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사도운동변호 [구요한칼럼⑦]당신 안의 사도를 개발하라 기사승인 2015.04.18 20:09:02 - 작게+ 크게 공유 [구요한칼럼⑦] 사도와 선지자의 회복 (2) : 당신 안의 사도를 개발하라  어떤 사람이 ‘나는 사도다’, ‘나는 선지자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당혹해 한다. 성경에나 나오는 직분인 줄 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갑자기 '사도다', '선지자다'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역사적으로 사례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으니 처음 듣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성경에 의하면 사도는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보다 한참 서열(?)이 높은 자리인데 오늘날 누가 사도나 선지자이라고 하니 특히 목사들의 심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사도적 리더십 한국에도 목사들 중에서 ‘사도적 기능’을 담당하는 목사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에게는 많은 목사들이 따른다. 그 목사의 인품에 감화 받거나 뛰어난 영적 통찰력과 리더십에 영향 받은 목사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서 팔로워(followers) 즉 멘티가 된다. 그러면 그 목사는 사도적 리더십, 사도적 은사가 있는 목사이다. 고(故) 한경직 목사, 옥한음 목사, 하용조 목사 및 김준곤 목사 등을 들 수 있다. 굳이 유명 대형교회나 유명 선교단체의 목사가 아니라도 나름대로 팔로워 그룹을 형성하여 사도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사들도 한국에는 많다. 사도적 은사가 있는 리더 목사를 팔로워들은 자기들의 편의상 ‘선임 목사’, ‘왕 목사’, ‘대표 목사’로 부르기도 한다. 결국 ‘사도적 은사’는 ‘리더십의 은사’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사도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선지자적 통찰력 오늘날의 선지자는 어떤 사람인가? 전통적 교회는 성경 말씀을 잘 가르치는 ‘교사’를 ‘선지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교사와 선지자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성경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거나(forthe-tell), 예언하는(fore-tell)사람이다. 대언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변인이란 뜻이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대언의 말에는 미래를 예언하는 말도 포함된다. 선지자는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선지자에게 알리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하나님이 오늘날의 선지자에게 ‘보이시는 자기의 비밀’은 ‘성경 기록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시대와 상황에 맞게 펼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성령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을 하라는 내용이 성경의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라는 내용은 성경에 있는가? 하나님은 성경(text)과 상황(context)을 가장 잘 아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상황에 맞는 처방을 내리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새롭게 하실 일을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알려주신다. 마르틴 루터는 구원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가져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롬 1ㅣ17)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경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올더스가에서 ‘가슴이 따듯해지는 체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완전성화’를 주장하고 영국을 뒤흔드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종교개혁 한 지 백 여년이 지났을 때의 당시 유럽교회는, 에베소교회나 사데교회처럼, 교리는 바르지만 삶은 따르지 못하는 전형적인 ‘죽은 정통’의 교회였다. 웨슬레의 완전성화 이론은,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리는 바르지만 삶은 냉랭한 루터나 칼빈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준다. 초기의 완전성화론은 결함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보완되었다. 물론 상당수의 칼빈주의자들은 아직도 웨슬레의 완전성화론을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지만 필자는 단점 보다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성령으로 인해 가슴이 따뜻해지는 강렬한 체험을 하면 그 순간 자신은 다 된 것 같은 생각에 젖어 들게 된다. 필자는 이런 체험을 수없이 많이 한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또 다시 내 안의 육신이 드러나서 추악한 나의 모습에 실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체험이 무익한가? 아니다. 완전하지 못한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천국의 능력을 샘플로 맛 보는 것이다. ‘진짜지만 완전하지는 않다’(genuine, but not perfect). 그러나 체험 없는 자들은 가짜라고 한다. 그게 문제다. 이처럼 오늘날의 선지자는 루터, 칼빈 및 웨슬레처럼 시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섭리를 남 보다 먼저 캐치하는 사람이다. 결국 ‘선지자’는 남 보다 앞서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미리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보았는가? 기도로 깨어있던 사람들이다. 제사장 시므온, 과부가 되어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는 아기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란 사실을 금방 알아보았다(눅 2:25-39). 그러나 학식은 뛰어나지만 기도로 깨어있지 않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무수한 기사와 이적을 행해도 사사건건 트집잡으면서 대적만 하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선지자적인 통찰력은커녕 기득권 보호에 급급하여 영적 눈이 가려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사역을 대적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용도 폐기된 수백 년 전의 신학과 교리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난도질한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표면적으로는 교리 문제라고 트집 잡지만 실제는 기득권 보호와 교인 이탈 방지를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물론 오늘날의 선지자도 실수를 한다. 오늘날의 예언은 ‘조명 수준’이지 성경을 기록한 것처럼 100% 영감 받은 ‘감동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적인 통찰력이 성경을 넘어서거나 성경 내용과 다르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문선명, 모르몬교 교주처럼 거짓 선지자이다. 오늘날 선지자의 예언 몇 개가 틀렸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인가? 아니다. 그런 논리를 적용하면, 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신학자나 목사도 거짓 교사, 거짓 목사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도 100% 완벽하게 성경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신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상황에 맞는 사역을 하시는 것을 미리 아는 사람이다. 사도와 선지자의 동역 사도적 은사와 선지자적 은사 중, 둘 모두를 가진 사람도 있고 한 가지만 가진 사람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루터, 칼빈, 웨슬레는 두 가지 모두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과 성취해 내는 추진력과 리더십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만 가진 사람도 있다. 피터 와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조직력, 추진력, 리더십은 있지만 신디 제이콥스나 기타 선지자적 은사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선지자적 통찰력만 가진 사람은 사도가 가진 추진력, 조직력, 리더십이 부족하기 때문에 홀로 사역하는 것 보다는 사도의 리더십 휘하에 들어가서 사역하는 것이 좋다. 정리하면, 교회 시대의 사도는 좁은 의미의 예수님의 12사도보다는 바울과 ‘기타 사도들-바나바, 실라 등-처럼 넓은 의미에 은사·기능·사역을 감당하는 지도자로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신약의 선지자는 개별적으로 활동한 구약의 선지자와는 달리 교회에 소속되어 사도적 리더를 돕는 사람이다. 성경은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기적중지론자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도시대에 사도와 선지자가 교회의 기초를 설립했기 때문에 교회 시대에는 사도와 선지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사도시대에 사도와 선지자가 교회의 기초를 설립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설립이 쉬운가? 교회 개척처럼 어려운 것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기적중지론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파의 목사들은 교회 개척을 두려워하고, 이미 설립된 교회에 청빙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농촌교회-도시의 소형교회-중형교회-대형교회로 줄 타기를 잘한 목사는 성공한 목사이다. 그러나 성령운동파 특히 신사도 운동 목사에게 교회 청빙은 예외이고 교회 개척이 일상이다.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 설립의 은사이다. 사도와 선지자에게는 교인들이 따르기 때문에 굳이 남이 개척해 놓은 교회에 청빙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신사도 운동교회들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에베소서 2장20절의 말씀을 지금도 잘 실천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20절의 교회 설립은 단회적이고 비반복적인 것이 아니라(구속사적 해석), 지속적고 반복적인 것이다(모범적 해석). 당시의 사도와 선지자가 시작한 교회 설립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계속되어야 하는 사역이다. 사도와 선지자의 회복 왜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 은사 (또는 기능·사역)를 회복하시는가? 부정 선거로 얼룩진 교단 총회장들의 리더십 상실,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교회, 비전과 선지자적 통찰력이 없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교회를 하나님은 갱신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단을 하나님이 정화시키고 무장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단(denomination) 자체가 미국적인 산물이다. 유럽의 국가 교회(State Church)가 미국이란 신 대륙에 오면서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등으로 고정된 것이 교단의 효시이며 이제 겨우 4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교회는 미국적 교단 형태를 잘 복사한 모범(?) 국가에 속한다. 그런데 이제 미국적 교단 형태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고 신사도 운동과 같은 탈 교단화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기존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미국의 독립교회 그룹들 중, 신사도 운동처럼 ‘은사적 독립교회그룹’은 70%이고 ‘비은사적 독립교회 그룹’은 30% 정도라고 한다. 비은사적 독립교회 그룹 중에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윌로우크릭교회(빌 하이벨스), 새들백교회(릭 워런) 갈보리교회(척 스미스) 등이 있다. 이들은 사도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도적 은사를 발휘하고 있다. 『세계기독교 백과사전』편집자인 데이빗 배렛(David Barret)에 의하면, 전 세계 38,000여개에 달하는 기독교 그룹 중에서, 조직적이고 전통적인 교단을 탈피하여 조직이 느슨한 독립교회 그룹 형태를 지니는 그룹이 현재 절반에 육박하고 있으며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데이빗 배렛은 피터 와그너를 인용하여 이런 교회를 신사도적 교회라고 부른다. 혹자가 비판하는 것과는 달리 피터 와그너가 ‘신사도 교회’를 시작하고 ‘신사도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20세기초부터 시작된 아프리카의 독립 교회들, 중국의 가정 교회들, 남미의 풀뿌리 교회들 및 미국의 독립교단들이 유례 없이 급성장하고 있는데 이들 교회를 분석해 보니 전통적이고 관료적인 교단 형태가 아니라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사도적 목사들이 이끌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는 이런 운동을 가리킬 적당한 명칭을 모색하다가 ‘신사도 개혁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태동된 지 불과 20년도 되지 않는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org)-물론 얼마 전 분리의 아픔은 겪었지만-의 소속 교회·선교단체·신학교가 3,000여개(?)를 넘는다. 목회 보다는 정치, 생명 보다는 낡은 교리에 치중하고, 제대로 주는 것도 없으면서 지나친 통제와 간섭을 하는 교단에 식상한 목회자들이 주 회원들이다. 회원 목사들 중에는 장로교, 감리교 등 정통 교단 신학교 출신들이 많다. 이런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기존 교단들은 거취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태스크 포스를 형성하여 ‘교단 백년 대계’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의 형태를 고집하고 새로운 운동을 대적만 하다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단의 존재마저 사라질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적 목사와 목회적 목사 교단이나 교회의 행정과 목회를 책임지는 사람은 ‘사도’와 ‘목사’이다. 아직도 ‘사도’란 직분·은사·사역이 한국 교계에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으므로 필자가 글에서 ‘사도’와 ‘목사’란 말을 사용하면 독자들은 이를 사도적 목사(Apostolic Pastor)와 목회적 목사(Pastoral Pastor)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전도자'는 목회를 하지 않으면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빌립이나 스데반, 근대와 현대에 와서는 D.L 무디와 빌리 그레이엄, 선교단체 CCC의 빌 브라잇이나 YWAM의 로렌 커닝햄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도적 목사와 목회적 목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사도적 목사와 목회적 목사는 권위의 문제, 교회 정치의 문제 및 사역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권위’의 문제 기존 교단에 소속된 목사는 소속된 노회나 지방회의 치리를 받고, 섬기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당회, 운영위원회와 같은 단체에 부여된 권위의 일부분이다. 특히 한국에서 본인이 교회를 개척하지 않고 청빙되어 간 목사의 권위는 당회나 운영위원회의 권위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 행정이나 재정과 같은 주요 결정은 당회나 운영위원회에서 내리고 목사는 목회적 일에만 전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도는 대부분의 경우 전통적 교단의 노회나 지방회와 비슷한 ‘사도적 네트워크’(Apostolic Network)나 ‘사도적 센터’(Apostolic Center)의 대표이자 지역 교회의 대표이다. 전통적 교회의 결정권은 당회나 운영위원화 같은 단체에 귀속되어 있지만 사도적 교회의 결정권은 사도 개인 또는 사도적 팀에 귀속되어 있다. 즉 전통적 교회는 ‘민주적 결정’을 내리지만 사도적 교회는 ‘개인적 결정’을 내린다 (C. Peter Wagner, Changing Church, 31-33).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그러므로 내(야고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고후 15:19).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민주적 결정과 개인적 결정 얼른 들으면 ‘민주적 결정’이 ‘개인적 결정’에 비해 합리적이고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는 인간의 단체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민주적 결정’이냐 ‘개인적 결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결정 시스템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더 잘 실행하느냐 가 중요한 관건이다. 물론 두 가지 시스템 모두에 장·단점이 있다. 민주적 결정은 다수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결정이라 해서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소수의 결정이라 해서 항상 틀린 것도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달된 한국이나 선진국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각종 이권에 관련되어 있고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므로 ‘식물 국회’ ‘졸속 국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때는 정말 선구자적이고 카리스마틱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침투한 민주주의로 인해 ‘사람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고’(삿 21:25) 하다 보니 오히려 혼란과 정체가 가중되는 경우가 많다. 1961년 미국의 ‘쿠바 피그만 침공’ 실패의 경우처럼 ‘집단 사고’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집단 중의 영향력 있는 한두 사람이 큰 소리를 치면 다른 사람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날 한국 교회나 교단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과 비슷한 경우이다. 특히 교회 설립 목회자 개인의 ‘인간적 독재’에 식상한 교인들도 많다. 그래서 설립 목사 아래서는 조용히 지내다가 후임 목사가 들어오며 당회나 운영위원회에서 교회의 입법· 사법·행정권을 틀어쥐어 족장 노릇을 하고 목사는 ‘메디신 맨’(Medicine man. 주술사)이 되어 영적인 일만 관장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명목 상으로는 목사 개인이 아니라 당회나 운영위원회가 결정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쿠바 피그만 침공’ 사건처럼 영향력 있는 개인이나 소수의 장로가 주요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은 ‘목사 개인’의 독재에서 ‘소수 장로’의 독재로 넘어간 것뿐이다. 특히 교회 개척 1 세대가 물러나고 2대 후임자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리더십의 진통을 겪고 있다. 후임 목회자와 전임 목회자의 갈등, 전임 목회자파와 후임 목회자파의 갈등으로 내홍(內訌)을 겪고 있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갈등과 내홍을 피하기 위해 교회 세습을 하다 보니 ‘목회 대물림’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교회 ‘리더십’의 문제이고 ‘권위’의 문제이다. 한국 교회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지 않으면 해당 개 교회는 물론 대 사회적 이미지도 계속 추락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대안으로 오늘날의 교회에 ‘사도적 리더십’을 회복하신다고 필자는 믿는다. 사도는 ‘거룩한 독재’를 하는 리더이다. 사도가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비전을 제시하거나 선지자들 통해 간접적으로 들으면서 하나님이 선지자들 통해 주신 비전을 실행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도는 독재(?)를 하는 사람이지만 인간적 독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충실한 종이다. 이런 결정과 실행 메커니즘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도 개인이 독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도의 독주는 누가 견제할 것인가? 전통적 교회의 당회나 운영위원회가 아니라 사도적 팀-사도·선지자·전도자·목사·교사 및 장로의 협의체-이나 선지자가 그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개 교회에서는 중보기도자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선지자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목사의 사모, 기도 많이 하는 권사들 중에서 선지자들이 많다. 이들은 사도의 비저너리(Visionary)이자 견제 장치 및 감시자들이다. 이들은 사도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제시해 주고, 중보기도를 통해 영적 발전소와 영적 방패 역할을 하지만 사도가 곁 길로 가면, 다윗 왕을 책망한 선지자 나단과 사울 왕을 책망한 선지자 사무엘 처럼, 책망과 훈계의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결국, 교회는 설립 목회자의 것도 아니고 소수 장로의 것도 아니고 회중의 것도 아닌 하나님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를 통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 리더가 바로 사도, 사도적 목회자, 사도적 리더이다. 사도적 리더를 제대로 이해하면 사도야 말로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이자 회중들이 선호하는 리더이다. 사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기호나 다수결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충실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치 현실적으로 사도와 목사는 교회 정치의 ‘위치’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피터 와그너 교수는 그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같은 책, 33-36). 전통적 교단 교회의 ‘목사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목사는 교회의 ‘고용인’(employee)이다. -목사는 이직률이 심하다. 예를 들어,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3년이다. (*한국에도 3~5년 주기로 목사를 바꾸는 교회들이 꽤나 많다) -목사는 봉사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교인의 비전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목사는 교회의 주요 결정을 내리는 ‘족장’이 아니라 영적 일만 관여하는 ‘주술사’이다. -목사는 목회 결과로 평가 받는다. 평가에 따라 하시라도 해고될 수 있다. 사도적 교회의 ’사도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회중이 아니라 사도적 목사가 비전을 제시한다. -사도는 리더십이 주업이고 경영은 부업이다. -사도는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나머지는 권한을 위임한다. -사도는 장로와 스텝들로 구성된 든든한 운영팀을 구성한다. 목사는 운영팀에 종속되지 않고 운영팀이 목사를 돕는다. 스텝은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고용인이다. -사도는 평생직이다. -사도는 후계자를 직접 임명한다. 만일 한국에 이런 ‘사도’가 등장하면 교회 주요 결정의 ‘민주적 절차’에 익숙한 일부에서는 목사가 ‘독재’를 한다고 난리를 부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모세는 여호수아를,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직접 임명했다. 교회에 기적중지론과 계시종료론이 침투하여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부인하고 인본주의로 인한 민주적 절차가 유일한 대안이라 착각하다 보니,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로 전락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단의 ‘리더십’과 사도적 리더십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담임 목회자가 시간이 지나면 고참이 되어 교단의 임원이 되어 교단 행정을 담당한다. 지역 교회 목사는 교단 총회나 노회에 소속되어 교단법과 규정에 의해 관료적인 상위 단체의 지도와 통제를 받는다. 목회하던 교회가 클수록 교단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목회하던 목사는 목사의 사고방식으로 교단의 행정을 감당한다. 사도적 교회는 다르다. 사도적 교회는 교단처럼 관료적 관계가 아니라 사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사도적 교회의 목사는 회중의 지도자이며, ‘지역 사도’(Translocal Apostle 또는 Territorial Apostle)의 영적 우산 아래 들어가는 것도 자율적이다 (같은 책, 34-36). -‘사도적 사고방식’과 ‘목사적 사고방식’ (Apostolic mind-set vs. Pastoral mind-set) 사도와 목사의 결정적 차이는 사고방식의 차이다. -목사적 사고방식은 ‘양’ 즉 개별 성도에 초점을 맞춘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지역 교회의 전체적 비전과 외부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목사적 사고방식은 ‘양떼’ 즉 회중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인도한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회중을 넘어 도시와 지역의 변화를 목표로 삼는다. -목사적 사고방식은 조화, 균형, 화평 및 안정을 추구한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위험부담을 지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의 일선에서 활동한다. -목사적 사고방식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간주한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교회를 하나님의 군대로 간주한다. 효과적인 전략이 중시된다. 목사는 회중들이 침대에 머물기를 원하지만(하나님과의 친밀감), 사도는 회중들이 전선에 있기를 원한다(사탄과의 영적 전쟁). -목사적 사고방식은 교사를 편안해 하고 교사와 협조가 잘된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선지자를 편안해 하고 선지자와 협조가 잘된다. -목사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이 안정되도록 논쟁을 회피한다. 사도적 사고방식은 결정적 목표를 향해 논쟁을 환영하고 대면한다. (같은 책, 37).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래로 사도와 선지자 직분을 사도 시대에 잠시 존재했던 ‘임시직’으로 분류하고 ‘목사’와 ‘교사’만을 교회의 항존직으로 인정해 왔다. 특히 사도가 없는 상황에서 개신교 ‘목사’가 천주교의 ‘사제’에 버금하는 권위와 소명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오중 직임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목사와 교사가 교회를 지배하고 섬기는 동안 교회의 기능은 그 한계에 다 달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로 인한 한국 교회의 개 교회주의의 폐해는 심각하다. 한국 목사의 로망은 대형교회 담임 목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소형 교회를 선호하는 목사도 있겠지만 다수의 목사가 한국 교회의 1.7%에 불과한 성도 2000명 이상의 메가 처치(Mega church)를 사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가 처치의 담임 목사는 군대에서 별(☆)을 단 것처럼 어디 가나 대접을 받고 목에 힘을 준다. 목사로서 다른 사역이나 은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목회를 잘 하지 못하면 실패자로 간주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실정이다. 성도들도 목회 못 하는 목사는 우습게 여기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목사가 큰 교회 목사가 되려고 발버둥을 치고 큰 교회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온갖 추태와 비윤리가 발생한다. 세상에서는 공정거래법이 있어서 대기업을 통제하면서 중소기업에 혜택을 준다. 업종 별로 차이가 있지만, 제조업의 경우 상시 근로가 수가 300명 이하 업체이면 중소기업으로 분류되어 정책 및 세제 상 각종 혜택을 받는다. 만일 300명을 넘어서 중견기업이 되면 각종 혜택과 지원이 사라지고 그 대신 공공시장 참여 제한, 사업 조정 등 50개의 관련 법률에서 190여 가지의 규제를 받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견 기업의 문턱에 있는 중소기업들은 기업을 작은 규모로 쪼개어 중견기업이 되지 않으려는 ‘피터팬 증후군’이 만연하다고 한다. 또한 대기업은 매출 5조 이상의 기업으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을 말한다. 대기업이 되면 각종 규제로 인해 몸살을 앓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기업의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를 관장하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법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법의 심판을 내린다. 갑질 하는 홈쇼핑 업체와 과다 보조금 지급으로 법을 어긴 이동통신사에게는 엄청난 벌금을 물리거나, 동네 구멍가게를 위협하는 대형 마트에 격주 주일마다 휴업을 시키거나, 심하면 영업 정지 또는 영업 면허 취소 처분을 내린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규제를 담당하는 기관이 없다.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온 교회의 온 교회를 위한 투쟁’이다. 각 교회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정된 교인들을 상대로 교인 무한 쟁탈전을 벌인다. 그 결과 많은 교인을 끌어 모은-수평이동-목사는 ‘스타 목사’가 되어 주변의 칭찬을 받으면서 차세대 리더로 각광 받지만 주변의 중소형 교회는 교인 이탈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큰 교회 목사는 승자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목사이고 작은 교회 목사는 패자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목사로 전락한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 보다 더 무서운 곳이 바로 한국 교계이다. 왜 교회가 세상 보다 못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에 ‘사도’가 없고 ‘목사’만 무성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위에서 잠시 살펴 본 바와 같이 ‘목회적 목사’는 개별 교회 지상주의에 빠지기 쉽다. 1000명 교인을 모았으면 5000명을 꿈꾸고, 만 명을 모으면 3만 명을 꿈꾸고 그 다음은 5만 명, 그 다음은 10만 명을 꿈꾼다. 부흥사로 잘 알려진 모 목사가 섬기는 중대형 교회에서는, 교구의 성도가 멀리 이사를 가도 빈 자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부교역자가 개인 돈으로 차비를 줘 가면서까지 교적 이탈을 방지한다고 한다. 한국 교회의 교인 관리 수준은 공산주의를 빰친다 목회적 목사는 개별 교회의 무한 성장이 목표이므로 혹시라도 부교역자가 양떼를 훔쳐서 주변에 교회 개척하는 것을 금기 시 한다. 때로는 주변에 교회를 개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목회적 목사’의 한계이다. 만일 그가 ‘사도적 목사’라면 어떻게 할까? 개별 교회의 무한 성장과 지점 교회(Branch Church)를 확장하기 보다는 자격 있는 교역자를 분가시켜 교회를 개척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본부 교회 양적 성장의 상한선을 나름대로 정해놓고 그 이상 성장하면 자동 분가시키는 시스템을 가동할 수도 있다. 가물에 콩 나는 정도지만 이미 한국에 이런 목사들도 더러 있다. 필자는 이런 목사를 ‘사도적 목사’로 부르고 싶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유독 독일 경제가 승승장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량한 강소기업((强小企業. Hidden Champion)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강소기업이 드물고 소수의 대기업과 절대 다수의 중소기업의 양극단적 구조로 인해 전체 경제 성장에 한계가 있고 경기 변동에 취약하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계는 소수 대형 교회의 무차별적 확장 정책으로 인해 주변 대다수 소형 교회의 존립이 생사기로에 처해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교회 연합을 자주 주도했던 김xx 목사는 한국의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자기 교회에 직접 유익이 돌아가지 않는 교회연합 사역에는 대부분이 비협조적이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만일 그런 중대형교회 목사가 ‘사도적 목사’라면 어떻게 될까? 지역 복음화를 위해 지역 교회 전체의 성장은 물론 지역의 변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일회성·전시성 연합회나 집회는 물론 내 교단 소속이 아니라도 개척 교회나 어려운 교회에 경제적·목회적 도움을 제공하여 시기(질투)와 경쟁의 부정적 분위기를 타파하고 상부상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대 사회적 이미지도 제고하여 전도의 문도 활짝 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100개 정도의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면 교회 이미지 개선은 물론 교회 성장과 사회 변화의 새로운 물꼬를 트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점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누차 지적해 온 사항이다. 그런데 실천이 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이 개별 교회 지상주의의 ‘목회적 목사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성도들 중에서도 크고 이름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마치 성공하고 출세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담임 목사가 교회를 일정 수준으로 성장시키지 못하면 직·간접으로 압박을 가한다. 만일 이런 목사들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도적 은사’를 개발하여 ‘사도적 목사’로 활동한다면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인 개별 교회 지상주의와 개별 교단 중심주의는 서서히 타파되고, 대 사회적 교회 이미지도 개선되어 전도의 문도 넓게 열려서 교회의 양적 성장을 통한 지역 및 민족 복음화도 속히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사도적 사역의 확장-'교회 중심'에서 '킹덤(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목회적 목사는 개별 교회 사역에 전념하지만 사도적 목사는 지역 교회는 물론 일터 교회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영혼 구원은 물론 사회 변혁에도 관심을 가진다.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명령’은 물론 사회도 변화시키는 ‘문화명령’에도 관심을 가진다. 사회 변혁을 동반하는 문화명령에는 일터 사역자(Workplace minister), 일터 사도(Workplace Apostle)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지역 교회’는 주로 안수 받은 목사가 담당하지만 ‘일터 교회’는 평신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일터 교회’를 담당하는 ‘일터 사도’의 영역은 종교의 영역을 포함하여 정부, 기업, 가정, 교육, 매스컴, 연예의 7대 영역을 담당하면서 사회 변혁을 주도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가지고도 시비를 건다. '왜 7대 영역이냐', '너희들이 세상을 정복하여 다스려보겠다는 거냐?' 정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반박들을 하고 있다. '7대 영역'은 임의적인 것이라 사람에 따라 5대 영역, 8대 영역, 10대 영역도 될 수 있다. '몇 대 영역' 그게 무슨 대수인가? 중요한 것은 사회의 변혁(Transformation)이다. 반대자들은 신자들이 불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로 인도하고 사회는 어떻게 되든 내버려두어도 좋다는 말인가? 교회는 물론 사회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아닌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성도는 교회는 물론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세상 나라 일은 물론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서도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일터 사역자’와 ‘일터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소요되는 엄청난 자금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본다. 실제로 킹덤 확장이 주업이고 사업은 부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일터 사역을 감당하는 일터 사역자, 일터 사도 중에서는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하고 십의 9조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 돈은 호의호식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이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신사도 운동가들이 돈만 밝힌다'고 비판한다. 피터 와그너는 십의 3조를, 체안 목사는 십의 5조까지 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 돈만 밝히는 사람들인가? 필자는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금하고 기부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정리하면, 신사도 운동은 하나님이 교회에 주셨지만 교회가 거의 2000년 동안 묻어 놓았던 사도적 은사와 선지자적 은사를 회복하여 교회를 회복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운동이다. 오늘날 침체된 교회를 갱신하고 죄악에 빠진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신자라면 누구나 생각해 보암직한 일들을 하나님이 사도와 선지자의 회복을 통해 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초자연적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이것들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서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를 이기는데 가장 효과적인 영적 무기이기 때문이다. 죄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4-5). 당신 안의 ‘사도적 은사’를 개발하라 그러면 도대체 누가 ‘사도적 목사’이고, ‘일터 사도’인가? 첫째, 평소에 이런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도-지역 교회 및 일터 교회의 사도-일 가능성이 크다. 은사가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의 부담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지역 교회나 일터 교회에서 사도적 은사를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둘째, 당신 안의 사도적 은사를 개발하라. 피터 와그너 교수는 교인 800명 이상의 목사는 사도적 목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목회자는 자신의 사도적 은사에 대해 심각하게 기도해 보기 바란다. 적당한 크기의 교회를 섬기면서 안분자족하기 보다는 교인 800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해 보라. 주어진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고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사업체를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일터 사역자라면 자신에게 일터 사도의 은사가 있는가를 심각하게 기도해 보라.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도 한다. 관심이 있는 분은 그 동안 다음의 도서들을 참조하라. *일터 교회, 일터 사도 관련 도서들 : 피터 와그너. 『일터 교회가 오고 있다』 ---------. 『Dominion(다스림)』 에드 실보소. 『사업을 위한 기름부으심』 조니 엔로우. 『일곱산을 꿈꾸는 자들』 John D. Beckett, Mastering Monday. Robert Fraser, Marketplace Christianity. Larry Julian, God Is My CEO. Ed Silvoso, Every Business Is God’s Business 셋째, 교인 2000명 이상의 메가 처치 담임 목사는 본인이 인식하든 못 하든, 인정하든 안 하든 ‘사도적 목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목사는 개별 교회의 성장 보다는 교회 분립 및 지역 교회 성장과 지역 변화에 사역의 초점을 두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새로운 사역 방법, 새로운 사역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넷째, 한국 교회는 사도적 목사가 성장할 토양을 제공하라. 중대형 교회를 키운 ‘스타 목사’만 목사가 아니다. 스타 목사를 키울 목사, 사도적 목사를 키울 또 다른 사도적 목사가 필요하다. 사도적 소명을 갖고 사도적 목사를 양육하고 사도적 네트워크를 돌보는 사람이 꼭 중대형교회 목회자일 필요는 없다. 아무리 큰 목회를 해도 목회적 사고방식을 가진 목사는 사도적 목사가 아닐 수도 있다. 축구 코치 히딩크는 2류 축구 선수였지만 일류 선수를 발굴하고 훈련시킨 사람이다.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Tiger Woods)는 자기는 골프를 잘 치지만 남을 잘 치게 훈련하는 사람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관대하게 용납하고 포용하라 필자가 보기에 한국에서 ‘사도적 은사’를 발휘하는 일부 지도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인신공격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자기 보다 잘 나고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가 아니라 ‘자기 왕국’(His Empire) 을 건설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겉 모습은 ‘사도적 목사’지만 속은 탐욕스런 ‘목회적 목사’에 불과하다.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사도와 선지자의 회복 지금 한국 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꼭 필요한 운동이 바로 신사도 운동이다. 처음에는 다소 생경스럽고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아 거부감이 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의 한국 교회처럼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한 적은 예전에 없었던 것 같다. 사도와 선지자가 활동하기 위해 지금 당장 기존 교회 정치제도를 뜯어고치거나 교단을 해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목회적 목사’가 사도적 은사를 발견하여 서서히 ‘사도적 목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아니면, ‘사도적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도적 교인들’이 새로운 ‘사도적 교회’나 ‘사도적 교회연합’을 설립하여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도적 소명’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한국 교회는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로서 새로운 은사를 발견하고 새로운 소명을 인식하여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것으로 본다. *  구요한 jk0544@naver.com 관련기사 [신사도운동 대해부②] 오늘날에도 사도가 존재하는가 정이철의『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비판(1) 김재성의 『교회를 허무는 두 대적』비판 [구요한칼럼⑤]사도와 선지자의 회복 (1) [구요한칼럼⑥]신사도운동과 한국교회 페이스북트위터구글+카카오스토리라인밴드URL복사 최신기사 [성경해석] 구속사적 해석과 기적중지론 [영적부흥] 아주사 부흥 110주년 기념 집회, 은혜롭게 마무리 [신앙간증②] 하나님을 즐거워하라(1) [신앙간증]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다 [사역안내] 구요한 목사, 성령사역 컨퍼런스 개최 인기기사 1배우자 기도 이렇게하라 2[구요한 답변] 성령운동 대적자 정이철 씨(목사)에게 보내는 공개 답변 3[방언기도의재발견②] 방언기도의 비밀 4[방언특집①] 방언이란 무엇인가 5[쓰러지는현상②] 성령의 능력이 임할때 나타나는 현상들 6[성경Q&A] 기름부음 사역이란 무엇인가? 7[신사도운동 대해부⑧] 황덕형 박사가 본 신사도 개혁운동,  포토  [성경해석] 구속사적 해석과 기적중지론  [영적부흥] 아주사 부흥 110주년 기념 집회, 은혜롭게 마무리  [신앙간증②] 하나님을 즐거워하라(1)  [신앙간증]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다  [사역안내] 구요한 목사, 성령사역 컨퍼런스 개최  [집회간증] 구요한 목사, 집회에서 ‘기도열풍’과 ‘능력사역’ 강조 1 2 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섹션별 최근기사 섹션별 인기기사 이슈•뉴스[해외뉴스] 신자들이 성령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거짓말들 신학•목회[성경해석] 구속사적 해석과 기적중지론 치유•영성[영성훈련⑤] 퓨전신학, 통섭신학의 구원관: 회심의 단계 사역•선교[영적부흥] 아주사 부흥 110주년 기념 집회, 은혜롭게 마무리 교육•자료[문답식구원론] 5-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가정•신앙[신앙간증②] 하나님을 즐거워하라(1) 오피니언[구요한칼럼⑩] 성경교사, 은사자 및 영성가였던 사도 바울 PC버전으로 보기 Copyright ⓒ글로리아타임스 all rights reserved. ndsoft #top
