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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마포동 419-1 담담정(淡淡亭)이 있던 그 자리이다.
풍광이 빼어난 용산강이 굽이쳐 흐르는 언덕에 자리잡은 담담정이다.
“담담정은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 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 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동국여지비고>에서
현재 벼랑고개 위 벽산빌라 앞에는 담담정이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담담정 터
淡淡亭 址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무악(안산)의 지맥인 용산이 한강으로 뻗어 형성한 서호, 마호, 용호 세 호수를 이르는 삼개(삼포) 중 마호를 마포강
또는 마포항이라고 했다. 담담정은 무악에서 갈라져 나온 와우산과 노고산의 한 구릉이다. 빼어난 산수는 풍류를 낳았고,
한강 본류 18개 나루터 중 서울로 들어오는 땔감, 생선과 소금, 수공업품이 주로 반입됐기에 주막과 객주, 창고가 즐비했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48영(詠)을 지어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연구(聯句)를 짓고 바둑, 장기를
두는 등 풍류가 끊이지 않았고, 항상 술을 마시며 놀았다.” -<용재총화>에서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문종, 수양대군에 이어 세종의 셋째아들로 태어 났다.
그는 서예, 시문,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수양대군 주변 인물이 무인들이 많았다면 그의 주변에는 문인들이 많았다.
특히 그의 서체는 탁월하여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탄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권력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운명은 달라졌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으로선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밤.안평대군을 잡기 위해 수양대군의 수하들이 그의 집을 쳐들어갔을 땐 그는 집에 없었다.
밤새 도성을 뒤졌지만 안평대군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김종서가 철퇴를 여러 번 맞고도 아직 살아있다는 정보만으로도
수양대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게다가 안평대군 행방마저도 오리무중이니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사실 안평대군은 양어머니 집에 있었다. 안평대군은 일찍이 숙부인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 갔는데 양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도 양어머니 집에서 자고 있었다.여기서 잠시 양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할어버지 태종은 양영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세종), 성녕대군 네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성녕대군은 태종의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성녕대군은 창녕 성씨와 혼인하였으나 혼인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4살이던 해에 홍역에 걸려 죽었다.
애지중지하던 성녕대군의 갑작스런 죽음은 태종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래서 죽은 성녕대군을 위해 손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손자를 골라 양자라도 들여 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종에게서 난 똑똑한 손자들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세종의 아들들은 모두 양자로 들어가길 원했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는 즐거움을 떠나 종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순서로 본다면 당연히 둘째인 수양대군 차례였다. 그러나 태종은 거친 수양대군보다 다재다능한 안평대군에게 마음을 두었다.뒷날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 수양대군을 버리고 안평대군을 동생인 성녕대군의 양자로 선택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충격이었다. 태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부왕인 세종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서글펐을지 모른다. 동생 안평대군에 대한 열등의식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이 결국 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게 되는데 그 원인이 안평대군에 대한 열등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안평대군이 양어머니 댁에서 묵었던 그날 밤 계유정난이 일어났다.수양대군의 수하들은 안평대군이 늘 머무는 무계정사를 덮쳤지만 그곳에 없었다. 밤새 안평대군의 찾으려 도성을 뒤지던 병사들은 날이 샌 뒤에야 성녕대군 군부인 댁에서 안평대군을 체포할 수 있었다.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곧바로 강화도에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불안했던지 교동도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사했다. 불과 이레 만에 죽인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그가 죽은 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죄목 25가지를 열거하여 발표했다. 그 중에 세 번째 죄목이 양어머니 성씨를 간통했다는 죄목이었다. 양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신 안평대군을 두고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밤 양어머니 집에서 잤다는 이유만으로 간통죄를 씌웠다. 그것은 동생에 대해 잠재해 있던 열등의식이 안평대군을 빨리 죽이게 된 한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 영일정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이우량은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에 병사했고 장남 이우직은 안평대군이 사사되고 난 1년 뒤 교형(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으로 죽였고, 외동딸과 며느리는 계유정난 1등공신 권람에게 노비로 하사되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제수와 조카딸인데 이들을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던 권람의 집 노비로 팽개치는 비정한 수양대군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스산한 봄이 가고 5월이 된다. 마포강가의 담담정,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마주 앉아있었다.
한때는 안평대군의 별장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흥청거리던 곳이었다.장차 신숙주의 별장이 되는 이 담담정은
지금은 한적하기만 하였다.눈아래 내려다 보이는 강물은 눈이 시리도록 프르렀고 그 물위를 스쳐오는 강 바람은 뺨에 닿아
싱그럽긴만 했다.수양대군은 강물을 내려다보고 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런 수양대군의 기색을 힐끔힐끔 살피면서 한명회는 홀짝홀짝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처럼 물놀이나 한번 나가세.'하고 자신을 불러낸 수양대군의 심증을 한명회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었다. 옛날 같으면 그런 아프고 가려운 곳을 지체 없이
찾아 해결해줄 한명회였지만 요즈음은 짐짓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더 괴로워해야....."
그래야 결론이 빨리 난다고 한명회는 믿고 있었다.
천하의 한명회마저 별다른 계책을 내놓지 않으니
수양대군은 못내 답답하고 섭섭한 눈치였다.
그러던 중에 이렇게 호젓한 자리로 불러내었으니
오늘은 무언가 심중의 말을 털어놓을 모양이었다.
한명회는 계속해서 혼자 잔을 비우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공."
수양대군이 여전히 강을 내려다보는 채로 한명회를 불렀다.
"예."
"이 담담정에 아직 안평이 살아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한명회의 대답에 막힘이 있을리 없다.
"대군께오선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 못하겠습지요."
"어찌되었을까?"
"바꾸어 생각해보시오소서."
"흠,...."
수양대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명회의 말은 안평대군이 살아 있었다면
반대로 수양대군은 죽었으리라는 말이었다.
"한공, 내가 정난 전에 이곳을 단신으로 찾은 적이 있지?"
"그러하오이다."
"그때는..... 진짜로 살기를 느끼었네. 내가 안평의 동생이기만 했어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야."
"......."
"한공."
"예."
"실은...... 금성에게서도 그러한 살기를 느끼네. 나를 미워하고 있을거야. 죽이도 싶도록."
"......"
"안평을 죽였다는 것이지. 금성만이 아니라 모두가 믿질 않는게야. 죽이자 않았으면 내가 죽었으리라믄 걸."
-신봉승의 책 실록대하소설 <고운 님 여의옵고>에서
동생 안평대군과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세조 5년(1459년) 9월 담담정에 나와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했다. 성종 1년(1470년) 6월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은 한강을 유람하다가 물고기를 잡은 후
이 정자에 올라 잔치를 벌였다.
안평대군이 죽은 후 담담정은 신숙주에게 넘어간다.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 그리고 안평대군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세종 시절에는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중국을 13차례나 다녀오는 등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자기를 사랑해 주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양대군에게 붙었으니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할 수 밖에
없었다. 변절은 그렇다 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신숙주의 인간성을 잘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계유정난 직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조완규(안평대군의 수하)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 요문(要文)을
신숙주에게 하사품으로 주었다. 소사와 요문이 우물에 투신하여 죽어버렸다.
세조는 단종복위사건과 관련하여 공신들에게 노비를 내린다. 이때에는 신숙주가 폐위된 단종비 정순왕후를 자기 집 종으로
달라고 세조에게 요구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중후기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이나 윤근수의 <월정만필> 그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이 내용이 전해진다.
신숙주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보필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작에 크게 기여한 탁월한 성운학자다.
아울러 북방 육진 개척 등 외교적 노력도 평가받고 있으며 병서도 지은 전략가이자 문화 예술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요즘 말로 하면 ‘르네상스적 인재’였다. 신숙주에겐 ‘변절자’라는 매우 부정적인 꼬리표와 함께 변절을 상징하는 ‘숙주나물’까지
가세해 그의 업적은 빛을 잃고 있다. 신숙주를 변절자로 묘사한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가 중학국어 국정교과서에 실리면서
‘신숙주=변절자’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고 그의 업적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신성모는 정부수립시 국무총리서리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 곳 마포장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북
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신성모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들과 함께
대책마련을 위해 국무회의를 주재하여 마지막까지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마포장은 조선초기 안평대군이 지은 담담정 자리에 신숙주가 세운 별장이었다.
이승만이 정부수립 이전에 사용하였던 적이 있다.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여 조선호텔에서
며칠 묵다가 한민당이 주선하여 당시 서울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던 장진영의 집으로 옮겼다.
장진영은 약 150평의 건물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 다른 1채를 빌려주었는데
이곳을 돈암동 인근에 있다고 하여 돈암장이라 불렀다.이곳에서 2년 정도 머물렀다.
이승만과 미군정간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마포 쪽으로 옮겨
담담정 터에 지은 마포장에 살게 되었다. 이승만의 세력이 커지자 우익들은 돈을 모아 낙산 아래
이화장을 지어 이승만에게 기증하여 1948년 경무대로 이사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담담정 터가 신숙주의 것이었고 이화장도 ‘신대’(申臺)라고 불리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터였다.
결국 윤치영 등이 미 군정청과 교섭, 새 집을 얻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포(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언덕배기의 집이었다.
1947년 8월 18일 이승만이 들어가면서 마포장(麻浦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집도 내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정무총감(총독부의 2인자. 국무총리 격)의 여름별장이 있었다.
정무총감의 여름별장이 있던 곳이라니 대단할 것 같지만, 평시의 처소로는 적당치 않은 곳이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급히 수리를 해서인지, 집안 곳곳에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도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한 것만도 못하구먼.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끄르게.”
그 궤짝 안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목공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난 후, 망치로 대패를 톡톡 치며 맞추었다. 문짝을 떼어 자를 대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다음 손잡이를 고쳤다. 비서들은 그 능숙한 솜씨에 입을 딱 벌렸다.
이어 이승만은 정원을 다듬기 시작했다. 정원수를 다듬었고, 고목은 잘라서 도끼로 팼다.
무성히 자란 정원의 풀도 직접 뽑았다. 억센 풀을 힘주어 뽑아낸 후에는 “이놈, 나한테 졌지, 졌어”라며 즐거워했다.
이승만은 처음에 마포장을 ‘평원정(平遠亭)’이라고 불렀다. ‘평원정’이라는 한시도 남겼다.
어찌하여 집을 옮겨 강가에 산단 말가(移家何事住江頭)
찾아오는 사람마다 묻기를 멈추지 않네(來訪人人問不休)
서남쪽을 향하여 창밖을 바라보소(須向西南窓外望)
강 안개 속에 달이 뜨니 온 산이 가을이로다(五湖烟月滿山秋)
마포장은 전망이 참 좋았다. 하지만 추웠다. 가을이 되면서 바람이 몹시 불었다.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 날도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의 홍보고문이자 동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박사는 심한 기관지염으로 누워 계시고 저도 좀 그렇습니다. 집은 난방이 되지 않고 전기난로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그나마도 전류가 약해 난로가 좀처럼 잘 데워지지 않습니다.
몸이 따뜻해질 때라고는 햇볕이 방안으로 들 때에 볕을 쬐는 것뿐입니다."
마포장 시절은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 역정 속에서 가장 힘들던 시절이었다.
미 군정의 견제 속에서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이 지냈다. 지지자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암살의 위기도 겪었다. 범인들은 현직 경찰관들이었다.
5명의 범인 가운데 네 명은 다름 아닌 마포장 경비순경들이었다.
이들은 남로당에 포섭된 자들이었다.
암살음모 사건을 적발해 낸 마포경찰서장 윤우경은 이승만에게 집을 옮기라고 권했다.
권영일 전용순 신용욱 등 33명의 실업인들이 나섰다. 이들은 100만원 가까운 돈을 모아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있는 김성훈의 집을 매입했다.
이승만 부부는 마포장으로 이사한 지 두 달 만인 1947년 10월 18일 이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이 이승만의 사저(私邸)로 유명한 이화장(梨花莊)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