜額)하게 되었으니, 이제 도봉서원은 양현(兩賢)을 모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어필사액서원(御筆賜額書院)이 되어 세상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첩설(疊設)한 서원은 모두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정암선생은 용인의 심곡서원에 독향하고, 우암선생은 여주 대로사에 독향하였고, 3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도봉서원은 훼철되고 말았다.

 1903년(광무 7)에 양주, 포천, 파주 등지 유림들의 주도로 도봉서원의 옛터에 제단을 모아 봄, 가을로 정암선생과 우암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 양주향교 전교 남궁 복씨의 발의로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창립해서 경향유지의 찬조를 받아 서원 경내의 동북쪽에 서향으로 사우(祠宇)를 다시 세워서 정암 조광조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병향하여 춘추향제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서원은 아직 완전복원되지 않았다.

 율곡 이이선생의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도봉서원의 건물배치는 북쪽에 남향으로 사우가 있어 정암선생의 위판을 모셨고, 사우양편에 재학생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으며, 서원은 남쪽에 위치했는데 중앙에 강당을 건설하였으며 강당의 양쪽에 협실을 붙여지어 날개처럼 만들었고, 전면에 있는 지형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김석신의 「도봉첩」이나 작자미상의 「도봉서원도」에 나타나는 도봉서원의 모습이 위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도봉서원 인근의 계곡바위에 우암선생의 친필을 새긴 ‘도봉동문(道峯洞門)’과 역시 주자의 시를 우암선생이 대자로 써서 새긴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 료장현송답잔원(聊蔣絃誦答潺湲)’이란 암각문을 비롯하여,  김수항, 권상하, 이재 등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여러 암각문들이 계곡 주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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